8000년 전의 도시 여리고의 성벽(?)
언제부터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였을까.
인류의 문명화에서 가축을 기르고, 곡물을 재배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빙하기가 끝나는 기원전 8000년 경으로 본다.(1만 년 전이다.) 그래도 이때는 수렵과 채집이 생활의 근거였다. 그러나 2000년 전에는(예수시대) 모든 사람이 목축이나 농경에 종사했다.
제일 먼저 사육한 동물은 양과 염소라고 한다. 이들은 군집새활을 하고, 온순하며, 길들이기 제일 쉬운 동물이다. 사냥을 할 때 어린 놈이나, 암컷이 잡히면 먹거리를 보존한다는 의미에서 살려서 자연으로 돌려 보내 준 것이 목축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한다.
농경의 경우는 밀과 보리가 처음 시작한 농경이었으리라 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야생 보리는 많은 열매를 달고 있어서 채집시대에도 인기 있는 곡물이었다. 쉽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곡물이어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문명화가 일찍 나타나는 요인이었리라고 본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농경을 한 작물이 달랐다. 감자도 있고, 옥수수도 있고, 조와 밀, 그리고 벼 재배도 있다. 작물이 자라는 조건에 따라 농경생활의 시기가 다를 수 있다. 이러한 작물의 농경은 정착촌을 먼둘도록 했다. 앞에서 보았던 신석기 시대의 마을이 이런 과정에서 나타났다.
중동 지역에서 대표적인 고대 도시는 여리고이다. 물이 솟아나는 샘의 옆에 터를 잡았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망루를 만들었다.(이때는 이웃 마을을 약탈하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생존의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흙과 암반을 파서 도랑을 만들었다. 그리고 도시는 튼튼한 석벽으로 둘러쌌다. 방어용이다. 이러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 주민의 공동작업이 있어야 했다.
석축 쌓기는 많은 자본과 인력이 들어간다. 방어 석벽을 쌓을려면 돈이 워낙 많이 들어감으로 방어용으로는 계산이 맞는 일일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러나 이때는 많은 집단이 생겨나서 살아남으려는 경쟁이 치열하였음으로, 방어벽이 맞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옛날에는 부족간의 싸움질이 아주 많았다.
고대인은 이웃간의 싸움질은 생존의 수단이었지 범죄가 아니었다.
첫댓글
고대인은 이웃간의 싸움질은
생존의 수단이었지 범죄가 아니었다.
- 역사적 사실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또한 그 상황에 따라
다른 가치관을 형성하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