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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농악을 울리고 추렴을 해온 음식이 차려진 가운데 그네들은 타고 신명나는 한판이 벌어 졌는데 그동안 그네를 만드느냐고 수고한 총각들이 한 번씩 타는데 차금돌은 역시 재주꾼 이었다.
“우두 그네 허.” “우두 그네 허.”
하면서 힘차게 구르는데 스무 번도 안 되어 느티나무 잎사귀를 발로 차서 떨어트려서 동내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그렇게 젊은 총각들의 경연이 끝나고 어린아이 들이 타고 그 다음에 옥인이 보다 어린 에들이 한참을 탄 다음에야 열댓 살이 넘은 처녀애들이 타고 나서 줄을 서서 기다리니 조금 나이가 찬 처녀들의 차례는 좀처럼 오지를 않았다.
그날 저녁 무렵에야 옥인이 또래들의 탈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그날 희상을 비롯한 음전이는 그넷줄 한 번 만져보지도 못하고 지나갔다.
다음날 그네가 조금 한가해진 틈을 이용해 음전이와 희상이는 서로 마주보고 타는 쌍그네를 타고 있었는데 한참 킥 킥 거리며 힘차게 굴러서 높이 올라갔는데 그만 음전이의 고무신 한 짝이 벗겨져 연실네 논으로 떨어졌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재덕이 바지를 신을 벗고 바짓가랑이를 접어올리고 논에 들어가 찾아 가지고 나와서 음전이에게 건넸다.
순간 음전은 가슴이 뛰고 얼굴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재덕 또한 동내서 늘 보던 얼굴이 아니고 동내에 새로 온 처녀를 대하고 보니 순간 가슴이 뛰었다.
얼떨결에 걸음을 옮겨서 형 재운의 집으로 향했다.
사립문을 들어서 자 옥순이 초로로 달려와
“담 툰 담 뚠.” 하면서 안겼다.
마침 부엌에서 나오던 연순이
“도련님 점심 드셨어요.”
대답이 없자 다시
“도련님 점심 드셨어요.”
“아 예, 예.”
음전은 재덕이 작은 형 재운의 집에서 몇 번 보기는 해지만 그저께 맨 앞에 서서 꽹과리를 치면서 농악대를 이끄는 상쇄를 하는 것을 볼 때 다부지게 생기고 농악의 모든 것이 그가 이끄는 데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금 끌렸었는데, 신발을 받아 신고 붉어진 얼굴을 누구에게라도 들킬 세라 얼른 집으로 향하며 보니 재덕에게는 옥순이 안겨져 있었고 성동이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음전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보고 싶어서 생각해 보니 저녁 무렵이면 어김없이 집을 나서서 작은 형 재운의 집에 왔다 가는 것을 알고 저녁을 먹고 부지런히 느티나무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 재덕을 기다리며 그네에 올라 시원한 저녁 바람을 가르며 그네를 타는데 재덕은 그사이에 느티나무를 지나 저만치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기회는 지나가고 천식의 동생 정순이 나와서 그네 줄을 넘겨주고 한참을 그네를 타던 정순이도 그네를 타다가 지졌는지 돌아가고 음전은 다시 그네에 올라앉아서 앉은 자세로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그네를 타고 있는데 옥순네 사립문을 나서는 재덕이 보였다.
그네가 멈추는 시간에 맞춰서 재덕이 언덕을 올라오고 있어서 음전이 그네에서 내려서 말을 걸었다.
“저 저 아까는 고마웠어요.”
“아 예 뭘 .”
“그리고 옥인이 삼촌 저 할 말이 있는데요.”
음전이 몇 마디라도 더 말을 하고 싶어서 얼떨결에 나오고 말았다.
재덕이 다그쳐 묻지도 않고 기다려 주는데 음전이 할 말이 있다고는 했지만, 딱히 정해 놓은 말이 없어서
“어쩌면 옥인이 삼촌은 꽹과리를 잘 치세요. 제가 반했어요.”
“아 예 .”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그러면서도 누가 볼세라 신경을 쓰고 있는데 천석의 모친 용단이 머리에 동이를 이고 사립문을 나서는 게 보였다.
재덕이 급히 음전의 손을 잡아끌고 느티나무 뒤로 숨었는데, 용단은 다행히 못 보았는지 느티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논둑길을 걸어서 샘이 나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재덕은 얼떨결에 음전의 손을 잡게 되었고 공교롭게 이번에는 희상이가 지나다가 그네가 비어 있자 올 타구나 하고 올라서 그네를 타고 있었다.
재덕과 음전은 느티나무 뒤에 숨어서 나가지고 못하고 들키지 않으려고 몸을 밀착 시키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가슴은 뛰고 서로에게 가슴이 뛰는 것을 들킬세라 숨소리를 들킬세라 온 신경을 쓰고 있는데 싫지는 않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마음이 진정이 되어서도 한참을 안긴 것을 알고도 풀지 못하고 있는데. 희상이도 그네 타기를 그만 두고 집으로 갔는지 기척이 없었다.
먼저 음전이 입을 열었다.
“내일 저녁에 또 기다릴게요.”
재덕이 말없이 끄떡였다.
