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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이 되자 비로소 조항 내용대로 형무소에 있었던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기 시작했다. 그 때서야 경성(서울)시민들은 어제 방송이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방송인줄 알게 되었고, 해방을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시민들은 계동에 있는 여운형의 집에 몰려가 연설을 해달라고 요구하였고, 몽양 여운형은 집 바로 뒤에 있는 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해방을 맞이하는 연설을 했다.
조선민족의 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에 원등(엔도 류사쿠)이가 나를 불러가지고 '과거 두 민족이 합하였던 것이 조선에게 잘못 됐던가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날 나누는 때에 서로 좋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
오해로 피를 흘리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민중을 지도하여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다섯 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
우리 민족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 이상적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는 개인적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연합군 군대가 입성할 터이며, 그들이 오면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럼이 없이 하자.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시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는 통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문화 건설에 백두산 밑에서 자라난 우리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대학·중학생의 경비대원이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연설도중에 '소련군이 서울역에 온다'는 소문이 나돌아 수많은 시민들이 연설 도중 청중들 사이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청중의 일각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여운형은 연설을 이어나갔으나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은 순식간에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이에 흥분한 군중의 일부가 아우성치면서 교문 밖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여운형의 이날 연설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기록으로 전하는 연설문도 반 토막 밖에 읽지를 못했다.
연설이 중단된 원인은 흔히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조선 사람들의 습격을 두려워한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전향자들을 동원해서 벌였던 공작이었다.
황골에 해방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16일 오후에 소문으로 전해졌고, 그날 저녁 재운 광상 제광을 비롯하여 재덕이 천석이 태환이 제우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모여서 몇 개 남지 않은 꽹과리 징 북과 장구를 치면서 작은 큰 황골로 작은황골로 황골로 속실로 돌면서 해방의 기쁨을 전했다.
저녁 무렵 별안간 신나는 농악 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이 웬일인가 하여 나왔고,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사람들은 너도 나도 나와서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밤늦도록 농악 소리와 만세 소리가 이어졌다.
다음날 조반을 마치고 젊은이들은 다시 모여서 농악을 울리며 동내를 다시 돌기 시작 했고 너도 나도 웃으며 싱글벙글 거리며 만세를 부르며 기쁨을 만끽하기를 사흘이나 이어 졌다.
그러나 8월16일에 벌써 소련군이 청진을 점령하고, 20일에는 원산 22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8월 22일 오전 10시, 우키시마마루 호는 조선인 7000여 명을 태우고 일본 북동부의 아오모리 현 오미나토 항을 출항해 부산 항으로 향했다. 도중인 24일, 돌연 방향을 틀어 교토 부 마이즈루 항으로 기항하는 중에 폭발과 함께 침몰하였다.
고의적인 폭발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대형 군함이 기뢰에 의해 순식간에 침몰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가 어렵다.
공식적으로는 사고 당시 한국인 3,725명과 일본 해군 승무원 255명이 타고 있었으며, 이 중 한국인 524명과 일본 해군 25명 등 549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실종되었다고 발표되었으나, 사망자가 5000명을 넘는다는 자료도 있다.
희생자와 유족들이 1992년 일본 법원에 국가의 배상청구 소송을 제소하였다.
2001년 8월 23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일본 정부의 안전 배려 의무 위반을 이유로 생존자 15명에게 1인당 300만 엔의 위로금 지급 판결을 내렸으나,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요청은 기각했다.
그러나 이 판결마저 2003년,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번복되어 원고패소판결을 내렸다.
아직까지 이 사건의 진상조사나 일본 정부의 사과나 배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8월28일 호치민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다음날 미군이 일본 본토에 진주를 했고, 9월2일 오전 10시 30분 도쿄만에 정박 중인 미주리호(USS Missouri BB-63) 함상에서 일본에 시게 미츠外相과 우메즈참모 총장과 연합군은 연합군 최고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외에도 미국 대표, 중화민국 대표, 영국 대표, 소련 대표, 호주 대표, 캐나다 대표, 프랑스 대표, 네덜란드 대표, 뉴질랜드 대표가 서명했다.
갈은 날 베트남은 프랑스로부터 독립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9월 6일 밤에 경기여고 강당에서 약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 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을 통과시킨 다음 조선 인민공화국(인공) 수립을 선포했다.
인공 형태로 개편시켜 나아감에 따라 9월 7일 건국준비위원회는 '발전적 해소'라는 미명 아래 인민위원회로 각 지역 지부로 개편되었다.
반면에 광복 직후 보수적인 인사들과 지주, 미국과 유럽 유학생 출신들은 각자 정당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16일 원세훈, 이순탁, 조병옥 등은 서울에서 고려민주당을 창당, 8월 28일 김병로, 백관수 등이 서울에서 조선 민족당을 조직했고, 이어 9월 2일 백남훈, 장덕수, 윤보선, 장택상, 허정 등이 한국국민당 등을 조직했다.
이들은 하나의 단결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보고 8월말부터 협상에 들어갔으며 9월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윤보선의 자택인 안동장에서 통합에 합의하고, 같은 날 우익진영의 대표자 82명은 서울 종로국민학교에 모여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 준비위원회 발기총회를 개최했다.
처음에는 송진우, 김성수 등의 명망가를 영입하려 하였으나 송진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우익 여당이 있을 텐데 별도의 당을 창당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라는 권고에 못 이겨 한민당 창당 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9월 7일에는 김성수, 송진우, 서상일등 동아일보사 계열의 인사들은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을 계획하고, 이인, 조병옥 등이 결성한 중경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다음날 명칭을 국민대회준비위원회로 통합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 준비를 계획하는 한편 한민당의 측면지원조직으로 활동하였다.
한민당 창당 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8일 성명을 내고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정권을 참칭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을 단호히 배격한다"고 선언했다.
그날 한민당은 창당 발기인 명의로 '조선인민공화국의 타도' 성명서를 동아일보와 중앙방송국 등에 발표했는데, 그것은 '기미(己未) 이래의 조선 독립운동의 결정체이며 국제적으로 승인된 재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반대, 부인하는 도배(徒輩)가 있다면 이는 3천만 민중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9월7일 미 극동사령부, 38선 이남에 대한 군정을 선포했고, 9월 8일에는 미국군이 인천에 상륙 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9일 조선 총독부 건물에서 아베 노부유키 총독과 미 24군단 하지중장을 비롯한 미군 지휘부 항복문서에 서명을 함으로서 일본의 공식적인 식민지 지배가 끝이 났다.
그리고 그날 미국은 38선 이남에 군정을 실시한다고 발표를 했다.
다음날인 10일 한민당계열 인사인 오긍선이 미군 장교를 접선, 송진우의 한민당을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9월 11일 군정사령관과 미정보참모부(G-2)는 한민당을 대표한 조병옥, 윤보선, 윤치영 등을 만나 한반도 상황을 듣게 되는데, 이들 한민당 세력들은 '건준을 비롯한 인공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 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협력 정치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창당 멤버의 한사람인 조병옥에 의하면 한민당의 주 목적은 건준 타도라고 하였다.
한국민주당은 건국준비위원회를 타도하는 활동과 그 다음 소위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등의 좌익 집단을 성토, 타도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인민위원회의 조직은 지방 방방곡곡으로 뻗쳐 있었고, 조선민주청년동맹이라는 것도 결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조직을 타도하는 것이 한민당의 첫 당면과제였다.
9월11일 경의선 철도가 남북분단으로 운행을 중단 했다.
그리고 9월16일 소련 정치국 38선 이북에 군정을 공포 했다.
같은 날 이미 미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한민당이 천도교 강당에서 1600여명의 발기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었다.
한민당은 창당 선언을 통해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맞이할 것을 다짐하면서 당시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많이받았던 건준을 맹렬히 비난, 공격하였다.
창당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중략)
일본제국주의 의 철쇄는 끊어졌다. 혈 한의 투쟁! 참으로 36년, 세계사의 대전환과 함께 우리는 드디어 광복의 대업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반만 년의 빛나던 역사를 도로 밝혀 완벽무결한 자주독립의 국가로서 구원의 발전을 약속하게 되었다. 3천만 가슴에 뒤끓어 용솟음치는 오늘의 기쁨이여! 이 기쁨은 곧 혁명동지들에게 바치는 감사로 옮겨지고 더욱이 포한종천하신 순국제현에게 생각이 사무치매 도리어 몰래몰래 슬플 뿐이다. 참으로 이 크나큰 광복의 공훈은 해내. 해외의 들 입고 감춰진 무수한 혁명동지들의 혈 한의 결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는 머지않아 해외의 개선동지들을 맞이하려 한다. 더욱이 인방중경에서 고전 역투하던 대한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한 혁명동지들을 생각건대 그들은 두 번 거듭나는 세계의 대 풍운을 타서 안으로 국내의 혁명을 고동하며 밖으로 민족의 생맥을 국제간에 현양하면서 나중엔 군국주의 박멸의 일익으로 당당한 명분 아래 맹방 중,미,소,영 등 연합군에 끼어 빛나는 무훈까지 세웠다. 오늘의 기꺼운 광복 성취가 이 어찌 우연한 바이랴.
