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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진술하는 김재규 의사
김재규, "나는 7년 만에 혁명을 행한 것이다"
박근혜를 치켜 세우려는 자들이 박정희는 물론이고 이승만을 영웅시 하는 것은, 1. '영구 집권'이라는 싸가지없고 무모한 생각을 박정희나 이승만 그리고 박정희 졸개나 이승만 졸개들이 하고 있었기에 물타기를 하려는 것이고 2. 동시에 '반공'이라는 미명 하에 무고한 사람들을 수 없이 죽인 이승만의 패악질은 감추고 '공산당에 맞서 단독정부를 세우고 반공을 국시로 했다'는 점을 내세워 박정희 정권의 반공팔이 장사를 합리화시키려는 의도이며, 3.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박근혜에게 적용시키려 함이다.
박정희의 갈대 인생 행각
형편이 별로 넉넉치 않았던 옛시절, 박정희의 모친은 박정희가 잉태되자 낙태를 시키려고 무수한 시도를 한다. 지금처럼 산부인과를 찾았으면 단번에 해결되었을 것을, 민간요법으로 높은데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낙태가 된다는 이것 저것을 먹기도 하다가 뱃 속의 애가 자꾸 커지자 도리없이 낳는다. 그래서 그런걸까. 박정희의 형들은 키도 크고 기골이 장대하다고 했는데 박정희는 극히 단신에 까무잡잡한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첫 부인 김호남을 만나 애(박재옥)까지 낳았을 때, 박정희는 교사였다. 그런데, 김호남에게 도무지 오지를 않아서 박정희의 큰 형이 한 번은 박정희를 방에 끌어다 놓고 두드려 팬 일도 있었다. "애도 있는 아내가 있는 놈이 교사 노릇을 하면서 왜 생활비도 안주고 잘 오지도 않는 것이냐"가 구타의 이유였다. 이때 김호남은 박정희가 다칠까봐 옛 한옥 원형의 쇠문고리를 밖에서 잡고 살살 대해줄 것을 울면서 호소했다.
이렇게 착한 아내 김호남에게 나중에 찾아온 박정희는 청천벽력같은 소릴 내놓는다. "우리 갈라서자". 아내 김호남은 그 이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버린다. 속세에 남아있으면 자신도 괴롭고 박정희에게도 걸림돌이 될 것 같아 내린 결단이었을게다. 김호남과 갈라 선 박정희는 한달 정도 후에 육영수와 결혼을 한다. 이미 바람을 피우고 갈데까지 다 가고 있었으며 육영수에 빠져 김호남에게 갈라설 것을 통보한 셈이었다.
순수하고 착한 여자 김호남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박정희의 갈대인생은 이렇게 시작됐고, 혈서를 쓰고 일본군이자 일본인으로 살겠다며 맹세를 한후 '항일독립군'토벌을 만주에서 거행한다. 해방이 되자 박정희는 형 박상희의 전철을 밟으며 '남로당 빨갱이'가 되고 나중에 여순 반란사건으로 죽게 생겼으니까 남로당 동료들을 모두 고발하여 배신하면서 살아남고 우리 국군으로 들어온다. 국군이 된 박정희는 5.16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그만 둔 전력이 있다.
그러므로, 이승만의 독재가 있고 4.19가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서 그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탱크와 총을 앞세우고 정권을 찬탈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권력욕 때문에 한 것이다. 국가를 지켜야 하는 군이 정권을 찬탈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박정희는 '사회가 안정되면 바로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짓말을, 박근혜가 '65세 이상 분들에게 몽땅 20만원씩 주겠다'고 했던 것처럼 하고 바로 식언을 해 버린다. 당시 김종필은 '사회가 안정되면 군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홍보하는 전도사이기도 했다.
김재규의 유신독재 종식을 위한 몸부림
군으로 돌아가긴 커녕, 자신의 보호막을 위해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란 것을 만든다. 그리고는 변칙과 편법을 앞세워 10년을 집권한다. 1971년, 김대중은 "만일 이번 선거에서 박정희가 집권하면 영구 총통이 될것이다"를 외치며 정권교체를 부르짖었다. 이때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대중연설에서 이번이 마지막 집권이라는 것을 밝히라고 종용했다. 이 말을 들은 박정희는 '저에게 한번만 기회를 주시면 악을 몽땅 뿌리뽑고 좋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연설을 했다.
김재규는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흐뭇해 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위장이었다. 박정희는 그 다음해인 1972년 현 정권의 비서실장이라는 김기춘을 시켜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만든다. 당시 제3군단장이었던 김재규는 유신헌법의 내용을 받아보고 극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김재규는 이미 박정희에게 그만 해먹으라고 자꾸 제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신헌법이 발표된 1972년 말, 박정희는 전방부대를 순시하고 있었는데, 김재규는 박정희가 자신의 제3군단에 들릴 때를 대비하여 철조망을 친다. 전방에 있는 철조망 모습 그대로. 그리고 위의 꺾어진 부분이 내부를 향하게 하여 달아나지 못하도록까지 만든다.
