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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스데반 황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 (2)
요한복음 4:16-26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서 그 여인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영적인 생명수를 말씀하심에도 그 여자는 알아듣지 못하고 자꾸 헛소리만 합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1-12, 15)
이에 예수께서는 그녀의 마음에 복음이 들어갈 수 있도록 그녀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단계로 들어가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6).
사마리아 여자는 불법으로 여러 남편을 바꾸어가며 살아온 창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끓어 오르는 욕정을 참을 수 없어서 그 욕정을 만족 시키기 위해 세상의 방법을 추구하였습니다. 심지어 그 여자는 예수님의 복된 말씀을 들으면서도 주께서 말씀하시는 생수가 세상 행복과 쾌락과 안일함을 가져다 주는 세상적인 음료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신 생수는 이 세상 것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을 다 내려놓고 오직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주어지는 것이 하늘의 생수입니다. 그 생수는 성령이시며 또한 성령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 나라 천국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4-46).
예수님은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는 사마리아 여자의 헛된 마음과 죄악을 지적하기 위해 그 여자가 스스로 판 터진 웅덩이를 주의 손가락으로 지적하셨습니다(렘 2:13). 즉, 아무리 물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그녀의 부패하고 허망한 터진 웅덩이를 지적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음란하고 더러운 정욕이었습니다.
여자가 대답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8).
사마리아 여자는 한 남편을 둔 것이 아니라 벌써 다섯 남편을 사귀었습니다. 즉, 남자를 통해 성적인 만족과 편안한 삶을 얻고자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자 계속 이 남자 저 남자와 살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동거하고 있는 남자는 쾌락을 위한 도구일 뿐 남편도 아닙니다. 따라서 현재 이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음행을 범하는 죄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 아래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담고 있는 웅덩이는 죄로 구멍이 나 있는 터진 웅덩이는 아닌지요? 그런 웅덩이의 삶은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비참과 허망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이 땅에서도 지옥과 같은 삶을 살다가 실제로 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아무튼 사마리아 여자는 목마릅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죄악을 쌓아놓은 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녀가 파 놓은 인생 웅덩이는 죄악을 저지름으로 인해 터진 웅덩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족이 없고 허무하고 힘들고 목마릅니다.
하지만 독생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우리 주 예수님은 그러한 죄인들에게 그들이 영원히 만족할 수 있는 영원한 생수의 샘을 가져다 주십니다.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구멍이 난 웅덩이를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막아주시고 하늘의 샘물을 그 웅덩이에 한없이 부어주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은 계속 물이 새는 터진 웅덩이와 같습니까? 그리스도께 나아와 주를 믿고 의지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의 고질적인 죄악과 그로 인한 삶의 비참과 실패를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러한 어리석고 완고한 우리를 손가락질하며 판단하고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생수를 제시하며 죄를 회개하고 생수가 넘치는 삶을 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그 생수는 우리 모두의 삶을 가장 행복하고 보람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자, 우리 주님께로부터 이러한 노골적인 지적을 받은 사마리아 여자는 깊은 수치를 느낍니다. 모든 것이 들통났습니다.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아 있는 한 유대인 남자가 그녀의 삶 전체를 과거부터 지금까지 전부 다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녀의 깊은 마음속의 숨겨진 욕구까지 정확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이에 그 여자는 건드리고 싶지 않은 자신의 수치스런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주제를 환기시킬 겸 물을 달라고 한 유대인에게 말합니다.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19-20).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의 고질적인 죄악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피하려고 주제를 돌립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여자가 취한 주제는 우리 주 예수께서 참으로 그 여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믿게 할 수 있는 주제였습니다. 그것은 예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산, 즉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여 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하는 장소는 예루살렘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기 시작한 것은 주전 400년경에 그곳에 성전을 지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는 유대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예루살렘의 스룹바벨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다윗 및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던 예루살렘 외의 다른 산에서 예배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인들은 모세의 율법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신 12:5, 16:2, 26:2)을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심 산이라고 주장하며 그곳에 성전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줄곧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구약의 성전에서 드려진 동물 제사 예배는 하늘의 성전과 땅을 연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속죄와 영원히 살아계시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구약의 제사는 새언약 시대에 드려질 참된 예배에 대한 그림자 및 예표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를 것인데 그 때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주의 백성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부활하셔서 대제사장 및 중보자로 계시게 될 때입니다. 