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주점에서의 해프닝
그 날 해프닝이 일어난 발단은 순전히 내게 있었다. 1차가 끝나자 술이 알맞게 오른 친구들은 끝까지 달리자며 2차를 원했다. 술을 끊은 나는 지겨워 ‘가요주점’에 가자고 우겼다.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의 '어느 시인의 비문'이란 시의 첫 구절 '그는 노래하고, 노래하고 싶었다’ 처럼, 나는 그날 무슨 바람이 씌었는지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참 나이 값을 못했다. 결국 우리는 도파민이 넘쳐 7호 광장에 있는 가요주점의 문을 밀었다. 해넘이가 금시라 홀에는 손님이 없었다.
“올드 오빠!”
호스트 진양이 간드러지게 맞았다. 감창소리를 내듯 항상 낭창거리는 그녀는 k의 팔을 끼고 쌈박하게 뒤집어졌다. 죽여주는 미녀는 아니었지만 멋을 내지 않아도 멋이 나는 여자였고 ‘저기녀’나 ‘로드 비프’는 더더욱 아니었다. 갓 서른을 넘긴 나이였는데 우린 그녀를 ‘진양’이라 불렀고, 진양은 우릴 ‘올드 오빠’라고 여사로 불렀다. k는 진양을 보자 사족을 못 썼다. ‘물에 빠진 건 건져도 계집에게 빠진 건 못 건진다.’드니 윤 모처럼 엉덩이를 툭 치기도 하고, 나머지 친구들의 스킨쉽을 막는 방파제 구실도 하며 살라미 전술을 폈다. 무성생식이라도 하려나? 굳이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교직을 거치지 않은 친구들이라 노는 물이 달랐다.
“자알 논다!”
나는 그들에게 타박을 주고 무대에 올라 ‘뜨거운 안녕’을 불렀다. 자니리의 노래지만 나는 자우림의 김윤아 버전으로 부르길 좋아한다. 친구들은 내 노래는 관심 밖이고 오로지 진양에게 목을 매고 있었다. 놈들의 눈빛이 그냥 두면 진양을 뼈째 발라먹을 배곯은 늑대들 눈이었다. 그래선지 나는 삑사리가 났다.
우리 젊은 시절엔 아가씨를 골라가며 술을 마신 황금기였다. 아가씨들은 선택되려고 알랑방귀를 뀌었지. 아, 옛날이여! 그나저나 기방에 가면 유난히 스킨쉽을 즐기는 친구들이 있다. 변변한 팁도 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럴 땐 보는 사람이 도리어 민망했다. 연애를 기술로 치면 그들은 하수에 속한다. 나처럼 고수는 허투루 스킨쉽을 하지 않는다. 맹수일수록 주리고 주려야 헌팅을 하듯, 사냥감이 정해지면 먹잇감이 사정권 안으로 들 때까지 포커스를 맞추며 끈질기게 참고 기다린다.
매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을 때는 조는 것 같고 범이 앉은 모습은 병든 것 같은 법이다.
그러다 사정권에 들면 한 방에 눕힌다. 깔짝깔짝 거리지 않는다. 왈왈 짓는 개가 아니라 소리 없이 해치우는 헌터다.
자리에 돌아와 보니 K가 산란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물고기처럼 진양의 긴 머리카락 속을 들여다보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친밀한 거리가 45.7cm라 하지만 이건 숫제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나이를 골백번 먹어도 섹슈얼리티는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진양은 머리카락에 웨이브를 넣거나 묶었을 때 속에 숨어 있던 색깔이 드러나 반전 매력을 주는 ‘시크릿 투톤 컬러’를 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전체 모발이 갈색인 것 같지만 머리 안쪽은 핑크빛이 보이는 식이다.
그때 가요주점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오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힘꼴이나 써 보이는 대여섯의 사내들이 술에 떡이 되어 올챙이처럼 부푼 배를 앞세우고 굴러들었다. 알록달록한 냉장고 바지를 입고 있는 사내가 있는가 하면, 몽클레르, 에르노 같은 외국 고가 점퍼를 걸친 사내도 있었고, 일종의 야구모자인 스냅백을 머리에 걸치거나, 머릴 퍼플(갈색, 자주)톤으로 물들인 '얼큰이'(얼굴이 불균형하게 큰 사람)도 있었다. 입성이 힙스터처럼 좀 거칠어 보이는 자들이었다. 오십대란 모든 죄가 잘 어울리는 나이 아닌가. 부사리처럼 주점을 둘러보든 그들은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기도 전에 우리 일행을 꼬나보았다. 우리들 노는 꼴이 저들 눈에 시답잖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내 친구들이 겁먹을 사람들인가. 도리어 K는 더 진하게 진양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수작을 부렸다.
냉장고 바지를 입은 사내가 우리를 향해 시니컬하게 비꼬았다.
“다들 참 자알들 놉니다.”