그리고 음전이 떠나고 한참 후 재덕은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 저녁을 먹은 재덕이 집을 나서서 느티나무 있는 곳으로 와서 보니 아무도 없었다.
아직 안 왔나 하여 나무 뒤를 돌아가 보아도 음전은 보이지 않았다.
재덕이 성동이내 집에 잠깐 들려서 몇 마디 이야기를 하고 여느 날 보다 일찍 나서서 느티나무 있는 곳으로 가서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느티나무 뒤로 돌아가 보니 음전이 느티나무에 숨어서 재덕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안겼는데 어제보다 다른 것은 서로의 심장소리가 들키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을 사라지고 이제는 서로의 가슴 뛰는 소리가 상대에게 전하여 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날도 공교롭게 저녁을 먹고 난 천석의 동생 만석이와 정순이가 나와서 그네를 한참을 타는 바람에 들키지 않으려고 둘이는 꼭 끌어안고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음전의 봉긋하게 솟은 가슴이 재덕의 가슴에 눌리어지고 심장을 터질 듯 쿵쾅거리고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 음전의 입술에 재덕의 입이 포개어져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재덕이 내일 또 라고 말을 하자 음전이 고개를 끄떡였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만나서 서로의 사랑은 더욱더 깊어지고 있었다.
5월31일 국회가 구성되어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가 당선 되고 정부수립을 위한 법을 만들기 시작 했다.
얼마 뒤 황골에서는 단오 날 또 다시 한바탕 농악을 울리며 흥겨운 한마당이 지나고 보리이삭이 패고 익어갈 무렵 재덕과 천석이 태환이 그리고 금동이는 관솔불을 붙여 종다래끼를 허리에 매고 삼태기를 들고 물개로 밤고기를 잡으러 갔다.
강어귀에서부터 관솔불로 물속을 들여다보면서 잠을 자는 고기를 삼태기로 떠서 종다래끼에다 넣는 것으로 보리가 익어갈 무렵이면 산란을 위해서 강에서 개울을 거슬러 올라오는 고기가 많고 헤엄을 치면서 잠을 자는 고기를 삼태기로 떠서 잡아먹는 것이 젊은이들의 즐거움의 하나였다.
그렇게 이백여 미터를 고기를 잡다보니 어느덧 소암다리 아래 공회당 앞에 왔을 때 종다래끼가 거의 다 찾다.
“어디서 끓여 먹을 까?”
“천석아 너네 집으로 깔까?”
“글 세 그런데 우리 집은 누에를 친다고 싫어하잖아.”
“우리 집도 그렇고.”
“그러지 태환이가 가지고 들어가서 손질을 하면 되겠네.”
“그래 그게 좋겠다.”
그렇게 하고 집으로 둘은 집으로 돌아왔고 이튿날 아침 태환이가 물고기 밸을 따서 매운탕이 다 되었을 무렵에 재덕이와 천석이 금돌이가 공회당에 도착하였다.
한참 후 진호네 식구를 비롯하여 네 사람의 젊은이가 앉아있는 방으로 음전이 매운탕이 든 양푼을 들고 들어와 국자로 대접에 매운탕을 퍼서 나누어 주는데, 커다란 고기가 국자에 들어오자 밀어내고 퍼 담았다.
그렇게 진호부터 주고 다음에 앉아있는 천식이 그 다음에 태환이 그리고 재덕에게는 밀어 버렸던 고기를 담아서 주었다.
“야 왕건이네.”
하면서 금동이가 건저 가려는 시늉을 하자 재덕이 조금은 민망함을 감춰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윤희와 연순 그리고 음선와 음전이 모여서 발 방아로 보리를 찧고 있다가 음선이 입을 열었다.
“언니들 제가 보니 시동생이 없는 것 같은데 저를 시누이 삼으면 안 될까요?”
“딱히 안 될 거야 없지요.”
“그럼 그렇게 해주시는 거죠.”
음선은 엄청 기뻐하는 걸 보니 윤희와 연순도 흐뭇하였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는 급진전 되었고 재명도 재운도 동의를 했다.
그래서 적당한 날에 두 집 아니 세 집 식구들이 한데 모여서 밥을 먹으며 의남매를 맺는 의식을 가졌다.
세집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먹을 갈고 바늘에 꿴 실에 먹물을 묻혀서 제일 재운의 팔뚝위에 살갗을 뚫고 지나가고 그 바늘이 음선의 손목위에 팔을 뚫고 지나가며 진한 먹물 자국을 남기는 것으로 재운은 음선의 바로 위의 오빠가 되고 음선은 여동생이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삼형제는 오남매가 되었다.
그러나 재덕과 음전의 사랑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가고 있었다.
저녁에 만나는 장소도 중소 아래에 있는 개울가로 소암다리 아래에서 저녁에 멱을 감고 난 음전과 중소에서 멱을 감고 난 재덕이 중간쯤 되는 개울가에 앉아서 사랑을 속삭이기에는 그만한 장소도 없었다.
캄캄한 개울가에는 돌돌돌 하면서 여울을 휘감아 도는 물소리와 개똥벌레가 별처럼 번쩍이며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무대가 펼쳐지고, 나란히 누워있는 하늘에는 미리내가 하얗게 흐르고 있는 그런 밤이었다.
