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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천리(一瀉千里)
한번 흐르기 시작한 강이 거침없이 천리를 간다는 뜻으로, 어떤 일이 거침없이 진행됨 또는 말이나 글이 조금도 거침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一 : 한 일(一/0)
瀉 : 쏟을 사(氵/15)
千 : 일천 천(十/1)
里 : 마을 리(里/0)
(유의어)
구천직하(九天直下)
출전 : 황육홍(黃六鴻)의 복혜전서(福惠全書)
일사천리(一瀉千里)는 물이 쏜살같이 단번에 천리를 흘러내린다는 뜻으로, 그 진행이 매우 빠른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또, 문장을 쓸 때 그 필세가 기운차고 막힘이 없는 것에도 비유된다.
(1)청(淸)나라 황육홍(黃六鴻)의 복혜전서(福惠全書)에 다음의 전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파른 협곡 안으로 가벼운 배가 삽시간에 일사천리로 내려간다(儼然峽裡輕舟, 片刻一瀉而千里)."
(2)송(宋)나라 진량(陳亮)의 여신유안전찬(與辛幼安殿撰)에 다음의 전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긴 강과 큰 물이 한번 흘러 천 리를 가는 것은 조금도 괴이해할 일이 아니다(長江大河一瀉千里, 不足多怪也)."
(3)이백(李白)의 시 증종제선주장사소(贈從弟宣州長史昭)의 다음 구절에서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긴 내는 중류에서 시원스럽게 터져 천 리를 흘러 오나라 도회지로 흘러들어 간다(長川豁中流, 千里瀉吳會)."
옛날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로 썼던 1리(里)는 약 0.393km라 하는데 실제 10배를 부풀렸다. 십리길이라면 40km 정도 됐고, 우리나라 전체를 삼천리(三千里) 강산이라 한 것도 서울 중심으로 진주, 의주, 경흥까지 거리가 각 400km 정도인 데서 나왔다고 한다.
물론 천리를 정확한 거리가 아닌 먼 길이란 뜻으로 비유해서 썼다. 시작이 중요하다고 한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와 우보천리(牛步千里)는 느릿느릿 걷는 소가 결국엔 목표를 달성하니 서두르지 않아야 하고, 악사천리(惡事千里)는 나쁜 일은 천리 밖에 소문이 난다고 말조심을 하라는 교훈이었다.
이런 말보다 더 많이 일상에 사용되는 것이 물이 쏜살같이 흘러(一瀉) 천리까지 간다(千里)는 이 성어다. 강물이 빨리 흘러 먼 바다로 흐른다는 데서 일이 조금도 거침없이 빨리 진행되거나 말이나 글이 조금도 막힘없이 명쾌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막힘없이 줄줄 쓰는 명문이라면 중국 시선(詩仙) 이백(李白)의 구천직하(九天直下)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여산(廬山)의 폭포를 읊으면서 "날아 흘러 떨어지니 길이 삼천 척,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지는 듯하구나(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란 문장에서 땄다. 천리까지 가는 물은 장강(長江)과 황하(黃河)에서 왔다.
성어의 유래는 몇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송(南宋)의 학자 진량(陳亮)은 '여신유안전찬(與辛幼安殿撰)'이란 글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장강과 황하의 물이 한 번 흘러 천리 가는 것에 아무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다(長江大河 一瀉千里 不足多怪也)."
청(淸)나라 관리 황육홍(黃六鴻)이란 사람이 지방관을 위해 쓴 지침서 '복혜전서(福惠全書)'에는 "엄연한 계곡 사이를 가벼운 배는 삽시간에 일사천리로 내려간다(儼然峽裡輕舟 片刻一瀉而千里)"란 표현이 들어 있다.
강이 쉼 없이 흘러 바다로 들어가듯이 시원하게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속을 후련하게 한다. 가슴에 닿는 웅변은 폭포수 같다며 구약현하(口若懸河)나 푸른 산에 흐르는 물처럼 막힘없다며 청산유수(靑山流水)에 비유했다.
시원하게 계획을 말하고 일사불란하게 밀고 나가면 모두에 박수 받는다. 이런 말대로 일이 척척 처리된다면 아무 걱정이 없다. 남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이런 자세로 말대로 실천했다면 살기 좋은 나라는 벌써 됐을 것이다. 훌륭한 복안이 있더라도 이루지 못하면 천천히 걷는 황소보다 못하다.
