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군은 충청남도의 서남부에 위치하여 있는데 이를 경위도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극동은 초촌면 송정리의 동경 127도 03분, 극서는 외산면 만수리의 동경 126도 44분, 극남은 양화면 시음리의 북위 36도 04분, 극북은 은산면 용두리의 북위 36도 23분 등으로 나타난다. 면적은 624.92㎢, 인구는 9만 5213명(2000)이다. 동쪽으로 논산군, 서쪽으로 보령시와 서천군, 북쪽으로 청양군과 공주시, 남쪽으로 전라북도 익산시와 접한다. 차령산맥이 충청남도의 북동에서 남서부로 이어져 군의 북서쪽을 지나면서 구릉지를 이루고, 성태산(631m)·만수산(432m)·월명산(544m)·옥녀봉(368m)·원진산(271m) 등이 솟아 보령시·서천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부여군은 1914년에 홍산현, 임천군, 석성현이 부여현과 합쳐져 된 군이다. 부여현은 지금의 부여읍 자리인데 백제 시대에는 '소부리' 또는 '사비'로 불렀다. 사비는 본디 새벽이란 토박이 말이었다고 하며 지금의 이름인 부여도 본디 "날이 부우옇게 밝았다"는 말에서 나온 토박이 말이라고 하는데 이 토박이말에 나중에 한자를 갖다 붙였다고 한다. 이렇듯 부여는 예로부터 새벽의 땅, 아침의 땅으로 여겨져 온 것이다. 군의 동부를 관류하다가 남쪽 군계(郡界)를 이루는 금강 연안에 충적평야가 펼쳐지고, 북부·서부 산지에서 발원하여 금강으로 흘러드는 은산천(恩山川)·구룡천(九龍川)·금천(金川)·사동천(寺洞川)·여사천(餘士川) 등의 하천 유역에도 크고 작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내산면(內山面)에서 발원하는 구룡천은 금천과 합류하여 논산읍 대안(對岸)에서 금강으로 흘러드는데, 이 두 하천 유역의 구룡평야는 3,000ha가 넘는 옥답을 이루어 군내 제일의 곡창지대가 되고 있다. 황해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 내륙적인 색채가 현저하지 않으며, 강수량도 비교적 많은 편이다. 연평균 기온 13℃, 1월 평균기온 0.4℃, 8월 평균기온 24.6℃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1388.4mm이다. 군을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이고,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다. 백제 26대 성왕이 국가중흥의 원대한 뜻을 품고 도읍을 옮기고 나·당 연합군 아래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화려한 사비문화를 꽃피운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다. 하지만 멸망한 나라의 수도였던 부여는 나라가 망한 순간부터 퇴락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동국여지승람』에서도 “집들이 부서지고 시체가 풀 우거진 듯 하였다.”라고 쓰여 있듯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 같은 기록도 극히 드물어 역사에서 백제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게 되어버렸다. 한때 한강 유역을 호령하며 중국 등지와 활발한 해상 무역을 펼쳤고, 찬란한 문화를 바다 건너 왜에 전해 주었던 모든 역사가 베일 속으로 가려져 버린 것이다. 단지 간간이 발견되는 유물들로 그 문화의 우수성과 독창성,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이 때문인지 부여는 근세까지도 발전이 더뎠다. 반면 시가 정리는 아주 잘 되어있는데 이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흔적이다. 일본은 자신들이 자랑하는 아스카 문화의 본거지로 백제시대의 부여를 받들어왔다. 그래서 이곳에 신궁을 짓기 위해 대규모의 공사를 벌였던 것이다. 신궁을 짓기 위해 터를 닦고 길을 내는 등 망하기 직전까지도 공사를 벌였다고 한다. 신궁터는 현재의 부여고등학교 자리인데 그 때 심었던 향나무며 신궁 지을 재목으로 만든 의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부소산 밑자락 왕궁터에서 궁남지까지 뻗어있는 대로를 바라보며 찬란했던 백제의 마지막 도시 부여의 영광과 좌절을 안타깝게 일깨울 뿐이다.
선사시대 유적으로 충청남도기념물 제40호인 부여 산직리 고인돌과 사적 제249호인 부여 송국리 선사 취락지 등이 있고 백제시대의 것으로는 사적 제135호인 궁남지(宮南池), 사적 제99호인 부여 쌍북리 요지, 사적 제14호인 부여 능산리 고분군, 사적 제34호이며 백제산성으로는 최대규모인 부여 청마산성(扶餘靑馬山城) 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국보 제9호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 보물 제356호인 무량사극락전, 보물 제217호인 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 사적 제44호인 부여군수리사지 등이 있고 군수리사지에서 보물 제329호·제1330호인 군수리 석가여래좌상·군수리금동미륵보살입상이 출토되었다. 유교문화재로는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 95호인 부여향교대성전을 비롯하여 홍산향교, 창강서원, 김시습을 배향한 청일사(淸逸祠),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흥수(興首)·계백(階伯)을 향사(享祀)하는 삼충사(三忠祠) 등이 있다. 이 밖에 중요민속자료 제30호인 보부상 유품, 천연기념물 제320호인 내산면의 은행나무 등이 있다. 한편 부여읍 정동리(井洞里)에 자리잡은 백제요(百濟窯)에서는 백제토기의 재현품들을 볼 수 있다. 격년으로 10월에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가 개최되고 있으며, 이 외에도 은산면을 중심으로 한 은산별신제(恩山別神祭), 임천면을 중심으로 한 임천충혼제(林川忠魂祭) 등이 매년 열리고 있다.
능산리고분군(陵山里古墳群)
부여 근방에는 백제 고분 수백 기가 수십 군데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대개 세월에 씻겨 형체가 제대로 남은 것은 드물고 또 일찍부터 도굴되어 온전한 것도 많지 않다. 능산리 고분군은 그 많은 고분들 가운데 부여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잘 남아 있고, 규모면에서도 큰 축에 드는 무덤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사적 제14호로 해발 121m의 나지막한 능산리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이곳은 부여 시가지에서 논산쪽으로 약 2Km의 거리에 위치하는데 고분군은 모두 총 7기의 고분이 3개의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 열에 3기, 뒷 열에 3기가 전후 좌우로 정열되어 있고 맨 뒷편에는 보다 작은 고분 한 기가 위치하고 있다. 이제까지 이 고분들을 일러 전하기를 왕능이라 하며 옛지명은 '능뫼 부락'이라 하였다.
이 고분들은 1915년 여름에 일본 학자인 구로이다(黑板)씨가 2호(중하총)·3호(서하총) 2기를, 세키노(關野)씨가 5호(중상총) 1기를 발굴 조사하였는데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그 후 1917년 노모리(野守建)씨가 1호(동하총)·4호(서상총)·6호(동상총) 3기를 추가 조사하였고, 같은 해 이 고분군에서 서쪽으로 소계곡을 건너 서고분군이라 칭하는 고분 4기 가운데 2기를 발굴하였다. 한편 1937년이 고분들은 1915년 여름에 일본인 구로이다(黑板)가 2호(중하총)·3호(서하총) 2기를, 세키노(關野)가 5호(중상총) 1기를 발굴 조사하였으나 조사전 이미 도굴이 된 상태가 확인되었다. 그 후 1917년 노모리(野守建)이 1호(동하총)·4호(서상총)·6호(동상총) 3기를 추가 조사하였고, 같은해 이 고분군에서 서쪽으로 소계곡을 건너 서고분군이라 칭하는 고분 4기 가운데 2기를 발굴하였다. 한편 1937년 우메하라(梅原末治)에 의해 전왕릉군(傳王陵群)의 동쪽 마을뒤에서 동고분군이라 칭하는 고분 5기가 조사되었다. 이와 같이 능산리 고분군은 동·서와 중앙에 각각 1군을 이루어 3군으로 총 16기가 분포되어 있는데 그들 가운데 중앙부에 일군을 이루고 있는 전왕릉군 7기만이 현재 사적 1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사적지 지정 면적은 233.35㎡이다.
당시 조사된 고분들은 잘 다듬은 판석을 결구하여 석실을 구축하였는데 현실과 연도로 구분되는 두 개의 방으로 된 횡혈식 석실분들이다. 이들 고분은 모두 왕과 왕족들의 분묘라고 생각되는데 백제 후기의 묘제를 알 수 있는 전형적인 석실분들이었다. 외형은 봉토분으로 밑 지름이 20∼30m쯤 되는데 아래쪽에 호석(護石)을 두른 것도 있다. 부장 유물로 5호분에는 관대 위에서 두개골 조각과 칠(漆)한 나무관 조각, 뚫인 모당 금동 금구(金具), 꽃무늬 금동 금구가 있었고 2호분에도 칠기 조각과 금동 둥근머리 못이 있었다. 그중 '동하총'이라고도 하는 1호분에는 사신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고분 안에 벽화를 그리는 것은 고구려사람들의 문화로서 특히 내세의 수호신으로서 사신도를 중심으로 그리는 것은 7세기 무렵의 일이다. 그러므로 백제 고분에서 사신도 벽화가 나왔다는 것은 이 무렵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교류가 활발했으며 백제에서도 도교가 어느정도 수용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자세하게 들어가 보면 먼저 1호분인 동하총(東下塚)에 대해 살펴보자. 동하총(東下塚)의 봉토 직경은 27m이었는데 봉토 아래에는 할석을 2·3단 쌓은 호석이 봉토 연변을 따라 돌려져 있었다. 현실은 장방형으로 앞뒤가 길며 네벽과 천정에 벽화가 있다. 현실의 크기는 3.25mⅹ1.51m의 평면에 높이는 1.94m인 상자형 방이다. 각 벽석과 천정석은 각각 한 매의 큰 판석으로 물갈이를 하여 면을 매끄럽게 다듬었는데 북벽과 동벽은 편마암을 썼으며 기타는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였다. 바닥은 전돌을 깔고 그 중앙부에 전돌을 가로 세워 한 단 높여서 관대를 설치하고 관대 아래에는 배수로를 구축하여 물이 고이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현실 내의 벽화는 주 . 황. 적. 흑색으로 네 벽에는 사신도를, 천정에는 나는 구름과 그 구름 사이에 연화문을 예리하고 감각적인 필치로 그렸다. 다시 말해서 북벽은 현무(玄武), 남벽은 주작(朱雀), 동벽은 청룡(靑龍), 서벽은 백호(白虎) 등 사신도를 그리고, 천정의 연화비운문(蓮花飛雲文)을 채색하였는데 천장의 연화문만은 아직도 선명한 가운데 서벽의 백호는 머리 부분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고 기타의 벽화는 적외선 사진으로 약간 나타날 뿐이다.