그날 밤 재덕과 음전은 견우와 직녀가 되어 미리내에서 한참을 헤엄치고 있었고, 음전은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별동별 들을 보았다.
7월 17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을 국호로 하는 건국헌법이 공포되었고, 존 하지가, 미군정 폐지 공식 선언했다.
7월 20일 제헌국회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에 의한 제1대 대통령 선거로 이승만 후보를 초대 대통령으로, 이시영 후보를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7월 29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열린 런던 하계 올림픽에 대한민국 최초로 손기정선수가 태극기를 앞세우고 개막식에 기수로 나섰다.
이어서 열린 경기에서 복싱 플라이급의 한수안 선수 와 역도 미들급의 김성집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8월 4일 이승만대통령 당선으로 궐석이 된 제헌국회, 의장과 부의장에 각각 신익희(申翼熙)와 김약수(金若水)선출 했고, 다음날인 8월 5일 대한민국 국회,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를 인준 했다.
8월 7일에는 대한민국 초대 정부 기구를 11부4처66국으로 결정했다.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은 지 삼년 만인 8월15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황골에서는 그날도 농악을 울리며 정부수립의 기쁨을 만끽 했다.
다음날 미군정은 대한민국 정부에 정권을 이양했다.
8월25일 북에서도 총선거가 있었다.
9월3일 미군정은 경찰권을 대한민국에 이양했고, 이어 9월 5일에는 국방경비대를 개편하고 대한민국의 육군과 해군이 발족했다.
9월7일에는 대한민국 국회에서 5.10선거후 김광준 의원의 주도로 8월5일 김웅진 이원이 발의한 해방 후 남조선 과도입법 때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되었다.
이틀 후 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선포를 하여 완전히 남과 북으로 갈라섰다.
이어 수상에는 김일성 부수상에 박헌영 김책 홍명희가 선출되었다.
9월 12일 에는 국회에서 연호를 단기(단군기원)로 변경 공포 하였고. 9월 22일 에는 친일파 단죄를 위한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되었다.
9월 28일에는 더 이상 말도 섞지 않고 밥도 같이 안 먹겠다는 식으로 정부에서는 남북교역중지 선언했다.
9월 30일 국회에서 한글전용법안 가결되었다.
그리고 황골에서는 추석이 지나고 얼마 있지 않아서 동내에서는 재덕과 음전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 했다.
음선은 처음엔 의남매 이상에 무엇이 있겠느냐고 부인을 하면서 하루라도 빨리 시집을 보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을 해서 음전에게 방물장수가 권하던 보리올 신랑감과 맞선을 보자고 했다.
“시집은 아직 싫어.”
“너 그럼 소문이 사실이냐?”
“ 그게 ....”
“아니면 왜 선을 안 보겠다는 거야 가진 것 없는 우리가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지, 시동생에 조카가 둘 다섯 식구가 살려면 얼마나 힘든지 네가 알기나 알아.”
“나 옥인이 삼촌 좋아해 ...”
“뭐 뭐라고 했니 소문이 사실이구나. 생각해 봐라 옥인네 뭐가 있냐?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집에 시집을 가면 둘이서 살림이나 제대로 내어 줄 것 같아, 속 차려 이것아.”
그나저나 음선은 걱정이 되었다.
공회당에서 피난살이처럼 지내면서 먼저부터 살고 있던 태환이와 정분이라도 나면 어쩌나 했었는데 엉뚱하게 옥인이 삼촌이라니 소문이 사실로 밝혀지자 서둘러야 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이일을 재명오빠나 재운오빠에게 알려서 수습부터 해야 갰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녁 때 옥인네 집으로 가니 마침 재운도 와 있었다.
“저 오라버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올라왔어요.”
“그래 뭐데 ?”
“저 소문 들으셨나요?”
“무슨 소문?”
“우리 음전이와 재덕이 동생 사이에 이야기요.”
“의남매라서 가까이 지내서 그런 소문이 난줄 알았는데.”
“오늘 제가 음전이를 다그쳤더니 그게 사실이래요.”
“그래 이 놈을 그냥.”
“그래서 말씀인데요. 우리 음전이 중신이 들어와서 선을 보이려고 하는데 둘 사이를 떼어 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리고 연애를 해서 결혼을 하는 건 뼈대 있는 집안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가득 차 있는 재명과 재운이었다.
“알았네. 그럼 어떡한담?”
“형님 이렇게 하면 어때요.”
“어떻게?”
“음전이가 안동권씨 아녜요. 그러니 우리 안동김씨 하고는 조상이 같아서 혼인이 절대로 안 된다고 하면 어떨까요.”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
“그러니까 안동김씨 하고 안동권씨 하고 안동장씨 하고 삼태사라고 하는 말은 삼태성이라고 해서 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래 그렇게 그게 좋겠네.”
음선이 다녀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재명이와 재운이 재덕을 방으로 불러 들였다.
“재덕아 .”
“네.”
“너 음전이와의 소문이 사실이냐?”
“왜 대답이 없어 그건 안 될 말이다.”
“너 그것도 모르고 연애를 했냐? 게네는 안동권씨야 우리하고 삼태성으로 조상이 같은데 어떻게 결혼을 하니.”