그때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나아가 참으로 예배할 수 있게 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물리적인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주의 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이 중요하며 그러한 예배가 참 예배로서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인 것입니다. 즉, 아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들이 드리는 예배는 어떤 물리적인 장소의 제재를 받는 외부적 예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의식하고 드리는 영적 예배인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2)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참된 계시가 있는 곳은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사마리아인은 혼합 종교를 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세 5경만 믿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이 누구를 섬기는지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앗수르 왕이 가나안 땅에 심어 놓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혼합주의, 즉 하나님과 마귀를 겸하여 섬기던 엉터리 신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을 얻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참 유대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믿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 드렸습니다. 사실, 구원의 길은 에덴 동산에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창 3:15)이라는 약속이 주어졌던 순간부터 한결같았습니다. 즉, 구원의 길은 여자의 ‘그 씨’였습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로 이어졌고 야곱의 12지파에 의해 생겨난 이스라엘 국가에 알려졌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 및 사회법뿐만 아니라 제사 및 의식법을 받음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 및 죄를 범한 후에 죄 사함을 받는 구원의 길을 알게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유월절 및 오순절과 장막절이 제정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어린양의 구속 및 부활로 인한 구원을 예표적으로 선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대속죄일은 모세의 율법이 담고 있는 모든 희생 제사와 함께 피흘림이 있어야만 죄 사함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가져다가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법궤와 속죄소에 뿌림으로 온 이스라엘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속죄하고 그 후에 분향한 다음 나와서 모든 백성의 죄 사함을 선포하며 그들을 축복했습니다.
또한 대속죄일에는 두 마리의 염소를 준비하여 한 마리는 희생 제물로 드리고 아사셀양이라고 불리는 다른 한 마리는 대제사장의 손에 의해 모든 이스라엘 자손의 죄가 그 염소에게 전가되게 한 후 아무도 없는 광야로 인도함을 받아 광야에서 버림 받음으로 죽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아사셀양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진영 밖으로 가져가 제거하고 그 대신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에 따른 하나님의 거룩한 형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희생 제물의 피는 여러 모양의 제사와 함께 드려졌는데, 어떤 경우에는 범죄자가 희생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어야 했고, 어떤 경우에는 희생 제물의 피를 제사하는 자들에게 뿌려야 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피를 뿌리되 물과 섞어 뿌리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제사와 관련한 모든 율법의 내용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이 구원의 길인 것을 알려주는 예표이며 그림자였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 제도를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야 및 그분의 속량을 믿고 바라본 자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는 갈보리에서 단번에 드려진 하나님의 어린양의 영원한 희생 제사를 되돌아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대제사장 및 중보자로 모신 우리처럼 그들도 효과적으로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속량과 부활을 가리키는 예표들과 그림자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임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속량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 사함 및 의롭다 칭함을 실제적으로 받을 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나사렛 예수님을 성령 안에서 영으로 만나며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예배를 드렸으며 따라서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복음이 주어졌었다는 뜻입니다. 이 뜻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구약의 율법은 복음의 그림자였습니다. 특히 성막과 제사는 예수님과 그분의 속량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지을 때와 성전을 지을 때 하나님은 매우 구체적인 지시를 하셨고 모세와 다윗, 그리고 솔로몬은 성막 및 성전을 지을 때 하나도 빠뜨림이 없이 세세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순종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제사 제도와 성막 및 성전은 구원의 길 되시는 메시야를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온전한 복음이 선포된 이후로는 그 복음에 한 가지라도 추가되거나 생략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조금이라도 그릇되면 복음은 구원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펴보면서 인류의 타락 이후 구원의 길은 오직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그리고 사도 바울은 구약의 아브라함을 들어 구약 사람이든 신약 사람이든 오직 복음으로 구원 받는 사실을 확증하였습니다.