박정희가 군단에 들르면 그를 연금하고 녹음기를 들이댄 다음 "사퇴하겠다"는 말을 받아내기 위함이었다. 김재규의 이러한 생각은 박정희의 육성을 녹음하여 대국민 증거자료로 제시함으로써 박정희가 도리없이 물러나도록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김재규의 의도는 무위로 끝난다.
보호막용 사병으로 양육된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차지철
한편, 박정희는 집권을 하고 나서 꾸준히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차지철을 키운다. 쿠데타로 집권했을 때 애초에 전두환에게 정권에 들어오라는 말을 했지만 전두환은 "군에 남아있는 아우도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며 거절했다. 이렇게 믿음직한(?) 아우를 박정희는 무럭무럭 키워준다.
초급장교에 불과했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따로 불러 돈도 주고 극진히 대접했던 것이다. 이래서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차지철이라는 '신군부' 세력이 꿈틀거리며 태동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자신도 군이었다가 정권을 탈취했으므로 군 내부에 또하나의 자신의 사병(私兵)용 군을 양성하고 있으면서 군의 반란을 제어하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향성에다가 자폐아적 증상도 있었던 차지철을 이렇게 키워주니까 차지철은 흔히 말하는대로 눈에 뵈는게 없는 자가 되어갔고 대통령을 배경삼아 전횡을 저질렀으며 박정희는 이를 용인하고 묵인했다. 김재규 역시 박정희가 아끼는 사람이었다. 고향 후배이기도 하고 군의 후배이기도 했기에. 그러나, 김재규는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이었고, 국가를 위해 산다고 마음먹은 철저한 군인정신의 소유자 이자 '사나이의 기개'를 좌우명으로 삼는 의로운 자였기에 박정희에게 사퇴를 종용했고, 이런 박정희가 키우는 차지철과 거리가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김재규는 박정희가 권해서였는지 모르지만 73년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을 했고 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된다. 박정희가 권해서였는지 모른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김재규의 사적인 행동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김재규가 만난 사람들을 보자.
김재규, 김수환 추기경 및 장준하와의 만남
민청학련 사건의 발발
73년 유정회로 정치에 입문을 한 그 해 3월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경계했던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항거하며 일어난 사건이 바로 민청학련 사건인데 처음에는 반유신체제 운동이었다가 나중에는 반독재-반체제 운동으로 발전된다. 민청학련 움직임에 놀란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2호를 발동하기까지 한다. 이때 김재규는 민주주의 회복 운동의 선두에 서있던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고 그 이후 여러 차례 만난다.
김 추기경을 만난 김재규는 "환자(박정희)에게 처음부터 딱딱한 음식을 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선 김 추기경님이 대통령을 만나셔서 유신체제를 그만하라고 충고해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했으며 "제3의 안(유신체제를 그만하게 할)을 제시해 주십시요"라는 말을 했다. 그런가 하면, 광복군 장교였으며 후일 국회 외교국방위 소속이었던 장준하와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며 만나는 사이였다.
김재규와의 만남을 지속하다가 1975년 박정희 정권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는 평소에 이렇게 말했다. "현재의 군부독재체제는 '정의로운 군인의 무력투쟁'으로써만 종식시킬 수 있다"라고. 장준하가 말하는 '정의로운 군인의 무력투쟁'이 김재규의 거사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인권유린의 극치 실미도 사건
한편, 청와대 급습을 노린 김신조의 1.21사태가 68년 발발하자, 당시 중정부장이었던 김형욱은 '김일성의 목을 따올 부대' 창설을 주창한다. 김신조처럼 31명으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무인도였던 실미도에서 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살인적인 훈련에서 7명이 죽어나간다. 인간 살인병기를 목표로 훈련시켰던 이 부대는 전과자들을 끌어들여 나라에 보람있는 일을 하라는 미명 하에 강행된 것이었다.
당초 3개월만 교육받고 김일성 목을 따기 위해 북에 밀파된다던 약속은 자꾸 어겨지고 그 괴로운 훈련이 3년 반이나 지속된다. 당시 공군이 공수와 훈련을 맡았지만 공군참모총장으로서도 중정이 하는 일에 감놔라 배놔라 할 수가 없어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실미도 부대 문제를 책임져야 할 김형욱은 물러나 버리고 이후락이 등장한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비인간적인 대우와 훈련에서 벗어나고자 실미도 부대원들은 교육을 시키던 기간병을 살해하고 청와대로 가서 박정희와 담판을 지으려고 총기에 수류탄까지 가지고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향하다가 인천에서 자폭해 버린다.