현실 전방의 입구에는 연도를 두었는데 연도의 길이는 3.7m, 폭 1.43m, 높이 1.68m로 현실과 접해서 바깥 쪽에 이르러서는 그 폭이 차츰 벌어지고 있다. 현실은 거대한 1매의 방형판석으로 폐쇄하고 연도는 방형의 전돌을 쌓아서 막았으며, 연도의 좌우 벽은 할석을 쌓고 회를 발라 벽면은 회벽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묘제는 평양 지방에서 발견된 고구려 후기 고분과 통하고 있어 고구려의 문화적인 영향이 백제 후기 묘제에 반영 되어 있음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능산리 고분군에는 백제 고분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백제의 무덤은 기본적으로 고구려 계통의 묘제(墓制)에서 출발하여 백제화되는 과정을 밟고 있는데, 평지에서 구릉으로, 돌무지무덤(積石塚)에서 돌방무덤(石室墳)으로, 어울무덤(合葬墓)에서 홑무덤(單葬墓)으로, 네모꼴(方形) 에서 긴네모꼴(長方形)무덤으로 변화하고, 널길의 위치가 남벽의 동쪽에서 가운데, 또는 서쪽으로 옮겨지며 점차 북침(머리를 북으로 둠)으로 통일되어 갔다.
의자왕릉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는 비운의 왕 의자왕릉이 따로 모셔져 있다. 혹시 고구려의 마지막 왕 이름은 아는가? (보장왕) 그것은 잘 모르면서 대다수의 사람들으 백제의 마지막왕 이름은 안다. 이름이 부르기 쉬어서 그럴까? 이를테면 'chair king'으로 외웠다든지...아니면 의자왕하면 삼천궁녀등 사치와 향락의 이미지가 박혀서 그런지 모르겠다.
멸망한 백제의 마지막 왕이어서 그런지 의자왕만큼나 역사적으로 왜곡된 평가를 받는 인물은 없다. 삼천궁녀만해도 야사에 떠도는 말이지 실체는 아니란다. '많다'라는 상징적 숫자일 뿐. 역사학자 이이화선생은 낙화암에 떨어진 여자는 비단 궁에 있는 여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다. 소정방의 당군이 재물을 약탈하고 아녀자를 능멸하다보니 귀족부인이 스스로 낙화암을 찾았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도 의자왕은 용감하고 결단성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무왕의 맏아들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해동의 증자'라고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즉위 이듬해에 신라의 40개성을 함락하고 신라의 대야성을 점령하여 1만명의 포로를 사로 잡을 정도로 신라를 괴롭혔던 왕이며 고구려 말갈과 동맹을 맺어 30개성을 쳐부술 정도로 외교적 수완도 발휘했다.
왜 백제가 망했을까?
그 강한 백제가 왜 망했을까? 신라 김춘추의 농간으로 외세인 당나라를 한반도 전쟁에 끌여들인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하긴 즉위이후 전쟁의 스트레스에 빠져 주색에 몰입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후자의 원인이 지나치게 강조된 것은 전쟁의 패자는 역사의 패자이기 때문이다.
정보력의 부족이다. 그는 당의 힘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 무왕이 수나라의 힘을 읽고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지만 백제는 새왕조인 당나라의 힘을 과소평과했던 것이다. 지배층의 내부분열도 한 몫을 했다. 당파싸움에 몰입하다보니 기민한 수비전략을 세우지 못했던 것이다. 백제가 망한후 왕자 풍의 주도로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어도 역시 내부분열 때문에 자멸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지금의 우리 정치모습이 클로즈업 된다.
1340년만에 귀향
어쨌든 의자왕은 태자 융 그리고 신하 1만3천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었다가 4개월만에 병으로 죽고만다. 수백년을 이어온 나라가 한 순간에 멸망했으니 그 죄책감이말로 오죽했겠는가? 이국땅 먼나라에서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던 것이다.
2000년 부여군은 9월 의자왕과 태자 융의 영토를 모셔와 이렇게 단을 만들었다. 관에 중국 낙양시 의자왕릉 봉분의 흙을 담았다고 한다. 의자왕이 타국에서 눈을 감은지 1340년만에 백제땅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일본 문화의 뿌리 - 백제
고대삼국중에서 가장 덜 대접을 받는 나라는 백제가 아닐까? 고구려는 만주벌판을 지배했고, 신라는 삼국전쟁의 승리자였으니 당연한 대접을 받았지만 백제는 수도를 옮기며 도망만 다녔다는 그릇된 인식에 약한 나라라고 평가받는다. 그렇지만 백제야말로 곡창지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먹을 것이 많고 힘이 강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경제적 여유가 백제의 우아한 문화를 만들어 냈는지 모른다. 일본 오사카에 가면 일본인이 세계 최대라고 자랑하는 천황무덤이 있는데 그 옛이름이 '백제군 남백제촌'이라고 한다. 1천3백년이 넘은 지금에도 백제역, 백제대교, 남백제 소학교라는 이름이 있는 것을 보면 백제가 일본고대국가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위례성이 함락되고, 백제가 멸망하는 등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백제의 유민들은 일본으로 대거 건너갔다고 한다. 이 조그만 읍소재지 부여에는 변변한 호텔 하나 없지만 일본관광객이 끊임없이 찾아드는 것을 보면 문화의 원류를 찾아온 회귀본능이 아닐까 생각된다.
능산리 고분군 옆에는 일본오사카 시민의 헌수가 있다. 천 5백년전 보은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고 할까?
능산리절터
능산리고분군 바로 옆에는 능산리사지가 있다. 백제의 가람배치처럼 중문-탑-금당-강당의 배열로 일탑일금당식이다. 옆에 자리잡고 있는 박물관에 들어서면 당시의 모형도를 볼 수 있다. 하늘을 찌르고 있는 목탑 뒤에 멋드런진 금당이 자리잡고 있다.
1993년 바로 이 장소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다. 우리나라 공예사를 다시 써야할 정도로 대발견이며 세계최고의 명품이라고 자부해도 좋을 정도로 아름답다.
궁남지(宮南池)
궁남지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연못 가운데 최초의 인공 조원(造苑)이다.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3만여평이나 되는 광대한 연못이었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축조 당시에는 상당한 규모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백제 멸망 이후 물가의 수심이 얕은 부분부터 점차 농지로 이용되어 오늘날에는 1만평 가량의 수면을 유지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무왕(武王) 35년(634) 3월에 "궁남(宮南)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리나 먼 곳에서 끌어들이고 못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쌓아 방장선산(方杖仙山)을 모방하였다."라는 기사가 실려있다. 따라서 현재 복원된 연못이 백제의 왕궁지의 남쪽에 해당하는 연유로 연못의 이름을 궁남지라 한 것이다. 궁남지의 동편에는 화지산(花枝山)이라는 낮은 산이 있는데, 이 산의 궁남지와 면하는 완만한 경사지에는 대리석으로 쌓아올린 팔각형 우물이 남아 있고, 그 주위 일대에는 많은 기와조각이 산재한다. 이 자리는 백제의 사비정궁(泗?正宮)의 남쪽에 설치되었다고 하는 이궁(離宮) 터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것으로 보아 궁남지는 이궁의 궁원지(宮苑池)로 꾸며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궁남지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무왕 39년(638)조에 "3월 왕은 비빈과 더불어 큰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라는 기록과 화지산의 망해정이 푸른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워 신선경을 방불케 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당시의 수로와 물가, 못 속의 섬이 어떤 생김새로 꾸며져 있었는지 오늘날에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하는 물가는 현재의 유적을 살펴볼 때,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린 곡선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 연못은 자연형의 곡지(曲池)였던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신라 조원의 맛을 보여주는 안압지보다 40년 앞서 만들어져서 안압지의 모형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하나, 직선과 곡선을 조화시켜 묘미를 살린 안압지가 둥글게 조성한 궁남지를 본떴으리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또한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지도 의심스럽다. 그러나 궁남지는 백제의 조경수준을 엿볼 수 있는 사적으로 『일본서기』에는 궁남지의 조경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조경의 원류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연못 가운데의 섬에 지은 정자(亭子)의 이름은 포룡정(胞龍亭)인데, 이는 무왕의 출생설화에서 연유된 것으로『삼국유사』무왕전(武王專)에는 무왕의 어머니가 이 궁남지에 살던 용과 정을 통하여 서동을 낳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익산의 마룡지에도 마찬가지의 전설이 전하고, 기록상 무왕 자신이 이 궁남지를 만들었으니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 무왕의 출생의 신이성을 강조되어 전설화된 것이겠다.