우리는 맹서한다. 중경의 대한임시정부는 광복 벽두의 우리 정부로서 맞이하려 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약속한다. 군국주의의루(전쟁보루)를 폭멸하고, 세계평화를 확립시키는 세기적 건설기를 당하여 자주독립을 회복한 우리는 맹방 제국에 최고의 사의를 표하는 한편 국제평화의 대헌장을 끝까지 준수 확충하려 한다.
나아가 우리 민족이 장래할 세계의 신문화 건설에 뚜렷한 공헌이 있기를 꾀할진대 무엇보다도 완벽결한 자주독립국가로서 힘차게 발전해야 될 것이다. 이는 오직 전제와 구속 없는 민족주의 제도 앞에 개로개학으로써 국민의 생활과 교양을 향상시키며 특히 근로대중의 복리를 증진시켜 호말의 차별도 중압도 없기를 기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 국민의 자 반석위에 두고 세계 신문화 건설에 매진하려 한다.
동지여, 모이라! 한국민주당의 깃발 아래로.
강령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국가 완성을 기함
민주주의의 정체 수립을 기함
근로대중의 복리증진을 기함
민족문화를 앙양하여 세계문화에 공헌함
국제헌장을 준수하여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
정책
국민 기본생활의 확보
호혜평등의 외교정책 수립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신앙의 자유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중공주의의 경제정책 수립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국방군의 창설
(하략)
한민당은 정강과 정책을 발표하였다.
정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중공주의 경제정책 수립',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등 경제조항은 사회주의 요소를 강하게 담고 있다.
경제 강령을 만들 당시 허정은 무상몰수를 하든 유상매수를 하든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할 것을 주장했다. 허정은 공산당과 사회주의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인 국유화는 곧 농민들을 소작농화 하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따라서 한민당은 농지에 대해 일부 무상몰수를 포함한 유상매수와 유상매매 또는 분배를 당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이어 한민당은 임정 간부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승만, 서재필, 김구, 이시영, 문창범, 권동진, 오세창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 5인은 아직 해외에 있었고 국내에 있던 권동진과 오세창은 영수직을 수락하지 않았다.
한편 조병옥은 '김규식 박사도 당의 영수로 추대할 것'을 여러 번 건의하였으나 다른 한민당 당원들에 의해 번번히 묵살당했다.
조병옥은 ‘나는 그(김규식)에게 누구보다도 많은 기대를 가졌다’며 많이 아쉬워하였다.
이들 한민당에 입당한 구성원들은 미국, 일본 등 해외 유학파와 그밖에 4분의 2가량이 지주,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들이 핵심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친일파를 직접 대표자로 선출하지는 않았지만 지주와 함께 친일파 세력을 상당수 포섭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민중들로부터 지지기반이 매우 약했다.
그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정국이었지만 추석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황골에서는 젊은이들이 올 추석은 신명나게 만들어 보자고 해서 빨강 노랑 파랑 색의 천을 마련하고 대나무를 사오고 먼지 쌓인 상모를 꺼내어 손질하고 모자라는 소고 몇 개도 돈을 모아 사오고 창호지를 추렴을 해서 고깔을 접고 꽃을 접어서 물감을 들여서 고깔에 붙이고 그럴싸하게 준비를 했다.
그리고 추석날 점심 무렵부터 모여서 농악을 울리며 동내를 돌기 시작했다.
가는 집 집 마다 술과 음식을 내놓고 대접을 하고 좀 살만한 집에서는 풍습대로 쌀을 세말 또는 다섯 말을 내 놓았는데 다 동내 기금이 되었고 젊은이 들은 단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추석이 지나고 가을걷이에 들어가서 열심히 일들을 하고 있었다.
10월 5일 미 군정청은 김성수 등 11명을 군정장관 고문에 임명을 했다.
10월 9일 미 군정청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치안유지법을 비롯한 12개의 악법을 폐지하였다.
10월 10일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설치했다.
10월 16일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왔다.
11월 3일 에는 김구선생이 개인의 자격으로 귀국을 했다.
그리고 제철의 큰딸 근상이가 방학리 도당마을로 시집을 갔다.
그런 가운데 12월 16일부터 미국의 제임스 번즈, 영국의 어니스트 베빈,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첨예한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의견을 조율하여 12월 27일 〈한국 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라는 이름의 합의문을 발표하였다.
이 합의문에서 세 나라는 한반도의 정부수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신탁통치안
1.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 민주정부를 수립한다.
1. 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1. 미, 영, 소, 중 의 4개국이 공동 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 결정서
1.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그 나라를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 을 창조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 하여 조선의 공업, 교통, 농업과 조선인민의 민족문화의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책 을 취할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1. 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의한 방책을 고출하기 위하여 남조선 합중국 관구, 북조선 소련 관구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 다. 그들의 제안 작성에 있어 그 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야 한다. 그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서는 이 공동위원회에 대표를 가진 정부가 최후 결정하기 전에 미, 영, 소, 중 제국정부에 그 짐작에 이바지하기 위 하여 제출되어야 한다.
1. 조선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발전과 또는 조선 국 가 독립의 수립을 원조 협력(신탁통치)할 방책을 작성할 것도 또한 임시 조선 민주주의 정부 및 조선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 공동위원회가 수행할 과업 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개년 기간의 4개국 신탁통치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 영, 소, 중 제국 정부의 공동 짐작에 이바지하도록
임시조선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1. 남북 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제 문재를 고려하기 위하여 또는 남조선 합중국
관구와 북조선 소련군 관구의 행정 경제면의 항구적 균형을 수립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 소 양군 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은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내용의 보도가 있었다.
이 보도가 있고. 한반도에서는 좌익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안에 대한 "총체적 지지"를 표명했고, 우익은 찬탁/반탁의 프레임에 의거하여, 즉 반탁은 애국, 찬탁은 매국이며, 그러한 구도 속에서 반 소련-반공산주의 운동을 전개 되었다.
그로 인해 찬탁파와 반탁파의 갈등이 폭발하여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갈등과 대립이 벌어졌다.
그러한 난국 속에서 12월 30일 새벽 6시 15분에 고하 송진우가 한현우 등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그리고 새해가 되었다.
1월2일 공산당은 모스크바상상회의 결정에 찬성을 결의했다.
1월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고 다음날인 16일에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되었다.
미국측은 아놀드(Arnold,A.V.) 소장이, 소련측은 스티코프(Shtikov,T.E.) 중장이 각각 대표를 맡았다.
이 회담에서는, 시급한 현안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였고, 다만 1개월 이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2월 5일 폐회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황골에서는 설을 맞아 좀 더 멋있는 이벤트를 위하여 아이 다섯을 무동을 태우고 춤을 추는 것까지 준비를 했다.
그리고 상쇄에는 재덕이 맡아서 농악을 지휘 하는 위치에 섰지만 뭔가 조금 더 멋진 구경거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가운데 누군가 열두 발 상모를 돌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아무리 해봐도 할 만한 사람이 없었고 연습에 연습을 해도 성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초빙을 해오기로 했는데 그게 쉽지는 않았다.
그렇게 정월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재운이 단월에 육촌 형 재홍의 둘째 아들 명동이의 결혼식에 다녀오다가 보리올에서 농악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동내가 커서 그런지 황골에 농악에 비할 바가 아니게 잘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열두 발 상모를 돌리는 사람이 둘이나 있어서 장관이었다.
그렇게 농사철로 접어들 무렵 동내 회의에서 열두 발 상모 돌리는 사람을 초빙을 해 오자는데 의견이 모아저서 재운이 보리올에 가서 수소문 끝에 한사람을 만났는데 동내서 머슴을 살고 있어서 우리 동내에 가서 머슴을 살면 세경을 조금 더 주겠다는 제의를 해서 황골로 데리고 오면서 물어보니 나이는 스무 살이고 이름이 차금돌이라고 했고 아직 장가는 안 갔다고 했으며 부모 형제에 대해서 물어보니 증조할아버지가 단월에 살다가 의병에 나가서 행방불명이 되고 할아버지가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지내다 어떻게 아버지를 낳았는데 아버지가 보리올에서 머슴을 살면서 결혼을 해서 자기를 낳았는데, 부모님은 몇 년 전에 돌아가셔서 아무도 없다고 했다.
차금돌을 황골로 데리고 온 재운은 우선 제광의 머슴으로 살게 해 주었다.
재덕도 같은 연배라 자주 어울리곤 했었는데, 이야기 중 큰집이 양평 단월이고 할아버지가 의병에 나갈 때 차지환 이라는 포수와 같이 나가서 제물포에서 차 포수의 마지막 이야기를 할 때 금돌이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었다.
연유를 물어 보니 증조할아버지가 분명하다며 더욱 서럽게 울었다.