재덕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원래 고려 때 삼형제가 정승을 지냈는데 맏이는 안동김씨가 되고 둘째는 안동권씨 막내는 안동장씨가 되어서 삼태성이라고 불리는데 대대로 내려오면서 삼태성끼리는 결혼을 절대로 못해.”
“알아들었냐?”
재운이 다그쳐 물었다.
“네.”
조상이 같다니 조상이 같아서 결혼을 할 수 없다니
같은 시간 음선이 음전을 앉혀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것아 내가 재명오라버니를 찾아가서 이야기를 붙였는데 조상이 같아서 절대 결혼을 못하는 사이 라더구나.
“옥인네는 안동김씨 우리는 안동 권씨 아니냐. 그래서 이야기 인데 옛날에 삼형제로 핏줄이 같아서 결혼을 절대 못한데. 그러니 네가 마음을 접고 내일 모래 선을 보자.”
그날 저녁 재덕과 만나던 느티나무 아래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음전은 눈이 퉁퉁 붓도록 밤새 눈물을 흘려야 했다.
다음날 저녁에 재덕은 느티나무 뒤로 돌아가 보았지만 음전은 보이지 않았다.
작은 형네 집에 들러서 조금 있다가 올라오다가 다시 뒤로 돌아가 보았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면서 재덕은 아 이별의 말 한마디도 못하고 하면서 아쉬워하고 있었고, 음전은 언니 의 성화로 선을 보기로 한 날 저녁에 뭐라도 한마디 하고 싶어서 느티나무 뒤에 기대여 행여나 하면서 기다렸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재덕이 나무 뒤로 돌아왔다.
둘이는 움찔 했으나 이내 반가움에 자신도 모르게 얼싸 안겼다.
그렇게 떨어질 줄 모르고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음전의 울음을 머금은 떨리는 소리가
“저 넬 선보러 가요.”
재덕은 말없이 한참을 그대로 있었고 차가운 달빛에 비쳐진 음전의 두 뺨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어깨는 재덕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듯이 작게 들썩였지만 이내 흔들림은 커지고 훌쩍이는 소리까지 내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 음전의 어깨가 조용해지고 나서야 재덕이 겨우 입을 열었다.
“잘 살아..........행복해야 돼.”
그 말을 끝으로 음전은 흐느끼며 하얗게 쏟아지는 달 빛 속으로 뛰어 갔다.
멀어져 가는 음전의 달그림자는 달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나무아래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덕의 머리는 느티나무를 찧고 있었다.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국방경비대 14연대의 1개 대대 규모의 군인들을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견하기로 한 일부 군인들이 1948년 10월 19일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 친일 전력 경찰과 우익을 자처하는 친일 경력 인사들을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여수경찰서장과 사찰계 직원 10명, 한민당 여수지부장, 대동청년단 여수지구위원장, 경찰서후원회장 등을 포함한 우익계 인사와 그 가족 70여 명이 살해되었다.
반란군은 여수를 점령한 후 순천시로 이동해 중위 홍순석이 지휘하는 14연대 2개 중대 병력과 결탁해 순천을 장악하고는 살인, 약탈, 방화 등을 저질렀다.
10월 21일 : 반란군이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를 거쳐 10월 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10월 21일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송호성 준장을 총사령관에 임명해 10개 대대 병력을 이끌게 하고는 진압을 명령하였다.
10월 22일 : 진압군이 오후 3시에 순천 공격을 시작하였다.
반란군의 주력은 광양 및 인근 산악지대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10월 23일 : 진압군이 오전에 순천을 장악하였다.
진압군은 순천 장악 직후 일사천리로 광양 일대의 반란군 주력을 섬멸하고, 여수를 탈환하기 위한 2단계 작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반란군은 여수의 입구인 미평 근처에 매복, 진압군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사령관 송호성 준장이 철모에 총을 맞고 장갑차에서 떨어져 고막이 터지고 허리부상을 입었다. 이 와중에 반란군의 주력이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도망쳤다.
10월 25일: 진압군의 여수 시내에 대한 박격포 사격을 시작으로 시가전이 이틀 동안 계속되었다.
10월 27일: 진압군이 여수에서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진압군과 경찰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규모 협조자 색출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최소 439명의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살해당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그리고 황골에서는 눈이 시리도록 차갑고 하늘이 파랗게 맑은 날, 재덕은 지개를 지고 산위에 올라 시집가는 음전의 가마를 보면서 작대기로 옆에 서있던 애꿎은 작은 떡갈나무를 두드려 패서 힘들게 붙어 있던 노랗게 물든 떡갈나무 단풍이 떨어트렸다.
그리고 얼마 후 제광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대한청년단 남면지회가 만들어 지고, 제광이 청년단 감찰 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재덕을 비롯한 젊은이들은 참나무 숯을 굽는 산판이 벌어져서 일을 하게 되었다.
참나무를 운반하기 좋은 곳에 숯가마를 만드는데 진흙이 옆에 있어야 힘을 덜 들이고 숯가마를 만들 수 있다.
방 세 개 정도가 될 만큼의 구덩이를 만들고, 배어낸 참나무를 빽빽이 세우고 위로 진흙에 물을 붓고 짓이겨서 덮고 떡메를 만들어 다지면서 뒤로 굴뚝을 세 개 만들고 앞 쪽으로는 아궁이를 만들고 불을 붙여서 때면서 위에다 진흙을 부면서 계속해서 떡메로 다져서 전체적으로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였다.