이 연못에서 발굴된 백제의 수로(水路)와 배수로(排水路) 시설물, 기타 주변에서 출토된 토기와 기와를 비롯한 여러 가지 유물들은 이 시기 백제의 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며, 특히 이 곳에서 출토된 목간(木簡)은 백제의 가장 완연한 것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국립부여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29년 우리의 옛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부여지방의 사람들이 '부여고적보존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백제문화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부여의 여러 유적과 유물을 보존하려고 힘썼다. 그 뒤 이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백제의 유물을 중심으로 문화재를 하나 둘씩 모아, 부소산 남쪽에 자리한 조선시대의 관청자리에 전시하여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었는데, 이것이 국립부여박물관의 처음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1939년부터는 '조선총독부 박물관 부여분관'이라 하여 비로소 「부여박물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1945년 해방이 되자 '국립박물관부여분관'으로 이름을 고쳐 쓰게 되었다. 백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백제유물의 보존과 전시를 보다 새롭게 하기 위하여, 1970년에는 부소산 남쪽 기슭에 새 박물관을 지어 부여지역을 비롯하여 백제권역에 흩어진 백제문화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였다. 그러나 점차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전시유물이 늘어나게 되고 사회교육시설 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박물관이 제구실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아서 지금의 박물관으로 옮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립부여박물관은 금성산 기슭으로 자리를 옮겨 1993년 8월 6일 새로운 모습으로 개관하였다. 새 박물관은 약 19,084평의 면적에 4개의 전시실과 야외유물전시장을 마련하고 약 1,000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현대식 시설을 고루 갖춘 사회교육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박물관은 선사실, 역사실, 불교미술실로 꾸며진 3개의 상설전시실과 하나의 기획전시실을 갖추고 있고. 중정과 앞. 뒤뜰에는 석조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전체 전시유물은 약 1,000점에 이른다.
선사실에는 청동기시대의 생활모습을 이해할 수 있도록 부여 송국리유적의 문화 내용과 충남지역의 청동기문화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다. 다른 박물관에 견주어 청동기유물을 집중적으로 전시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역사실에는 원삼국시대와 백제시대의 유물을 전시하되, 특히 사비백제시대의 생활상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꾸몄다. 주로 사비 백제 추정 왕궁터와 부소산성을 비롯한 생활유적과 부여 능산리와 논산지역 등의 무덤에서 나온 토기, 금속공예품, 나무제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불교미술실에는 사비백제시대의 여러 절터와 가마터 등에서 나온 불상, 기와, 전돌을 비롯한 불교공예유물을 주로 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이밖에도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여러 가지 공예품도 전시하고 있다.
현재 기획전시실에는 박만식교수가 지난 30여 년간 수집한 백제토기를 국립부여박물관에 기증한 것을 전시하고 있다. 이들 토기는 거의 대부분이 충남 논산군 연산면 일대에서 출토된 것이다.
야외전시유물로는 중정에 있는 부여석조(보물194호)를 비롯하여, 탑, 불상, 비석, 석조, 주춧돌 등 많은 석조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1) 정원지명 금동삼존불
사자루를 세우려고 땅을 고르던 중에 발견되었다. 손바닥 한 뼘도 안되는 8.5cm의 작은 금동불이지만 광배 뒤쪽에 정지원(鄭智遠)이라는 사람이 죽은 부인을 위해 만들었다는 뜻으로 3행 16자가 새겨져 있어 백제 때 불상 조성의 한 면모를 보여 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하나의 광배에 본존과 협시보살이 나란히 있는데 오른쪽 보살은 좀 깨져 나갔다. 대좌의 연꽃무늬를 음각으로 살짝 파는 등 형식적으로는 다소 간략한 편으로 6세기 때의 것으로 본다. 보물 제196호로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다.
2) 납석제여래좌상
화강암으로 만든 대부분의 석조불과는 달리 이 부처님은 골돌(납석)을 깍은 점이 이채롭다. 바라보아서 고개가 오른족으로 살짝 기울어 있어서 정면으로 꼿꼿한 부처에 견주어 인간적인 느낌을 주며 볼부분이 둥그스럼하여 넉넉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하여 부처라기보다는 백제의 마음씨 좋은 이웃 아저씨를 보는 듯하다.
이 부처님은 7세기 초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 시대에 조성된 많은 부처가 대개 서 있는 모습인 데에 견주어 가부좌로 앉은 모습이다. 무릎위로 다소곳하게 두손을 맞잡고 있으며, 대좌에 앉은 아래로 옷자락이 늘어져 있는데 이런 것을 상현좌라고 한다. 높이가 13.5cm로 아담하여, 호신불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보물 제329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다.
3) 금동보살입상
역시 통통하고 원만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보살입상이다. 연꽃대좌 위에 다소 두꺼운 천의를 걸치고 있는데 옷자락이 X자로 겹쳤으며 다리부분에서는 몸에 달라붙은 듯이 표현하였다. 머리에 단순한 삼산관을 쓴 이 보살은 머리카락이 옆으로 휘날리며 눈을 슬며시 내리깔고 있고 입가에는 미소가 살짝 맺혀, 수줍어하는 젊은 백제 아낙네를 보는 듯하다. 대좌의 절반이 잘려 있어 일광삼존불의 협시보살일 가능성이 높다. 높이는 11,2cm이며 보물 제330호로 지정되어있다.
4) 청양 본의리 도제불상받침
1986년에 청양군 목면 본의리 백제시대 가마터에서 발견되었다. 파편상태로 묻혀 있던 것을 수습하여 맞추어 복원해 보니 이처럼 높이 1m안팎, 앞면에서 본 폭이 2.8m나 되는 거대한 모양이 되었다. 군데군데 황토빛 나는 곳이 없는 부분을 복원하여 모양이 제대로 되도록 맞추어 놓은 것이다.
7세기 무렵의 불상이 한두 마애불 외에는 주로 소형 금동불로나 남아 있는 지금, 이러한 보기는 백제 불교문화의 알려지지 않은 한 양상을 이해하는 데에 큰 전기가 된다. 623년에 만든 당시 백제의 영향력과 국제 교류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불상받침은 옷자락이 앉은자리 위로 늘어지게 한 상현좌로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군수리 출토 납속제여래상과 그 모양이 거의 비슷하다. 전체 모양은 네모진 편이고 좌우대칭을 이루면서도 꽃잎이 두꺼운 연꽃이 한창 피어 오르는 위로 좌우 대칭되었으나 옷주름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모습이다.
부처는 따로 조성하여 올려놓았겠으나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결가부좌한 좌상으로서 그 키는 비례로 보아 적어도 3m는 넘었을 터이니 온화하면서도 당당한 부처였을 것이다. 제작시기는 백제말인 7세기 초 중반으로 짐작된다.
5) 산경문전과 무늬전돌들
이 전돌은 규암면 외리 백제시대 건물터 바닥에서 발견되었다. 건물터는 동서로 약 27m, 남북길이가 약 75m로 근처에서 백제금동보살이 발견되어 거의 절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모두 여덟종류가 발견되었는데 산경문(山景紋)2종, 귀형문(鬼形紋)2종, 반룡문(蟠龍紋), 봉화문 연화문, 연화와운문(蓮花渦雲紋)이 각 1종씩이다. 모두 정사각형으로 한변이 29cm이고 두께는 4cm이다.
전돌들이 발견될 때는 남북으로 길게 일렬로 깔려 있는 상태여서 바닥에 까는 것으로도 여겨지지만 의장의 화려함으로 미루어 벽을 장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룡문, 봉화문, 연화문 등 무늬가 둥근 테두리 안에든 전돌들은 네 귀퉁이에 4분의 1쪽짜리 꽃무늬가 있어 서로 죽 잇대면 사이사이마다 꽃 한 송이씩이 피어나도록 고안되었으니 그 치밀한 설계에 감탄할 따름이다.(서울국립중앙박물관 백제실에는 한쪽벽에 이처럼 복원하여 장식해 놓았다.)
유명한 산경무늬 전돌은 둥글둥글한 산모양의 도안이 더없이 부드러우며 살짝 두드러진 양각에 한 겹 얇은 테두리를 둘러 매우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마저 느껴진다. 신선경 또는 도원을 지향하는 백제인의 마음을 존해주는 듯하다. 자세히보면 아래 가운데 산에 절같은 집이, 오른쪽아래 산에 절로 가는 스님 모습이 음각되어 있다. 탁본으로 닳아져서 모습이 많이 희미해졌다. 반룡무늬 전돌은 우주를 하나의 구슬로 표현하여 그 안에 꿈틀거리는 용을 표현했고 봉황무늬 전돌은 연화대좌위에 있는 것과 바위, 물위에 있는 것 해서 두가지인데,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입을 벌려 이빨도 날카롭게 솟았고 눈도 매우 부리부리하지만 두려운 형상이기보다는 도깨비마저도 매우 부드럽고 유려한 것이 백제 사람들의 특성이 여기에도 잘 살아나고 있다.
이러한 무늬 전돌들은 하나하나는 그렇게 두드러지게 화려하지 않지만 여럿이 모여서 어울리면 또 다른 조화미를 이루어 내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백제 사람들의 단아하면서도 은근히 화려한 취향과 그를 뒷받침하는 섬세한 기술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6) 부여 석조
박물관 가운데뜰에 놓여 있는 이 거대한 석조는 부소산 기슭의 옛 국립부여박물관 동쪽 우물자리 아래쪽에 있던 것을 박물관이 이사하면서 따라서 옮긴 것이다. 본래 그 자리가 왕궁터로 추정되므로 이석조도 궁에서 연꽃을 띄어 놓던 석련지(石蓮池)로 쓰던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한다.