그 일이 있고서 재덕과는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3월2인 호치민이 북 베트남 대통령으로 선출이 되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회담의 개시와 더불어 소련측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한국 내 협의대상자의 선정기준으로,
①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할 것,
② 진실로 민주주의적이어야 할 것,
③ 장차 한국을 대 소련침략의 요새지로 만들려는 반 소련 집단이나 인물이 아닐 것 등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 측은 한국인들의 대부분이 모스크바협정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며, 따라서 신탁통치에 반대한다고 하여 협의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맞섰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결국 타협안이 제시되었고, 이에 따라 4월 17일 미소공동위원회는, 협의대상이 될 정당과 단체는 모스크바3상회의 협정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는 선언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미소공동위원회 ‘코뮤니케 제5호’이다.
그러나 그 뒤, 이 선언서에 서명을 하는 것이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 여부를 놓고 미 소간에 논란이 벌어져 끝을 맺지 못하자, 결국 5월 6일 무기휴회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1946년 5월 15일 수도경찰청 청장인 장택상은 '조선공산당 인사들이 정판사에서 약 1천 2백만 원 어치의 위조지폐를 찍어 유포한 사실이 드러났으며, 관련자들을 체포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수사 결과에 따르면 조선공산당 당원이며 일제 강점기 부터 정판사 직원이었던 김창선이 지폐 인쇄판을 미리 훔쳐 갖고 있었는데. 사건의 주범인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인 이관술과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의 지시로 정판사 사장 박낙종, 과 서무과장 송언필이 위조지폐를 인쇄해 유통시켰다는 것이었다.
권오직은 38선 이북으로 달아났고, 이관술은 체포되었다.
조선공산당의 활동 자금 마련과 남한 경제의 교란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경찰의 주장이었고, 조선공산당은 조작 사건이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나자 남한 내 정치세력간의 역학관계는 보다 복잡, 첨예화하여 우익진영에서는 이승만(李承晩) 중심의 단정파와 김구(金九) 중심의 단정 반대파가,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좌익 중심의 미소공동위원회참여파와 우익 중심의 불참파가 나누어져 있었고, 좌우합작을 추진해 온 중간파는 민족자주연맹을 결성, 독자노선을 걷고 있었다.
이러한 속에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위한 시도가 미소에 의하여 행해져, 결국 남한주둔 미군사령관 하지(Hodge,J.R.) 중장과 북한주둔 소련군사령관 치스차코프(Chistiakov,I.) 대장 사이의 서신, 그리고 미국 국무장관 마샬(Marshall,G.C.)과 소련 외상 몰로토프(Molotov,V.M.) 사이의 서신을 통한 장기간의 교섭 끝에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다.
공동위원회가 속개되자 국내 각 정치세력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좌익계와 중간파는 당연히 공동위원회에 적극 참여하였고, 우익계에서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공동위원회 참가는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신탁문제는 임정수립 뒤 민족총의로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공위참가를 결정하였다.
단정운동을 벌이고 있던 한민당(韓民黨)이 이승만의 지시를 거부하고 공위참가를 표명하였다.
이 에 6월3일 이승만 박사가 정읍에서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 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 하여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주기 바란다. 라는 연설을 했다.
반면에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지면서 미군정의 좌익계열 탄압과 공격을 심하게 받던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1946년 6월 23일에 합작 5원칙을 발표했는데,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곧 토지개혁과 정부기능을 미군정에서 인민위원회로 즉각 이양할 것 등을 주장했다.
이는 박헌영이 사실상 미군정을 비롯해 좌우합작세력 등을 전면 거부한 내용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반탁운동을 주도하던 김구의 한독당(韓獨黨)에서도 일부가 이탈하여 공동위원회참가를 표명하여, 이승만과 김구의 추종세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당·사회단체가 공위참가 청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6월 25일까지 공동위원회에 청원서를 제출한 남한의 정당·사회단체 수는 425개, 북한의 정당·사회단체 수는 36개였다.
그러나 남북한 총 461개 정당·사회단체의 회원 수는 7,000만 명이나 되어 당시 인구의 두 배나 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예정대로 공동위원회의 미소대표들은 6월 25일 우선 남한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합동회의를 서울에서 가졌고, 또 공동위원회의 미소대표가 평양에 가서 6월 30일부터 며칠간 본회의를 개최하고, 7월 1일 북한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합동회의를 가졌다.
이처럼 진전을 보이는 것 같았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협의대상문제를 둘러싸고 또다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8월에 들어서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소련 측의 ‘3상회의 결정고수’와 미국 측의 ‘의사표시의 자유’라는 제1차 공동위원회의 대립 점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문제로 인하여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하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8월 중순부터 미군정이 불법 파괴활동을 자행한다는 이유로 남로당 및 좌익계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면서 더욱 악화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미군정은 1946년9월 6일,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 좌파에 우호적이던 3대 진보신문을 강제로 폐쇄하고 10여명의 신문사 간부들을 체포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미군정 군정경찰은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 등 조선공산당 최고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발령하자 박헌영은 영구차를 타고 비밀리에 월북하였다.
이에 소련 측 대표 스티코프는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과 공위업무를 지지해 온 남한의 좌익요인의 탄압은 공동위원회사업을 방해하는 처사”라고 강경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 측 대표 브라운(Brown,W.G.)은 “남한 내정에 간섭하는 것”이라고 반박하며 오히려 북한에 감금되어 있는 조만식 선생을 위시한 우익의 중요인사를 석방하라고 요구함으로써 양측의 대립은 점점 심각해져갔다.
그리하여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회담의 분위기조차 나빠지고 결국은 결렬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진전을 이룰 가능성이 없게 되자 미국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국제연합(UN)으로 이관시켜 버렸다.
그런 가운데 황골에서는 추석을 맞아 농악을 울리고 봄에 보리올서 데려온 차금돌이 열두 발 상모를 돌리면서 농악은 제대로 갖춰진 놀이를 선보이게 되었다.
추석 다음날에는 가정초등학교 운동회가 열렸는데, 깜짝 공연을 해서 가경자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그 다음날 발산초등학교 운동회까지 가서 공연을 해서 가장 단합이 잘 되는 동내가 되어 가고 있었다.
1947년 9월 17일 미 국무장관 마샬은 2년 동안의 미소공동위원회의 노력이 성과가 없었음을 전제하고, “한국문제가 국제연합 총회에 상정됨에 따라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고 한국을 독립시키는 수단이 강구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국제연합 총회 소련 수석대표 비신스키(Vyshinskii,A.Y.)는 “한국문제의 국제연합 상정은 미소간의 협정을 직접 위반하는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마샬의 제안은 9월 21일 국제연합총회 운영위원회에서 가결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해주로 피신했다가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온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신 전술'이라는 전략을 주장하여 보다 더 과격한 성향을 보이면서 대중적인 투쟁을 선동하였고 총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에 주도한 세력은 조선노동자전국평의회(전평)로 첫 파업은 9월 23일 부산지역 7천여 철도 노동자들이 시작했다.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진 철도 파업에는 4만여 철도노동자가 참가했다.
금속, 화학 등 전 산업 분야에서도 15만 노동자가 파업을 벌였다.
이들은 '쌀 배급','임금인상','해고반대','노동운동 자유','민주인사 석방'등의 요구를 내걸고 총파업에 들어감으로써 본격화 되었다.
원인은 해방 후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USAMGIK)기의 남한 내 민중들은 굶주림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이는 미군정의 쌀 배급 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9월 27일에는 서울의 중학교와 전문학교 학생 1만 5천명도 가세하여 학원의 자유,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등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이 파업에는 심지어 남조선 국방경비대(현재 대한민국 육군) 해상경비대(현 대한민국 해군) 일부도 파업에 동참했을 뿐 아니라 서울에는 주한 미군 내의 미국 공산당 당원 수십 명이 '조선에서 미군을 철퇴하라!'며 시위를 벌인 이색적인 사건 등이 벌어졌다.
이 총파업은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이 독단적으로 벌인 것이 아니었다.
공산당의 지령은 총파업에 국한되어 있었다.
미국과의 항쟁을 결의했지만 아직까지 공산주의 운동의 기본 수단인 노동계급의 파업을 설정했을 뿐 폭력 투쟁은 상정되어 있지 않았다.
한편, 이 무렵 9월 27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북로당 중앙상무위원회 제6차 회의는 남한의 노동자 파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그 정당성을 강력히 옹호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미군정 경찰은 9월 30일 총파업의 거점인 서울철도 파업 단에 탱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관 2천여 명을 투입했다.
이어 대한노총(현 한국노총),대한민청, 독촉 등 반공 우파 청년단 1천여 명도 가세했고 김두한의 대한민청 필두로 8시간에 걸쳐 시가전을 벌인 뒤 3명의 간부가 사망하고 부상자가 수백 명에 총 1,700여 명이 연행되었고 우파세력에게 점거되었다.
