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이 많아서 답글 대신합니다.
한움쿰재님/ 성격이 급하신분이군요. 잠수라니요...저는 직장인으로써 어린아이를 키우고 있는 한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퇴근후 가사일을 돌보니라 컴퓨터 볼 시간이 없습니다.
제 의견이 부족했다면 수정해서 올립니다.
고려시대 제왕운기의 기록을 보면, 단군조선은 은나라 무정 임금 때 멸망하고, 그 후 164년의 공백기를 거쳐 기자조선이 등장하는 걸로 진술되어 있으며, 저는 이 기록을 신뢰합니다.
원문: 並與帝高興戊辰 經虞歷夏居中宸 於殷虎丁八乙未 入阿斯達山爲神 (今九月山也 一名弓忽 又名三危祠堂猶在) 享國一千二十八 無奈變化傳桓因 却後一百六十四 仁人聊復開君臣 (一作 爾後一百六十四 雖有父子無君臣.)
해석: (단군은) 帝高, 즉 요임금과 동시대인 무진년에 나라를 세워 우순(虞舜)을 지나 하나라 때까지 왕위에 계시다가, 은나라 虎丁[무정] 8년 을미년에 아사달산 (지금의 구월산 또는 궁홀 또는 삼위라고도 하는데 사당이 아직도 있음)에 들어가 신이 되니 나라를 다스리기를 1028년이다... 각설하고, 그 후 164년이 지나 어진이인 기자가 나타나 다시 군신관계의 국가를 復開하였다.(일설에는, "이후 164년 동안은 비록 부자는 있어도 군신 관계는 없었다"’라고 하였다.)
동사강목에는 다음과 같이 단군조선 멸망 후 기자조선 등장까지의 기간이 좀 다르게 나타납니다.
"동사강목: 단군이 처음에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白岳으로 옮겼고, 단군이 죽은 뒤 196년만에 기자가 동방에 봉하여졌다."
역경 旣濟 편에는 은대 갑골문에서도 증명되는, 은나라 무정 임금의 귀방 정복 사실이 기재되어 있는데, 귀방은 당시 단군조선의 방역과 매우 유의한 관계에 있으니 단군조선은 은나라 무정 임금에 의해 멸망당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은은 전혀 겹치지가 않으며, "단군조선이 있는데 무슨 기자를 받아들였겠냐? 이쪽에는 세력이 없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 기자조선의 의의가 있다."는 등의 주장에 대해서는 '자긍심 고취'를 빙자 또는 목적으로 한 역사왜곡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자는 단군을 이어, 국호도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고, 일명 李조선 또한 기자조선을 이어 '조선'이라 하였으며, 세종대왕께서도 기자조선을 후조선이라 하였고 기자를 후조선의 시조라 하였으니(실록 검색참조)우리는 단군조선의 후예일 뿐 아니라 기자조선의 후예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고구려(高麗)전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구당서: “其俗多淫祠,事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國城東有大穴,名神隧,皆以十月,王自祭之。” (고구려의 풍속에는 우상신을 모시는 사당이 많으며, 농사를 주관하는 靈星神, 태양신, 가한신, 기자신을 섬긴다. 나라의 성 동쪽에는 큰 굴이 있는데 神隧라 이름하며 항상 10월이 되면 왕이 몸소 그곳에서 제를 지낸다.)
또한, 공자도 기자를 군자로 칭송하고 군자가 계신 기자조선을 흠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 무왕의 책봉을 받아 조선이 주나라의 제후로 인식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꼭 그렇게 보기는 힘들것 같습니다. 서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주나라 무왕이 치세의 도를 물어 기자께옵서 그에게 홍범구주를 가르쳐주었다, 하였으니 기자는 무왕의 스승이며 세종대왕께서도 기자는 무왕의 스승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백의민족, 동방예의지국 제천행사인 무천의 풍습도 기자조선에서 부터 시작했으며 마지막으로 웃기는 것은 현 중고교 국사책과 국가공무원 7,9급용 국사 수험서 등에서는 팔조법금은 고조선사회의 기본법이라 가르치고 있는데 정부의 교육방침이 담긴 이들 국사 서적에 기자 또는 기자조선이란 문구가 보이질 않습니다. 고조선 부분은 단군조선에서 곧바로 위만조선으로 건너뛰었고, 팔조법금은 출처인 한서지리지를 언급하면서도 기자조선이 아닌 고조선의 법으로 기재하고 있죠.즉, 기자조선을 왜곡하고 부정하면서 기자가 제정한 8조법금만은 한서지리지를 왜곡하여 ‘고조선의 것’으로 돌려 크게 써먹는 것은 이율배반적 행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부여에서 부터 고구려, 고려, 李조선조까지 무려 수천년동안 기자를 선조로 보았는데 일제강점기 이후 부터 기자조선을 왜곡 부정하는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로 보여집니다.