전체적으로 사발모양으로 오므라들어 소담하다는 인상을 주며 아무런 장식이 없어 매우 단아하다. 그러면서도 이토록 거대한 돌덩이를 부드럽게 공들여 다듬어 조금도 차갑지 않은 느낌을 주는 것은 직사각형이 기본인 통일신라 석조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백제 사람들의 정서이다. 그런데 석조 옆면에 '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백제의 슬픈 종말을 가슴 저리게 증언하고 있다. 이는 정림사터 오층석탑에도 새겨져 있는 것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장수 소정방의 군대가 자신들이 백제를 평정했음을 기념하려고 새겨놓은 글자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전시실에는 능산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제품의 여러 유물이 있고, 벽화 고분으로 유명한 동하총의 사신도(四神圖)가 있다. 능산리 고분군은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 평면의 현실과 현실로 들어오는 연도가 달린 횡렬식 석실분으로 그 위치와 규모로 미루어 왕릉으로 전해져 왔으며 1993년 백제금동대향로(국보287호)가 출토된 고분군 서편 백제시대 절터에서 1995년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288호)이 발견됨에 따라 백제 성왕과 관련된 왕릉임이 입증되었다. 사리감에는' 백제창왕(위덕왕)13년에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부왕인 성왕을 기리고자 만든 것이다. 또한 이곳에는 백제의 묘제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옛 백제지역에서 출토된 여러형태의 고분군 모형을 실물 또는 축소모형으로 전시하고 있다. 야외의 정원에는 당(唐)의 유인원 기공비(보물제21호)를 비롯하여, 보광사 중창비(보물 제107호), 부여 석조(보물 제194호)가 있다. 이밖에 각종 기석(磯石), 판석, 백제의 큰항아리 등이 있으며, 석탑, 부도, 석등, 석불상, 돌매, 백제고분, 칠지도(모조품), 도용(陶傭) 등이 있다.
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말 부여의 능산리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는데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향로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며, 또한 전체 높이 64cm, 최대지름19cm의 크기로서 유례가 없는 대작이다. 구리에 아연과 주석이 섞인 청동을 주조하여 만든 후 몸체 겉면에 금을 도금한 향로로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라 불리운다. 향로는 불교 양식이 가미된 중국 박산향로 형식과 비슷하지만,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현존하는 동아세아 향로 중에서 가장 우수한 걸작품이며, 세계를 놀라게 한 우리문화의 최고 예술품이다.
발굴 당시 거의 완벽에 가까운 형태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는 봉황, 뚜껑, 몸체, 용좌 4단계로 구분되며, 각 부분마다 빼어난 조형적 구성은 완벽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향로 전체에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18명의인물, 65마리의 동물, 4곳의 산봉우리, 그리고 향을 피우면 봉래산과 봉황의 가슴을 통해 나오는 12개의 구멍들은 어느 시대에서도 볼 수 없는 독창적 예술의 표현이다.
이 향로의 가장 꼭대기에는 힘찬 날개짓으로 극락세계를 향하여 비약하고 있는 봉황이 하늘의 기상과 양의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여의주를 턱 밑에 간직한 채 뚜껑 위에 우뚝 서 있는 봉황의 힘찬 모습은 향로 전체를 장악하며, 그 앞가슴 위에서 피어오르는 향연은 마치 봉황의 입에서 품어 나오는 듯하다. 봉황은 고구려무덤에 그려진 주작도와도 비슷하여 사방위 가운데 남쪽을 지키는 주작(朱雀)일 가능성도 있다.
향로뚜껑은 다섯 겹을 이룬 입체적 형태의 크고 작은 30여 산악 봉우리가 새겨져 있다. 가장 윗단의 다섯 봉우리에는 새가 앉아 있고, 그 사이사이에 5인의 악사가 있다. 오른쪽으로 땋은 머리에 각기 피리와 북, 현금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신선을 연상케 한다. 모든 산악에는 수많은 동물과 사람, 꽃과 나무, 폭포 따위가 조각되어 있어 마치 부여 규암면에서 출토된 비슷한 시기의 '산수문전(山水文塼)'의 문양을 훨씬 기운생동하게 입체화시켜 변형한 느낌을 준다. 동자를 태운 코끼리, 지팡이를 든 승려, 폭포에 머리를 감는 사람, 멧돼지, 호랑이, 원숭이, 사슴 등과 함께 말을 달리며 뒤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은 고구려 무덤그림인 수렵도와 흡사하다.
향로 몸체는 만개한 연꽃송이처럼 8개의 꽃잎이 3중으로 장식되었다. 연꽃잎과 그 사이사이에는 각종 물고기와 새, 그리고 동물과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대체로 물과 관계된 것들이 많으며 상상 속의 동물도 있다.
이 연꽃의 밑 중심을 용이 입에 문채 받쳐들고 있다. 세 발로 굳건히 땅을 짚고 한 다리는 힘있게 당겨 올린 용의 주위에는 구름을 장식하여 금방이라도 승천하려는 기세다. 다섯 개로 표현한 용 발톱은 중국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백제인의 자주성과 위엄을 과시한다.
백제금동향로의 구성 내용은 도교의 신선사상과 불교의 세계관이 그 조형적 배경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그 구성내용을 아랫부분부터 살펴보면 받침에 수중의 정수인 용을 음으로서 등장시키고 그 위에는 연꽃과 수중생물을, 지상의 세계인 봉래산에는 불로장생하는 삼라만상을, 천상계에 해당하는 정상부에는 천하가 태평할 때 세상에 나타난다는 봉황의 우뚝 솟은 모습이 양의 상징으로 조각되어 있다. 받침에 수중동물의 정수로서 용을 등장시키고, 그 위의 몸통을 연꽃모양으로 표현하고 다시 그 위에 8개씩 3단 24개의 연꽃잎으로 장식한 모양은 불교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조형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연화장세계의 구체적인 내용은 향로의 뚜껑 부분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내주는데, 이 세계는 중생들이 사는 세계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도교의 신선세계의 모습과 분위기를 느끼게 하고 있다.
정림사지
정림사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위치한 백제시대의 사찰 정림사의 터를 말한다. 백제의 유구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부여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거의 유일한 절터로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지이다. 이 터의 지정면적은 3만 4155㎡이며, 현재 사적 제301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 때 창건되었으며,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있어 그 자세한 유래 등이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다만, 1942년 절터 발굴 조사시 이곳에서 발견된 와명(瓦銘)에 '太平八年戊申定林寺大藏堂草'라고 씌어 있어 정림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대평 8년은 고려 현종 19년인 1028년으로 그때에는 이 절의 이름이 '정림사'였으며 그때까지는 이 절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나「삼국유사」와 같은 문헌 기록에도 '정림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아, 백제 때의 이름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 절터에는 백제시대의 석탑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 9 호)과 고려시의 사찰 중수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5.62㎝의 석불인 부여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어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계속 법통이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발굴조사 때 백제시대·고려시대의 막새 기와편을 비롯하여 백제시대의 벼루·삼족토기 등 생활용구와 소조불상편이 다수 출토되었으며 현재는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지금 현재는 금당자리에 복원해 놓은 건물 한 동만 덩그라니 남아있고, 이곳을 이름나게 한 오층석탑이 절터 한 가운데, 석불좌상이 강당자리의 전각에 보관되어있다.
1. 정림사지의 가람배치
1979 년과 1980년 2년에 걸쳐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절터의 전면 발굴을 실시하여 절의 전체적인 배치를 밝혀냈다.
정림사의 가람배치는 금당(金堂)과 강당(講堂)과 중문(中門)이 일직선상으로 놓여 있고, 강당과 중문을 연결하는 회랑(廻廊)이 있으며, 금당과 중문 사이에 1기의 탑을 배치한 일탑식가람(一塔式伽藍)으로 추정되어 전형적인 백제시대의 가람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1) 금당지(金堂址)
석탑에서 북으로 26.27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면서 백제 건축사에서 특징으로 지적되는 2층 기단을 지난 건물로 조성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되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크지 않은 건물로 보인다. 그리고 서북 모퉁이에 있던 적심석(積心石) 주변에 붉게 탄 소토층(燒土層)이 발견됨으로서 이 건물이 화재로 인하여 소실된 것으로 판명된다.
2) 강당지(講堂址)
금당지의 중심에서 북으로 31.7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나, 석탑의 중심을 양분해서 통과되는 가람남북 기준선과는 동편으로 20cm 벗어나 위치한다. 이 강당지에서는 유일하게 5개의 초석이 발견되었으며, 건물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추정된다.
3) 중문과 연못
중문지는 석탑을 중심으로 남으로 19.98m 거리를 두고 남쪽에 문의 중심을 두고 있으며, 특이한 것은 중문과 탑 사이에 연못을 파서 다리를 통하여 지나가게 한 점이다. 지금은 금당 자리에 최근에 복원한 건물만이 덩그렇게 서 있지만 절 전체가 회랑으로 빙 둘러 있는 가운데 긴 네모꼴의 못에 연꽃을 기르고 잉어라도 몇 마리 놓아길렀다면, 시내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매우 운치 있는 공간이었을 듯하다. 기둥자리로 보아 중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아담한 구조였다고 밝혀졌다.
4) 회랑지(廻廊址)
회랑은 장방형에 가까우나 북쪽으로 갈수록 동회랑의 폭이 약간씩 넓어지는 형태 곧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다.
2. 정림사지의 유물
1)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여 답사 코스의 하이라이트인, 절터 한가운데 의젓하게 자리한 이 오층석탑은 백제가 멸망해 간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채 1400년을 버텨 왔다. 어느 나라보다도 불교가 융성했을 백제의 불교 문화 가운데 자리로만 남아 있는 목탑은 다 쓰러지고 없지만, 지금 남아 있는 탑은 익산 미륵사터 탑과 이 정림사터 오층석탑 2기뿐이다. 특히 이 정림사터의 탑은 백제 석탑의 완성된 형태로 손꼽는 것이다. 미륵사터 탑이 작은 부재들을 엮은 흔적이 보이는 점에서 목탑을 석탑으로 번안한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것에 비해, 이 정림사터 탑은 부재들이 한결 단순해지고 정돈되어 비로소 석탑으로서의 완성미를 보여준다. 국보 제 9호로서 손색없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석탑은 그 양식에 의하여 미륵사지 석탑의 뒤를 이어서 축조된 것으로 생각되나 발굴 조사에서는 정림사의 창건과 더불어 세워진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석탑의 그 연대는 미륵사지 석탑보다 빠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정림사에 대한 기록이 역사 서적에 없어 그 창건 연대가 분명하지 않으나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미륵사지에서 출토되는 것보다 연대가 오랜 것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륵사지와 정리사지의 금당은 모두 2중 기단이며 정림사지의 하층기단에는 초석이 있으나 미륵사지의 그것은 없다. 초석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시기적으로 빠를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즉 그 유물의 형식에 의하여 정림사지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며 석탑도 그 때 같이 만들었다고 본다면, 무왕대 만들어진 미륵사지 석탑보다는 연대가 앞서는 석탑임에는 틀림없다. 이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논의 중이다.