이 무렵 대구, 경북 일대에 2천여 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자 치료를 위한 조치들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전염을 막는다며 대구를 봉쇄해, 차량은 물론 사람조차 시 경계를 넘을 수 없게 되면서 그 결과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쌀이 부족하여 돈이 있다 해도 쌀을 구할 수 없어 콜레라를 치료하는 의사들조차도 콩나물과 쌀로 죽을 끓여 먹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치안을 위하여 채용된 과거 친일파 출신 경찰들이 일제 강점기 방식 그대로 농민들의 쌀을 강탈하다 시피 공출해갔다.
친일출신 경찰들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매우 커져갔고, 경찰은 이에 대해 보복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져 대구, 경북 일대의 민심은 매우 흉흉한 가운데, 10월 1일 저녁, 대구시청 앞에서 기아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위 도중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황말용, 김종태 라는 노동자가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 날 아침,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2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동자들이 시내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굶주린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도 시위에 합세했다.
만여 명의 군중에 포위된 대구경찰서장은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유치장 열쇠를 건네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하게 했다.
조선공산당 지도부의 통제를 받는 노동자들은 질서 있게 경찰권을 인수하려 했다.
그런데 이때, 거리 한쪽에서 흥분한 군중들이 경찰에 투석을 시작했고, 궁지에 몰린 경찰관들은 군중들에게 총을 난사하여 17명의 시위대가 죽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군정과 반공 우파청년단의 진압으로 겨우 끝날 기미를 보이던 총파업은 이를 계기로 10월 항쟁으로 번져나가게 되었다.
분노한 군중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동향을 살피던 정사복 경찰관들을 구타하거나 경찰 무기고를 털어 총기로 무장했다. 처음에 평화시위로 시작하다가 폭력적 성향으로 돌변하자 일부 젊은 공산당원들은 시위의 선봉에 섰으나 선임 당원들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뒷전에서 이리 저리 뛰어다니기만 했다.
군중들은 부잣집과 과거 친일파들의 가옥을 털어 생필품이나 식량을 가져갔지만, 달아나지는 않고 그것들을 길바닥에 쌓아놓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일반 가게나 은행 같은 곳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경찰관을 집단 폭행하거나 죽인 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일제 때부터 조선인들을 괴롭혀온 친일경찰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대구지역의 의사모임인 대구부의사회는 경찰에 대한 경고문을 발표해 "첫째, 경관은 시민에게 발포를 중지하라. 둘째, 동포에게 발포한 경관 부상자의 치료를 거부한다."며 항쟁에 동참했다.
미군정은 이튿날인 10월 2일 오후 7시 대구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동원함으로서 표면적으로는 질서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미군 개입으로 10월 2일 즈음 되어 잠잠해지는 듯 했으나 주변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시위를 벌이고 봉기를 일으키면서 항쟁은 경북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영천에서는 1만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하고 군수, 경찰, 관리들을 살해하고는 경찰서와 우체국을 방화했다.
(10월 3일) 경찰응원대가 도착해 질서는 회복되었으나 경찰관들과 우익 청년단원들은 봉기 관련자들의 집을 약탈하고 유린했다.
영천에서만 해도 1200여 호의 가옥이 전소, 파괴되었고 사망 40명, 중상자 43명, 피해액 10억여 원의 피해를 입었다.
선산군(현재의 구미)에서는 선동자들이 내려오지는 않았지만 박상희를 주동으로 한 2000여명의 군중들이 구미경찰서를 공격해 경찰서 기능을 마비시키고는 선산인민위원회보안서 간판을 매달아 지역관리에 나서기도 했다.
이들은 경찰, 우익인사들을 감금하고 식량을 나눠주고 부호들의 가산을 파괴했다.
예천군에서는 시위를 막기 위해 미리 경찰들이 파견되었으나 민중과의 충돌로 인하여 실패했고 1000여명의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해 교전까지 벌였으며,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도 질서가 회복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경찰서 공격이 이어져 경찰이 다치고 무기고가 탈취되는 일이 이어져 외곽지역에 경찰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영일군에서는 민중의 공격으로 전도사가 살해당하기도 했다.
칠곡군도 격렬한 항쟁이 발생하였다.
500여명의 군중은 약목지서를 습격해 3명의 경찰을 기둥에 결박시키고는 살해했다.
2000여명의 주민들은 시위와 함께 왜관경찰서를 공격했고 경찰 4명 역시 추가로 피살되었다.
항쟁 전의 왜관지역은 미곡 수집령에 대한 저항이 매우 심했는데 왜관 주민들의 분노가 어찌나 큰지 당시 경찰서장이었던 장석한은 얼굴이 난도질당한채로 머리부터 밑으로 갈라져 살해당했다고 했다.
이 외에도 달성,고령,성주,군위,의성,김천,경산,청도,경주,영덕,안동,상주,문경,영주,봉화 지역에서 항쟁이 발생했고 약 77만 3200여명이 항쟁에 참여했다.
대구를 포함한 경상북도 지역에서만 사망자가 공무원 63명, 일반인 73명으로 총 136명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역시 경북 지역에서만 관청 건물 4동과 일반 건물 6동이 불에 타 전소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체포된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
경북지역의 항쟁은 다양한 강도(미 발생/저 강도/중강도/고강도/최고 강도로 분류)와 방식(선제공격, 경찰서 습격, 장날 이용, 정치이념세력 간의 힘의 균형 이용, 파급이 큰 논농사 지역 이용)을 이용해서 전개되었다.
경남지역은 대구 10.1 사건의 도화선이 되는 9월 총파업이 시작된 곳이지만 다른 지역과는 달리 9월 총파업의 전개는 매우 소극적이고 온건적이었으며 10월 항쟁 때에도 분산적이고 고립적인 항쟁들이 펼쳐졌다.
경남지역에서는 통영에서 최초의 사태가 발생했다.
4000~5000여명의 군중들이 읍내를 장악하고는 경찰을 구타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창녕에서도 여러 지서가 습격당하고 군중의 경찰서, 군청 점령시도가 있었다. 마산에서는 6일과 7일에 거쳐서 군중과 군경 사이의 치열한 충돌로 13명 정도의 사망자를 내었다.
울산지역에서는 면사무소가 파괴되고 경찰서가 포위당했으나 응원경찰과 미군의 도움으로 곧 탈환되었고 군중 일부는 배를 타고 도망하였다.
소극적인 저항을 벌였던 부산에서도 9일에 유혈충돌이 일어나 24명이 목숨을 잃었다.
경상도에서 불붙은 항쟁은 충청도로 옮겨 붙었다.
충청도에서 봉기는 주로 서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다.
충남에서는 17~19일을 기점으로, 충북은 10월 4일과 7일에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10월 17일 당진에서 경찰서가 공격당하고 공공시설 점거, 통신선 절단, 교량 폭파가 일어남을 시작으로 충남 서북부는 항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홍성에서는 쌀과 토지를 달라고 시위를 벌이는 군중을 향해 경찰이 무차별 발포하여 4명이 죽었다.
예산, 선산, 천안에서도 소요사태가 발생해 경찰과 우익세력을 위협했다.
충북에서는 비교적 항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청주에서 경찰 1명이 죽고, 영동에 300~400여명의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으나 실패한 정도였다.
충북지역에서 항쟁이 이렇게 미미했던 까닭은 충북의 중심지인 청주가 온건 성향의 좌익이 꽤 우세했었기 때문이었다.
일부 온건세력은 "극단적인 공산주의자는 용납되지 못함"이라는 전단을 뿌리기도 했으며 실제로 극단주의자를 탈퇴시키기도 했다.
충청도에서 항쟁이 가라앉으면서 경기도와 황해도 지방에서도 소요사태가 터졌다.
경기도 광주에서는 경찰을 살해하고 경찰서를 불태우는 투쟁을 벌였다.
개풍에서는 경찰서장이 피살되고 대부분의 지서가 이틀에 걸쳐서 습격당했다.
파주에서는 폭동이 계획되다가 사전 발각되어 주동자들이 전원 체포되었다.
마침내 서울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
3일 1200여명의 군중이 학생들과 합세해 노래를 합창하며 시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21일 정오에는 2000여명이 종로네거리에 모여 동대문으로 전진했다.
그러나 기독교 청년회관 앞에서 무장경찰대의 집단발포로 해산 당했고 그 부근을 지나가던 권투선수 한 명이 피살당했다.
그 날 종로 5가에도 시위가 발생하고 서울역에서는 폭탄이 터졌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박헌영은 무력시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고, 불필요하게 미군정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며 중단을 촉구했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고, 박헌영은 즉시 서울을 떠나 피신하였다.
그 외에도 인천, 연백, 장단 지역에서도 시위와 습격이 잇따랐고 10월 20일에서 22일 간 항쟁이 발생했다.
강원에서는 횡성에서 수천 명의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했고 묵호에서는 시위를 조사하던 도중 사망자가 나자 주민들이 경찰지서 등을 공격해 다수의 사망자가 또 발생했다. 강릉에서도 경찰이 구타당하고 통신이 두절 됐으며, 평창에서는 무기를 든 좌익세력들과 경찰과의 충돌이 발생했다. 삼척에서는 광산을 이유로 좌우익 간의 소요가 일어났다.
