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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3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제1독서 : 레위 25,1.8-17
복 음 : 마태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영원한 비전(Vison)
-희년禧年의 영성-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비전이 있어야 삽니다. 비전이 없으면 곧 무너지거나 부패할 수 있습니다.
비전이 없을 때, 비전을 잃을 때 자유도 여유도 없습니다.
초월적 거점의 비전을 잃을 때 시야는 좁아지고 마음은 삭막해집니다.
영적 인간은 사라지고 육적 인간만 남습니다. 항구하려면, 한결같으려면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비전은 영어로 국립국어원에서는 이상, 전망의 우리말로 쓰기를 권고하지만
‘비전’이란 영어 그대로의 발음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27년전, 1992년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식 때 강론 일부가 생각납니다.
참고로 왜관에서는 일제 강점기 지명인 왜관倭館을 칠곡으로 바꾸자는 청원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썩 유쾌한 지명은 아닙니다. 강론 내용의 일부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수도원에 비전(vision)이 없다’고
당연합니다. 비전vision이 있다면 그리스도뿐이고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느님을 찾는 단순한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밖의 모두는 환상이요, 우상일 뿐입니다. 결과는 환멸입니다.
그 무엇도 자기 ego를 충족시켜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진짜 참 영원한 비전은 그리스도뿐입니다. 하느님, 또는 하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하느님, 하늘 나라 모두 한 실재에 대한 세 표현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예수님은 물론 요한 세례자 역시 비전은 동일했습니다.
-“회개 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3,2)
요한 세례자 설교의 요지입니다. 하늘 나라가 요한 세례자의 영원한 비전이었음을 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예수님 설교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역시 예수님의 영원한 비전이었음을 봅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하느님의 나라와 회개의 관계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한 필수적 전제 조건이 회개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비전인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맞아들이려 하는 자에게 회개는 필수입니다.
진정 회개가 없으면 악행은 반복됩니다. 회개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겸손입니다.
바로 이 회개라는 측면에서 일본에 대한 실망이 큽니다.
회개할 줄, 사죄할 줄 모르는 점에서 독일과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일본 정부는 2일 오전 각료회의를 열어 일본산 부품·소재 등
전략물자 수출 관련 이른바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우대국)에서 한국을 제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흡사 일본과의 경제 전쟁이 전개된 양상입니다. 어제 도반과 주고받은 대화도 생각납니다.
-“일본은 희망이 없어 발악한다!”
“공감합니다. 지도자든 국민이든 원대하고 숭고한 비전이, 희망이, 꿈이 없는 일본입니다.
그러니 강한 자에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갑질입니다.
이점 우리도 반성해야 합니다. 고압적, 호전적, 단선적, 획일적, 맹목적, 폐쇄적 사고입니다.
일본은 군국주의의 향수와 사고의 잔재가 여전하고 민주화의 역사가 전무합니다.
이웃이라 하지만 참으로 조심해야할, 방심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천여 년의 역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반면 한국은 찬란한 민주혁명의 역사가 있고 지극히 역동적이자 비전이, 희망이, 꿈이 넘치는 사회입니다.---
좌우간 양측이 ‘상생(win-win)’의 길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영원한 참 비전은 하느님이요 하느님 나라요 그리스도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레위기의 마지막 소개는 ‘희년’입니다.
어제는 이스라엘의 축일에 대해 소개했고 오늘은 희년입니다.
희년의 영성, 희년의 비전이 참 매력적입니다.
예언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고 예수님 역시 공생애가 시작되자
출사표를 던지듯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바로 이게 희년의 영성이자 비전입니다.
하늘 나라의 회개를 사는 이들에게는 매일매일이 희년의 시작입니다.
구체적으로 희년은 전체적인 해방과 자유를 뜻합니다.
모두가 하느님 창조 때의 제자리에로의 귀환을 목표로 합니다.
첫째, ‘인간의 자유(human liberation)’로서의 희년이요,
둘째는 ‘경제적 자유(economic liberation)’로서의 희년이요,
셋째는 ‘생태적 자유ecologicl liberation)’로서의 희년입니다.
인간뿐 아니라 경제적, 생태적 측면 모두가 망라된 참 아름답고도 영원한 비전의 실현입니다.
그러나 희년이 실천됐다는 증거는 없지만 영원한 비전으로,
후대는 물론 오늘의 예언자들에게 영원한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비전과 일치되는 희년의 영성입니다.
모두가 제자리에서 제 모습으로 제대로 서로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고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 때 비로소 희년의, 하느님 나라의 비전이 실현입니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와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비전이 없을 때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구체적 장면입니다.