당시, 수사관계자는 '무장공비가 저지른 짓이다"'군 범죄자가 저지른 일이다''특수범죄자가 저지른 일이다'라면서 말을 자꾸 바꿨고 그 때에도 사람 몇 십명을 죽여놓고 공안정국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던 것이다. 이 해에 김대중 납치사건이 벌어지고 그에 항거하여 민청학련 사건이 있었으며 그 이듬해 긴급조치가 발포되었던 것.
76년 중정부장에 임명된 김재규는 사회의 모든 혼란상을 보면서도 일단은 사나이 기개와 의리를 생각하여 '박정희 각하'라고 깍듯하게 예우했다. 박정희의 직책은 예우로서 대하지만 그가 하는 독재정치에는 계속 강한 반감을 품고있었던 것이다. 김재규의 독재정치, 유신정치 종식을 위한 노력은 지속된다. 김재규의 손윗 동서이자 주일공사를 지냈던 최세현에게 유신정치를 와해시킬 계획안 작성을 부탁하기도 했다.
'2원 집정부제'로라도 유신을 종식시키려했던 김재규
그 안(案)에는 '박정희는 군만 장악하면 되고 정치는 '이원 집정부'로 하여 권력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에게 말한 "환자에게 처음부터 딱딱한 음식(급격한 변화)을 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부분을 실행한 것이고 일단은 박정희의 총통적 권력을 무력화시키는 부드러운 음식을 주려했던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김재규와 최세현의 이러한 노력은 실행되질 못했다. 이유는, 최세현으로부터 계획안을 받고나서 2주 후에 김재규가 박정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기 때문이다.
부마항쟁의 발발 - 긴급조치 - 김재규 진정서 2차례 묵살
이승만 시절, 경무대 경찰서장이었던 곽영주가 "이승만 각하는 국부이시고 각하가 바로 이 나라이옵니다"를 외쳤던 것이나, 박정희의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이 무소불위의 권력의 칼을 휘두르며 제멋대로 했던 것이나 똑같다. 박정희가 급사하기 10일전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거리로 나온다. 반유신독재를 부르짖었다. 부산대학생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부산시민들은 적극 가담했고 무력시위인파는 순식간에 5만명 이상이 되었다. 경찰들이 속수무책이 될 것은 당연하고 경찰서 및 공공기관 그리고 공화당 관련 건물들이 화염에 휩싸였다.
김재규는 중정부장의 신분으로 부산사태를 탐사하기 위해 내려간다. 그리고 박정희에게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리지만 박정희의 반응은 대단히 불쾌하다는 것이었다. 차지철도 옆에서 거들었다. 무섭고 대단한 권력을 갖고있는 중정부장인데 이 정도 하나 해결 못하느냐고. 그러잖아도 차지철과 거리감이 있던 김재규는 경직화되어가는 박정희-차지철 모습에서 희망을 잃는다. 부산 사태는 곧이어 마산으로까지 번지며 이른바 부마항쟁이 되어버린다.
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생 시위가 일어나고 2일 후인 18일, 서울을 비롯한 부산 마산 등지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며 시내에 군 탱크가 주둔한다. 그러나, 1,500명 정도를 연행해 간 가운데 대학생은 수 십명에 불과했으며 그 나머진 모두 시민들이었다. 이 학생과 시민들에게 박정희 정부는 무차별 구타를 했다. 김재규는 사태가 심각하다면서 부마사태에 대한 제2차 보고서를 작성해 올리지만, 박정희는 냉담했다. 김재규에게 들리는 말은 박정희가 "사태가 심각하면 내가 발포명령을 내릴 수 있다"였고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명도 죽였다는데 탱크로 밀어버리겠다"는 것뿐이었다.
온건파였던 김재규는 '한미관계의 회복과 자유민주주의 확립'이 목표였고 어떻게 해서든 박정희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노력해왔던 것이다. 배신감을 느낀 후 7년이라는 세월을. 김영삼이 당시에 박정희 독재를 외치며 반기를 들었다. 박정희는 김영삼을 '사회주의자'로 몰면서 의원자리에서 내치겠다는 말을 했다. 미국의 반대도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은 결국 김영삼을 의원직에서 제명시켜버렸다.한국의 인권 추락이 심각하고 박정희의 군부독재의 폐해가 심각함을 느끼던 미국은 '그런 식의 독재를 계속하면 살아서 내려올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성이자 충고성의 말도 했다.
도덕주의를 앞세웠던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인권도 없고 군부독재가 판을 치는 박정희 정권을 보면서 주한미군철수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런데, 이런 카터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박정희가 취한 방식은 한심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카터를 옆에 앉힌 박정희는 무려 40분 동안 북의 위협을 강조하는 연설을 지겹고 지루하게 이어나갔다. 현재 남재준 국정원장이 쓰잘데 없는 정보까지 노출시키며 북의 위협을 강조하는 것이나 똑같다.
