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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감독
예술가
배우
이들은 모두 사회적으로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역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거짓말을 하고,
바람을 피우고,
후회하고,
또 반복합니다.
홍상수는 이들을 영웅도 악인도 아닌 매우 평범한 인간으로 그립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모순적인 존재다."
그런데 "당위는 없다"는 말은 위험하지 않을까?
맞습니다.
철학에서도 이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해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 된다면
논리적으로는
사기쳐도 되고
폭력을 써도 되고
약속을 안 지켜도 되고
라는 결론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당위를 버리면서도
윤리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실존주의의 답
장폴 사르트르는
신도 없고
절대적인 윤리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핑계 댈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도 비슷하다.
불교에는
신이 명령하는
절대 윤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아라."
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행동은
결국
자신과 타인의 괴로움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한 행동은
의무라기보다
지혜로운 선택이 됩니다.
홍상수는 방종을 긍정할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흥미롭게도
홍상수 영화에서
방종한 인물들은
대부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관계를 망치고
어색해하고
침묵하고
혼자 남습니다.
즉
영화는
방종을 응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도덕적 심판을 유보할 뿐입니다.
관객이
스스로 판단하게 합니다.
오히려 그의 영화가 묻는 것은
"왜 그렇게까지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가?"
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좋은 부모여야 하고
좋은 배우자여야 하고
성공해야 하고
남들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라는 당위를 너무 많이 안고 삽니다.
홍상수는
그 가면을 벗겨냅니다.
하지만
가면을 벗는 것과
무책임하게 사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윤리의 방향이 조금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윤리가
"남이 시키니까."
였다면
현대는
"내가 선택하니까."
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면 안 된다."
를
부모가 시켜서 지키는 것과
스스로
신뢰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지키는 것은
같은 행동이라도
전혀 다른 윤리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질문에 제 답은 이렇습니다.
당위가 사라지면 방종으로 갈 위험은 분명 있습니다. 역사에서도 모든 규범을 부정하는 허무주의는 때때로 그런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당위만 남아 있는 사회도 위험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원래 그래야 하니까"라는 이유로 살아가게 되면, 규범은 쉽게 타인을 억압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당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당위를 외부의 명령에서 자신의 성찰로 옮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홍상수 영화는 흥미롭습니다. 그의 인물들은 종종 사회적 규범을 어기지만, 그 대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죄책감, 어색함, 관계의 균열, 자기기만이 끊임없이 따라다닙니다. 영화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를 말하기보다, "규범을 벗어난 뒤에도 결국 자기 자신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당신이 앞에서 이야기했던 불교의 윤회와 연결해 보면, 이 지점이 더 선명해집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인 욕망과 사회적 강박 모두를 의식적으로 바라본 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그 자유는 방종과는 닮은 듯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합니다.
첫댓글 홍상수는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