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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다해 연중 10주간 목요일
<의로움은 자비와 비례한다>
복음: 마태오 5,20ㄴ-26
2005년 11월 3일 요르단강 서안의 예닌에 살던 아흐메드 카티브(12)는 이슬람 축제일을 맞아 플라스틱 장난감 총을 갖고 놀았습니다. 그런데 이를 실제 총을 가진 ‘무장 전사’로 오인한 이스라엘군이 카티브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소년은 머리와 배에 심한 총상을 입었고 곧바로 팔레스타인 지역 병원으로 후송되었다가 다시 이스라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이틀 뒤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소년의 아버지 이스마일은 “내 심장은 울고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보다 중요한 희망이 있다.”며 아들의 장기를 이스라엘 아이들에게 떼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스마일은 수년전 자신의 동생이 간을 이식받지 못해 세상을 뜬 기억 때문에 이 같은 결심을 굳히고는 “팔레스타인 사람 모두가 평화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AP통신에 따르면 소년 카티브의 심장과 폐와 간은 6일 이스라엘 소녀 3명에게 각각 이식되었습니다. 카티브의 심장은 같은 날 동갑내기 이스라엘 소녀 사마흐 가드번에게 전해졌고, 허파는 또 다른 14세 소녀에게, 간은 태어난 지 7달 된 아이에게 각각 이식되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의 총격으로 숨진 아들의 장기를 적국인 이스라엘에 기증하여 3명의 생명을 살려낸 것입니다.
심장을 이식받은 동갑내기 소녀 사마 가드반의 아버지는 “카티브의 부모가 내 딸을 자신들의 딸로 생각해주기를 바란다.”면서 가드반의 퇴원 날짜에 맞춰 카티브 가족을 초청했습니다.
카티브의 아버지는 “간을 기증 받지 못해 죽은 남동생이 떠올라 누군가를 꼭 돕고 싶었다.”며 “알라 신은 우리에게 어려움에 빠진 자는 누구든 도울 수 있다고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군 측은 오인 사격에 대해 즉각 사과의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저항운동으로 수감된 팔레스타인 전사들은 카티브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적에게 심장을 주지 말라.”며 분노를 나타냈습니다.
[참조: 국민일보, 한국일보 2005/11/0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우선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의로움’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움은 무엇일까요? 내 아들이 당했으니 나도 되갚아주는 것이 의로움일까요? 물론 단순한 의로움의 개념은 100원 꾸었으면 100원을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카디브의 아버지가 이스라엘에게 보복을 했다면 그는 의로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인 입장에서는 자녀도 다 주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가져가실 수 있는 분이 하느님입니다. 마치 내가 잃는 것들이 나의 것인 양 여기며 화를 내는 것이 의롭지 못한 행위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의롭지 못한 상태로 태어납니다. 이 의로움을 원죄로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의로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빚이 없었기 때문에 떳떳했습니다. 의로움이란 바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떳떳함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이후부터는 스스로의 힘으로 떳떳해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리려 시도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시며 당신 앞에 서기 위해서는 의로운 누군가가 죽어서 그 의로움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줘야 함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아드님을 통해 그들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셨습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이란 바로 나뭇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거나 나무 뒤로 숨는 노력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럴 것 같았으면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죄를 갚아주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십자가 나무 위에서 거룩하신 당신 수난으로 우리에게 의로움을 얻어 주셨다.”고 가르칩니다(교리서 617항 참조). 의로움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주님께서 내 죄를 대신 다 갚아주셨음을 믿는 것에서 얻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믿음을 통한 의화(義化)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행동으로 의로워지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는 주님 앞에 서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의로움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의인인 것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처럼 의로움을 추구하는 이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특징이 이웃에게 화를 낸다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길을 가다 금덩이를 주워 부자가 된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만으로 의로움을 가졌다면 그 사람은 누구에게도 화를 낼 수 있는 처지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물을 바치기 이전에 화해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빨리 가서 화해하고 오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화가 나 있는 사람은 의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상태로 예물을 바쳐봐야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참된 의로움은 용서로써 증명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의 의로움은 분노와 미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참된 의로움은 자비의 열매로 나타납니다.(전삼용신부)