하루정도 불을 때면서 다음에 숯을 굽기 위한 참나무를 베어 오면서 하루를 정도 지나면서 굴뚝을 살피는데, 검던 연기의 색깔이 희다가 푸르스름하게 변하자 바삐 굴뚝을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막고 아궁이도 미리 준비한 흙으로 막아서 공기가 전혀 들어가지 않게 막았다.
그렇게 나흘이 지나는 동안에 칡을 끊어오고 잔 싸리나무 가지나 억세 줄기를 베어다 숯섬을 만드는 일은 나이가 든 선복 재명이 또래들이 했는데. 숯섬 하나를 만드는데, 천 원씩 주었다.
그리고 숯을 꺼내는 날 조심스럽게 가마를 여니 뜨거운 열기가 가득하였다.
조그마한 불씨라도 있으면 다시 불이 붙어서 안에 있는 숯을 다 버리게 된다.
탱 탱 쇳소리가 나는 숯을 꺼내자 선복의 동생 선영과 아내 용단은 헌 낫으로 능숙하게 숯의 껍질을 벗겨내고 숯섬에 담았고, 옆에서 선복이 숯섬을 묶어서 쌓았다.
그러는 동안에 젊은이들은 숯을 굽기 위하여 참나무를 베어 오고 빈 가마에 참나무를 세워서 채워서 세우는데 사흘 정도가 걸렸다.
그리고 저녁마다 내려올 때에는 숯섬을 두 섬 세 섬씩 지고 내려와 차가 실고가기 편리한 곳에다 쌓았다.
품삯은 도급제에 가까웠다.
목상이 숯 한 섬당 얼마씩 처서 주니 나무를 베어서 숯을 굽는 재덕 천식을 비롯한 몇 사람이 적당한 품삯을 정하고 나누어 주고 나누었다.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UN 위원단의 감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선거가 치러진 지역 내 유일한 합법 정부로 결의 했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중국의 내전 중 수세에 몰린 장제스 총통을 1월 21일 하야를 하고 부총통 리쭝런 권한대행이 취임을 하고 설 이틀 뒤인 초사흗날 인 1월31일 베이징이 인민해방군에 함락 되었다.
섣달 그믐날 재덕은 겨우내 숯을 구워서 번 돈을 형 재명에게 돈을 내놓고 재명은 그래도 수고 했으니 얼마간의 돈을 재덕에게 내어주며.
“동생이 겨우내 고생고생 해가며 번 돈이니 뭐라도 하나 장만을 함세.”
“네 형님.”
그해 설은 여느 해 보다도 풍족하게 맞았다
설이 지나고 얼마 후 연실엄마가 앞 집사는 연순에게 말을 걸었다.
“저 옥인이 삼촌 말인데요.”
“왜요 우리 성동이 삼촌이 뭐 일이 있어요.”
“지난 번 일도 조용해지고 했으니 말인데요, 우리 사촌 시누 있잖아요. 둘이 결혼 시키면 어때요.”
“글쎄요.”
“알다시피 재작년 우리 시 숙모 돌아가고 시누가 살림을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살림을 하고 있는 시누가 시집을 가기 힘들지 않아요.”
“그럼 처가살이 하라는 이야기잖아요.”
“그게 그래도 남식 도련님이 커서 장가 들 때까지 몇 년 만 하면 살림을 내어 줄 텐데요.”
“하면 우리 성동 아버지한테 이야기 해 볼게요.”
그날 저녁 연순이 재운에게 이야기를 했고 재운은 밤새 생각해 보니 괜찮은 제안 같아서 형 재명에게 이야기를 하니 입맛을 다시며
“생각 좀 해보세 나.”
그 무렵 재덕을 비롯한 젊은이들이 모이다 보니 화투판이 벌어졌는데, 처음엔 장난삼아 하던 놀음이 보름이 가까워지는 초열흘날 저녁에는 판에 제법 커져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재덕이 돈을 따고 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 참고 참던 소변이 마려워 나와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금돌이도 같이 나란히 서서 소변을 보고 있었다.
“금돌아.”
“왜.”
“내가 지금 끗발이 한참 오르고 있거든.”
“그래서.”
“적당한 때에 내가 신호를 하면 네가 우리 작은 형 한 테 연락을 해서 우리 형이 나타나면 내가 줄행랑을 놓게 알았지.”
“응 알았어.”
다시 방에 들어간 재덕이 화투를 치면서 적당한 시기에 판이 깨졌으면 하면서 돈을 조금씩 걸면서 시간을 보내려 하자 잃은 사직이는 .
“더 걸지 그게 뭐야 따 가지고.”
“더 걸면 판이 커지잖아. 내 돈 가지고 내가 거는데 시비 걸지 마.”
하면서 말다툼 까지 해가며 화투는 계속되어 새벽이 되고 있었다.
날 샜네 하는 말이 도박장에서 나온 말로 날이 새면 각자 돈을 움켜쥐고 판이 깨지게 마련이어서 돈을 잃은 사람은 더욱 조바심이 나게 마련이었다.