참고로 저는 환단고기 신봉자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역사학계를 따르지도 않습니다. 역사학계를 따르지 않은 이유는 기자조선의 부정때문입니다.
첫댓글 말씀하신 내용들은 주로 전근대에 사용된 [문헌 고고학]의 방법에 따른 것입니다. 만약 천자님께서 조선시대에 이런 논의를 발하셨다면 그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겠지만, 현재의 역사학은 문헌은 물론이고, 유물-유적 등을 연구하는 고고학의 자료도 종합적으로 반영되어 그 '결론'을 도출해 냅니다...^^; 게다가 이런 문헌 뒤비기로 결론을 내는 방식은 이른바 [환빠]들의 짜깁기 전매품이나 마찬가지에요. 적어도 기자조선에 관한 "고고학적 유적-유물의 연구"가 뒷받침 되어야 기자조선의 '실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만약 이런 식의 제한적인 근거로 결론을 도출해 낸다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도 정설이 됩니다. <동사강목>을 언급하셨는데, 이 시기에 나온 역사 관련 논의들 중에는 <일본서기>나 그를 바탕으로 한 일본문헌의 주장들은 거의 그대로 실은 것들이 꽤나 많거든요. 당시에는 '고고학'의 개념이 희박했다는 한계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기자'라는 인물은 단순히 그가 중국에서 왔다는 점보다- 동방에 문명을 처음 전한 것은 물론, 중국의 성현에 버금가는 현인이었다는 점때문에 고려시대 이래로 "동방문명의 독자성"과 중국과 문화적으로 대등-유사하다는 [동문(同文)의식]의 키워드로써 그 존재가 점점 부각됩니다.
뭐 환빠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부정하는 기자조선에 관한 논의를 주장하시는 분이니, 다른 회원들도 오해는 안하셨음 좋겠네요...ㅎㅎ;; 사실 처음의 심플한 질문을 보면 한빠들의 패악질 서두와 오해할 소지가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해동천자님/ 닉이 좀 비슷해서 친근하긴 합니다만, 제가 지금 쓰고 있는 기자조선 연구의 대해서 완성이 되면 이곳에 먼저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물과 유적은 이미 다 발견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권위있는 역사학자 이형구 교수님께서 발견하셨는데 문헌과 유적, 유물이 대부분 일치 합니다. 마지막으로 8조범금의 출처인 한서지리지를 이용하여 고조선의 법으로 크게 써먹는 학계는 이른바 식민사학의 짜집기가 아닐까 사료됩니다. 일제는 단군과 함께 기자조선을 빼자는 내용이 있습니다. 일제의 마수에 걸렸다고 볼 수밖에....
아~ 그러시군요...^^; 전에 사학도셨습니까?! 이형구 교수라면 [발해문명론]을 주장하시는 분이었죠~아마?! 개인적으로 강의를 몇차례 들은 적 있습니다. 풍납동 주민들에게 역적취급 받는 고충을 겪는 분이었죠...-_-; 아무튼 나중에라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식민사학]이라는 용어는 주의해서 사용해주셨으면 좋겠네요.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ㅎㅎ;;
사람마다 본인이 신뢰하는 사람이 있을것입니다. 또한 그 학자들을 통해서 본인의 역사관이 정립되기도 합니다. 저는 환빠,라든가 신민빠 이런식의 편을가르고 토론하는것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식민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죄송합니다만 해동천자님께서도 환빠라고 말씀하신것은 옳지않아 적었을 뿐이니 오해는 안하셨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본인이 환단고기 신봉자는 아니며 그런류의 글 또한 어떨때는 역겹다는 생각도 들때가 입습니다. 논고가 완성단계에 있으니 완성되면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사실 기자 및 기자조선과 관련해서는 굳이 고고학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문헌 상으로도 어느 정도 비판이 됩니다. 제가 위키백과에도 작성해 놓았다시피, 흔히 이야기하는 선진문헌과 이후 문헌의 차이가 너무 뚜렷하거든요.
선진문헌에는 "기자조선"이라는 존재 자체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기자 역시 "은둔"한 것으로만 나타납니다. 반면 한대에 성립된 문헌에서 갑자기 "기자가 조선에 가서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 튀어나오죠.
