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를 타고 왔지만...
나는 때때로 지구의 미아라는 생각을 가질 때가 많다.
마치 지구의 이방인이 되어 낯선 곳에서 방황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처럼 지내는 경우가 많다. 어려서나 성인이 된 후나 그러한 기분은 마찬가지다. 지금도 나는 처음 보는 사람과의 낯가림이 심하다.
세상에서 늘 외톨이가 된 생각을 가지는 이유는, 지구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규칙들이 무엇이나 서툴고 서먹서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장에서 물건을 산다든가,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든가, 때로는 남의 집을 방문하기라도 했을 때, 어떤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안절부절못할 때가 대부분이다. 나이가 들어도 세상 물정에 서툴기만한 나의 존재...
그래서 나는 주변에서 누가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면 모든 행동이 어설프고 어린애 같다. 자주 왔던 길도 항상 낯설게 느껴지고, 몇 번이나 되풀이했던 일도 처음 하는 것처럼 익숙치 못할 때가 있다. 이러한 나의 행동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동반자는 물가에 내어놓은 어린애 같다고 표현한다.
지구에서의 삶은 항상 꿈속을 방황하는 느낌이다.
현실 세계가 아닌, 가상공간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지구에서 살아 온 삶이 길다고는 표현할 수 없겠지만, 이제까지 수많은 일들을 체험하고 겪었다.
그렇게 다양한 체험 못지않게,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평탄하지 못한 삶처럼 나의 탄생부터 파란곡절을 겪었다. 어쩌면 현실 세계의 빛을 보지 못할 운명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부모님의 완고한 고집 때문에 오기 싫은 세상을 찾아왔다.
현실 세계의 고행을 미리 내다보고, 나의 영혼은 얼마나 현실 세계를 방문하기 싫어, 10년 동안 망설임 끝에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하기 시작했을까... 10년 동안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 어머니의 정성을 이기지 못해, 끝내 내 영혼의 고집이 꺾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어떻든 나의 영혼이 현실 세계를 방문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서, 잘한 일이라든가 못한 일이라든가에 대한 답은 일단 유보하고 싶다.
앞으로 나의 주어진 삶과 사명에 대하여 최선을 다한 후, 마지막 지구를 떠날 때 그 답은 결정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구의 현실은 내게 익숙하지 않고 외딴섬에 버려진 외톨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문득문득 머릿속을 스쳐갈 때가 있어선지 모른다.
문중의 장손이었던 아버지는 결혼 후 10년이 넘도록 자식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오매불망 손자를 기다리며 보낸 세월로 마음이 다 타버렸고, 문중에서는 장손 집안의 대를 잇지 못한 책임을 모두 아버지에게 돌리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아버지에게 애 못 낳는 여자를 데리고 살지 말고, 새 여자를 얻어서 자식 낳아 대를 이으라는 압박들이 심했다. 그렇지 못하겠거든 첩이라도 얻어서 자식을 낳아 끊어진 대를 이어야 하지 않을 것이냐고 사방에서 야단법석이었다.
아버지가 어느 길을 택하든 어머니로서 항변할 말은 없었다.
소위 시집와서 애를 못 낳는 칠거지악을 범하고 있는 죄 많은 여자로서 무슨 할 말이 있었겠는가? 그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자청해서 아버지에게 자신을 버리지 않으려거든 첩이라도 빨리 두어 자식을 얻으라고 사정했다.
할아버지도 늘 입버릇처럼
“베개 덩어리라도 좋으니 손자든 손녀든 한번 안아보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 다른 집은 호박넝쿨에 호박 열리듯 자식들이 주렁주렁 하건만 우리 집은 어째 이 모양인고... 이러다간 내 생전에 대 잇는 모습은 볼 수도 없을 것 같으니 도대체 세상사는 재미가 없구나!"라고 넋두리를 쏟아 놓기를 반복했다.
할아버지가 평소에는 며느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어머니가 애 못 낳는 문제에 대하여 불편한 심기를 노출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술이라도 한잔하고 취기가 오를 때는, 대 이을 후손에 대한 그리움을 넋두리처럼 쏟아 놓곤 했다.