도박이란 돈을 잃은 사람은 오기가 생기고 본전 생각에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잃고 나자 돈을 가지고 오겠다고 하면서 나간 사이에 금돌에게 신호를 보냈다.
금돌이 슬며시 사라져 새벽녘에 재운의 집으로 가서.
“형님! 형님!.”
재운이 한참만에야 더듬거려서 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
“뭔 일이 났나?”
“일이 난 게 아니고요.”
“그럼 왜.”
“지금 재덕이가 우리 사랑에서 화투를 치는데요.”
“뭐야 이 녀석이 정신이 나갔나.”
재운은 식식 거리며 달려가고 있었고. 뒤 따라 가던 금돌은 전후 사정이야기를 할 시간도 갖지를 못했다.
그렇다고 나란히 같이 갈 수도 없어서 뒤로 쳐 저서 걸으며
“지금 돈을 따고 있으니 까 빨리 판을 깨 달래요.”
한 마 디 하고 뒤로 쳐 졌다.
한편 사직은 집에서 논문서를 가지고 와서 패를 돌리라고 독촉을 하고 있었다.
재덕은 형의 기척만 들이면 판돈을 움켜쥐고 튈 준비를 하면서 천천히 화투장을 돌리고 있었다.
그 때 별안간 밖이 수선해지며 문이 열리고 재운이 들이 닥쳤다.
“이 노무 자식이 정신이 나갔지 어디서 화투를 쳐.”
하면서 지게 작대기가 깔아 놓은 화투 방석을 내리 쳤고, 재덕은 판돈을 움켜쥐고 줄행랑을 놓았다.
그리고 재덕은 큰형이 도박을 해서 딴 돈이라고 내 놓으면 도로 돌려주라고 할 게 뻔 한 지라 재운에게 돈을 주면서
“형님 숯가마 해서 모은 돈 하고 이 돈하고 합하면 땅 마지기는 될 거예요, 그러니 큰형님 드려서 땅을 사게 하세요.”
하면서 내 놓았다.
그렇게 해서 재명은 물개에 서 마지기 논을 계약하고 그날 저녁 재덕에게
“네가 준 돈으로 물개에 논 서마지기를 샀다. 너 장가들면 살림 날 때 내어 주마.”
“네 형님.”
“그리고 너 이번에 제철이 딸 알지 희상이라고 결혼을 했으면 한다. 네 나이 벌써 스물일곱 아니냐. 게 누구냐 남식이 결혼 할 때 까지만 살다가 살림을 내 준다고 하니 그러는 게 우리 형편에 제일 나을 것 같아서 내가 허락을 했다.”
그렇게 혼담은 급진전 되었다. 그리고 날을 받고 날이 풀리고 따듯한 춘삼월에 스물일곱 살의 재덕과 스물 한 살의 희상은 결혼식을 올리고, 초야를 지나고 나서 재덕은 고민에 빠졌다.
약속대로 처가살이를 가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갈등이 생겼다.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를 면한다고 했는데 가서 남식이 장가 들 때까지 처가살이를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희상 역시도 얼른 재덕이 들어가 살기를 원했지만 제대로 말 한번 붙이지 못하는 수줍은 새색시로 마음만 태우고 있었다.
아버지가 밥을 제대로 끓여 드시는지 동생 남식은 밥이나 제대로 먹기나 하는 지 늘 걱정이 되었다.
큰집 며느리인 연실 어멈은 제철 부자를 챙겨 주면서 이제나 저제나 재덕 부부가 들어와 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괜히 시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다릴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4월 23일 중국의 수도 난징이 중국 인민해방군에 함락 되었다.
5월에는, 이른바 '남로당 프락치(공작원)'로 제헌국회에 침투, 첩보공작을 한 혐의로 김약수 등 13명의 의원이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국회 부의장이던 김약수를 비롯하여 노일환, 이문원 등 진보적 소장파 의원들이 외국군(미국, 소련)의 완전철수, 남북정당, 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남북정치회의 개최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평화통일방안 7원칙'을 제시하자, 평화통일, 자주통일을 불온시하고 북진통일만을 주장했던 제1공화국 정부는 이들이 남로당 공작원과 접촉, 정국을 혼란시키려 했다는 혐의로 김약수 등 13명을 검거되자 국회는 석방동의안을 상정했고 부결되었다.
6월 3일 국민계몽대 주관으로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체포된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의원에 대한 석방동의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에 대한 성토대회가 다시 열렸고 3~4백여 명의 군중들이 반민특위 사무실에 몰려와 "반민특위 내 공산당을 숙청하라"는 구회를 외치며 특별조사위원회 정문까지 습격하였다.
특위에서 중부경찰서에 경호 요청을 하였으나 경찰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결국 특경대(특위내 사법경찰)가 공포를 쏘며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다.
특위에서는 이 사태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과 내무부에 강력히 항의 하고 6월 4일 배후로 지목된 서울시 사찰과장 최운하,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 국민계몽회 회장 김정한(金正翰) 등을 반민법 제7조 해당자로 체포하였다.
6월 4일 친일 경찰 최운하가 체포되자 내무차관 장경근과 치안국장 이호는 특위에 최운하를 석방하지 않을 경우 실력행사를 하겠다는 위협하였다.