■ 일사천리(一瀉千里)
송(宋)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은 무인이기 전에 이미 뼛속까지 정치가였던 듯하다. 그가 순탄하게 제위에 오른 과정부터가 그랬다.
진교역에서 장병들이 자신을 추대하리라는 움직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까? 장병들이 그에게 걸쳐준 곤룡포가 어디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는 옷이던가? 추대를 받아들이면서 장병들에게 다짐을 받은 것도 단순히 즉흥 연기였을까?
황궁에 들어설 때도 궁문을 열어 준 이들은 평소에 그와 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던 석수신(石守信)과 왕심기(王審琦)였다. 평소 조광윤을 경계하고 있던 부도지휘사(副都指揮使) 한통(韓通)이 저지하려 했으나, 왕언승(王彦昇)이 얼른 그를 제거했으므로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마치 강물이 거침없이 흘러 바다에 이르듯이 조광윤은 단박에 조정을 접수하고 제위에 올랐다.
이 일련의 과정이 미리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고 조광윤도 그에 따라 행동했다면, 그리 괴이한 일이 아니다. "장강과 황하가 단번에 천 리를 가는 것은 그다지 괴이할 것이 없다(長江大河一瀉千里, 不足多怪也)"라는 말처럼. 그러면 누가 그런 계획을 짜고 연출했을까?
송 태조는 제위에 오른 이듬해인 961년 어느 날, 장수들을 궁으로 불러서는 사냥 도구를 챙겨 교외의 숲으로 나갔다. 술자리가 펼쳐졌고, 오래도록 형제처럼 지낸 사이였던지라 황제와 신하의 신분에서 벗어나 맘껏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갑자기 송 태조가 일어나서 말했다. "여기는 인적이 드문 곳이구려. 자, 그대들 가운데 누가 이 자리에 앉고 싶소? 사람도 없으니 나를 대신하고 싶으면 어서 행동으로 옮기시오."
장수들은 모두 깜짝 놀라 순식간에 취기가 사라졌다. 모두 무릎을 꿇고 벌벌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송 태조가 다시 물었다. "그대들은 진정 내가 황제의 자리를 지키기 바라는구려." 송 태조의 말투가 누그러지자 장수들은 참았던 숨을 내쉬고 "만세!"를 외쳤다.
송 태조가 말했다. "그대들이 나를 천하의 군주로 여기겠다고 하니, 이제부터는 신하된 도리를 갖추어야 할 것이오!"
[참고]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 927 ~ 976)
송왕조를 세우고 문치주의의 터전을 마련한 창업황제이다. 조선의 정조 즉위년 8월 8일, 정조는 경연 자리에서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임금을 내신 까닭은 백성을 위함이다. 송태조는 '짐(朕)은 백성을 위하여 지키노라'고 말했다는데, 참으로 절실하고 합당한 말이다. (…) 송태조는 비록 학문을 깊이 익히지 못했지만, 현철한 임금이었다."
과연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은 황제가 되기까지 밤낮 말에 올라 전쟁터를 달린 군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다스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장군이던 시절 늘상 수레에 책을 가득 싣고 다녀서, "뇌물을 실은 수레라고 합니다"는 참소를 들은 황제가 직접 확인해 보고는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1) 진교 회군으로 새 왕조를 세우다
907년, 당나라의 절도사 주전충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당왕조를 무너뜨리고 후량(後梁)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왕조는 겨우 17년 만에 후당(後唐)으로 교체되었고, 다시 후당은 14년 만에 후진 (後晋)으로, 후진은 11년 만에 후한(後漢)으로, 후한은 불과 4년 만에 후주(後周)로 바뀌었다. 모두가 지방행정권과 군권을 가진 절도사가 힘을 얻자마자 창을 거꾸로 잡고 제위를 찬탈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다섯 왕조가 뻔질나게 교체되었으나 이들은 사실 화북 일대를 대략 장악했을 뿐, 변방에서는 오(吳), 오월(吳越), 민(閩), 초(楚), 형남(荊南), 남당(南唐), 남한(南漢), 북한(北漢), 전촉(前蜀), 후촉(後蜀)의 10개 소왕국들이 잇달아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이 시대를 '오대십국' 시대라고 한다.