여기에 더불어, 홍범구주 문제로 들어서면 더 심각한 모순이 발생합니다. 주 무왕이 기자를 직접 "찾아가서" 받은 것이 홍범인데, 만약 기자가 조선의 왕이라면 이를 받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죠.
당시 주나라의 영역은 황하 유역에 머무르고 있었으며, 조선을 최대한 크게 보아도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이는 무왕이 홍범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 1000리가 넘게 국경 밖을 여행(?)해야 한다는 결론과 같죠. 물론 《상서》를 비롯한 선진문헌에서 홍범을 받은 경위를 살펴보면 위와 같은 "해외 순방급" 여행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홍범을 받은 사건은 명백하게 서주 영내에 은둔하고 있는 기자를 무왕이 직접 찾아가 나라를 다스릴 방도를 묻는 수준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기자조선과는 연관이 불가능하죠. 이 때문에 후대 문헌에는 반대로 기자가 주나라로 찾아왔다고 바꿔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 역시 모르는바가 아닙니다. 기자조선을 부정하는 견해로 단골메뉴가 바로 진대 이전문헌과 이후 문헌의 차이를 말하곤 합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고구려에서 기자신을 섬긴다는 내용, 고려 숙종대에 예부의 제의로 기자의무덤을 찾고 국가적 차원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 이후 기록이 없다가 충숙왕대에 평양에 기자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 조선조 역시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를 올렸다는 내용, 세종대왕께옵서도 기자를 후조선의 시조라 천명했던 내용등만 보더라도 무려 2천여년동안 기자를 선조로 보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무왕이 기자를 제후로 책봉을 했다는 어려운 근거중 하나는 주나라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조선이라는 해외국가에 무왕이 마음대로 기자를 봉해주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이거나 형식적인 조치로 주나라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 기자가 망명한 것을 인정했다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자는 은(殷)나라가 망한 뒤에 주나라 오복(五服)의 안에 있으려고 하지 않아서 해외의 먼 곳으로 피하였으니, 어찌 무왕에게서 땅을 나누어 봉해 주는 명령을 받았겠습니까.
기자께옵서 주 무왕의 신하가 되고 무왕의 땅을 나누어 봉해주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봉해주었다면 분명 스승의 예우로 봉해주었을 것이라 됩니다. 홍범의 대해서는 해외 먼 나라라는 명목으로 부정하는 것은 글쎄요...
항상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게 되어 있습니다.
1. 터키에 남아 있다고 전설로 전해지는 노아의 방주가 과연 《성경》을 실증하는 증거일까요? 고구려는 물론이고 고려, 세종까지 "기자에게 제사를 지낸 기록"이 존재한다고 해서 "기자"의 존재가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 당시 고구려, 고려, 조선의 지배층들이 기자를 자국 문명의 시조로 생각했다는 증거일 뿐, 기자 실존의 증거가 아닙니다.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겁니다. 애초에 증거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을 증거로 드는 것은 명백한 오류죠.
2. 고구려가 기자신을 섬겼다는 것은, 중국에서 전래된 "기자동래전설"이 고구려에도 퍼져 고구려인들이 그것을 믿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 기자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3. 물론 당연히 평양 어디에도 실제 기자의 무덤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기자의 무덤이라고 "전설"로 전해지고 "고려-조선인들이 그것을 믿었다"고 알려진 무덤만 있을 뿐이죠. 그 무덤이 진짜 기자의 무덤이냐 하면? 그건 파봐야 알 수 있는 겁니다.
비슷한 예가 실제로 남아 있죠. 소위 익산의 무강왕릉이라는 무덤. 기자의 후손(?)인 준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지고, 조선시대 내내 사실로 믿어져 제사도 지냈던 곳이지만 막상 파보니 백제의 무덤이었죠.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전근대인들이 사실이라 믿었고, 그렇게 기록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인 것은 아닙니다. 엄정한 비판을 거쳐 사실로 판명되어야 할 일이죠.
4. 소위 피지(避地)조선과 수봉(受封)조선의 문제는 이미 조선시대에도 논란이 되었던 문제이죠. 그러나 그것 역시 "기자동래설"이 사실이어야 비로소 논할 수 있는 문제일 뿐, 애초에 사실이 아닌 것을 가지고 피지냐 수봉이냐를 따져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제가 가사일에 바빠서 댓글이 늦었는데 이 점 양해바라며 '기자조선 연구'로 댓글을 대신합니다.
사료비판과 사료해석의 훈련이 그래서 중요한겁뉘;;
나의 불쾌한 직감은 왜 단 한번도 틀리지 않는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