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조선, 즉 대한제국이 허망하게 일제에게 넘어갔지만, 이 민족의 정신마저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민족의 독립과 주권의 회복을 위한 노력들이 곳곳에서 펼쳐지게 됩니다. 초기 독립운동의 목표는 대한제국, 즉 왕조의 복원이었습니다. 이를 복벽(復辟)운동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1915년 ‘신한혁명당’의 시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신한혁명당은 당시 해외의 여러 독립운동 조직 그리고 유력 독립지사들이 결합하여 만든 단체로서 입헌군주제를 지향하였습니다. 이상설(헤이그 밀사의 대표)이 당수가 되었고, 그 근거지는 상해였지만, 본부는 북경에 두었습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세계 정국이 재편되는 시기였습니다. 신한혁명당 사람들은 독일 황제의 군대가 승리하고, 이어서 아시아에서도 일본과 일전을 벌이게 될 것이며, 중국도 그에 합세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에 우리 민족 독립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당시 중국은 1911년 공화혁명이 성공하였지만, 이후 실력자 원세개가 정국을 장악하고 황제 등극을 시도할 때였습니다. 그리하여 신한혁명당의 독립지사들은 고종을 중국으로 망명시켜, 입헌군주제의 망명 정부를 구성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패전하고 일본이 오히려 승전국이 됩니다. 그리고 원세개도 곧 사망하고, 이상설도 사망합니다. 게다가 고종의 위임장을 받고자 한 연락책도 도중에 체포되었습니다. 고종 망명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복벽운동은 좌절되었습니다.
초기 독립운동의 주류는 복벽운동이었지만, 그와 다른 공화제의 발상 또한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군주의 무능과 실정은 군주제에 대한 분노를 야기하였고, 또 조선이 멸망한 상황에서 새로운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낳게 한 것입니다. 구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운동 조직인 신민회가 지향한 ‘자유문명국가’도 바로 민주공화제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간도에 설립된 경학사, 부민단도 민주공화를 지향하였습니다(박영석, 일제하 독립운동사연구, 4-12쪽). 1915년에 조직된 대한광복회의 지도자 박상진은 일본 경찰의 조사에서 “국권을 회복하고 공화제를 실현”하고, “민국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진술하였습니다(박찬승, 한국 독립운동사, 47쪽).
군주제의 복원이 아니라 공화제 신 국가 건설의 비전은 이미 중국에서 보여준 바 있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이 그것입니다. 4천년 군주제의 역사가 한 순간에 종식되고 공화제의 민국 시대로 넘어갔던 것입니다. 천지개벽과 같은 일이 바로 중국에서 실제로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초대 대통령 지위를 차지한 원세개의 반동으로 중화민국의 발전은 순조롭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공화제로의 이행은 돌이킬 수 없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안창호의 주도로 구성된 공립협회와 신민회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하였습니다. 대한인국민회는 중국 신해혁명을 적극 환영하고, 1912년 전국적 규모의 중앙 총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한민족 조직을 지향하였습니다. 미주 독립운동의 지도자 박용만은 중앙총회 결성 선포문에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바야흐로 “민주주의국가”가 발흥하는 것임을 선언하였습니다(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84-5쪽).
그러나 민족 동포 모두를 대상으로 민주공화국과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은 아마 1917년 <대동단결선언>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동단결선언의 서명자들은 14명이었는데,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홍명희 등 대표적 민족지사들은 물론 미주의 박용만, 그리고 조소앙(조용은) 등입니다. 선언문 문안은 조소앙의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조동걸 교수의 분석으로는 대종교 조직, 상하이 독립운동 조직인 ‘동제사’ 및 신한혁명당 그리고 미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의기투합하여 나온 것으로 평가됩니다(조동걸, 135쪽).
대동단결선언은 그 동안 독립운동의 주류였던 ‘복벽운동’ 즉 ‘보황주의(保皇主義)’와의 단절을 천명하였습니다. 대신 ‘국민주권’을 분명히 제창하였습니다. 항구적이며 불멸의 국민주권을 새로운 국가원리로 확인하였습니다. 융희 황제(순종)가 일제에 국권을 넘긴 것은 다만, 황제 자신의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포기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주권은 의연히 전 인민에게 남아 있으며, 그것은 항구적이며 불멸의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공화국 헌정에 대한 근본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러한 공화제를 위하여 모든 독립운동의 역량을 총집결하자고 호소합니다. 구체적인 방략은 바로 ‘임시정부의 수립’입니다. “통일 유일무이의 최고기관”을 조직하자고 하였습니다. 임시정부의 헌정 체계까지 제시되어 있습니다. “대헌(大憲)을 제정하여 민정(民情)에 합한 법치(法治)를 실행”할 것을 주문합니다. 아울러 일본에의 동화론 그리고 자치론을 배격하는 “독립과 평등의 신성한 권리”를 주장하였습니다.