한편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요나라라는 이름으로 강력한 왕조를 세우고, 후진의 고조에게서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 16주'를 빼앗는 등 중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실로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3백여 년 만에 찾아온 중국의 분열기요 혼란기였다.
조광윤은 927년, 후당의 수도 낙양에서 근위장교 조홍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3백여 년 전 위진남북조의 분열을 해결했던 수문제 양견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유력한 가문이었으나, 가난한 군인의 아들인 조광윤은 집안 덕을 거의 보지 못하고 21세 때 집을 나와 천하를 떠돌아 다녔다.
그러다가 곽위라는 절도사의 부하가 되었는데, 곽위는 950년에 후한을 무너뜨리고 후주의 태조가 되었다. 이때부터 조광윤의 출세길이 열리기 시작해서, 2년 뒤 근위대장의 신분으로 수도 개봉에서 근무하다가 태자 시영(柴榮)의 눈에 들어 그의 친구이자 오른팔이 된다. 그리고 시영이 954년에 즉위하면서(후주 세종) 가장 유력한 장군으로 떠오른다.
조광윤은 북한과 후주가 고평에서 충돌했을 때 죽을 위기에 처한 세종을 구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명성을 날렸으며, 그 뒤에도 다섯 번 전쟁에 나가 모두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침내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 지긋지긋한 난세를 내 손으로 끝장내겠다"며 천하통일의 뜻을 품고 영토를 넓혔으며, 내정에도 충실하여 민생과 재정을 안정시켰던 '오대십국 최고의 명군' 세종이 그만 959년의 거란 원정길에 병사하고 만다.
황제의 자리는 졸지에 일곱 살에 불과했던 시종훈(공제)에게 돌아갔다. 어린 황제와 강력한 절도사. 오대십국 시대의 정변 조건은 완벽하게 갖춰졌다.
마침내 960년, 거란군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해 출정했던 조광윤은 '진교의 변'을 만난다. 개봉 북쪽의 진교역에서 머물다가 술에 취해 잠든 그에게 부하 장수들이 억지로 황제의 옷을 입히고는 황제로 추대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조광윤이 계획적으로 쿠데타를 해 놓고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라고 여기는 수가 많다.
하지만 거란군의 침공은 분명히 있었으며, 당시 그가 출정하면서 인질이 될 수 있는 가족들에게 아무런 대비도 없이 출정했다는 점 등을 들어 실제로 얼떨결에 황제가 된 것이리라고 보기도 한다.
아무튼 조광윤의 군대는 진교에서 회군하여 황궁을 점령했다. 그리고 공제의 양위를 받아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송이라고 했다. 스무 살 때만 해도 당장 어떻게 하루를 살아갈지 기약이 없던 그가 3백 년 송왕조의 태조가 된 것이다.
(2)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나라의 근심을 없애다
뜻밖에 전 황제가 죽고 어린 황제가 즉위하는 행운을 맞이한 것도, 그 기회를 활용해 역성혁명을 벌인 것도 수문제나 송태조나 똑같았다. 하지만 송태조는 즉위 후 자신에게 제위를 넘겨준 어린 황제를 비롯한 전 왕조의 황족을 살육했던 수문제와 달리, 시종훈과 그 친인척들을 정중히 대접했다.
또한 한고조나 명태조 같은 창업 황제들과 달리, 자신을 황제로 이끌어 준 공신들을 토사구팽 시키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 과정에 피비린내는 전혀 없었다.
황제가 된 몇 달 후, 송태조는 진교에서 자신을 황제로 받든 석수신, 왕심기, 고희덕, 장령탁, 조언휘 5대 공신을 불러 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거나하게 취했을 무렵 이렇게 말을 꺼냈다. "경들이 없었더라면 어찌 지금 짐이 이 자리에 있었겠소? 진심으로 감사하오.(…) 하지만 한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소. 물론 짐은 경들을 전적으로 믿지만, 경들 중 누군가의 부하들이 언젠가 딴 마음을 먹고 술 취한 주군에게 황제의 옷을 입힐지 알 수 없지 않소?"
그런 말을 듣고 "그것도 그렇군요"라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섯 공신은 혼비백산하며 그 자리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송태조는 그들에게 계속 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 인생이란 무엇이오? 절벽 틈을 달리는 말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을. 모두들 하나같이 부귀를 원하지만, 얼마 안 되는 삶을 편안히 살다가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그것뿐인데, 그나마 지키기 힘드니 말이오.(…) 그러니 경들은 각자의 병권과 지위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면 어떻겠소? 그러면 여생은 아무 염려 없이 평안할 수 있을 것이오."