일명 백제탑으로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탑은 높이 8.33m이며, 특징은 기단이 단층으로 1층 지붕돌의 비례에 견주어 훨씬 좁고, 면석의 모서리 기둥은 위로 갈수록 좁아져 목조 기둥의 배흘림수법이 남아 있으며, 지붕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이 지붕돌과는 다른 돌로서 두공처럼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 마무리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지붕돌이 경사지지 않은 얇은 판석이면서 처마는 살짝 반전시켜 경쾌한 상승감을 주는 점들을 꼽는다. 또 전체적으로 키가 늘씬해 상승감을 보이는데 그것은 1층 몸돌이 훌쩍 솟고 2층부터의 몸돌은 높이가 1층의 반으로 줄어들면서 지붕돌의 너비는 차차 줄어져 가파른 기울기를 보이기 때문이다.
정림사 오층석탑의 구조를 정확히 실측한사람은 석굴암을 측량한 요네다미요지이고, 그 구조의 미학과 양식적 전후관계를 밝힌 것은 『조선탑파연구』를 저술한 우현 고유섭 선생이다.
우현 선생은,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인 익산 미륵사탑은 목조타파를 충실히 모방한 것으로 다만 재료를 돌로 한 목탑이라고 할 수 있음에 반하여 정림사탑은 이제 목조탑파의 모습에서 떠나 석탑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획득하는 단계로 들어선 기념비적 유물로 평가하였다.
석굴암을 측정하면서 통일신라 때 사용한 자가 곡척(曲尺, 30.3cm)이 아니라 당척(唐尺, 29.7cm)이었음을 밝힌 요네다는 백제 때 사용한 자는 곡척이 아니라 고려척임을 밝혀냈다.
고려척으로 측량한 결과 요네다는 이 탑의 설계에서 기본 단위는 7척에 있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1층 탑신 폭은 7척, 1층 총높이는 7척, 기단의 높이는 7척의 반인 3.5척이고 기단 지대석(址臺石)폭은 7척의 한 배 반인 10.5척이다. 그런 식으로 연관되는 수치를 요네다는 기하학적 도면으로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요네다는 정림사탑의 아름다움의 요체는 체감률(體感律)에 있는데 그것은 등비(等比) 급수 또는 등차(等差)급수적 체감이 아니라 기저부 크기의 기본 되는 길이에서 발전하는 등할적(等割的)구성으로 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예를 들어 1층부터 5층까지 각층의 높이를 보면 층마다 10분의 1씩 줄어들어 결국 1층은 6.9척, 2층과 5층을 더한 것이 7척, 3층과 4층을 더한 것이 6.9척이 되므로 대략 7척과 맞아 떨어진다. 또 1층부터 5층까지 탑신의 폭을 보아도 1층이 7척이고, 2층과 3층을 더한 것이 7척, 2층과 5층을 더한 것이 7.2척이므로 이 또한 대충 7척과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요네다는 모든 수치관계가 대략만 맞는다는 사실을 그대로 용인하고 그 정도의 차이는 여러 돌을 쌓기 때문에 수평고름을 하기 위하여 시공 때 상하면을 약간씩 다듬은 데서 생긴 오차로 보았다. 그러나 백제의 건축가들이 그렇게 대충 설계했을 리가 없다. 그래야만 했던 이유와 깊은 뜻이 따로 있을 것이다.
요네다가 제시한 측량에 의하면 모든 수치에서 5층이 관계되면 반드시 다른 층보다 약간씩 커짐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5층은 4층까지의 체감률을 적용하지 않고 약간 크게 만들었기 때문에 요네다가 제시하는 치수들이 약간씩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5층이 약간 커야만 했던 이유는 도면상의 문제가 아니라 완성된 탑을 절집 마당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실제로 느끼는 체감률 때문이다. 5층이 약간 커야 보는 사람 입장에서 비례가 맞다고 느끼는 것이다. 정림사탑의 설계자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것이다. 즉 우리 선조들은 실제 도면상에서 약간 오차가 생기더라도 실제 체감에 적용될 비례를 위해 슬기롭게 도면상의 비례를 파기한 것이다.
정림사터 탑은 8.33m나 되어 결코 작지 않은 탑인데도 멀리에서 보면 그리 육중한 느낌을 주지 않기 때문에 크다는 인상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다가갈수록 장중하고 위엄 있는 깊이가 느껴진다. 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사방을 빙 둘러보면 보는 자리에 따라서 장중함과 경쾌함이 교차되어 느낌이 새롭다. 아마 단번에 정면승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곱씹는 맛을 느끼게 하는 백제의 맛이 이런 데서도 나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통일신라시대나 고려 시대에 옛 백제 지역인 충청도와 전라북도 지방에 세워진 탑 가운데 많은 탑이 정림사터 탑의 문법을 지니고 있어, 이 탑을 본떠 백제 지역 나름의 정서를 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이 정림사터 탑은 이 지역의 조형적인 지주였다는 뜻이겠다.
한동안 이 탑은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리어왔다. 그 까닭은 1층 탑신부 한 면에 새겨진 소정방(蘇定方)의 평제기공문(平濟紀功文), 즉 소정에 방이 백제를 멸한 기념으로 세워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그러한 전시 상황에서 예술적으로 손색이 없는 이러한 탑을 만들 수도 없으며, 또한 뚜렷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는 '평제기공문'이라는 그 글자는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 그것을 기념하려고 이미 세워져 있던 탑에 새긴 것으로 고증에 의에 입증되었다. 따라서 이 탑은 660년(의자왕20년) 훨씬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아마도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자기의 전공을 오래도록 전할 기념비를 세우려고 했겠지만, 거세게 저항하던 백제 유민들의 기질과 불심으로 보아 비석보다는 탑에 새기는 것이 오래 보존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면서 당시 백제인들의 처절했을 정경을 그려 본다.
2) 소조부처머리
절터 발굴 조사 때에 절터 여러 곳에서 기와 조각들이 무더기로 파묻혀 있는 것이 밝혀졌는데, 그 중 회랑터 서남쪽 구덩이에서 백제 때의 기와조각들과 함께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 조각과 도용(陶踊) 파편들이 나왔다. 여러 조각이 난 것들이라 완전한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많지 않은 백제 불상의 면모를 보충해 줄 수 있는 유물로 매우 귀중한 것이다. 특히 부처 머리와 도용의 머리 부분들이 모두 볼에 다보록하게 살이 붙고 입가에는 엷고 부드러운 미소를 따뜻하게 머금고 있다. 진흙을 빚어 구운 소조불에서는 금동불보다 훨씬 부드러운 질감을 느낄 수도 있어 백제 사람들의 온화한 마음씨를 물씬 느끼게 한다.
3) 석불좌상
석불좌상은 창건 가람의 강당지에 다시 35cm 정도의 두께로 흙을 덮은 위에 부처의 좌대가 놓여져 있으며 보물 318호로 지정되었다. 이 자리에 근래에 전각을 복원해 놓아 석불좌상은 현재에는 집 안에 모셔져 있다.
얼굴이나 몸체가 모두 몹시 비바람에 씻겨 형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래쪽의 대좌를 보면 안상이며 연꽃 조각이 분명하고도 당당해서 이 불상도 본래는 매우 단정한 고려 때의 불상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정림사 이름이 새겨진 기와대로 고려 현종대인 1028년에 이 절을 크게 중수할 때 모신 듯하니 11세기 불상으로 볼 수 있다. 전체 높이는 5.62m이고 보물 제 108호이다.
여행작가 허시명의 체험여행 | 인삼박물관
숲 속의 보물찾기 “심봤다”
6년근으로 자라기까지의 모습. 요즘 도처에서 ‘심봤다’ 소리가 들린다. 어떤 공무원은 산삼을 캐서 불우이웃을 도왔다 하고, 민박집 텃밭에 묻어둔 산삼을 몰래 캐먹었다 낭패를 본 피서객도 있다. 또 어떤 단체는 백두대간을 타고 다니며 산삼 씨앗을 뿌린다고 하고, 어떤 지방자치단체는 지리산 자락을 산삼으로 덮어버리겠다고 호언하기도 한다. 그뿐인가. 산삼 캐기 체험여행도 생겼다. 이런 소식을 접하다 보면 은근슬쩍 내게도 산삼 한 뿌리 캘 수 있는 행운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문제는 그 좋다는 산삼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캘 수 있다는 것.
산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 꿩 대신 닭이라고 우선 인삼에 대한 정보부터 알아보자. 인삼과 산삼의 성분이 다르다고 하지만, 사람이 심으면 인삼이고 새가 심으면 산삼이라는 말도 있으니 인삼의 생김새를 알면 산삼을 구별하는 감도 생길 것이다.
10월21일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인삼박물관에 가봤다. 정관장 홍삼을 만드는 부여의 고려인삼창 본관 1층에 있는 250평 규모의 박물관이다. 대한민국 최대 히트 상품이자 장수 상품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인삼박물관이 이제야 문을 열다니, 다소 늦은 감이 있다.
삼박물관에 들어서자 인삼향이 짙게 풍겼다. 인삼을 쪄서 만드는 홍삼의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모아 만든 향이라고 했다. 인삼향을 맡으며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마치 내 몸이 약탕 속에라도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전시관 자동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인삼의 나신이었다. 이곳에선 인간의 몸을 닮은 것을 최고의 인삼으로 친다. 두 다리를 뻗고 있는 형태의 인삼이 성분이나 약효가 좋기 때문이란다. 이는 우리 조상이 경험을 통해 확인한 사실이라고 한다.