방탄 소년단, 류현진 선수, 손흥민 선수, 김연아 선수는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그 실력과 능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평소에 훈련과 연습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방탄 소년단은 매일 10시간 이상 안무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선수들도 최상의 몸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무대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하기에 열정과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었습니다. 야구를 좋아하기에 어깨에 부상이 생기는 것도 모르고 공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기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축구 유학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빙판 위에 서는 것이 좋았기에 외로움과 아픔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타고난 재능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은 뼈를 깎는 노력과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땅속에 묻혀있는 보물로 남았을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은 무엇입니까?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삶입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의 친구가 되는 삶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밤길을 나서는 삶입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마저 내주는 삶입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까지 기꺼이 함께하는 삶입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앙인의 삶을 이야기하십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는 희생과 고통까지도 감수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을 밝고 환하게 비추고, 세상에 참된 맛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은 무엇으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신앙인은 외모, 능력, 재산, 명예, 권력으로 평가를 받지는 않습니다. 신앙인은 남을 비난하고, 욕하고, 원망하고,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희생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를 가지고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율법과 규율이 우리를 해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편리한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를 편안하게는 하지만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해방해주고, 자유롭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하느님의 뜻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새로운 계명을 줍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조재형신부)
2019년 06월 13일 목요일
[백]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안토니오 성인은 1195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거쳐 성 십자가 수도회에서 생활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성인은 모로코에서 최초로 순교한 다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수사들의 유해가 포르투갈에 도착했을 때 깊은 감명을 받아, 아프리카 선교의 꿈을 안고 수도회를 작은 형제회로 옮겼다. 선교사로 모로코에 파견되었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탁월한 설교로 파도바의 많은 이를 주님께 이끌었다. 그러나 1231년 열병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였다. 안토니오 성인은 이례적으로 선종한 이듬해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들었다.
입당송
시편 132(131),9 참조
주님, 당신의 사제들이 의로움의 옷을 입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환호하게 하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복된 안토니오를 뛰어난 설교자요 곤경 속의 전구자로 보내 주셨으니
저희가 그의 도움으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3,15─4,1.3-6
형제 여러분,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15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16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17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18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4,1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 직분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3 우리의 복음이 가려져 있다 하여도
멸망할 자들에게만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4 그들의 경우, 이 세상의 신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5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85(84),9ㄱㄴㄷ과 10.11-12.13-14(◎ 10ㄴ 참조)
◎ 주님 영광 우리 땅에 머물리라.
○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
○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
복음 환호송
요한 13,34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이사 61,1-3ㄹ)와 복음(루카 10,1-9)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 기도
주님,
거룩한 신비로 복된 안토니오를 영광스럽게 하셨으니
그를 기억하여 주님의 제대에 바치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고
저희에게 용서와 평화를 베풀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마태 24,46-47 참조
행복하여라, 주님이 돌아와 보실 때에 깨어 있는 종! 주님은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기시리라.
<또는>
루카 12,42 참조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안토니오를 기리며 받아 모신 천상 음식으로 저희가 힘을 얻어
믿음을 온전히 간직하며 구원의 길을 충실히 걷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고는 모세가 하느님께 받은 십계명 가운데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보기로 드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짐승과 풀과 곡식을 음식으로 주셨지만, 인간의 생명은 범할 수 없는 하느님의 소유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그자도 사람에 의해서 피를 흘려야 하리라.”(창세 9,6)는 율법이 생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죽음에는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는 과거의 원칙, 그 공평한 균형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끼쳐지기를 바랍니다. 남을 혐오하고 경멸하고 배척하는 마음을 곧 살인과 비교하고, 정신적인 살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분노에서 상대방에 대한 독설이 나옵니다. 멍청이라고 하는 자와 바보라고 하는 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화를 내면서 자기 형제를 욕하거나 그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자는, 누구나 살인자와 같다는 말씀이고, 중앙 법정에 넘겨지거나 불붙는 지옥이란 하느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신앙 공동체로서 살려면 증오와 적개심은 반드시 피해야 하는 장애물입니다. 그것을 정신적인 살인으로 여기시는 주님의 뜻을 되새기며, 어렵더라도 용서와 화해의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