또한 송태조는공신들의 자녀와 자신의 자녀를 혼인시켜 서로 딴 마음을 먹지 않도록 하자고 권했다. 결국 석수신 등은 황제의 뜻에 따라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지방으로 내려갔다.
이 일을 두고 "술잔을 들면서 공신들의 병권을 없앴다"고 하여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라 하는데, 오대십국 내내 정권을 불안케 했던 절도사들의 병권을 술자리 한 번으로 해결해 버렸다는 말이라, 곧이듣기 힘들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다섯 명의 공신 중에는 한신이나 조광윤처럼 두드러지는 인물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 오대십국의 혼란에 지긋지긋해 하던 민심 등을 고려하면 아주 어이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송태조는 절도사들에게서 독자적 군지휘권, 행정권, 재정권 등을 순차적으로 빼앗아서 그들의 독자세력화를 막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을 중앙에서 파견되었다가 일정한 임기를 마치면 교체되는 문관 출신으로 교체하여, 지방의 반란 가능성에 쐐기를 박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오대십국 때에는 고려 무신정권 시대처럼 유력한 문무 귀족들이 모여 국정을 좌우하는 추밀원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송태조는 이 추밀원에서 무관과 대귀족을 배제하고는 종래의 재상부를 강화했다.
이로써 군사 문제는 황제 직속의 비서관들이 추밀원에서 담당하고, 그 외의 국정은 재상부에서 담당함으로써, 무관들은 권력을 직접 행사할 수 없게 되며 문관이라도 재상부의 범위를 넘어 군사지휘권까지 손에 쥘 수 없게 되었다. 그만큼 황제의 권력이 강화된 것이다.
왕권을 튼튼히 하는 한편, 통일 사업에도 열을 올렸다. 963년에 형남을, 965년에 후촉을, 971년에 남한을 멸망시켜 송나라의 영역을 넓혔다. 이들 소왕국들은 방만하고 부패한 정치운영으로 질서가 무너진 상태였기에 병합이 쉬웠다. 다만 오월 지역을 뺀 강남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남당은 간단치가 않았는데,오월과 남당을 이간질하여 서로 싸우게 한 뒤 모두멸망시켰다(975년).
당시 남당의 후주(後主) 이욱은 서현을 사신으로 보내 "우리는 후주(後周) 시대부터 대국을 섬겨 신하의 도리를 다해왔다. 무슨 명분으로 우리를 공격하느냐?"고 물었는데, 송태조는 화를 내며 "천하는 하나의 집이다! 그대는 자기 집안에서 남이 코를 골며 자고 있다면 참을 수 있느냐?"고 외쳤다고 한다.
이로써 오대십국의 잔재는 남쪽의 오월과 북쪽의 북한만이 남았는데, 이는 송태조의 사후인 978년과 979년에 각각 병합되었다. 한편 최대의 안보 불안 요인인 북방의 거란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맞서기보다 많은 공물을 주면서 회유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3) 사대부의 제국, 그 빛과 그림자
형의 문치주의를 계승한 송태종 조광의
송태조는 괄괄한 무인 출신답게 곧잘 버럭 성을 내기도 했는데, 곧바로 자신이 지나쳤다고 반성하며 잘못을 바로 잡았다고 한다.
또한 옷 한 벌을 빨고 또 빨아가며 입고, 생일 같은 잔칫날에도 일반 가정 수준으로 상을 차리게 하는 등 죽을 때까지 검소함을 실천했다. 그래서 바야흐로 사회의 주축으로 떠오르고 있던 사대부 들에게도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더구나 송태조는 이들 사대부를 적극적으로 조정에 받아들이는 정책을 취했다. 바로 과거 제도의 강화였다. 황제가 직접 시험 문제를 내고 합격자를 뽑는 전시(殿試) 제도를 처음 도입하고, 과거의 규모와 횟수를 크게 늘려 여기서 뽑은 관리들을 종래 세습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던 관직에 충원했다.