전시용 알코올 병에 담긴 인삼의 생김새는 가지각색이다.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을 닮은 게 있고, 발레를 하듯 몸을 휘감고 있는 게 있는가 하면, 남녀가 합궁하는 형상의 인삼도 있다. 좀더 안쪽으로 들어서면 인삼의 재배와 성장과정을 볼 수 있는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사실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검은 비닐 볕가리개 설비를 갖춘 인삼밭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인삼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까이서 관찰하기란 쉽지 않다. 자칫 인삼도둑으로 오인 받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인삼 뿌리는 땅 속에 있어서, 정작 땅 위로 노출된 인삼의 모습은 가늠하기가 어렵다.
7월에 열리는 인삼열매, 인삼딸.인삼박물관에서 가장 먼저 손님을 맞이하는 인삼부부. (위부터). 산삼이든 인삼이든 가장 쉽게 가늠하는 방법은 인삼꽃을 보는 것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삼꽃이 지고 나서 열리는 인삼열매를 보는 것이다. 열매가 예뻐서 종종 꽃으로 잘못 알기도 하는 인삼열매는 ‘인삼딸’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파란 꽃대 위에 붉은 팥알처럼 맺히는데, 산삼을 처음 캔 사람들은 십중팔구 이 열매를 보고 횡재한 사람들이다.
7월이 되면 인삼딸이 붉어진다. 열매는 이빨로도 깨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그 열매가 땅에 떨어져 자연 상태에서 발아되는 데 21개월이 걸린다. 그래서 인삼을 밭에 심을 때는 그 단단한 껍질을 인위적으로 열어주는 `개갑(開匣)’ 처리 과정을 거친다.
개갑 처리 방법은 이렇다. 인삼딸을 따서 과육을 완전히 제거한 뒤 7월 중·하순 개갑장에 넣어 약 100일 동안 물을 뿌려주면 싹이 나와 종자껍질이 벌어지게 된다. 씨앗 껍질이 열리면, 10월 하순이나 11월 초순 땅에 심으면 된다.
인삼박물관에서는 이러한 인삼의 성장과정은 물론, 인삼을 캐는 데 쓰는 특이한 도구도 살필 수 있다. 인삼을 발아시키는 개갑 시루, 종자와 모래를 분리할 때 썼던 얼게미, 묘삼을 심는 조막손, 수삼 캐는 호미, 볏짚이엉을 설치할 때 쓰던 이엉매잽이(대바늘) 등이다.
인삼에 대한 상식을 이 정도 쌓은 뒤에는, 박물관 안에서 심마니 옷을 입고 인삼 캐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인공 숲이 조성된 작은 무대인데, 그 안에 더덕 도라지와 함께 인삼이 숨겨져 있다. 인삼을 찾게 되면 ‘심봤다’고 소리치면 된다. 협소하긴 하지만, 보물찾기 하듯 인삼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부여 고려인삼창에서 가장 인상적인 볼거리는 홍삼의 제조과정이다. 홍삼 제조장은 인삼박물관과 연결돼 있다. 세계 40개국으로 수출되는 정관장 홍삼이 모두 이곳에서 생산된다. 홍삼은 수삼(막 캐서 마르지 않은 인삼)을 쪄서 말린 것이다. 수삼은 금방 삭아버리기 때문에 건삼이나 홍삼으로 만들어 보관해야 한다.
그런데 홍삼은 단순하게 저장을 위한 가공상품이 아니다. 수삼을 찌는 과정에서 새로운 성분이 강화되면서 품질이 극대화된다. 홍삼이 6년근만을 사용하고(건삼은 보통 4년근이다) 최고가의 인삼가공상품으로 팔려나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홍삼 공장에 들어서니 모자를 쓴 직원들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나오는 수삼을 갈무리하느라 여념이 없다. 수삼을 씻고, 말리고, 이를 증삼기에 넣어 증기로 찐다. 인삼의 전분이 호화(糊化, 전분의 치밀한 구조를 무너뜨리는 작업)되어 소화가 잘되게 변하고, 조직은 견고해지고 붉은 기운을 띠게 된다.
홍삼을 자연광에 건조시키는데, 다 건조되면 수삼에 함유된 75%의 수분이 14%로 떨어져, 보관이 용이하게 된다. 이렇게 가공 처리된 홍삼이 150가지의 상품으로 포장돼 세계로 팔려나간다.
인삼박물관과 홍삼 제조장을 지나 밖으로 나오니, 인삼향과 홍삼 기운으로 내 몸이 단단해진 것 같았다. 인삼 잎과 인삼딸도 단단히 보아두었으니 이제 산에 가면 산삼도 캘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신 박물관 입구의 매장을 지나오면서 내 지갑이 홀쭉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인삼박물관 찾아가기
위치 충남 부여군 규암면 고려인삼창 본관.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5시. 연중무휴(주말 및 공휴일은 사전예약),
문의 041-830-3242.
홍삼 제조과정을 보려면 예약해야 한다.
부소산성
부여는 정말로 작은 읍이다. 그래서 부여의 첫인상을 "이것이 과연 고도(古都) 부여란 말인가"라고 하며 그 허망부터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백제의 마지막 123년간 도읍지로 백제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다는 성왕 시절 위업도 들은바 있어서 고구려의 평양, 신라의 경주에 필적할 만한 백제 왕도의 유적이 있으리라 기대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부여에 당도해 보면 왕도의 위용은커녕 조그만 시골 읍내의 퇴락한 풍광뿐이며 이곳이 백제의 옛도시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백제가 이 곳 사비성에서 신라와 당나라에 망할 적에, 망해도 깡그리 망해 또렷한 유물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백제후기의 무대였던 부소산과 부여산성이 있는 부여읍은 선조들의 얼이 서려있는 곳이다. 그런 만큼 우리는 앞으로 보게 되는 유적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며 보아야 하며 조금이나마 당시의 상황이나 정세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가슴속에 먼가가 찡하게 퍼진다거나 고개를 끄덕인다면 소기의 답사목적을 달성하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1. 새 도읍지로서의 부소산
부소산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산으로서 해발 100m밖에 안되는 낮은 산이며 현재 이곳에는 부소산성과 여러 사적지와 문화재가 있다. 부소산 북쪽으로는 백마강이 둘러 있고 남쪽으로는 들판이 전개되어 피란살이나 다름없던 공주 시절에 일찍부터 여기 사비를 새 도읍지로 봐 두었으나 국내 정세나 불안하여 미루어오다가 비로소 성왕이 천도하였다고 역사학자들은 사비성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그 백마강을 천연의 참호로 삼고 부소산을 진산(鎭山)으로 하여 겹겹의 산성을 쌓고서, 남쪽 기슭에 왕궁이 자리잡았다. 그러니까 지금 부여 박물관이 선 일대가 왕궁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여기를 기준으로 해서 남쪽으로 육좌평(六佐平)관가가 펼쳐지고, 그 남쪽으로는 정림사, 또 그 남쪽으로는 궁남지(宮南池)가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전개됐다. 그리고 부소산성에서 두 팔을 뻗어 부여 읍내를 끌어안는 형상으로 나성이 둘러져 있었으니 강과 산성과 집들이 어우러진 당시 부여는 참으로 아늑하면서도 질서있는 도성이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멋진 부여의 옛모습을 옛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거의 없다. 왕궁터는 사라진지 오래고 나성은 다 허물어져 끊어진 잔편을 찾기 바쁘고, 궁남지는 옛 연못의 3분의 1도 복원하지 못하였다. 오직 정림사 오층석탑 하나뿐이고 굳이 찾자면 반은 뭉개진 부소산과 가난한 물줄기의 백마강이 있을 뿐이다. 그래도 마음만 바로 세운다면 부여에서 백제를 회상하며 백제의 미학을 배우고 백제의 숨결을 체득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것이 부여의 저력이며, 답사의 뜻이기도 하다.
2. 부소산성
부소산은 북으로 강을 두르고 바로 산이 막아선 형상으로 되어 있어 북으로부터 내려오는 고구려 군사를 방비하기에 알맞게 되어 있는 점이 공주의 공산성과 흡사하다. 그래서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경기도 하남 위례성터와 함께 백제식 도성 방식을 보여준다. 이 부소산에는 왕궁과 시가를 방비하는 최후의 보루였던 백제의 부소산성이 있다. 산성이 완성된 것은 성왕이 538년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던 무렵으로 보이나 그보다 앞서 500년쯤에 이미 그 선왕인 동성왕이 산봉우리에 산성을 쌓았고, 후대에 무왕이 605년에 고쳐 다시 쌓았다.
