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 / 이시영
왕십리 하면 야간수업을 일찍 마치고 나와 왕소금을
뿌려가며 구워먹던 좁은 시장통의 그 대창집이 생각난다.
그리고 시간에 쫓기면서 심야의 아스팔트 가르며 나아가던
심선생의 날렵한 오토바이도. 그는 단축수업을 너무도
좋아하는 Y고의 2부 주임. 4교시가 끝나갈 무렵이면
수업시간표가 빼곡한 칠판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백묵을 들고 교감선생에게 달려가 단축수업을
건의하던 그의 그 생글거리던 소년 같은 얼굴이 떠오른다.
왕십리 하면 또 어둑한 교무실을 밝혀주던 따뜻한
배선생이 생각난다. 늘 남의 숙제를 대신 해줄 것 같은,
웃을 때면 콧잔등에 잔주름이 많이 접히던 여자.
무슨 일인가로 면목동에 갔다가 허름한 여관에 들어
새우처럼 서로의 등을 오그리고 자던 통금의 밤이 생각난다.
이튿날 함께 결근을 하고 대낮의 긴 골목길을 걸었던가.
아, 또 생각난다. 수학 이선생, 체육 오선생이랑 여럿이서
알 수 없는 열기에 들떠 달려갔던 남이섬의 겨울밤들.
얼어붙은 겨울 강에서 얼음을 지치면서 우리는 늑대처럼
울부짖었지.
왕십리. 어딘가에서 버림받고 왔다는 느낌 때문에
마음보다 먼저 이마가 달아오르던 시절 우리들의 거처.
밤새도록 헤매이고 이튿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업에 들어가곤 했지만 늘 벌판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막막함 있지? 그러나 그때 우리 나이는 겨우 스물셋.
바람 부는 벌판으로부터 어서 떠나고 싶은.
- 이시영 시집 <은빛 호각> 2003
[출처] 이시영 시인 22|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