죽기 살기로 참고있었던 카터는 되돌아가는 차량 안에서 측근들과 심한 말싸움을 한다. 철수냐 주둔이냐를 놓고. 미국은, 김재규를 가리켜 '민주주의를 아는 특이한 정보부장'이라고 칭했고 "김재규와는 민주주의가 뭔지 대화가 통한다"는 말을 했다. 일각에서 미국을 지칭하여 '미국 CIA의 사주하에 김재규가 일을 저지른 것이다' 라는 말은 전혀 근거없는 말이다. 김재규는 그 누구와도 협의나 상의도 없었고 더구나 누구의 사주에 의해 일을 벌인게 아니었다.
79년 10월16일 부마항쟁 - 계엄령 선포 - 두 차례의 김재규 진정서 묵살 냉담 -계속 혼란 속의 정국 등이 그 당시의 상황이었는데 궁정동 연회장에서 딸 뻘 여자 두 명을 앉히고 호화 술판을 벌이고있었던 박정희. 이거 제정신인가? 이 연회장에 김재규는 비무장으로 동석했다. 당연히 시국에 관한 이야기가 안나올 수 없었고, 박정희와 옆에 앉은 차지철의 입에서 다시 한번 부마사태가 김재규의 무능 때문이라는 질책이 나오자, 그것도 여자와 술판이 진행되는 곳에서, 김재규는 극단의 결심을 그 순간 하게된다.
연회장은 2층도 있었는데 그날 박정희를 쏠 계획은 없었기에 2층에 총을 둔 것도 아니었다. 김재규는 연회장에서 50미터나 떨어진 별관으로 뛰어가서 권총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직속부하인 박선호·박흥주에게도 그 때 작전 지시를 한 것이었다. 완곡하게 진정을 하고 충고와 제안을 7년 동안이나 배신감 속에서 해온 김재규. 부마항쟁의 실상을 보고하면서 이러니까 박정희가 물러나는 조치를 취하던 대국민 사과를 하던 하라던 김재규를 다시금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했던 것이다.
김재규가 권력욕에서 저지른 내란음모였다고 둔갑시킨 전두환
김재규는 도저히 이제 말로는 불가능함을 느끼고, 초록은 동색인 차지철과 박정희에게 총알을 날린 것이었다. 김재규는 거사를 치룬 후, "이제 자유민주주의 시대가 됐다"고 했다. 김재규의 수사를 맡았던 수사관은 "김재규는 권력을 찬탈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김재규는 자신이 벌이는 일을 '혁명'이라고 칭했다. 독재를 종식시키는 혁명. 오로지 그게 목적이기도 했다.
그런데, 박정희가 키워놓은 전두환이 군을 앞세워 나라를 점령하고 합동수사본부라는 것을 차린 후, "김재규는 정권을 찬탈할 목적이었다"는 혐의를 씌우며 '내란음모죄'를 적용했고. 법정에서 사형이 선고된 후 4일이라는 초단시간 후에 김재규의 목숨을 앗아버렸다. 김재규의 입에서 여러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사전에 차단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사형집행을 하루 앞둔 날, 찾아온 비서관에게 "난 이제 얼마 못산다. 내가 죽으면 수의로 먼저 입었던 검정옷을 입혀달라"는 유언을 했던 김재규. 그러나. 이런 소박한 유언마저 지켜주지 않았다. '박정희 암살범'으로 몰면서. 그리고, 김재규가 묻힌 묘소의 비석과 상석에는 꾸준히 테러가 가해지고있다. 누군가 자꾸 '김재규 의사'라는 글씨를 훼손시키고 비석과 상석 여러 곳에 상처를 입히고 있다.
'나라사랑'의 일념으로 가득 차있던 김재규는 이런 사람이었다. 장준하와 더불어 다시 역사 속에서 의사로 추앙되어야 하며 그의 나라사랑 의지가 다시 빛을 발해야 한다. 더불어, 김재규가 살었던 그 암흑시절 정권에 있었던 자들이 현금에도 흰 머리를 날리며 박근혜 정권에 포진되어있는 지금, 김재규의 행적과 가치는 바로 오늘의 일처럼 우리에게 다가 옴을 알 수 있다.
첫댓글 사촌 형님뻘인 이 분을 어릴땐 위대한 대통령을 죽인
암살범 정도로 알고 오랜동안 지내온 것이 참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30년이 훌쩍 넘은 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그 망할 대통령의 딸이라니
참 아이러니하고 분통이 터집니다.
김재규는 다시 재조명 돼야 한다고 봅니다
박정희 신봉자인 회사 후임이 있는데 김재규가 나라 살렸지 하니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ㅋㅋ
박근혜가 대통령이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현실이죠.
이런것들의 정권연장에 동조하는 개새끼들은 다 싹 조져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