이 <대동단결선언>을 읽어보고 있으면, 우리 임시정부의 헌정, 아니 우리 민주공화국의 신성한 원류가 바로 여기였구나라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그만큼 경이롭고, 장엄하고, 감동적인 선언문입니다. 이 선언문의 작성자 조소앙에 대하여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균관에서 수학하다 국비장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국치(國恥) 연간의 굴욕과 고통을 씹으며 메이지 대학에서 법학을 수학하고 1913년 그 형과 함께 중국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후 평생 민족의 자주와 독립 그리고 새로운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비전을 위해 진력한 민족 지사이자 시대의 경륜가입니다. 조소앙은 이후 상해 임시정부 최초의 임시헌장도 기초하였으며, 해방을 앞 둔 임시정부의 건국 비전인 건국강령을 작성하여 우리 헌법의 비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조소앙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개론서로는 김기승, 조소앙이 꿈꾼 세계 참고).
그러나 불운하게도 이 대동단결선언에 대한 국내외의 호응은 없었습니다. 조소앙은 적이 실망한 채로 상해를 떠나 길림으로 갑니다. 그러나 1년 후 상황이 급반전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연합국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국의 발언권이 강해졌습니다. 미국의 이상주의적 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라는 자유와 평등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제시하였습니다. 이는 구체적으로는 세계대전 패전국가이자 전범국가인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대한 응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지배 장악하고 있는 중부유럽의 제 민족들을 해방시켜, 독일 오스트리아의 패권적 토대를 해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윌슨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폐위하고 공화제 수립을 요구하였습니다. 군주제는 군주의 이익과 영광을 위하여 신민의 희생을 가볍게 여기는 전쟁을 감행할 위험이 크지만 공화제는 국민들 자신의 목숨을 거는 전쟁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는 체제이므로 섣불리 전쟁을 감행하기 어렵습니다. 이 원리는 칸트(Kant)의 영구평화론 이래 서구 사상가들이 공유하던 국제관계의 ‘공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내에서도 인민들의 공화제 열망이 터져나와 마침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민주공화국 그리고 식민지 해방은 시대 정신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독립 지사들도 흥분하였습니다. 마침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이 중국 상하이에서 윌슨 외교정책에 대한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또 한 명의 훌륭한 독립지사이자 당시 상해 거류민단의 단장이었던 여운형은 크레인을 면담하여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단지 패전국 처리를 위한 정책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세계의 모든 식민지 해방의 원리인지 물었습니다. 크레인은 당연히 후자라고 하면서 미국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할 것이라고 확약하였습니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의 기대는 커졌습니다. 천운이 도래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여운형은 상하이의 젊은 동료들을 규합하였습니다. 상해 거류민단 부단장인 선우혁 그리고 일본에서 막 건너 온 장덕수, 미국에서 건너 온 김규식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을 결산하는 즉, 새로운 세계질서를 결정하는 파리 강화회담에 우리의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의합니다. 세계 수뇌들이 모이는 인류 공론의 장에서 독립을 외치기로 결의한 것입니다. 그 대표로는 김규식을 정하였습니다. 김규식은 일찍이 구한말 선교사 언더우드로부터 공부를 배우고 미국에 유학하여 뛰어난 영문 실력으로 중국에서 영문학 교수까지 하던 또 한 명의 훌륭한 민족지사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세계의 변방, 더욱이 일제는 세계대전의 당당한 승전국의 일원이었습니다. 한국을 아는 사람이 몇이며, 한국의 처지를 이해하고 우리의 뜻에 동참해 줄 사람이 몇이 될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파리 강화회담에 파견되는 대표에 대한 민족적 지원이 필요한 것이었으며, 또 우리 민족의 염원이 파리 강화회담에까지 울려 퍼질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3.1운동의 배경이 됩니다.
신한청년당은 신속하게 움직입니다. 장덕수를 국내를 거쳐 일본에 파견하고, 선우혁을 국내에 파견하고, 여운형 자신은 만주와 연해주로 갑니다. 한편 이미 세계 정세의 변화와 민족자결주의는 일본 유학생들 그리고 국내의 민족 지사들에게도 감지되는 것이었으며, 또 그들을 격동시키고 있었습니다. 일본 동경 유학생들도 독립선언을 준비하였으며, 국내의 종교단체들 특히 기독교와 천도교는 신속하게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민족 해방의 정기가 국내외적으로 호응하여 결집되었습니다. 그리고 3.1운동으로 분출되었습니다(김희곤, 대한민국 임시정부 I - 상해시기, 30-36쪽).
거족적인 3.1운동은 동시에 새로운 국가 건설을 희구하였습니다. 3.1운동과 함께 전국에서 수많은 독립선언서 그리고 여러 개의 임시정부 조직이 선포됩니다. 1919년 한 해에만 60개 가까운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김소진, 한국 독립선언서 연구, 18쪽 이하), 많게는 7개의 임시정부가 선포되었습니다(윤대원, 상해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구, 30쪽). 대동단결선언이 말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전민족의 통일적 운동이 실현된 것입니다.
<참고 문헌>
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역사비평사, 초판 4쇄, 2018
김기승, 조소앙이 꿈꾼 세계, 지영사, 2003
윤대원, 상해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초판 2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박영석, 일제하 독립운동사연구, 중판, 일조각, 1997
김소진, 한국 독립선언서연구, 국학자료원, 1999
김희곤, 대한민국 임시정부 I - 상해시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2008
이정식,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대 출판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