또한 태묘 안에 '맹서비'를 세워 두 가지 유훈을 후손에게 남겼다. 하나는 "후주의 시씨 자손들을 죽이지 말고 우대하라" 였고, 또 하나는 "사대부와 상소를 올린 사람을 죽이지 마라. 아무리 불쾌한 말을 하더라도 죽여서는 안된다"였다. "이를 어긴 자는 천벌을 받으리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이로써 송나라는 중국 사상 최초의 '사대부의 나라'가 됐으며, 당시 사대부의 위상은 뒤를 이은 원, 명, 청에서 보다도 훨씬 높았다.
송태조는 생전에 비빈이나 자녀 문제를 둘러싼 잡음을 남기지 않았으나, 사후에는 약간의 의문이 남았다.
976년, 그가 갑작스레 50세로 숨을 거두자 송황후는 자신의 아들인 진강혜왕 조덕방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급히 입궐하라 했다. 그러나 정작 나타난 것은 송태조의 동생인 조광의(趙光義)였다. 그는 놀란 황후에게 이른바 송태조의 비밀 유언이라는 것을 내밀었는데, 거기에는 동생 조광의를 차기 황제로 삼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를 재상 조보를 비롯한 대신들도 추인함으로써 조광의가 2대 황제, 송태종으로 즉위했다. 이를 두고 과연 그런 비밀 유언이 있었을까, 조광의의 조작이 아닐까, 아니 송태조의 죽음 자체가 조광의의 음모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추측들이 있다.
한편 당시 송태조의 세 번째 황후로서 권력욕이 강했던 송황후를 배제하기 위해 송태조가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런 쑥덕공론이 일고 있음을 모를 리 없던 송태종은 형의 문치주의정책을 더욱 강화시켜 사대부를 우대하고 무신들을 억눌렀다. 이는 빛과 어둠을 함께 남겼다. 역대 최고의 문치주의 결과 소식, 구양수, 황정견, 매요신 등 천재 문인들이 나타나고, 왕안석, 사마광 같은 대정치가 겸 문필가도 나왔다.
또한 범중엄, 장재, 주돈이와 남송 시대의 주희, 정이, 정호, 육구연 같은 사상가들이 나와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유학을 창시하기도 했다.
과학기술도 발달해서 심괄 같은 '르네상스적 천재'가 활약하는가 하면 중국의 4대 발명이라는 종이, 나침반, 화약, 인쇄술 중 종이를 제외한 세 가지가 송나라 때 확립되었다. 행정체제 개선과 농업기술 발달에 힘입어 경제적 풍요 또한 이루어졌다.
이후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킬 때, 쿠빌라이의 조정에서 지내던 마르코 폴로는 "내가 본 세상의 어떤 나라도, 그 절반만한 부를 지닌 나라가 없었다"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문을 앞세우고 무를 억누르는 정책은 만성적인 국방 불안과 정치 갈등을 가져왔다. 요나라(거란)의 위세에 송나라는 제대로 대응할 힘이 없었으며, 결국 1004년에는 '전연의 맹약'을 맺어 요에게 사실상 굴복하고서 평화를 허락 받았다.
하지만 얼마 뒤에는 다시 여진족의 금나라가 일어나면서 화북 지방을 빼앗기고 남송이 되었으며(1127년), 북벌의 꿈도 헛되이 다시 원나라에게 유린된다(1279년). 중국의 통일왕조 치고 송나라만큼 이민족의 침입에 무력했던 왕조는 없다.
또한 온 천하 사람이 사대부 되기를 바라고, 사대부는 과거 급제를 바라고, 급제자는 고위직을 바라다 보니 시험 지옥과 당리당략에 따른 당쟁을 면하지 못했다.
송태조는 오랜 분열과 혼란을 극복하고 통일왕조를 세운다는 사명을 수문제와 같이 훌륭히 완수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거의 피를 흘리지 않았고, 백성을 위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새로운 문명의 기반을 이룩한 점은 수문제보다 훌륭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피 흘리기를 회피하는 자는, 언젠가 크게 피를 흘리게 될 위험이 있다.