남한 전역을 휩쓸 것 같았던 일련의 사태들은 10월 23일부터 28일까지 약 일주일 가까이 멈추었다.
미군정과 우익세력들은 좌익극단주의자들이 추수기와 군경의 쌀 수집을 기다리고 있고 미군정은 쌀 수집을 할 권리가 없다는 선동에 집중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것은 좌익이 전라도에서 일을 준비해나가는 기간이었다.
그런 이유 탓인지 특히 전남지역은 항쟁 초기의 경북처럼 크고 폭력적이었다.
전라도에서 항쟁은 10월이 끝나갈 때 즈음 시작되었다.
10월 30일부터 화순지구의 광부들은 광주를 향해 행진을 시도했다.
다음 날인 31일에도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대동하여 행진에 나섰으나 별 다른 충돌 없이 미군의 설득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정작 11월 4일에 광부들은 미군과 경찰에 대한 격렬한 저항을 시도했다.
광부와 민중들은 도로와 다리를 막고는 군경이 탄 지프차를 전복시켰다.
그리고 돌과 탄환을 날리며 이들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무안에도 시위가 발생했다.
좌익청년단체원 50여명이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소요가 발생해 7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로에서는 군중이 경찰을 공격했으며, 안성에는 시위대가 철도역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철도경찰과 응원경찰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목포에서까지 학생과 노동자로 구성된 많은 군중들이 파출소를 불태우고 경찰서까지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자, 목포와 무안군 일대에 야간통행금지령이 선포되었다.
광주에서는 파업참여자들이 시위를 벌였고 학생들도 시위를 벌이면서 학교가 휴교당하기도 했다.
광산군 송정리에서는 미군과 대화를 한 한국인이 군중에 의하여 친미파로 몰려 무차별 폭행당했다.
그런가하면 함평에선 군중들이 다른 곳에서 온 선동자들과 함께 경찰과 충돌을 일으켰고, 영광에서도 경찰과의 충돌이 발생했다.
나주지역에서 항쟁은 화순과 함께 전라도 지역에서는 대규모이자 극렬 적이었다.
5000여명의 군중이 나주 진입을 시도하였고 일단의 군중이 총을 쏘는 경찰에 달려들어 10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11월이 되자 8000여명의 군중이 집결해서는 집결하여 진압하려는 미군을 저지하고 각 경찰지서를 공격했다.
그 외에도 보성에서 면장과 마을유지, 우익청년단원들이 공격당하는 일이 발생했고, 벌교, 장흥, 해남, 강진, 영암에서도 11월과 12월에 걸쳐 조그마한 항쟁들이 여러 번 발생했다.
전남의 항쟁이 매우 격렬했던 것과는 달리 전북에서는 오직 남원과 순창에서만 작은 크기의 항쟁이 발생했는데, 전북의 좌익세력이 분열되어 갈등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주에서 신경과민적인 경찰의 발포를 끝으로 대구 10.1 사건은 종말을 고했다.
10월 민중항쟁은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로 확장되면서 경찰력만으로는 진압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각 지역에서 미군과 남조선국방경비대를 비롯하여 한민당세력, 민족청년단, 서북청년회, 백의사 등 반공주의 우파 인사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족청, 백의사, 서북청년회 등 각종 반공주의 우파단체 관련자들이 시위에 가담한 좌파를 체포한다는 명분으로 테러 또는 재산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속출했고, 이를 피해 일부 좌익세력과 민중들은 산으로 피신하기까지 하였다.
이 사건의 정확한 규모는 기록 미비로 알려지지 못하였고, 2차 피해를 우려한 참가자들의 신고도 적어 피해 상황은 명확히 추산할 수 없다.
10월 민중항쟁 참가자의 시각에서 이 사건은 전국적인 규모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한 대중 운동으로, 주도 세력은 조선공산당이며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조직이 활용되었으나, 공산당 선임 간부들은 사태를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몰라 뒷전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만 했었다.
민중항쟁의 근본원인은 일제 강점기의 지배 체제가 그대로 유지된 미군정과 군정청의 식량정책 실패, 가혹한 수매, 미군정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좌익 사냥,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의 권력 복귀 등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게 된 대한 민중들의 분노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0월 항쟁을 주도한 시위대는 미군정의 경제 정책에 대한 반발과 경찰과 같은 핵심 행정기구에 친일파를 그대로 등용한 과거사 미 청산에 대한 반대, 행정과 치안에 인민이 참여하는 인민위원회 설치 요구 등의 주장을 내걸어 민중의 참여를 유도했다.
10월 민중항쟁은 조선공산당의 지도와 영향 아래 발생하였지만, 지역별로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미리 통일적으로 준비되거나 철저히 계획된 사건은 아니었다.
이미 박헌영, 이강국, 이주하 등 간부들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져 일부는 월북하고 일부는 체포되었으므로, 조선공산당의 영향력은 전국 단위의 조직적인 봉기를 일으킬 수 있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북으로 도주한 박헌영은 이 사건을 "'10월 인민항쟁'으로 부르며, '동학농민운동 , 3.1 운동과 함께 조선의 3대 위대한 인민항쟁'이라 평가했다.
실제로 조선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시위를 선동한 적이 없지만, 지역의 공산당원들은 읍면마다 자생적으로 터진 시위대의 맨 선두에 서서 싸우다가 죽거나 감옥으로 끌려갔다.
한편, 우익세력들은 일제히 이 사건을 격렬히 비판했는데, 특히 한국민주당 세력에서는 '이번 파업투쟁은 박헌영 일파의 모략 선동에 기인한 것'이라며 일제히 맹비난했다.
좌익 내부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조선공산당을 제외한 좌익계열 9개 정당 대표들(정백과 이영)은 긴급 회동을 갖고 이번 싸움이 '박헌영의 공산당이 벌인 모험주의'라며 격렬히 비난했다.
좌우합작 세력에서는 양비론을 내세웠는데, 여운형과 김규식은 10월말 미군정청 브라운 소장과의 회담에서 "‘10·1 폭동’이 경찰에 대한 반감, 군정 내 친일파의 존재, 일부 한국인 관리의 부패, 파괴분자들의 선동 탓에 일어났다."고 군정청에 비난을 했다.
이어서 자칭 '대구 폭동'이 미군정의 정책파탄에 따른 한국 민중의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사태를 살육과 파괴로 몰고 간 책임은 ‘신전술’로 과격한 투쟁 노선으로 기울어 잘못된 정책을 채택한 조선공산당에 있다."고 주장했다.
김규식은 '이러한 행동들은 국제적으로 조선 민족의 위신을 떨어뜨려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며 자제를 촉구했다.
1946년 10월 덕수궁 한미공동회담에 참석한 수도경찰청 수도국장 최능진은 "대구 폭동은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에 의한 불행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우리 경찰 내부에도 있다.
국립경찰은 친일경찰과 부패 경찰관들의 피난처가 되었다고 말했다." 당시 10월 민중항쟁의 이유 중에 하나였던 친일경찰의 실태를 자신들의 입으로 증거 한 셈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좌파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9월 총파업에 이은 10월 민중항쟁으로 좌파에 대한 검거는 가속화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풍부한 현장의 투쟁 경험을 얻게 되었고, 경찰과 우파의 탄압를 받게 되면서 좌파의 단결력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도 낳았다.
오늘날, 이 사건을 '폭동'이라는 시각과는 달리 '항쟁'으로 규정하기도 하고, 동학 농민 운동, 3·1 운동과 더불어 한국 역사상 3대 민중 항쟁으로 규정하는 시각도 있다.
북한에서는 "극도의 정치적 무권리와 민족적 불행,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하는 미제의 야만적인 식민지 파쇼통치에 여기저기에서 반기를 들고 나선 남조선인민들의 항쟁"으로 보고 있다.
한편 10월 18일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 제62차 본회의에서 미국 측 수석대표 브라운소장은 국제연합에서 한국문제 토론이 끝날 때까지 공동위원회 업무를 중단하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 측 수석대표 스티코프는 소련 대표단의 서울 철수를 발표하였고, 10월 21일 50여 명의 소련 대표단 일행이 평양으로 돌아감으로서 미소공동위원회는 5개월간의 우여곡절 끝에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휴회 상태로 돌아갔다.
황골에서는 제철의 부인이 18살의 희상과 11살의 남식을 남겨둔 체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작년에 시집간 근상이 내려와서 장사를 지내며 보니 참으로 안타깝기가 그지없었지만 출가외인이고 시집하고 친정하고 거리고 있고 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그해가 가고 새해가 되었다.
설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북의 김일성은 작년 2월에 조직했던 임시인민위원회를 북조선인민위윈회로 개칭하고 본격적으로 정권 수립절차에 들어갔다.
그리고 3월 1일 미군정은 3·1기념 제주도대회가 좌익의 주도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촉구와 조직의 정비라는 목표로 열리게 된다는 것을 알고 시가행진을 허가하지 않고 행사장소도 제주 서 비행장으로 하라고 했지만, 이미 제주북 초등학교 주변엔 좌익이 동원한 남로당,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주주의청년동맹, 부녀동맹, 인민위원회에서 동원한 17,000명의 군중과 기타군중 8,000명 등 총 3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경찰은 제주 경찰 330명과 육지에서 파견된 응원 경찰 100명 등 430명으로 주변 경비 활동을 하였다.