[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3:7-9, 13-14, 16, 22, 24, 26-29)
그러므로 새언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매시간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하신 십자가의 속량을 기억하며 주께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부활하셔서 우리를 죄와 세상과 마귀로부터 해방 시켜 주신 만유의 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여져서 날마다 새로워지고 거룩하여질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의 그 한량없는 희생의 가치를 헛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온전한 계시는 유대인들에게 있었고, 그들에게서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이에 바울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민족은 하나님께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낳기 위해 선택하신 혈통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4-5).
물론, 혈통적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역시 장차 오실 메시야와 그분의 구속을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구약 성경은 남은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 9:6-8).
아무튼 하나님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계시는 순수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방 종교와 혼합된 사마리아인들에게는 이런 온전한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하던 참된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바라보고 의지하며 예배 드렸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예표들과 약속들이 그분 안에서 다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라고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추가로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해 왔던 메시야이기에 구약의 예표들과 그림자들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을 알려주며 따라서 예배 방식도 바뀌는 것을 알려줍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실체가 오신 이후로 우리는 구약 시대의 그림자와 예표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사도가 말한 배교입니다. 이는 참된 예배는 새언약 시대에 매우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자칫 우리는 참된 예배를 잃고 얼마든지 다시 구약의 그림자 예배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슬프게도 새 언약 시대의 많은 신자들이 여전히 복잡한 외형적인 형식과 의식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며 구약의 예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예배당 건물 그 자체에 의미를 두거나 예배 순서 및 복장 등에 지나친 규정을 두는 것 등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우리 주님은 이제 메시야가 왔기 때문에 더 이상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 등, 어느 한 곳에서만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고 하늘 아래 어디서든 영과 진리로 예배하면 주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대조하시는 상황을 기억하면 이 의미가 뚜렷해집니다. 주님이 “영과 진리”로 대조하시는 것은 구약 시대의 예배 장소와 예배 의식입니다. 즉, 구약에서는 그리심 산 또는 예루살렘으로 어떤 물리적인 장소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장소라고 다투었지만 메시야가 오셔서 십자가 속량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후로는 더 이상 물리적인 장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에서 그림자와 예표로 사용된 제사 의식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과 진리”와 대조됩니다. 구약에서는 모세 율법에 따라 예배 드렸지만 새언약 시대에서는 은혜와 진리에 따라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예배 드린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과 진리”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는 말씀과 맞물립니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새언약의 예배로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령의 임재 가운데 진리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한 예배는 물리적인 공간 및 구약의 제사 의식이 전혀 필요 없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힘입어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즉, 구약이든 신약이든 아브라함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과 부활의 복음에 근거하여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메시야와 관련된 약속들로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9-20).
즉, 예수님은 구약 성전의 성취로서 참된 하늘의 성전이고 또한 구약 제사와 여러 정결 의식을 성취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게 되면서 구약의 모든 외적인 형식들과 요소들은 불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사도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
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
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하셨느니라)
](히 10:1, 5)
이때 성령과 부활의 그리스도는 예배하는 자의 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즉, 예배하는 자는 무엇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야 하며, 하나님 보좌 곁에 영광 가운데 계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그 신자는 그리스도를 중보자 대제사장으로 하여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 8:1, 6).
[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그러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새언약의 신자들에게는 어떤 뚜렷한 증상들이 나타납니까? 우리가 주께서 말씀하신 참 예배, 즉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때 어떤 현상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는 외형적 예배 형식보다는 내면의 영적 상태에서 뚜렷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와 믿음입니다. 그리고 감사와 믿음에서 바치는 참된 헌물입니다.
주일에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죄든 큰 죄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기 마련합니다. 입술로만 형식적으로 하는 회개가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주 앞에서 무례하고 경솔하게 행한 일들에 대해 주께 진심으로 사과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물론 주의 계명에 어긋난 미움이나 음란이나 거짓말 등에 대해서는 더더욱 눈물 나도록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된 회개 가운데 예배하는 모습에 대해 주 예수께서는 회개하는 세리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3-14).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낮추는 진실하고 겸손한 회개의 예배를 받아주십니다.