부소산성은 사적 제 5호로서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소재해 있다. 이러한 부소산성의 규모는 성의 둘레가 2.2㎞에 달하며, 높이는 106m이고 면적 74만 6202m²에 이르는 거대한 산성으로 백제가 멸망할때까지 123년 동안 이 산성을 주축으로 백제의 왕도 수호에 기초적인 역할을 하였다. 부소산성의 형식은 테뫼식과 포곡식이 병용되어 있는 백제의 독특한 복합식 산성으로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머리띠식) 산성을 구축하였고, 주성에 해당하는 부분은 군창지와 영일루를 중심으로 하여 그 남쪽 경사면까지를 둘러 싸고 있는 약600m이다. 군창지를 포용하고 있는 산성에 이어서 반월루에 이르는 지역에 또 하나의 테뫼식 산성이 확장되어 쌓아졌다. 또 다시 산성과 연이어 군창지 동측과 반월루에서 사자루를 향하여 북쪽으로 산성이 골짜기를 감싸며 포곡식(包谷式: 성의 내부에 낮은 분지가 있는 형식)으로 부소산을 둘러 쌓았는데 그 둘레는 약 1.5km에 이른다. 이처럼 전체의 구성은 복잡하지만 성벽의 축조는 잡석을 적심석으로 채우고 거죽은 흙으로 덮는 방법을 택하여 돌과 흙을 섞어 쓴 토석혼축(土石混築)법을 채용하고 있는데 이를 토성이라 한다. 축성의 구체적 방법을 보면 성벽 안쪽의 흙을 파서 성내 벽쪽에 호(壕)를 만든 한편 그 파낸 흙을 성내벽에 보축하였으며 기타 부족한 흙은 다른 곳에서 가져다 성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의 바깥 벽면은 기반토를 마치 판축(版築)하듯이 황색사질토와 적색 점질토를 겹겹이 다져 놓았다. 그위에 돌을 3∼5단으로 쌓고 흙을 덮었다. 이런 방식으로 축조된 산성의 입지는 경사면이어서 원래의 경사도보다도 더욱 가파른 경사를 이룰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이 산성의 아래 너비는 7m가량이며 높이는 대략 4∼5m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1년의 사비성 복원작업시 토성의 단면을 자른 결과 대개 아래로부터 A·B·C·D의 4층을 확인하였는데, 맨 아래층인 A층은 붉은색의 진흙으로 판축하여 하부를 축조하였고 층의 높이는 1.9m이다. B층은 황갈색토층으로 이곳에서는 연질의 백제시대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 C층은 황갈색사질토로 판축기법을 사용하여 두께3∼6cm로 축조되었는데, B층의 바깥쪽 경사면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수축된 것으로 보인다. 맨 위층인 D층은 조선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부소산성이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수축·개축을 거치며 사용된 이용편년을 증명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성벽의 높이는 내면의 높이가 7.6m, 외면 높이가 3.4m, 너비는 8.6m이다. 한편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표고106m의 사비루(泗泌樓) 부근의 산봉우리 중심으로 약700m의 테뫼형 산성이 있는데 50×50cm 70×60cm의 백제시대 초석이 많이 산재해있다.
한편 부소산성에서 특징적인 것이 북쪽의 백마강을 자연의 방어벽으로 삼고 외성과 내성을 두어 2중 방어벽을 구축하여 도성적 기능을 지닌 성과 함께 나성도 현존되어 있다는 점인데 부소산성에서 시작해 동서에서 사비 고을을 감싸안 듯 나성이 토성을 감싸고 있다. 이 나성은 약 8㎞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쪽으로 둘러쳐진 나성의 잔편이 지금 능산리 절터 옆에 완연히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성의 통과범위는 동쪽으로는 부소산성과 청산성을 거점으로 연결한 후 석목리를 경유하여 남쪽의 백마강변까지 달리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부소산성과 연결되어 백마강 대안의 낮은 구릉지대를 따라 성말리에 이르렀다. 이 나성도 성왕의 사비성 천도 시기를 전후하여 축성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6세기 초에 이루어진 궁성의 외성이라 하겠다. 이러한 부소산성의 동·서·남·북에는 각각 문으로 추정되는 터가 남아 있고 초석도 보이는데 이 중 남문으로 추정되는 건물터는 문루형식의 건물이었으며 그 양옆에 석축이벽이 남아 있었는데 여러번 증수와 개축을 했음을 알 수 있고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 백제에서 고려시대까지 문이 있었다는 것도 알수 있었다. 그리고 북문지는 물을 빼는 수구를 겸하였던 것으로 생각되고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대형철제 자물쇠가 발견되어 문지였음을 입증해주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부소산성은 유사시에는 도성 방어의 거점으로,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궁성의 궁원으로 이용되어 왔는데 성내에 분포된 유적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성내에는 절 이름이 전하지 않는 부소산 서복사지·영일대지와 삼충사·영일루·군창터와 사자루·낙화암과 백화정·고란사 등 기타 대소의 건물지와 많은 유적과 명소가 분포되어 있다.
1) 사비문
사비문은 사적 제5호로 지정된 부소산성의 정문으로 주차장 관광안내소 뒤에 있다. 이 문은 1986년 11월 건립된 70㎡규모의 목조건물로 팔작(八作)지붕 3간, 측면 2간의 건축양식으로 되어 있다.
2) 삼충사(三忠祠)
삼충사는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부소산에 들어서서 바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보인다. 이 곳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망할 때 많은 충신 중 성충(成忠)·흥수(興首)·계백(階伯) 세분을 모셔 제사지내는 사당이며 1957년에 그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처음 세웠고 1981년에 지금처럼 대대적으로 만들었다. 외삼문·내삼문·사우로 구성된 삼충사는 깨끗하게 잘 단장되어 있는데 사내에는 삼충사기가 있으며 매년 가을이면 백제의 고도 부여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정성을 모아 제물을 차려놓고 제를 올린다.
3) 영일루
삼충사 옆에 있는 영일루는 사비성의 동대가 되는 영일대가 있던 자리로 지금 건물은 당호가 집흥정이었던 이 문루를 고종 8년(1871)에 당시 흥산군수 정몽화가 건축한 것을 1964년에 부소산성내의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여 영일대가 서있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부소산의 동쪽 산봉우리이니만큼 아침 해뜨기를 보기에 안성맞춤이어서 '해 맞는 곳'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이 명칭에 대해서 유홍준씨는 가람과 육당의 기행문에만 해도 분명 '달맞이대' 즉 '영월대(迎月臺)'라고 되어 있는데 어느 순간에 왜 '해맞이'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하기도 한다. 아무튼 영일루에 올라서면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이는데 여기에 옮기는 과정중에 백제시대의 초석과 기와편들이 다량 출토되어 백제시대의 영일대지인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영일대는 백제 임금이 매일같이 아침일찍 일어나 여기에 올라 동편 멀리 계룡산 연천봉위로 솟아 오르는 아침 해를 맞으며 국정을 계획하였다는 곳으로 당시의 영일대는 그 규모나 구조가 웅장하고 거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일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획된 2층 누각건물인데 다른 아문에 비해서 그 규모가 비교적 크다. 현재는 농경지로 변모되었지만 월함지라는 널찍한 연못이 있고, 이 연못의 북편이 되는 청산성 아래에는 여산정이라는 화려한 정자가 있어 월함지에 이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백제 특유의 조경시설과 잘 어울린 자연경관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 영일루라고 할 수 있다.
4) 군창터
영일루 아래쪽 너른 터에 철책을 둘러싼 군창터가 있는데 백제시대때 군수물자를 비축했던 창고 유적지이다. 지금은 잔디를 심어 놓았지만, 땅속을 파면 불에 검게 탄 쌀이나 보리, 콩이 나온다고 하는데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저항하던 백제군이 군량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 1915년에 한 초등학생이 칡뿌리를 캐다가 처음으로 발견했다니 땅속에 묻힌지 1250년 만에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군창터 옆에는 움직 두 채가 있어 이채로운데 이것은 백제 때 군인들의 움막을 발굴 복원해 놓은 것이다. 1m가 못 되게 움을 파고 사방에 벽을 두른 뒤 지붕을 얹은 모습인데 가운데 화덕에서 나는 연기를 빼려고 환기창을 달아 놓은 것이 재미있다. 바로 옆에 본래 움집터를 발굴한 곳은 현대식 건물을 지어 놓고 볼 수 있게 했다.
5) 반월루
반월루는 백마강(白馬江)이 반달모양으로 끼고 도는 부소산 남쪽 마루에 있으며 부여 시가지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6) 궁녀사
백제 의자왕 20년(660)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던날 삼천궁녀들은 적군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낙화암에서 꽃처럼 떨어졌다. 이러한 삼천궁녀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세운 사당이다. 이 사당에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여성의 귀감이 되고 있는 백제여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7) 사자루(泗疵樓)
부소산의 서북편 제일 높은 봉우리에 1919년 부여 군수 김창수씨가 부여군 임천면 소재지에 있던 옛날 임천군의 문루인 개산루를 뜯어다 옮겨 짓고 사자루라 이름지어 오늘에까지 보존되고 있다. 현판 '백마장강(白馬長江)'의 시원하고 힘찬 글씨는 근대 서예의 한 봉우리인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쓴 것이다.
사자루가 세워진 자리는 본시 송월대(送月臺)혹은 영월대(迎月臺)의 옛터로 전해 오는 곳이며 영일루와는 반대로 달을 보내는 곳이다. 이 곳에는 백제 시대의 주춧돌, 장대석 등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시대의 개와편들이 무수히 발견되고 있어, 원래의 송월대의 건물규모는 현재 사자루와는 비교할 수 없이 웅장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 백화정과 낙화암
부소산 서쪽 또는 사자루 바로 아래쪽으로 가면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육모지붕의 백화정이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정자는 백마강 강바람에 땀을 식히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백화정 바로 아래쪽에 낙화암이 있는데 사비가 나당 연합군의 발 아래 유린될 때에 3천 궁녀가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삼국유사》백제 고기에 의하면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를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 즉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었는데, 뒷날 패망의 멍에때문에 이렇게라도 최후를 미화하고 싶었던 것임에 분명하다.