그때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 설명하지 않아도 불 보듯 빤하다. 그렇게 문중과 온 집안에서 대 이을 자손을 기다리며 온갖 원성이 들끓는 와중에도 아버지의 고집은 만만치 않았다.
문중의 성토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한결같은 대답은 “때가 되면 하늘이 알아서 자식을 주실 것이니 너무 인간의 일을 억지로 하려 하지 마시오.”라는 한 마디였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가만히 앉아서 하늘만 바라보며 자식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해마다 추운 겨울만 되면 흰 눈으로 덮여 있는 깊은 설산을 찾아가 움막을 치고 겨우내 집에도 돌아오지 않은 채, 천지신명을 향해서 기도했다고 한다. 자식 하나만 얻게 해달라고 하늘을 향해 드리는 기도였다. 차가운 눈으로 몸을 씻고 칼바람이 옷깃으로 스며드는 추위를 참으며 눈물로 기도할 때 하루해가 짧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때 어떤 신앙심으로 설산의 고행과 굶주림을 견디고 기도하면서 자식을 염원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하늘을 받드는 신앙심은 대단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아버지가 설산의 움막 속에서 기도하다가 밖으로 나오면 거대한 몸집의 호랑이가 버티고 앉아 지키고 있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가 해마다 겨울이면 산에 들어가 기도할 때마다 그 호랑이는 어김없이 나타나 아버지를 지켜주었는데, 아버지는 그 호랑이를 하늘이 보낸 수호신으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하늘에 대한 신앙심은 깊어지고 후사에 대한 확신도 강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전설 같은 그 이야기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오랫동안 친척과 온 동네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의 정성 못지않게 자식 얻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산으로 기도하러 간, 그 기간 동안 어머니는 아침마다 집안에 정화수를 떠 놓고 절을 하며 하늘에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정화수는 동네의 공동우물에서 길어 왔는데, 이른 새벽마다 남들이 물을 길어가기 전 가장 먼저 우물로 가서 물을 떠 온 후, 그 물로 목욕을 제계하고 하늘을 향해 절을 올리면서 자식을 염원하는 것이 어머니의 치성이었다.
어머니가 치성을 드렸던 장소는 마당 한 구석의 장독대였는데, 눈보라가 몰아치는 아무리 추운 겨울의 날씨에도 치성을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정화수 앞에서 허리가 구부러지도록 수 없이 절을 하면서, 죄많은 여인에게 아들 하나만 낳아서 끊어진 대를 잇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은 설명하지 않아도 눈물겨웠을 것이다.
어머니가 하늘을 향해 절을 하며 기도할 때는 언제나 얼굴 가득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고, 추운 날씨에 흘러내리던 눈물이 턱밑에서 고여 고드름으로 변할 때도 많았다고 한다.
한두 해도 아니고 십 년 동안, 그러한 어머니의 가련한 모습을 지켜보며 할아버지도 감동되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불쌍한 것. 너에게 무슨 죄가 많아서 하늘이 큰 시련을 주시는지 모르겠구나...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너의 정성을 모른체하지 않으"련만..."
그처럼,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식을 얻기 위해 공을 들이고 정성을 쏟는 노력은 친척과 문중은 물론 그 지역 마을마다, 집집마다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다.
그러한 소문 중에는 아버지를 향해서
"우직한 사람 같으니라구... 생기지 못할 애기가 기도한다고 생기나? 아니면 없던 애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하나? 나이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 다른 여자 얻어서 애 낳아 후손 둘 생각을 해야지어리석게 기도만 하고 있으니 남의 일 같지 않구먼... 쯧쯧쯧...”라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수없이 들어야 했다.
그러기를 십 년, 과연 하늘도 무심치 않았던지 어느덧 어머니의 뱃속에는 태기가 있어 힘찬 박동을 시작했다. 그가 바로 나였다.