두 번째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를 받아주십니다. 나의 의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고, 내 죄가 씻겨지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주의 보혈로 씻음 받고 죄 사함 받은 상태에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의 맹세가 담긴 새 언약을 믿음으로, 새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의 영이 성령에 충만함을 입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때는 주의 자비와 긍휼로 인한 죄사함에 대한 감사와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된 마음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어떤 때는 감사의 눈물이 멈추지 않고, 어떤 때는 찬양을 멈출 수 없을 정도로 기쁘고 즐거워 춤이라도 추고 싶으며 어떤 때는 철저하게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단과 함께 더욱 주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감사와 믿음에서 바치는 참된 헌물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예배 때에 헌금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시며 참된 헌금을 바치는 신자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눅 21:1-4)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한 죄사함뿐만 아니라 죄로 인한 저주의 삶이 도리어 그리스도 안에서 차고 넘치는 복된 삶이 된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벨처럼 예물로 우리의 믿음과 감사를 주께 표현해야 하나님께 상달되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네 가지 현상이 신자가 복음의 약속 안에서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입니다.
이처럼 참된 예배를 드릴 때 신자들에게 열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실한 기도입니다. 저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기도는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로서 거짓이 없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때 기도는 주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즉, 영혼 구원과 용서와 하나님 나라 확장과 거룩함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배 때에 열린 기도는 예배를 마친 후에도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계속 주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 기도하게 되며, 세상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고자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참 예배는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변혁시키는 가장 중요한 원천입니다. 그들이 바른 예배를 드리면 반드시 어디에서나 빛과 소금의 영향력을 나타낼 것입니다. 이에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도 “영과 진리로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참 예배는 평소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지금 우리 교회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영과 진리로 참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놀라운 역사가 이 교회와 여러분의 가정과 삶에 뚜렷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참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피조 세계에 제한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며 심지어 창조주로서 영원한 삼위의 상태로 피조물과 구분되는 창조주의 영으로 계십니다. 이에 성부도 영이시고 성자도 영이시며 성령도 영이십니다. 우리는 피조물로서 시공간에 제약된 존재이기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씀의 의미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피조물인 천사와 인간의 피조된 영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과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하나되는 것,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신격과 하나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신격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속량과 중보자 역할을 바탕으로 하여 성령과 우리의 영이 하나될 때 참 예배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구약 시대처럼 물리적인 건물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속량하시고 부활하신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너무나 귀한 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대제사장으로서 드리신 기도는 참된 예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22 …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11, 20-22, 24, 26)
이로 보건대 참된 예배는 신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사건으로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임하는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그들의 영이 성령과 연합하여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와 연합한 가운데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 다름 아닌 참 예배이며 영생인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1-3).
이렇게 우리 주 예수께서 참된 예배를 알려주시자 사마리아 여자의 눈이 열리며 참 예배의 핵심, 곧 구원의 주인공을 말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이는 만일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그 여자는 믿고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 4:25).
이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권위로 사마리아 여자의 깊은 심령에 말씀하십니다. 즉, 여자가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즉, “내가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여 사마리아 여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녀는 당장 그녀의 모든 것이었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즉, 그녀는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참된 예배자가 된 것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8-30).
이 시간 여러분의 삶이 허무하며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면 신속히 그리스도께 나아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믿고 성령 안에서 ‘영과 진리’로 참된 예배를 드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죄로 구멍이 나 있던 여러분의 삶이 이제야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부으시는 생수의 강으로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세상의 썩어질 것을 위해 오늘도 수고하고 있습니까? 참 만족이 없고 왠지 허망하고 답답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죽음과 함께 영원한 어둠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진 웅덩이의 삶을 버리고 실제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자기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킴으로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영생을 주신 중보자 메시야와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예배로 나아간다면 그는 당장 천국을 맛보며 누리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 받고 성령으로 깨끗하여져서 맑고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평안하고 마음이 청결한 상태에 있으니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이때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하나 되고,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됩니다. 이러한 영원한 복이 오늘 이 예배 가운데 복음의 메시지를 받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