행사를 끝낸 군중은 가두시위에 들어갔는데, 이때에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여 작은 소란이 발생하였다.
기마 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몰랐는지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무장을 한 응원경찰은 몰려오는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걸로 알고 발포하여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서울 남대문에서는 좌우익 세력이 집회도중에 충돌하여 30여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발포사건의 전모를 모르던 미군정 당국은 이 발포사건을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사건을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래 행사 간부와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경무부에서는 3만여 시위군중이 경찰서를 포위 습격하려고 했기에 불가피하게 발포했다고 해명하면서 민심이 들끓었다.
그런 혼란 속에도 북의 김일성은 3월8일부터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하는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들을 국유화를 단행했다.
그리고 남북 간의 상호 접촉이 두절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남과 북 각각의 정치단체들을 단독정부를 수립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확장하기 시작했다.
3월12일 미국대통령 의회에서 자유와 독립의 유지에 노력하며, 소수의 정부지배를 거부하는 의사를 가진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하여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선언 했다.
그 내용은 미국에 외교정책에 관한 원칙으로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내용으로 반공의사를 가진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하여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윤희는 아들을 낳았는데 연동이라고 지었다.
5월 21일에는 덕수궁에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지만, 서로의 입장만 되 풀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7월에 북의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중앙조직위원회 제8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조선신민당과의 강제합당 및 합당 이후 당의 명칭을 ‘북조선로동당’으로 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강행하였다.
합당이 끝나자 공산당과 신민당 대표가 섞인 801명의 대의원으로 제1차 당 대회가 열렸다.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는 1946년 8월 28일부터 8월 31일까지 진행된 북조선로동당의 제1차 당 대회에서는 북조선로동당창립에 대한보고, 당 강령에 대한보고, 당 규약에 대한보고, 당 기관지에 대한보고, 당중앙위원회 및 당 중앙검열위원회 선거 등의 의정이 진행되었으며, 김일성은 ‘당을 강력한 전투부대로 만들기 위한 과업들을 제시’하여 규약에는 ‘부강한 민주주의 독립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가 제시되었다.
9월17일에는 국제연합총회에 한국문제가 정식으로 상정되었다.
9월21일에는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이 4월부터 우익계열을 찾아다니며 설득을 해서 반공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했다.
9월26일 소련은 한반도에서 미소 양국이 동시에 철수 하자고 제의를 했다.
결국 10월 14일 제2차 112번째 국제 연합 총회에서 찬성 43표, 기권 6표로 결의안이 가결됨으로써, 1948년 3월 31일 안에 UN한국임시위원단(UNTCOK;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의 감시 하에 한국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고, UN한국임시위원단은 호주·캐나다·중화민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 공화국 등 9개국 대표로 구성된 'UN한국임시위원단'을 발족시켰다.
10월 18일에는 미소 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이로서, 모스크바3상회의의 협정에 따라 한국의 임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하여 2년간에 걸쳐 개최되었던 미소공동위원회는 아무런 결실 없이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10월, 연합군최고사령부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일본 정부에게 재일조선인을 일본의 교육기본법, 학교교육법에 따르게 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당시 재일본 조선인의 아이들은 전쟁 전·전시의 황민화교육 때문에 조선어를 읽고 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일본 각지에 국어 강습회가 개최되어 한글과 한국어를 아는 사람이 재일 조선인의 아이들에게 독자적으로 제작한 교재로 조선어를 가르쳤다.
국어 강습회는 재일본 조선인련맹(약칭 '조련') 사무소나 공장 철거지, 현지의 초등학교 교사 등을 빌려 열렸다.
그 후 국어 강습회는 조선인 학교로 개편되어 갔다.
이 학교는 전국에 500여개, 학생 수는 6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새해가 되었다.
1월7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방한을 해서 정부수립을 할 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위원단은 1월 12일 서울 덕수궁에서 첫 총회를 가지고 그들의 임무에 착수 하였으나, 1월24일 동 위원단의 38선 이북 진입이 소련군정당국에 의해서 거부되자 유엔소총회에 이를 보고하였다.
유엔소총회는 2월 26일 동 위원단이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해서 그 과업을 계속 할 것을 결정하였다.
1월 24일, 일본 문부성 국장은 각 도 도부 현 지사에 대해 〈조선인 설립 학교 취급에 대해서〉라는 통지를 내려 조선인 학교를 폐쇄하고 학생을 일본인 학교로 편입시키도록 지시했다.
이것이 조선학교폐쇄령이다.
오사카부와 효고현은 이에 근거해 조선학교의 폐쇄를 명령했다.
1월 27일, 조련은 제13회 중앙위원회를 개최해 조선 학교 폐쇄령에 대해 반대를 밝혔으며. '3·1 독립운동투쟁 기념일'에 맞추어 민족 교육을 지키는 투쟁을 전국에서 전개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2월 5일에 군정장관 A.L. 러치가 미군 철수 설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틀 후 남로당의 단선반대 구국투쟁위원회가 지휘한 노동자 파업을 중심으로, 전기 노동자들이 송전을 중단하고 철도 노동자들은 철도 운행을 중지하며 통신 노동자들은 통신 설비를 파괴하는 방식을 통해 미군정을 압박했다.
이에 호응한 농민들의 가두시위와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더해졌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 조선의 분할 침략 계획을 실시하는 유엔 한국 위원단을 반대한다.
1. 남조선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1. 양군 동시 철퇴로 조선 통일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 인민에게 맡기라.
1. 국제 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 등친일 반동파를 타도하라.
1. 노동자, 사무원을 보호하는 노동법과 사회 보험제를 즉각 실시하라.
1. 노동임금을 배로 올리라.
1.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1.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라.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서울에서는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고 시내 주요 공장의 노동자들도 파업에 돌입했다. 남대문과 영등포 지역에서도 수 십 차례에 걸쳐서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부산은 부두 노동자들과 선원들의 파업으로 부산 일대의 해상교통이 일제히 마비되는가하면 전차 운행도 중지되고 4500여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밀양에서는 2월 7일 이른 아침에 농민들이 지서 두 곳을 습격하여 경찰이 발포로 맞서면서 10여 명이 사살되고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합천에서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농민들이 지서를 공격하여 역시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틀 후인 2월 9일 불난 집에 기름 붓듯 백범 김구가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 한다〉라는 제목으로 단선단정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는 등 이승만 계열 외에는 이에 동조하는 파벌이 적지 않았다.
이와 유사한 충돌이 전국에 걸쳐서 일어나면 2월 20일까지 2주 동안 진행되었다.
전체 참가 인원은 약 200만 명이며, 이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100여 명, 투옥된 사람은 8,500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그런가 하면 작년 제주 3. 1절 사건의 불씨 꺼지지 않고 살아 있었다.
당시의 제주도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미군정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약 6만 명에 이르는 귀환인구의 실직 난, 생필품 부족, 전염병(콜레라)의 만연,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
특히 과거 일제강점기당시 경찰출신들이 미군정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미군정 관리들의 모리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사건의 배경에는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로동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의 활동과 군정경찰,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 반공단체의 처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등이 복합되어 쌍방 간의 적개심으로 일어났다.
남로당은 제주에 반미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삐라 붙이는 일과 사상자 구호금 모금운동을 벌였으나 2월 10일 사건 후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에 반대하기 위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골수당원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 민족청년단, 독립촉성중앙회 등 우익단체 회원들이 희생되었고, 이에 분노한 우익 세력은 우익 세력대로 살상을 자행했다.
여기에 우익단체의 처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유언비어와 반감, 공포가 합해져 유혈사태는 급속도로 제주도 전역으로 번져나가 제주 전역은 행정기능이 마비되는 등 심각한 치안불안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 효고현[편집] 4월 10일, 효고현 지사 키시다 유키오(岸田幸雄)는 조선인학교에 대해 봉쇄 명령을 내렸다.
이에 조련은 4월 14일, 효고현청을 방문해 키시다 유키오와의 교섭을 요구했다.
4월 23일, 경찰과 헌병은 조선인학교 나다교(灘校)와 히가시고베교(東神戸校)를 봉쇄했다.
오전 9시, 오사카부 오사카 성 앞의 오테마에 공원에서 조선인학교 탄압반대 인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집회에는 재일조선인과 일본 공산당 관서지방위원회의 일본인 등7000여명이 참가했다.
대표자 16명이 선출되어 오사카부 청사에서 오사카부 지사와 교섭을 실시하였다.
12시 30분, 오사카부청 지사실에서 부지사(지사는 부재중이었다)와 조선인 대표자 16명이 교섭을 시작하였다. 교섭은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오후 3시, 집회 참가자가 동시에 구호를 외쳤다.
청년 50여 명이 행동대를 편성해 스크럼을 짜고 오사카부청 앞의 저지선을 돌파했다.
