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돌아온 지 2년,
영국에 있을 때도 영어를 잘 못했었고, 공부도 잘 안했었고
공부하기 위한 시도도 잘 게을리 했었던 나로선
한국에 본의아니게 돌아오자 마자 영어 학원을 끊는 등으로 사람들을 웃기다가
더이상 사람들이 웃지 않고 학원비도 떨어지자,
사실은 나 영국에 갔다온 적이 없다고 오리발 개그를 해대다가,
사람들이 도저히 안 웃겨하고 심지어 날 잡으러 다니기 까지 하자
달아나서 틀어박혀 글만 썼었다.
그러다 갑자기 글쓰기가 직업이 되어버려,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냥 열심히 우리말로 소설 써서 대한민국에서 생존하고,
런던 포일스 서점에 내 책을 깔겠다는 내 꿈은,
사람들이 발벗고 나서서 번역해 줄 만큼 아주 대단히 유명해지고 위대해져서 이루자,
하고 생각하며
영어와 나 사이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 담벼락을 세우고
비로소 편안한 마음이 되었었다.
영어와, 나. 사실 이젠 관계가 없어 보였다.
우린 사랑했으나, 서로 의사가 통하지 않으니 헤어지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다음은 우리가 헤어졌을 때 했던 이야기다.
- 영어로 된 영화! 어떡할거야?
- 자막 나오니까 제발 날 잊어줘.
- 영어로 된 노래는?
- 인테넷에 혹시나, 하고 찾아보면 열심히 번역해 놓은 애들 있으니까 제발 날 놔줘.
- 쳇, 길에서 외국 사람을 만나면?
- 피곤하다고 하면 되니까 제발 스토커처럼 굴지마,
그리고 난 어딘가에 취직하기 위해 영어시험을 볼 필요도 없어졌다구,
라고 영어를 타이르고 윽박지르고 달랬다.
덕분에 영어는 울면서 나를 떠났고,
긴 세월 절름발이들처럼 어긋난 채 사랑했었던 영어와 나와의 악연이 그렇게 끝났다.
혹은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아는 사람은 아시겠지만,
나는 어떤 여자를 못잊어 지난 2년간 찌질거리며 살았다.
그런데 최근에 운명적으로 쨔잔, 하고 새로운 여자를 사귀면서
나는 찌질이 짓을 끊고 깔끔했던 나로 돌아갔다. 더이상 찌질거릴 이유가 없었다.
여자는 아름답고 착하며,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고 술도 사주고 내 뺨도 어루만져 준다.
그래서 사랑스러운 나머지 조만간 그녀의 집에 인사를 가겠노라고 했다.
아, 그러나 영어의 미련과 집착은 강했다.
딸만 셋인 그녀의 집, 그녀가 첫째고
둘째의 제부는 한국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파키스탄인이고,
셋째의 제부는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영국인이었다.
고로 그 집에선 공용어가 영어라고 했다.
당신은 영국에도 살았었다니 이상한 우리 집에서도 문제가 없겠군요,
라고 여자친구는 말했다.
그럼, 문제가 없지, 하하하, 라고 웃기기 위해 말했으나 그녀는 웃지 않았다. -_-;;
둘째 동생은 영문과를 나와 영어가 거의 네이티브고 제부인 파키스탄인도 어지간히 영어를 잘한다고 했다.
영국애 애인이야 말할 것도 없이 영어를 잘하고 영국애야 말할 것도 없다.
아, 나는 운명적인 연인을 만났으나, 영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다시 끈적하게 매달리고 있다.
아, 제발 날 놔줘 날 잊어줘... 여긴 한국이잖아. 너 없이도 잘 살고 있잖아. ㅠㅜ
나는 할 수 없이 다시 그래마인유즈를 펼친다.
글 쓸 시간도 없는데 영어공부를 하고 있자니 내 인생이 보릿자루같아 영사에 들어와 한탄한다. ㅡㅡ;;
아, 영국에 있을때 잘할걸.
항상 후회를 달고 사니 자꾸 회가먹고 싶다.
회는 뭔 돈으로 사먹는담..
- 고독히 걸어가며 악을 낳지 않으며 원하는 것은 적다. 숲 속의 코끼리 처럼. (공각기동대2 이노센스 대사 중)
아,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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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국 일 기
영어가 나를 놔주지 않는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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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동안 새로운 짝을 만나서 방문이 없으셨군요, 정말 축하합니다. 그리고 영어라는 놈 이사람 저사람 많이도 쫒아다니는 것 같아요. 열심히 하세요.
참..글 너무나 코믹하게 잘 쓰십니다. 작가님이신것 같은데, 암튼 화이팅하셔요 !
이젠 점점 더 좋은 일만 생기시는군요.. 그동안 힘들었던 것에 대한 보상 아니겠어요? 영어, 그래도 한번 하셨었으니까 다시 시작하시면 더 빨리 늘거예요. 이제부턴 영어랑 동거를 하세요 ^^
하하하하하하 죄송해요..고민스러운 글인데..넘 재밌게 쓰셔서..그만 웃고 말았네요...님이 만난 여자분네 집안도 정말 신기하네요...^^; 사랑의 힘으로 영어공부에 도전해 보세요 홧팅!!!
흠... 축하합니다. 새 사랑을 찾으신 것, 나중에 따님 이름을 영어라고 지으세요. 그럼 영어로 된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보일 거에요.
다시 찌질거려 보야요~~^^; 농담이고 다시 하시면 금방좋아지실듯합니다~^^
쇼펜하우어가 그랬나요? 타인의 불행에서 자신의 행복을 본다구요. 그분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님의 호소와 고민이 제겐 살짝기쁨으로 형질변화하네요^^;(역시 영어는 해야 하는거였어!) 애인이 생기신거 정말 축하드려요.
크흑. 슬프고 아름답고 두려운 이야기군요.
개인적으로 '이 윤기'씨를 좋아하는데 이 분처럼 원서 번역으로 안 떨어지는 영어와 친하게 지내보시면 어떨까여?
^^
보통 긴 글들 잘 안읽는데 너무 술술 잘 읽었어요~ 역시 작가분 맞으시네요~
너무 서로 공감하게 하면서 마음을 즐겁게 하는 글입니다. 영어라는 단어하나로 이렇게 재밌게 글을 쓰시다니... 영어.... 아직도 저도 헤메고 있습니다.
정말 유쾌한 글을 쓰시는군요.... 그냥 글만쓰셔도 무방하겠어요!!!
거 여친분님 집안.. 참 희안하네요.. ㅎㅎ 영어와 친해지기라.. 영국생활 2년 5개월.. 쉽지 않은데요.. ^^
영국다녀온지도 벌써 2년이 다되가는데도, 영국사랑에 자주 들리는이유는, 우리 15번진짜안와작가님 때문이기도 하지요~ㅋㅋ 정말 축하할일이네요, 새로운 시작~!!!
ㅋㅋㅋ 정말 표현 잼나요~
헤헤~ 가끔 사전을 찢어버리고 싶을때가 있다는.. ^^ 그래도 영어랑 친해지셔야하니.. 좋겠다.. 그만큼 노력하실거자나여... 좋은결과 있길 바랍니다~! ^^*
넘 재밌네요,,ㅋㅋ 어찌 그런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