9) 고란사(高蘭寺)
고란사는 부소산 북쪽 기슭 백마강변에 있는 사찰로서 고란초와 고란약수가 유명하다. 고란사의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서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사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皐蘭寺)라 불리게 되었다. 고란사에서 유명한 고란초는 이곳 고란사를 제외하고는 부여 근방에서는 자라지 않는다고 하며 겨울철에도 얼어죽지 않고 서른해에서 쉰해쯤 산다. 전해지는 말로는 백제의 임금들이 늘 이곳 약수를 마셨는데 물 한 사발을 올릴때에 반드시 고란초 한잎을 띄웠다고 한다. 고란약수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마셨다고 하여 어용수라고도 불리는 약수인데 바위 절벽 좁은 터에 가면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물을 한번 맛보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북적하다고 한다. 현재 고란사 건물은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는데 1959년 고쳐 지을 때 대량 밑에서 고란사 상량문이 나왔는데 이에 의하면 정조 21년(1797)에고 고쳐 지은 사실이 있는 건물이다. 또 그 이전으로 올라가는 상량문도 있었다고 하나 종이가 삭아서 판독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현재는 대웅전 좌측에 요사채가 있고 우측으로는 범종각이 위치하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규모가 비교적 큰 불전건물인데 좌측 2칸을 요사로, 나머지 5칸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고 후면 중앙부분에 긴 불단을 조성하였다. 부소산에는 절터의 흔적은 많으나 지금 현존하고 있는 절은 고란사밖에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부여의 팔경은 다른 지방에서 내세우는 경치와는 좀 다른, 어떤 자연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물과 어울려 애틋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을 칭하는데 백제탑의 저녁노을,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봄날 백마강가 아지랑이, 고란사의 은은한 풍경소리, 노을 진 부소산에 간간이 내리는 부슬비, 낙화암에서 애달프게 우는 소쩍새, 백마강에 고요히 잠긴 달빛,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떼, 규암나루에 들어오는 돛단배가 그것이다. 이 중 수북정, 고란사, 낙화암이 부소산에 있고 다른 네 가지도 부소산에서 내려다 볼수 있는 풍경들이니 부소산은 부여팔경을 다 누릴수 있는 멋진 곳이라고도 하겠다.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1. 신동엽의 출생 및 성장
1930. 8.18. 충청남도 부여(扶餘)읍 동남리에서 농사를 짓던 부친 신연순과 김영희 사이에서 1남 4녀중 장남으로 출생. 부여초등학교 졸업(1943)후 가계형편으로 국가에서 숙식과 학비를 지원한 전주사범학교 입학. 졸업반이던 1948년 동맹휴학으로 학교가 쉬자 고향으로 가있다 곧 고향 부여 부근의 국민학교 교사로 발령받음. 부임 3일 만에 그만두고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1949). 1950년 6.25발발후 고향으로 가 당해 9월 말까지 부여 민족청년회 선전부장으로 일하다 국민방위군에 징집됨. 졸업(1953)후 제1차 공군 학도간부후보생에 지원 합격후 발령을 받지 못한채 고향에서 대기하다 환도령과 함께 서울로 감. 성북구 돈암동에 자취방을 얻고 친구의 도움을 받아 돈암동 네거리에서 헌책방을 열어 생활. 이 때 이화여고 3년이던 부인 인병선(부친(인정식)은 농촌경제학 권위자이자 동국대교수로 전쟁때 납북됨.)을 만남. 결혼(1957)후 고향으로 낙향, 부인이 부여읍내에 양장점을 열어 생활하다 충남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부임. 1958년 말 각혈후 폐결핵을 앓아 학교를 사직하고 서울 돈암동 처가에 아내와 자녀를 올려보낸뒤 고향 부여에서 요양하며 독서와 문학습작에 몰두하며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를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1959), 입선됨. 1960년 건강을 회복하고 서울로와 '교육평론사'에 취업한 뒤 성북구 동선동에 터를 잡음. 1960년 4.19의거를 체험하고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하며 4.19 혁명에 동참. 1961년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로 교편생활을 하며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 이수(1964). 간암으로 사망(1969. 4. 7). 부여읍 능산리 고분근처 야산에 묻침. 부여읍 백제대교 부근에 신동엽시비(산에 언덕에)가 건립됨.
2. 활동 및 작품경향
조선일보 신춘문예(1959)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가 입선(가작)되면서 본격적인 활동 시작. 1966년 시극 <그 입술에 파인 하늘>이 국립극장에서 상연됨. 시집 [아사녀](1963), 서사시 <금강(錦江)>(1967)을 발표. 아사녀(阿斯女)의 사랑을 그린 첫 시집 [아사녀(阿斯女)]에 <진달래 산천(山川)>, <그 가을>, <내 고향은 아니었었네> 등을 발표하였는데, 민족의 전통적인 삶의 양식이 역사의 격변으로 붕괴되고 있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고 있다. 그의 언어는 역사와 현실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민중적 이념을 구현하는 데에 모아진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시적 신념이 장시 <금강(錦江)>에서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강렬한 민중의 저항의식을 동학혁명이라는 역사적소재를 통해 형상화 한 <금강(錦江)>은 동학혁명에서 그 시적 주제를 찾고 있으며 동학 이후의 민족의 수난사를 내용으로 삼고 있는 장시이다. 시적 진술 자체가 허구적인 서술자의 존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이 작품은 그 내용의 역사성과 서사적 요건으로 인하여 서사시적 골격을 지니게 된다. 서정적 세계에서 서사적 세계로의 전환을 모색한 신동엽은 역사적 현실성에 대한 인식을 구체화하기 위해 동학혁명의 방대한 내용을 시적 형식으로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역사의식과 현실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내용의 역사성과 서사적인 요건으로서의 객관적인 거리의 문제, 시적 주제의 전개방식의 불균형, 어조의 변화문제 등을 드러내는 미숙함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을 민중혁명으로 승화시켜 근대한국민중사의 운동의 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요저서로 [삼월(三月), [발], [껍데기는 가라]. [4월은 갈아엎는 달], [주린땅의 지도원리(指導原理)], [우리가 본 하늘] 등이 있고 이 밖의 장시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여자의 삶> 등이, <시인정신론(詩人精神論)>, <시와 사상성> 등 평론 10여 편이 있다. 시극(詩劇)운동에도 참여하여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이 시극동인회에 의해 상연되었다. 유작으로 통일을 기원하며 쓴 [술을 마시고 잔 어젯밤은]등이 있으며 [신동엽 전집]이 발간(1975)되었다.
금강’의 시인 신동엽의 부여, 금강]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시인은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필생의 역작인 장편서사시 금강에서 이렇게 항변조로 말했다. 백제의 고도, 부여. 부여에서 나고 자란 신동엽 시인은 서울에서 대학 재학 중 6·25가 터지자 고향마을에 내려온다. 이어서 그는 1년여에 걸쳐 부여 일대의 백제 사적지와 금강을 따라 이어지는 갑오농민전쟁의 사적지를 답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때의 답사기에서 마음에 남은 감회들이 후일 그의 시편에 고스란히 살아난다.신동엽 시인이 고란사와 낙화암, 백제탑 그리고 백마강 강변에 서서 본 하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신동엽 시인의 생가는 부여읍 동남리 계백 장군의 동상이 서있는 사거리의 한 주택가인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다. 기와집의 마당에는 수국줄기와 장미나무 대추나무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시인은 이 집에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고 결혼도 했다. 그리고 백마강을 오가며 시심을 가다듬었다고 전해진다. 집에서 나와 백제대교 못미쳐 있는 신동엽 시인의 시비를 둘러보고 시인의 행적을 따라 백마강변의 부소산을 찾는다.
부소산에 걸어 오르는 길에는 푸른푸릇 이제 움이 트고 있는 새싹에서 봄기운이 완연하다.시인은 이 길을 오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부소산매표소를 지나면 길은 낙화암과 고란사로 이어진다. 낙화암은 부소산 서북쪽 강변의 단애.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패망한 뒤 3000궁녀가 떨어져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시인은 자신의 시편에서 이렇게 말한다.백마강변의 고란사. 은은한 풍경소리가 백마강의 잔잔한 흐름과 어우러져 평화로움이 넘친다.
일설에는 3000궁녀는 궁녀가 아니라 대부분 쫓기고 쫓기던 병사와 민초 民草들이다. 3000궁녀 전설이란 패배한 의자왕義慈王의 사치와 방탕을 강조하려는 교묘한 각색이라는 주장이다. lk
수면으로부터 40m에 이르는 낙화암의 절벽 위에는 1929년에 지은 백화정이 서있다. 백화정에 서면 푸른 강물이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 흰 모래톳이 곱게 펼쳐져 있다. 멀리 시선을 던지면 구룡평야를 적시며 유유히 흘러가는 강줄기가 아스라하게 이어진다.
흔히 부여8경하면 백제탑의 저녁노을, 봄날 백마강 아지랑이, 고란사의 풍경소리, 부소산에 내리는 부슬비, 낙화암의 소쩍새, 백마강 달빛, 구룡평야의 기러기떼, 규암나루의 돛단배를 말한다. 그중 수북정, 고란사, 낙화암이 부소산에 있고 다른 네 가지도 부소산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풍경들이다.
신동엽 시인은 이런 글을 남겼다.
어느 해 /여름 금강변을 소요하다 /나는 하늘을 봤다 //빛나는 눈동자 //너의 눈은 밤 깊은 얼굴 앞에 /빛나고 있었다.
백마강 언덕에 올라 시인이 내려다본 강변에는 호젓하고 평화로움 너머 역사의 애환이 담겨 있지 않았을까. 그 강에서 시인은 1884년의 동학농민혁명과 1919년의 기미독립운동을 1960년 4월혁명의 함성을 들었던 것은 아닐까.
고란초와 약수로 유명한 고란사는 낙화암으로부터 약 200여m 떨어진 강기슭에 있다. 강변이 지척이다. 고란사 강변은 구드래나루터에서 출발한 유람선이 경유하는 선착장 역할도 한다.
부소산에는 백제 성왕이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2.2㎞의 산성이 남아있다. 백제가 남긴 성城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방어를 위한 성이라는 사실이다. 부소산성도 마찬가지다. 평화를 지향하는 백제인들의 삶의 원리를 엿볼 수 있다.
첫댓글보석과도 같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자세히 읽어보며 답사 못 가는 한(?)을 얼마간 풀었구요... 신동엽 생가와 시비는 언젠가 다녀왔었는데 부여군에서 잘 관리하고있더군요. 신동엽 시인의 미망인 인병선은 '짚풀박물관' 운영하시는 분이시죠. 대장님, 잘 다녀오세요^*^
첫댓글 보석과도 같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자세히 읽어보며 답사 못 가는 한(?)을 얼마간 풀었구요... 신동엽 생가와 시비는 언젠가 다녀왔었는데 부여군에서 잘 관리하고있더군요. 신동엽 시인의 미망인 인병선은 '짚풀박물관' 운영하시는 분이시죠. 대장님, 잘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