오후 3시 30분, 행동대에 이어 시위대 7000여 명이 오사카부청에 진입해 3층 복도까지 점거했다. 부지사는 경찰관의 유도에 따라 전시에 만들어져 있던 지하도를 통해 탈출했다.
오후 5시 경, 일본 공산당 오사카지방위원회에 파견되어 있었던 마스야마 타스케(増山太助)는 가와카미 간이치(川上貫一) 중의원의원과 함께 지사실에서 막으려 했으나, 시위대는 지사실에 진입하여 집기를 파손하였다.
같은 날 밤, 오사카성 주변의 각처에서, 재일조선인과 일본 공산당 관서지방위원회의 일본인은 봉화를 피웠다.
같은 날, 조련은 가와카미 간이치(川上貫一)를 대표로 하여 교섭 장소를 만들려고 했지만, 미군과 무장 경관이 배치되어 무산되었다.
그 후, 재일조선인과 일본 공산당 관서지방위원회의 일본인 등은 무장 경관대와 충돌하였으며, 재일조선인 1명이 사망하였고, 재일조선인 20명이 부상, 경찰관은 31명이 부상당했다.
이로 인해 179명이 소란죄로 검거되었다.
4월 24일, 조선인학교에 대한 전날의 조치에 항의하는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이 효고현 현청앞에 모였다.
같은 날 오전 9시 30분, 효고현청 지사실에서 키시다 유키오, 고데라 겐키치(고베 시 시장), 검사정 등 15인은 조선인학교 폐쇄 가처분 집행 문제와 재일 조선인의 항의 집회 대책을 협의했다.
조련은 효고현 지사실에서의 밀담의 정보를 입수해 약 100명의 재일본 조선인과 일본인이 효고현청 내에 진입하였다.
이들은 지사 응접실을 점거해 비품 등을 파손시킨 후, 벽을 깨어 지사실에 진입해 키시다 유키오와 헌병을 감금했다.
그리고 전화선을 절단해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학교 폐쇄령의 철회', '조선인학교 폐쇄 가처분의 취소', '조선인학교 존속의 승인, '체포된 조선인의 석방' 등을 키시타 유키오에 요구하였고, 오후 5시 경, 키시다 유키오는, '학교 폐쇄령의 철회', '조선인 학교 폐쇄 가처분의 취소', '조선인학교 존속의 승인', '체포된 조선인의 석방' 을 약속했다.
같은 날 오후 10시 경, 키시다 유키오, 요시카와 효고현 부지사, 이치마루 검사정, 타나베 차석검사, 이데이 효고현 경찰장, 후루야마 고베시 경찰국장 등은 점령군 효고현 군정부에 모여, 오후 11시 경, 효고현 군정부는 '비상사태 선언'을 발령했다.
이에 따라 전 경찰관은 미군 헌병 사령관의 지휘하에 들어갔으며, 효고현청에 진입한 사람들을 철저히 검거할 것이 명령되었고, 키시다 유키오가 약속한 '학교 폐쇄령의 철회', '조선인 학교 폐쇄 가처분의 취소', '조선인 학교 존속의 승인', '체포된 조선인의 석방' 등은 사실상 무효가 되었다.
4월 25일 이른 아침, 미군 헌병과 일본 경찰관은 효고현청에 진입한 사람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조련과 일본인 약 300여 명이 오사카 남경찰서에서 체포자의 석방을 요구했다.
경찰은 위협사격을 가해 이를 해산시켰다.
4월 26일, 조련은 오사카 히가시나리 구·아사히 구 등에서 조선인학교 탄압반대 인민대회를 개최했다. 같은 날 오후, 조선인 대표자와 오사카부 지사는 다시 교섭을 벌였으나, 오후 3시 40분, 별실에 대기하고 있던 오사카 군정부의 크레이그 대령이 교섭 중지와 오테마에 공원에 집결하고 있던 재일조선인 2만 명의 해산을 명령했다.
같은 날, 재일조선인 1600여 명이 다시 오사카부청으로 향했다.
시위대는 무장 경찰의 저지선을 향해 돌을 던졌다.
무장경찰은 소방차로 물을 쏘고 권총으로 발포하였고, 이로 인해 재일조선인 1명이 사망했다.
검거된 사람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일본인 9명과 재일조선인 8명이 중노동 4년 이하를 선고받았다. 이후 오사카시 경찰국은 미국 육군 제25사단 사령부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4월 28일, 비상사태 선언이 해제되었다.
4월 29일까지 1590명 혹은 7295명이 검거되었다.
일본 공산당 고베 시 시의회 의원인 호리카와(堀川一知)도 검거되었다.
검거된 사람 중 주요 인사를 구류해 23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일본인 호리카와는 중노동 10년을 선고 받았다.
재일조선인은 최고 중노동 15년을 선고받아 형기 종료 후 본국에 강제송환 되었다.
한신교육투쟁의 결과[편집]1948년 5월 5일, 조련의 교육대책위원장과 문부대신 사이에 "교육기본법과 학교 교육법을 준수한다", "사립학교의 자주성의 범위 안에서 조선인 독자적인 교육을 인정하고, 조선인 학교를 사립학교로서 인가한다"라는 내용의 각서가 교환되었다.
이보다 앞서 미군정하 남한에서의 유일한 대의입법기관이었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남북 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김규식 의장을 비롯한 관선의원 측과 가능한 지역 내의 선거 및 정부수립을 주장하는 민선의원 측 간의 대립 끝에 2월 23일 본회의 에서 주로 관선의원인 김규식의원 등 28인의 의원이 사퇴 한 가운데 가능한 지역 내에 서 총선 실시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어서 3월 4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는 5월 9일에 총선실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실시할 선거는 보통·평등·비밀·직접·자유 등 민주선거의 원칙에 입각하여 실시, 선거법은 추후 한국인대표 및 유엔위원단의 요구에 따라 선거법을 제정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남조선 총선거 실시에 관한 특별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동 과도입법의원은 동년 3월 17일 자유·평등(대일부역자 제외)·비밀선거, 임기 2년, 정원 200명 등을 주요골자로 한 전문 57조로 된 입법의원선거법을 제정·공포(남조선과도정부 법률 제5호)하는 한편 김동성, 김법린, 김지환, 노진설, 이갑성, 이승복, 박승호, 백인제, 오상현, 윤기섭, 장 면, 김규홍, 최윤동, 최두선, 현상윤 등 15인을 중앙선거위원으로 선출하였다.
3월29일에서 4월9일은 유권자 등록기간이었다.
이때 전체 유권자의 79.7%인 약 780만명이 선거인 명부에 등록했다.
4월 말, 신문들은 "약 500명을 인터뷰한 결과 91%가 선거 등록을 강요당했다"고 보도했다.
4월28일, 유엔임시위원단은 투표자 등록 부정행위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적했다.
(1)미곡배급통장을 발급하는 지방행정사무실에서 등록을 실시한 사실
(2)통장을 몰수하겠다고 위협해서 강제 등록
(3)경찰과 청년단체가 등록을 권유한 건 일종의 강제로 간주됨
유엔임시위원단 위원장 야심 머기(시리아 대표)는 "(남한은) 경찰국가일 뿐만 아니라 선거 지지파들이 경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또 지방당국을 조정하여 완벽하게 선거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남한에서 자유선거를 치르기 위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김구도 "국민들은 경찰과 향토보위단의 억압적인 태도 하에 등록하고 투표를 강요당했다"고 했다.
그런 가운데 4월 19일 평양에서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열렸다.
평양의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연석회의에는 남한의 41개 정당·사회단체와 북조선의 15개 정당·사회단체에서 선출된 695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했는데 이는 당시 남북을 통틀어 좌·우익세력 대부분을 망라한 것이었다.
실제로 남한 쪽에서는 남조선로동당·근로인민당 등 좌익계열 정당뿐 아니라 한국독립당·민족자주연맹 등 우익계열 정당들도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헌영·백남운·김구·김규식·조소앙 등 명망 있는 좌익 및 우익 인사들도 참석했다.
회의 시작일인 19일에는 연석회의를 이끌어 갈 주석단 선거, 축문·축전 소개가 있었고, 20일에는 휴회, 21일에는 김일성의 '북조선 정치정세보고'를 시작으로 백남운·박헌영의 '남조선 정세보고'를 들었으며, 22일에는 전날 발표된 정세보고에 대한 활발할 토론이 진행되었다.
특히 22일의 토론에서는 UN 한국임시위원단의 단독선거 실시를 규탄하고 5.10 단독선거의 실시를 저지하는 것은 물론 남북 모두에서 외국군이 당장 철수해야 한다는 총의를 모았다.