특위가 석방을 거부하자 이들은 내무차관 장경근, 치안국장 이호, 시경국장 김태선의 주도로 6월 6일 오전 7시에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 하에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특경대장 오세윤 등 특경대원 35명을 폭행하고 중부서와 기타 경찰서로 분산 감금하였다.
이날 현장에 있던 특별검찰관 곽상훈은 몸수색을 당하고 권승렬 특별검찰부장은 경찰에게 권총을 압수당하고 반민특위 사무실의 서류와 집기도 탈취 당하였다.
한편, 사건 발생 직후인 6월 6일 오후 반민특위는 긴급회의를 갖고 국회에 진상 규명을 제안하였고 국회는 반민특위 원상 복귀와 책임자 처벌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이날 강원도 조사부에서도 특경대원이 춘천경찰서에 의해 무장해제 당했고 6월 8일에는 충북경찰청이 충청북도조사부의 특경대 해산을 요구하였다.
6월 6일 오후에는 서울시경 사찰과 소속 경찰 440명은 반민특위의 간부 교체, 특경대 해산, 그리고 경찰의 신분보장을 요구하며 집단 사표를 제출하고 6월 7일에는 서울시 경찰국 9천여 명이 6월 6일 결의문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는 총사퇴하겠다고 정부를 압박하였다.
이에 이승만대통령은 6월 9일에 경찰에 대한 선처를 약속하고 업무 복귀를 요청하였다.
이어 이승만대통령은 6월 9일 AP통신사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반민특위 습격은 자신이 직접 지시한 한 것이라고 밝히고 6월 11일에는 반민특위 활동으로 민심이 소요되어 부득이하게 특경대를 해산하였다는 담화문을 발표하며 국회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7월6일 법무부 장관에서 돌아온 이인 의원의 주도로 반민법 공소시효 단축을 골자로 하는 정부개정안(반민법 2차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이에 반대하는 김상덕 위원장을 비롯한 특별조사위원 전원과 특별검찰관, 특별재판관 일부가 사임 의사를 밝혔다.
특위활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던 특위위원들의 사퇴하고 친일 비호세력을 주축으로 새로운 특위가 구성됨으로써 반민특위의 활동은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9월 22일 반민특위 법의 개정으로 1949년 10월에 해체되었다.
그보다 앞서 6월26일에는 미군이 철수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한 철수 었다.
그 시기에 남북은 삼팔선을 두고 소규모 전투가 있기 시작 했다.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백범 김구선생이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을 당하여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향년 74세에 절명하였다.
8월 6일 병역제도가 모병제에서 전시 징병제로 개정 되었다.
그때까지 재덕은 제철의 집으로 가지 않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희상은 그때 이미 홀몸이 아니었지만 틈틈이 친정을 오가며 제철의 뒷바라지를 했다.
그래도 사촌올케 연실 엄마가 많은 도움을 주어서 다행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9월 30일 외신 기자 회견에서 "우리는 북한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으며 북한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하는 등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다.
또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라디오 방송에서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며 호전적인 발언을 하였다.
12월 24일 공비를 토벌 중이던 국군 제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 및 3소대원 70여 명이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 불을 지르고 마을 주민 136명 중 어린이 9명과 여성 44명을 포함해 모두 86명을 살해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이 있었다.
1950년 새해가 되고, 1월 10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의 비밀회담에 참석한 애치슨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타이완의 동쪽 즉,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말하였다.
이틀 후(1월 12일), 외교위원장 톰 코널리는 이를 대외에 발표하였다.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 미국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동북아시아 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하였다.
태평양에서 미국의 지역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한국과 타이완, 인도차이나반도가 미국의 방위에서 제외되었다.
이 선언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국공내전에서 패퇴하고 타이완으로 천도(1949년 11월)한 것에 대한 미국 조야의 충격을 반영한 것이다.
애치슨 선언이 있자, 대한민국의 임병직 외무부장관은 즉시 주한 존 무초 대사를 불러 애치슨 선언의 진의를 해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 장면주미 대사에게 훈령을 보내 애치슨 발언의 경위를 알아서 빨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애치슨은 한국이 미국의 극동방위권에서 제외된 이유에 대해 한마디 회답도 보내주지 않았다
더욱이 한반도는 당시 까지만 해도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한다는 인식이 미 국민들 사이에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하게 됐다는 것이 후일의 평가다.
그리고 재덕은 좀처럼 희상이 원하는 대로 처가살이를 하려고 하지 않고 배가 남산만큼 불러서 어느 날 진통이 시작 되었다.
2월15일 희상은 어제부터 배가 이상하게 아파오더니 지금은 점점 더 심해지는 게 아이가 나오려나 보다
급히 윤희를 찾았다
“형님 아이가 나오려나 봐요, 아 이고 배야”
“그래 걱정 마 내가 있잖아 어서 편히 누어 그리고 천천히 깊게 쉬어 그리고 힘은 모았다가 한 번에 주어야해 그렇지 그렇게 숨을 숴.”
윤희도 지금 임신 8개월째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희상의 출산을 돕고 있다.
그렇게 한나절이 넘는 진통 끝에 희상은 사내아이를 낳았다.
재덕은 하늘을 날기라도 할 것처럼 기뻤다.
몇 칠 뒤 재덕은 이름을 명동이라고 지었다.