내가 잉태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태몽을 꾸었다. 하늘에서 백마를 탄 선인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이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났을 때 백마선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뿐만아니라, 내가 태어난 기념으로 백마까지 구해서 길렀다.
할아버지는 내가 철이 들기 직전까지, 가끔 백마를 태워주며 산책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키도 크고 늘씬하게 생긴 온순한 말이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백마를 타고 마을 주변을 지나가면,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하곤 했다.
그 백마가 나중에 누구에게 팔려 갔는지 어쨌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어릴 때 할아버지와 함께 타고 다니던 늘씬한 그 백마의 모습은 가끔 눈앞에 선명하게 나타나, 어디론가 나를 태우고 떠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기르던 그 백마는 아버지가 병석에 누운 후로 어려운 집안 형편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처분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던 날 얼마나 기쁨으로 들떴던지 마당에서 춤을 덩실덩실 추었고, 그 소문은 멀리 떨어진 이웃 마을들까지 퍼져서 며칠 동안 구경 온 사람들로 집 앞 골목이 북적거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십 년 동안 자식을 못 낳던 부부가, 임신하고 실제로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하니,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믿어지지 않는다고 구경 온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몰려온 구경꾼 중에는 남의 일 같지 않게 기쁘고 즐거워서 찾아온 이웃이나 친척들도 많았다.
할아버지는 구경 온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푸짐한 잔치를 베풀어 배불리 먹인 후 돌아가게 했다. 그러한 잔치는 며칠간이나 이어졌다. 그때 밥이나 떡으로 사용된 쌀이 몇 가마나 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여인이 시집와서 자식을 못 낳는다고 큰 흠도 아니고, 아들을 못 낳거나 대를 못 잇는 일이 죄악시되는 일이 없지만, 그 시절만 해도 아들 낳고 대 잇는 일이 시집온 여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얼마나 큰 몫이었는지를 느끼게 하는 해프닝이었을 것이다.
구경 온 사람들은 대문에 금줄이 걸려있는 모습을 보고
“저 집 진짜 아들 낳았구나!"
하고 잔치를 즐긴 후 돌아갔다는 소문을, 내가 커서 성인이 된 후에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온 고을이 떠들썩할 만큼 경사스러운 분위기에서 태어난 나는,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온갖 호강을 다 누리며 부족함을 모르고 살아갈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난 후 연이어 사내 동생이 태어났고, 가세와 재산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 우리 가족의 행복은 영원히 탄탄대로로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언제나 듬직하고 건강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이름도 모르는 큰 병을 앓고 시름시름 자리에 눕다가, 결국은 허무하게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생전에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보이지 않는 선행을 많이 베풀었다. 굶고 있는 이웃에게 쌀을 나누어주고 헐벗은 이웃에게 따뜻한 옷을 입혀주기를 밥 먹듯 했다.
아버지가 쌀자루를 메고 다니며 어려운 이웃들에게 양식을 퍼서 나누어 주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철부지적의 일이지만... 나는 아버지가 이웃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러 다닐 때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선행을 본받곤 했다.
그렇게 좋은 일만 하며 착하게 살았던 아버지가 무슨 잘못으로 일찍 세상을 하직했는지 몰라, 살아가면서 하늘이 야속하게 생각 들 때가 많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던 나이는 서른아홉이었고 내 나이는 철조차 모르는 여섯 살이었다.
이때부터 우리 형제의 운명은 뒤바뀌기 시작했는데, 옛날 말에 공들여 낳은 자식은 팔자도 세고 고생도 많이 한다고 하지 않던가... 나와 동생이 아무리 귀하게 태어나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처지였지만, 집안의 기둥인 아버지가 쓰러지자 고아나 다름없는 천덕꾸러기로 변한 것은 시간문제였다.
빛과 무한이론의 세상을 지배하는 주인공들 - 도선당(백마신선) 저
첫댓글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
공감이 크네요
공들여 낳은 자식은 그 길이 결코 순탄치 않음을 또한 매사를 조심조심하며 살아가기도 하지요 본성이 선함이기에
네 맞습니다
선한 본성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