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욱(李煜)-우미인(虞美人)
春花秋月何時了(춘화추월하시료) 봄꽃과 가을 달 언제쯤 다하려나
往事知多少(왕사지다소) 지난 일이 너무나 그립구나
小樓昨夜又東風(소루작야우동풍) 작은 누대에 어젯밤 또 봄바람 불었는데
故國不堪回首月明中(고국불감회수월명중) 밝은 달빛 아래 차마 옛 땅으로 고개 돌릴 수 없었네
雕欄玉砌應猶在(조란옥체응유재) 조각한 난간 옥섬돌은 아직도 그대로인데
只是朱顔改(지시주안개) 아름답던 얼굴만 세월 따라 변했구나
問君能有幾多愁(문군능유기다수) 얼마나 많은 수심을 품었는지 그대에게 묻노니
恰似一江春水向東流(흡사일강춘수향동류) 봄 강물이 동쪽으로 흐르는 만큼이려나
*이욱[李煜, 937. 8. 15~978. 8. 13, 자(子)는 重光(중광), 號(호)는 鐘隱(종은)]은 오대십국시대의 10국(十國) 중에 하나인 남당(南唐)의 제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촉한의 마지막 황제 유선과 함께 후주(後主)라고 불린다.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이 송나라를 건국하고, 세력을 확대해오자, 이에 겁먹은 이욱은 당제국에서 강남국(江南國)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가 아닌 '국주'(國主)를 자처했으나, 조광윤에게 나라가 멸망당했다. 남당이 망한 후 개봉에 끌려와서 살다가 송태종(宋太宗) 재위 기간, 생일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우미인'이란 위 사(詞)를 지었다가 이에 격노한 송 태종에게 독살당했다. 황제로서의 능력은 실격자로, 국정을 제대로 살피는 것보다는 문학 작품을 짓고 부르는 데 더 열중했다. 때문에 시인으로서는 일류급이었지만, 황제로서는 삼류라는 평가조차 과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황음무도하거나 자신의 취미를 위해 백성을 혹사시키거나 가혹한 징세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욱이 사망한 것을 들은 옛 남당 백성들이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 예술가 황제로 송휘종 조길과 함께 이름이 높고, 예술 때문에 나라를 망친 황제로 또 함께 이름이 높다. 남당의 수도인 금릉성이 포위된 마당에도 문학 작품을 짓고 노래부르는 데 열중할 지경이었으니... 실제로 그는 시문에 조예가 깊고 서화(書畫)와 음률에 정통한 만능 예술인이였다. 그러나 송 휘종이 천부적인 예술가적 재능을 지닌 황제로서 자기 취미를 위해 백성들을 혹사시킨 반면에, 이욱은 자기 취미를 위해 혹독한 징세를 하거나 백성을 동원시키지 않고서도 예술적인 면에서 일대 종가를 이루어 송대 문학가 4인방을 꼽으면 꼭 들어갈 정도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래서 당대 서적에서도 황제로 태어나지 않고 문학가로 태어났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언급된다. 송나라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송대 문학가 4인방에 들어갈 정도로 문학에 있어서 독보적인 경지를 구축했는데 그중 '사(詞)의 명인으로 유명하고, 훗날 송나라에서 태동하게되는 송사(宋詞)에도 큰 기여를 했는데, 위 작품은 후기에 지은 사이다.
*위 사(詞)는 “나무위키”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