50년2월 24일 제광이 대한청년회남면지부 감찰부장을 못 하겠다 하여 재운이 맡게 되었다.
한 달 뒤 연순도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이어서 윤희도 사내아이를 출산하자 동내 사람들은 삼동서가 모두 아들을 낳았다며 부러워했다.
드디어 1950년 3월 10일 개정법이 공포되어 농지개혁 실시를 위한 지루한 입법조처가 완료되었다.
농림부는 농지개혁의 연내 실시를 목표로 예산확보를 꾀하는 한편, 전국적인 농지 소유 실태조사에 착수하였으나 예산의 부족, 정부 측의 농지개혁법 개정 요구로 지연되고 있었다.
국회는 다시 정부의 의사대로 지가상환액을 15할로 인상하고, 지주에게는 기업자금으로 정부보증 하에 융자할 수 있는 지가증권을 발급하기로 한 개정안을 채택, 통과시켰다.
3월 25일에는 그 시행령이, 4월 28일에는 시행규칙이 각각 공포되었으며, 1949년 6월 21일 현재로 실시된 농가 실태조사도 완료되어 농지소표(農地小票)에 의한 대가조사(對價調査)와 농가별 농지일람표의 종람(縱覽)이 완료되고, 분배 예정통지서 발급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입법과정에서 입법 자체는 지주들의 광범위한 소작 방매(小作放賣)를 방조하였다.
농지개혁에 대한 농림부 시안이 발표되고, 농지개혁이 기정사실이 되자 소작권 이동(小作權移動)과 소작권 박탈을 금지하는 농지개혁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1948년 12월 초에 국회에 상정되었다.
그러나 <농지개혁법>이 곧 상정될 것이라는 이유로 심의되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에 죽암조봉암이 농림부 장관을 그만 두고 1949년 3월 10일 재차 본회의에 상정되었으나, <농지개혁법> 심의를 위한 의사일정 변경으로 심의가 보류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광범위한 소작지 방매행위가 빈발하여 더욱 불완전한 농지개혁을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확정된 <농지개혁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농가자립과 농업생산력의 증진으로 인한 농민생활의 향상 내지 국민경제의 균형과 발전을 기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둘째, 개혁방식에서는 경자유전(耕者有田:경작하는 자가 땅을 가져야 함)의 원칙하에 소작지를 유상 매수하여 경작 농민에게 유상 분배하되, 전답의 소유 한도는 최고 3정보를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셋째, 분배대상으로는 대상 농지를 현재 경작하고 있는 농가와 경작능력에 비하여 적은 농지를 경작하는 농가, 농업경영에 경험이 있는 순국선열의 유가족, 영농 능력을 가진 피 고용농가 및 국외에서 귀환한 농가의 순위로 하고, 분배·소유하게 될 분배농지의 대소규모는 수배농가(受配農家:배급을 받는 농가)의 노동력과 농업생산 수단의 보유상태에 따라 결정하기로 하였다.
분배받은 농지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인정하되, 상환이 완료될 때까지는 매매·증여, 기타 소유권의 처분이나 담보권의 설정을 제한하도록 하였다.
넷째, 매수농지에 대한 평가는 평년작 주생산물 생산량의 15할로 하고, 지가보상은 정부가 지가증권을 발급하고 지가증권을 기업자금으로 사용할 때에는 정부가 융자·보증을 하여 증권 액면은 보상액을 환산한 당년도 당해 농지 주생산물 수량으로 표시하되, 증권의 보상은 5년간 균분연부(均分年賦:해마다 똑같이 나누어 냄)로 하여 매년 액면 농산물의 법정가격으로 산출한 금액으로 지급한다.
다섯째, 지가상환은 당해 농지의 보상액과 같은 액수로 하며, 5년간 균분연부로 하여 매년 정부가 지정하는 현품 또는 대금을 정부에 납입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의 농지개혁사업이 1950년 5월 이후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 개정안 및 동법 시행령, 같은 해 4월 농지개혁법 시행규칙이 공포되면서 법적,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고, 같은 해 5월에 농지개혁법이 실시되었다.
농지개혁법에서도 미군정의 귀속농지 매각사업에서와 마찬가지로 해당 경지의 현소작인에게 우선적으로 불하하도록 하였으며, 토지소유 상한선 3정보와 거주지로부터 8km 이내라는 제한을 두었다.
귀속농지 매각사업에서와는 달리 1년 소출의 1.5배를 매각지가로 산정하여 매년 소출의 30%씩 5년간 균등 상환하도록 하였다.
6월 24일 초등학교 3학년인 성동이는 토요일이고 농번기휴가까지 주어서, 학교가 파하자마자 방하리 사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어니 고개를 넘어서 외가로 갔다.
집에서 가정초등학교 까지 10리가 조금 안되지만 학교에서 방하리까지 10리가 훨신 넘는 거리로 늘 반겨주는 외할머니가 있어서 몇 칠 놀게 되어서 동내 친구들에게 외가로 갔다고 이야기 하고 간 것이었다.
외가에서는 아이고, 내 강아지 왔네, 하면서 외할머니가 반겨 주었다.
첫댓글 50년 하면 생각나는 거 육이오 전쟁 아 소용돌이가 결말을 향해 가고 있는건가요.
네 마지막 소용돌이가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