이들 토론을 기초로 회의 마지막 날인 23일, 남북의 대표자들은 단선을 저지하기 위한 각 정당·사회단체의 구체적인 행동통일을 규정한 '남조선 단선단정반대투쟁 대책에 관한 결정서'와 "조선인민이 자기의 뜻대로 민주적 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민주국가를 창설할 수 있도록 미소 양국군이 동시에 한반도에서 철군해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하는 '미소 양국 정부에 보내는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요청서'와 함께 '남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전 조선 동포에게 격함' 등이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연석회의가 끝난 4월 26일부터 30일 사이에는 김규식이 방북 직전 제안한 독재정권 배격·총선거 실시·전쟁방지방안 마련 등 5개항을 중점적으로 다룬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또는 '15인 지도자협의회')가 열렸다.
이 '15인 지도자협의회'에는 남측의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붕준·이극로·엄항섭 (이상 우익)·허헌·박헌영·백남운 (이상 좌익)과 북측의 김일성·김두봉·최용건·주영하(북은 모두 좌익)이 모였다.
한편 이와 함께 김구와 김규식의 요청으로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간 4김 회담, 김규식과 김일성의 양김회담도 열렸다.
그러나 중요한 이야기는 논의되지 못하였으며, 여기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단지
1. 남한에 대한 송전계속,
2. 연백수리조합의 개방,
3. 조만식의 월남허용 등을 김일성에게 피력하였다,
김일성은 1항과 2항은 수락하였으나 3항에는 이견이 있어 합의를 얻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김일성은 백범과 우사가 남한으로 귀환하자마자 전기와 농업용수를 모조리 끊어버렸다.)
그리하여 4월 30일,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의 명의로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
공동성명서에는
1. 외국군의 즉시 철군,
2. 외국군의 철거 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점의 확인,
3. 전조선정치회의 소집→임시정부 수립→총선으로 입법기관 탄생→헌법 제정과 통일정부 수립의 4단계 통일정부 구성안
4. 남조선 단독선거 절대 반대 등의 4개 항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2항과 3항은 북조선으로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민족자주연맹의 간부 여운홍은 이렇듯 협상 과정에서 북측이 일방적인 태도를 보이자, 남측의 인사들의 반발이 심하였다.
민족자주연맹의 김규식은 병을 핑계로 4김 회담에만 참석한 뒤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연석회의 중 참석자인 장건상·여운홍 등은 의사결정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장건상은 연석회의 중 "우리 겨레는 공산주의를 갖고는 살 수 없다.
우리가 근로인민당 운동을 하는 것은 공산사회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평등의 이념으로 평화롭게 살려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가 이를 문제 삼은 북조선에 의해 한동안 연금되기도 하였다.
장건상은 김구, 김규식이 떠난 지 보름 뒤에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도 그와 친분이 있던 북로당 위원장 홍명희·김두봉 덕택이었다고 한다.
지도자 연석회의 기초위원회의 위원으로는 홍명희, 엄항섭, 여운홍이 보선되었는데 기초위원회 소위원회 회의에서 박헌영이 미국을 제국주의로 5.10 총선거 참가자를 망국노, 반동분자 등으로 과격한 언어를 구사하며 비판하자,
이에 격분한 여운홍은 "이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결정서가 좋을지 모르지만 우리 다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안 되겠으니 어구 수정이라도 하라"고 항의하였다.
그러자 박헌영은 "개인이 왈가왈부하지 말고 민주주의적인 결정으로 가부를 결정하자"고 했다.
결국 초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다시 반대발언을 했다가는 서울에 돌아갈 수 없다는 공포감을 느낀 여운홍은 일체의 발언을 중지하고 표결 등에서도 기권을 선언하였다.
이후 여운홍은 소극적으로 참여하다가 5월, 남한으로 귀환하였다.
그 무렵 철원에 살던 오진호는 토지개혁으로 악덕지주라는 비판을 받고 땅까지 빼앗기고, 일 년 가까이 버티며 농사를 지었는데 현물세라는 것을 내면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음을 느끼고 동생 진철이 아내 장음선 처제 음전이 그리고 태희 태욱 남매를 데리고 황골로 찾아들었다.
진호의 딱한 사정 이야기를 들은 재운이 주선을 해서 소암 아래에 있는 공회당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 일로 해서 고마움을 느낀 음선이 살림을 나서 살고 있던 재운의 집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연순 에게도 언니, 언니 하면서 살갑게 굴면서 연순이 윤희내 집으로 가면 같이 따라가서 일을 돕고 하였다.
그리고 진철은 얼마 뒤 춘천읍으로 일을 하러 나가더니 거기서 어떻게 되었는지 여자를 얻어서 살림을 시작 했는데 황골 사람들에게는 잊힌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남한만의 총선거를 위한 유엔감시위원단과 미군정은 절차를 진행하여 입후보자는 모두 948명으로 이승만이 이끄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235명, 동아일보 중심의 언론계 출신과 자본가 계급, 그리고 일본 및 미국 등에서 해외 유학을 하고 돌아온 지식인 계층 등이 조직한 보수 우익 정당인 한국민주당이 91명, 대동청년당이 87명, 조선민족청년단이 20명, 대한노동총연맹이 12명,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이 12명의 후보를 각각 냈다.
그리고 기타 43개 사회단체 및 정당이 86명을 후보자로 내세웠으며, 무소속은 무려 전체 입후보자의 44%인 417명이 출사표를 던졌다. 무소속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한국 민주당의 비인기로 인해 당의 후보들이 무소속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정당 및 사회단체가 무려 48개나 되었지만, 7명 이하로 후보를 낸 정당이 42개나 되었고, 단 1명의 후보를 낸 정당 및 사회단체도 25개나 되었다.
해방 후 정당과 사회단체의 난립현상과 함께 정치적 혼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황골에도 선거 바람이 불었다.
기호 1번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 이종순 대한 청년단 이종식 그리고 무소속의 유연국이 출마를 했다.
고흥 씨들의 집성촌인 가경자 간내월 박암이 황골에는 다른 후보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모두들 연국이가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추진했던 남북 협상파와 좌익계열은 이 선거에 불참한 가운데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 날이 밝았다.
선거 당일, 서울에선 수천 명의 경찰과 특임된 민간인이 미군 지원 하에 중요 도로와 교차로에 방어울타리를 쳤으며 각 골목 입구에는 경비대가 배치됐다.
민간 경비대원은 도끼자루, 야구배트, 곤봉을 휴대했다.
경찰은 카빈 소총으로 무장했다.
외신 기자들은 이 광경을 "계엄 하 도시 같다"고 했다.
부인들은 투표장으로 가면서 가만가만히 주위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야심 머기는 "투표소 둘레나 안에서 향보단원을 발견했다. 어떤 투표소엔 경찰이 투표소 안에 있었다. 어떤 투표소는 (투표의) 비밀이 결여됐다"고 했다.
황골에서도 일찌감치 길을 나서서 가정리에 있는 초등학교 투표소로 향해서 안내에 따라 투표들을 했다.
선거에는 의석정수: 200의석 선거제도: 소선거구제 입후보자수: 942명 이 입후보 했고, 총 유권자수: 7,840,871명 (총 유권자수는 선거인명부등록자로 집계. 실제 총 유권자수는 8,132,517명임.)투표자는 선거인 총수의 95.5%로 역대 선거사상 최고의 투표율이 나왔다.
한국 최초의 선거로 기록된 제헌국회 총선은 미군정에 의하여 관리·집행된 가운데 국회의원 정수 200명을 선출하였다.
제헌국회의원 투표 결과 정당·단체별 당선자는 무소속이 의원정수 200명에 42.5%에 해당하는 85명이 당선되어 정당제에 대한 낮은 이해 속에 개인의 인기가 선거를 좌우하였고, 정당 및 단체별로는 이승만을 추종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총의석의 27.5%인 55석을 차지하여 무소속 다음으로 가장 많은 당선자를 내어 제1세력으로 부각되었다.
정식 정당이 아니었기 때문에 뚜렷한 정강·정책을 내세우지 않았고 후보들이 개인 자격으로 출마하기로 했으나, 실제 선거에서는 반탁 운동으로 쌓은 우익 진영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이승만의 후광을 얻기 위해 소속을 밝히는 경우가 많았다.
선거전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한국민주당은 당 중진을 포함한 후보자들이 대거 탈락하여 총의석의 14.5%에 불과한 29명으로 그 뒤를 이었지만 상당수 무소속으로 출마하였기 실제 의석수는 이보다 많은 60-80석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었다.
춘성군에서는 대한 청년단의 이종식이 사퇴를 한 가운데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이종순 후보가 26,404표로 6,219표를 얻은 류연국을 세배가 넘는 표차로 이기고 당선되었다.
황골에서는 선거가 끝나고 몇 칠 지나서 농사일이 바뿐 가운데서도 매년 해오던 대로 초파일 저녁에 마을 청년들이 짚을 한 단씩 가지고 느티나무 아래로 모여서 그네를 매기 위하여 사흘 저녁 동안 짚을 메기고 틀고 하여서 그넷줄을 들여서 그넷줄을 매고 새끼줄을 꼬아서 밑싣개를 만들어 걸치는 것으로 그네가 완성되었다.
첫댓글 드디어 선거가 끝나고 우리가 아는 마지막 소용돌이 한국전쟁이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