하느님 중심이, 하느님 비전이 없기에 우유부단한, 영혼이, 생각이 없는 ‘무지無知의 사람’,
헤로데요 헤로디아요 헤로디아의 딸입니다.
영원한 비전인 하느님 나라를 살지 못할 때 바로 여기 기생하는 악인 것입니다.
마침내 이들에 의해 하늘 나라의 비전을 살았던 세례자 요한은 순교의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지내고, 예수님께 알립니다.
아마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순교적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도 분명 예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기소침, 위축되거나 좌절함이 없이 요한의 몫까지 더하여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현에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바로 이의 생생한 증거가 곧장 이어지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복음입니다.
비전이 삶의 꼴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비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비전에 따른 현실적 조건이 구비되어야 합니다.
부단히 기본에, 기초에 충실하며 ‘실력’을 키워야 할 것이요, ‘겸손’과 ‘신뢰’의 인품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하느님 나라 비전의 실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비전인 희년의 영성을 살게 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25,17).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할 때에도 참 많은 결정을 해야 합니다.
뜨거운 커피인지 아이스커피인지, 좀 더 진하게 마시기 위해서 샷을 추가할지 안할지,
매장에서 마시고 갈지 들고서 매장 밖으로 나갈 것인지... 등등
여기에 계산할 때에 사용할 수 있는 포인트 카드까지 선택하려다보면
커피 한 잔 마시는 것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많은 정보가 넘쳐나고 그래서 결정할 것도 저절로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당연히 최고의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건을 구입할 때, 싸고 좋은 물건, 디자인도 마음에 쏙 드는 물건,
남들이 부러워 할 수 있는 물건 등을 선택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일까요?
하지만 최고의 물건을 선택했다고 해서 잘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젠가 어떤 분에게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제가 필기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하나에 몇 십 만원 한다는 최고의 명품 볼펜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너무나도 불편한 볼펜이었습니다.
너무 무거웠고 제 손에 잘 맞지 않아서 글을 쓰기가 힘들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을 따르는 최고의 선택이 아니라
내 기준을 따르는 만족스러운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긴 행복한 사람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작가는 만족스러운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만족스러운 삶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일에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 것이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일에 시간을 소비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은 간단하게 무시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와 헤로디아 그리고 헤로디아의 딸을 떠올려 보십시오.
헤로데는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헤로디아와 그 딸은
자신의 앞을 가로 막는다고 생각해서 세례자 요한을 죽입니다.
아마 당시에는 스스로 최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은 결코 최고의 선택이 될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죽을 때까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죽어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나쁜 영주로, 나쁜 여인으로, 나쁜 딸로 기억되어 우리들 가운데 회자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기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선택은 절대로 만족스러운 선택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당당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를 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같은 방법으로 못 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러낼 수 없는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잔치에 흥을 돋구어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습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은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허영심에 함부로 내뱉은 말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입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마르1,7)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할 말을 다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 걱정,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마태 14, 8)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너무
많은 것을 탐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세상을
더럽히는 것은
언제나 지나친
우리마음들입니다.
위험한 욕망은
하느님까지 내쫓는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뜨거운 생명은
우리 것이
분명 아닙니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으로
많은 이들이 희생됩니다.
헤로데의 교만한
권력의 폭력은
결국
요한 세례자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작은 생명
큰 생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 줄도
모른 채 살아갑니다.
먼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권력의 끝은
늘 허무하며
권력의 욕망은
이와 같이
끝이 없습니다.
참된
생명의 길은
선한 의지 안에서
서로를 살립니다.
생명 중심으로
나가는 길이
서로를 살리는
구원의 길임을 믿습니다.
욕망에
취하지 마십시오.
작은 죄도 짓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영국 성공회는 헨리 8세가 현 왕비와 이혼하고 재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생긴 종교입니다.
왕이 재혼을 하고 싶다는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러나 가톨릭 신자로서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한 번 혼인하면 그 혼인의 유대가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에 헨리 8세는 가톨릭교회와의 연을 끊고 자신이 교회의 수장이 됩니다.
모든 전례나 예식은 가톨릭교회의 모습을 따르지만 자신이 교황의 자리에 앉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의 분열이라는 것이 그의 작은 욕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작은 죄는 더 큰 죄를 짓는 밑거름이 됩니다.
이에 적극 반대하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던 인물이 있습니다.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 성인입니다.
영국의 대법관까지 역임하고 높은 지위의 정치인이었던 그는 왕의 그러한 행위를 보고 있지 못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멈추지 않고 충언을 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던 헨리 8세는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마스 모어는 정치인들의 수호성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토마스 모어와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물론 헨리 8세와 같은 인물은 헤로데 왕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죄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영혼은 구원받고 싶어서 믿으려 했던 인물들입니다.
