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24.수요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1567-1622) 기념일
2사무7,4-17 마르4,1-20
하느님 중심의 삶
-내 삶의 성경 ‘렉시오 디비나’하기-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86,4).
결국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대서사시인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의 궁극목표는
오늘 내 삶의 성경 렉시오디비나입니다. 어떻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명실공히 믿는이들의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 인간은 결코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둠의 혼란 중에 길을, 희망을 잃고 방황할 것입니다.
어제 교황님의 홈페이지에서 읽은 영어 한 문장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Christ is password for a happy life”
(그리스도는 행복한 삶의 암호이다)
하느님은, 예수님은 행복한 삶의 암호, 즉 열쇠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없이, 예수님 없이 참 행복은 없다는 것이며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오늘 사무엘 하권의 다윗과 복음의 예수님에게,
그리고 오늘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로에게 하느님 중심의 삶을 배우게 됩니다.
전쟁으로 찢겨진 세상에서 ‘기도는 믿음의 호흡(Prayer is breath of faith)’ 이라는 교황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을 위해 간절히 항구히 기도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 삶의 좌표이자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은 성인들의 삶을 대하면 늘 감동하게 됩니다.
성인들의 삶 역시 한결같이 모두가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말그대로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한평생 순교적 삶을 산 성인들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55세로 뇌일혈로 선종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마지막 임종어 역시 감동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예수, 나의 하느님, 나의 모든 것!”
임종어가 성인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평생 예수님을 사랑하며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했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은 예언자 나탄을 통해 다윗의 삶에 주인공은 자신임을 밝히며
그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보십시오!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을 통해 우리는 다윗의 생애를 렉시오 디비나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문장의 주어가 다윗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그 문장의 일부만 인용합니다.
“이제 너는 나의 종 다윗에게 말하여라.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양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결코 믿는 이들의 삶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이 중심이 되어서 하느님이 해주신 섭리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
참된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다윗의 하느님 중심의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해주면서 다윗의 무지를 밝혀주시는 나탄입니다.
우리 역시 내가 원해서 요셉 수도원에 온 듯 하지만 하느님 친히 인도해 주신 하나하나
수도형제들이 하느님 섭리의 역사임을, 모두가 대체 불가능한 “신(神)의 한 수(手)” 같은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선물인 요셉수도공동체요, 믿는 모든 이들 역시 깊이 들여다 보면
이와 똑같이 신의 한수같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비유의 해설은 늘 읽어도 새로운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삶을 엿볼수 있을뿐 아니라 우리에게 삶의 길을 환히 밝혀주십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을 들어라.” 외치시며 깊이 경청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앞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그대로 예수님의 한결같은 삶의 자세를 밝혀줍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명언도 생각납니다.
환경이든, 누구든 탓하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신망애(信望愛) 삶의 자세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우보천리(牛步千里) 한결같이, 묵묵히 씨뿌리는 삶에 전력해온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보여주는
예수님입니다.
말그대로 정주영성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결국은 어떻습니까?
짧은 안목으로 실패인 듯 하지만 주님의 긴 안목으로보면 성공인생임을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배의 열매를 맺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을 들어라.”
저 역시 날마다 묵묵히 말씀을 씨뿌리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참 많이도 뿌렸네요.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내고 수확될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날마다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때 어디선가, 언젠가는 열매를 낼 것이며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 좌절함이, 절망함이 없이 항구히 씨뿌리는 삶에 항구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삶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씨뿌리는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절망은 없다!”입니다.
지성이며 감천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느자를 돕습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후반부 내용은 우의적 해설입니다.
여기서 초점은 말씀이 아니라 토양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밭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과연 길바닥 같은 마음밭입니까, 혹은 돌밭, 가시덤불 같는 마음밭입니까?
이런 마음밭들이라면 오늘 복음의 후반부 해설에서 보는 것처럼 좋은 수확은 어불성설입니다.
참으로 “말씀의 평생 학인”이 되어 말씀수행과 실천에 항구했던
참 좋은땅의 마음밭을 지닌자들의 수확은 얼마나 경이로운지요!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말씀을 받아들여, 어떤이는 서른배, 어떤이는 예순배, 어떤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
정말 이런 이들이 렉시오디비나의 달인들이자 대가들이요, 예수님을 위시한 성인들이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특히 오늘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공부하면서 저는 놀랐습니다.
17세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인들중 가장 위대한 최고의 성인이라 합니다.
그는 1665년 교황 알렉산더 7세가 성인품에 올렸고 187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됩니다.
성인은 언론인과 저술가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온유함의 성인’, ‘신사성인’이라 불리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탁월한 평온과 온유는
본래 타고난 성품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온화함과 밝은 마음, 그리고 친절함이 일상적 행동 양식이 되기까지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인고의 수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인은 “나는 내 과격한 성격을 극복하는데 20년이 걸렸다” 고백하는데,
말그대로 은총에 협력하여 지칠줄 모르는 항구한 노력으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같은
척박한 마음밭을 20년동안의 노력으로 옥토의 마음밭으로 바꿨다는 것이니 정주영성을 사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경청해야할 성인의 삶입니다.
그의 불후의 작품이 ‘신심생활 입문’, ‘신애론’, ‘영적담화’중 평신도들을 위한 신심생활입문은
수도자들이 애독했던 준주성범과 쌍벽을 이룬 작품이라 합니다.
성인은 무엇보다 성성에의 보편적 성소의 선각자였습니다.
모든 이가 성인으로 불리었다는 보편적 성소는 400년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천명됩니다.
성인의 영적 가르침이 참 유익하고 심오합니다.
첫째는 애덕입니다.
완덕에 이르는 최고의 길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며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이웃사랑입니다.
둘째는 온유의 덕입니다.
성인은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세마디로 남겨주신 중요한 교훈을 잊지 마십시오.
즉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를 본받으시오. 이것이 모두입니다.
이웃에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며 하느님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는 경건한 생활입니다.
참된 신심은, 영성은 비상한 은총이나 은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이들은 준엄한 생활을, 절식을, 자선을, 묵상기도를 덕행이라 생각하고,
어떤이들은 수동적이고 탁월한 관상기도에, 무상으로 받은 특은을 덕행이라 하는데
이들은 모두 결과를 원인으로, 개울을 샘으로, 가지를 뿌리로 그림자를 실물로 착각하고 있다.
나는 하느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것 말고는 다른 완덕을 알지 못한다.”
넷째는 영성의 다양성입니다.
영성의 다양성이 신심의 특징입니다. 사람이 완덕에 이르는 방법은 다양하고
하느님께 가는 길도 여러 가지라 했습니다.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세상을 떠난 수덕하는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달성해야할 목표임을 강조했습니다.
다섯째, 성인은 감정을 다시 일깨움으로 지성에 치우친 신심행위가 좀더 따뜻한 정감을 되찾도록 노력했습니다.
여섯째, 경건한 인문주의 신심운동의 고취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불완전한 실재에 대하여 과도한 엄격함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엄격함을 서로 조화시키면서 영적발전을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성대가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요 성인의 영성을 계승한 요한 돈 보스코 성인이 설립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수도회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인들처럼 하느님 중심의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아멘 🙏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