사내의 시건방진 '구찌 겐세이'는 잘 벼린 칼끝을 보는 것처럼 참람했다. 사내의 반어법에 K는 술잔을 탁 내려놓았고, P는 뜨악한 표정으로 등신불이 되었고, H는 된장 발라 버릴까, 구시렁거리며 고추 먹은 소리를 냈다.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 말은 끔직한 악담으로 들렸고 분노팔이처럼 배알이 꼴렸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소이부답笑而不答, 나비눈을 하고 헬로 키티 같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호갱'으로 보였나?
그 와중에 스냅백이 눈심지를 세우고 진양에게 오만방자하게 말했다.
“어이, 진양. 노땅들과 놀지 말고 이리와!”
딴 사내들도 우릴 원숭이 보듯 싱글거리며 백안시 했다.
“무슨 짓이에요? 점잖지 못하게….”
진양이 앙살스레 발끈했다. 티격태격하는 본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열녀 났네, 열녀 났어!”
그 말에 그 대거리였다. 퍼플이 이죽거리며 염장을 질렀다. K가 엇섰다.
“노땅? 어디서 굴러온 땅거지들이고?”
상처 입은 늙은 사자는 포효했으나 K의 외침은 비명에 가까웠다. 술자리에서 남의 좌석에 서빙 하는 여자를 빼 가는 것은 임자 있는 여자를 공개적으로 훔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술꾼들의 불문율이요, 칼부림 날 일이다. K가 빛접으며 그들을 향해 다가가자 몽클레르 점퍼를 걸친 놈이 엄살을 피우며 도리어 부아를 돋웠다.
“허 참, 사람 치겠수? 웃자고 한 이야긴데 죽자고 달려드네….”
사람을 어를 줄도 알았다. 이게 뭔 짓거리? 분노의 표면적이 팽창하고 있었다. 내가 죽순처럼 빼족이 내미는 살의를 느낀 것처럼 K도 완전히 뚜껑이 열린 것 같았다. 20년이란 세월의 차이지만 사내들이 K의 잽이 되진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K를 말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발톱을 세우지 않으면 방전 직전의 배터리 꼴이 될 것 같았다. 아직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고 싶진 않았다. 주인이 개그의 김기리처럼 슈퍼 히어로 K를 막아서며 말했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허나 K는 자신을 잡은 주인의 손목 급소를 틀어잡아 떼어냈다. 주인은 오만상을 찡그렸다. 그때 나는 뭔가 구체적이고 상징적인 ‘액션’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하나님 말씀을 받아먹은 덕분인가, 성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 지 말라. …- (마태 5;3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16;32)
“렛 잇 고!”
나는 친구들을 향해 그보다 더할 수 없다 싶을 만큼 분명하게 선언했다. 그리고 러그에 발이 꼬여 넘어 질 뻔 했지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카운터로 가 술값을 계산했다. 주점을 아마겟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이게 내 알량한 선의의 전부란 생각도 들었다. 내가 너무나 단호했던지 엉거주춤하던 친구들도 따랐고 사내들은 멍 때렸다. 나는 주점을 나서기 전에 사내들에게 공손하게 말했으나 내가 생각해도 공손한 태도는 아니었다.
“노땅들이 주책을 부려 미안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20년 후 당신들의 모습입니다’하는 말은 하려다 삼켰다. 나란 인간은 ‘야누스’처럼 '욱'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지만 어떨 땐 오줄없다.
주점을 나서며 H는 누구에게 랄 거 없이 ‘X 됐네!’ 하고 탄식 했고, K는 분을 삭이지 못해 나에게 투덜거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P가 불쑥 끼어들었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유행어가 된 영화 ‘곡성’의 딸 효진이 한 말이다. 그것은 분명 우리들에게 던지는 물음이기도 했다. 한국 시인협회장을 지낸 ‘못'의 시인 고 김종철 시인은 '못' 이미지를 줄곧 파고들어 못에 관한 연작시를 꾸준히 쓰면서 생의 끝 무렵에 말했다.
"삶이란 못을 박고 못을 빼는 일의 되풀이"라고.
그렇다. 우리야 삶이 단순하고 명료해진 넉넉한 황혼 아닌가. 마누라와 자식 땜에 한창 스트레스 받을 50대에게 져주자. 세상은 이제 우리 것이 아니고 그들 것이다. 우리도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정답을 찾기가 그리 쉬운가. 그러나 마음한구석에서 뭔가 미끄덩! 하고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첫댓글 우리야 넉넉한 황혼 아닌가.
마누라와 자식 땜에 한창 스트레스 받을 50대에게 져주자
공자님 말씀이지
여름철 한 줄기 시원한 빗 줄기처럼 청량감있는 글 잘 읽어네.
강 펀지보다 강한 성경 말씀으로 상대한 자네가 승리자일세.
무무는 금주외엔 변한것 없구나.아주 좋은 현상이야.ㅡ義 峰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