헤로데 왕도 세례자 요한의 쓴 소리를 즐겨 듣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목을 베게 만듭니다. 죄에 사로잡혀 믿는 하느님은 언제나 우상이 됩니다.
우상숭배는 부처나 알라신 등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숭배는 하느님을 믿지만 자신이 만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본래 모습이 그들의 죄에 가려진 눈 때문에 변형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이렇듯 죄를 지으면 믿고 싶어도 눈이 가려져 우상숭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다 용서해 주신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죄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자아의 판단을 더 믿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선과 악을 분별하라고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하나의 기관입니다.
그것 자체가 나를 심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건 죄다, 아니다”만을 말해줍니다.
마치 도로의 중앙선과 같습니다. 넘었는지, 넘지 않았는지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다만 죄책감을 주는 대상이 있는데 바로 ‘자아’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믿느냐, 하느님을 믿느냐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아를 믿었기에 죄책감이 생겨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다면 주님께 자비를 청하며 나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아를 믿는 이를 에덴동산에 두실 수 없으십니다. 자아가 또 다른 하느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느님께서 자비롭다고 믿고 싶어도 계속 죄를 짓는다면
자아에게 더 힘을 실어주는 격이 됩니다.
죄에 자꾸 빠진다면, 자아가
“거봐. 용서해 주면 뭐하니? 또 죄를 짓잖아. 너는 주님께 합당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행위 때문에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헤로데가 예수님을 정신병자처럼 이상하게 바라본 것처럼,
죄에 빠진 우리들도 각자가 하느님을 금송아지처럼 만들어 우상숭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이 죄책감은 나의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됩니다.
어차피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한다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행복은 자신이 정해주는 만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사람들은 아무리 행복이 오는 상황이 되더라도 그 행복을 스스로 차버리게 됩니다.
돈을 주어도 받지 않고, 용서를 해 주어도 화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런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스스로 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이 그들을 지나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를 도와주면 더 큰 만족이 온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것을 알더라도 그들이 정해 놓은 행복은 그저 성전에서 봉사하는 가운데 얻는 보람 정도입니다.
죄에서 벗어나야 그에 합당한 행복을 받을 그릇이 마련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이거구나!”라고 외치며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 사랑실천을 통해 오는 만족감이 자신이 잘 살아온 상급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살아 “하느님께서 상을 언제 주실까?”라는 마음이어야지
행복이 오는 순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같은 행복을 부어주시지만 준비된 사람만이 그 행복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 준비란 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살기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
인생이라는 순례의 끝은 하느님이다.
하느님과 함께 혹은 그분 안에 사는 것은 어떤 권력을 가짐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것을 포기한다. 그 대신 거기에는 평화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남겨주셨던 당신의 평화이고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는 차원이 다르다.(요한 14,27)
권한은 봉사이다. 봉사하는 이들에게 대중은 권위를 준다.
이것을 권력이라고 오해한 이들이 손을 꽉 쥐는 순간 모래알들은 손에서 빠져나간다.
반면 하느님 안에서 살았던 이들은 주어진 권한으로 사람들은 섬겼다.
그렇지만 그들의 삶은 대부분 고단했다.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했다.
폭력을 휘두르는 권력은 진리와 하느님을 품은 권위자들을 함부로 대한다.
폭력과 비폭력의 대결은 언제나 폭력이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뿐이다.
진리가 승리한다. 어둠은 빛을 덮을 수 없다. 오히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 밝아진다.
일제강제징용피해자 어르신이 울먹거렸다.
괜히 당신 때문에 나라가 힘들어진 것 같아서 죄송스럽다는 것이었다.
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을 잊어버리지만 피해자는 자신이 당한 일을 정확히 끝까지 기억한다.
그 어르신에게 불평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니 없어야한다. 그래야 하느님 안은 아니어도 최소한 하느님 편에는 서있는 것이다.
헤로데는 체면 때문에 하느님의 사람인 세례자 요한을 살해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삶을 예언했다. 하느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사셨던 예수님은 그들의 편이 되어주신다.
비폭력 안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그것은 거룩한 장소에서는 지시하지 않아도 몸과 마음을 조신하고,
웬만해서는 기도를 방해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것을 보지 못하고 그들을 함부로 대하는 이들은 무지하고 어리석고 오만한 권력자들이다.
가끔 자신에게 부여된 성사권을 권력이라고 착각하는 성직자들이 있어 마음 아프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종처럼 사람들을 섬기고 목숨을 내어 놓으심으로
그분이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참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셨다.
고달프고 마음 아파도 끝까지 진리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답게 살기를 기도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