▶️ 一(한 일)은 ❶지사문자로 한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젓가락 하나를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하나를 뜻한다. 一(일), 二(이), 三(삼)을 弌(일), 弍(이), 弎(삼)으로도 썼으나 주살익(弋; 줄 달린 화살)部는 안표인 막대기이며 한 자루, 두 자루라 세는 것이었다. ❷상형문자로 一자는 '하나'나 '첫째', '오로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一자는 막대기를 옆으로 눕혀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막대기 하나를 눕혀 숫자 '하나'라 했고 두 개는 '둘'이라는 식으로 표기를 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그래서 一자는 숫자 '하나'를 뜻하지만 하나만 있는 것은 유일한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오로지'나 '모든'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一자가 부수로 지정된 글자들은 숫자와는 관계없이 모양자만을 빌려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一(일)은 (1)하나 (2)한-의 뜻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나, 일 ②첫째, 첫번째 ③오로지 ④온, 전, 모든 ⑤하나의, 한결같은 ⑥다른, 또 하나의 ⑦잠시(暫時), 한번 ⑧좀, 약간(若干) ⑨만일(萬一) ⑩혹시(或時) ⑪어느 ⑫같다, 동일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한가지 공(共), 한가지 동(同),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리 등(等)이다. 용례로는 전체의 한 부분을 일부(一部), 한 모양이나 같은 모양을 일반(一般), 한번이나 우선 또는 잠깐을 일단(一旦), 하나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음을 고정(一定), 어긋남이 없이 한결같게 서로 맞음을 일치(一致), 어느 지역의 전부를 일대(一帶), 한데 묶음이나 한데 아우르는 일을 일괄(一括), 모든 것 또는 온갖 것을 일체(一切), 한 종류나 어떤 종류를 일종(一種), 한집안이나 한가족을 일가(一家), 하나로 연계된 것을 일련(一連), 모조리 쓸어버림이나 죄다 없애 버림을 일소(一掃), 한바탕의 봄꿈처럼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이란 뜻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일장춘몽(一場春夢), 한 번 닿기만 하여도 곧 폭발한다는 뜻으로 조그만 자극에도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태를 이르는 말을 일촉즉발(一觸卽發), 한 개의 돌을 던져 두 마리의 새를 맞추어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한 가지 일을 해서 두 가지 이익을 얻음을 이르는 말을 일석이조(一石二鳥), 한 번 들어 둘을 얻음 또는 한 가지의 일로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을 이르는 말을 일거양득(一擧兩得), 한 사람을 벌주어 백 사람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한 가지 죄와 또는 한 사람을 벌줌으로써 여러 사람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킴을 일컫는 말을 일벌백계(一罰百戒), 한 조각의 붉은 마음이란 뜻으로 한결같은 참된 정성과 변치 않는 참된 마음을 일컫는 말을 일편단심(一片丹心), 한 글자도 알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일자무식(一字無識), 한꺼번에 많은 돈을 얻는다는 뜻으로 노력함이 없이 벼락부자가 되는 것을 이르는 말을 일확천금(一攫千金), 한 번 돌아보고도 성을 기울게 한다는 뜻으로 요염한 여자 곧 절세의 미인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일고경성(一顧傾城), 옷의 띠와 같은 물이라는 뜻으로 좁은 강이나 해협 또는 그와 같은 강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접해 있음을 이르는 말을 일의대수(一衣帶水), 밥 지을 동안의 꿈이라는 뜻으로 세상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일취지몽(一炊之夢), 화살 하나로 수리 두 마리를 떨어 뜨린다는 뜻으로 한 가지 일로 두 가지 이득을 취함을 이르는 말을 일전쌍조(一箭雙鵰), 한 오라기의 실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질서나 체계 따위가 잘 잡혀 있어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일사불란(一絲不亂), 하루가 천 년 같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이르는 말을 일일천추(一日千秋), 그물을 한번 쳐서 물고기를 모조리 잡는다는 뜻으로 한꺼번에 죄다 잡는다는 말을 일망타진(一網打盡), 생각과 성질과 처지 등이 어느 면에서 한 가지로 서로 통함이나 서로 비슷함을 일컫는 말을 일맥상통(一脈相通), 한 번 던져서 하늘이냐 땅이냐를 결정한다는 뜻으로 운명과 흥망을 걸고 단판으로 승부를 겨룸을 일컫는 말을 일척건곤(一擲乾坤), 강물이 쏟아져 단번에 천리를 간다는 뜻으로 조금도 거침없이 빨리 진행됨 또는 문장이나 글이 명쾌함을 일컫는 말을 일사천리(一瀉千里), 하나로써 그것을 꿰뚫었다는 뜻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음 또는 막힘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감을 일컫는 말을 일이관지(一以貫之), 기쁜 일과 슬픈 일이 번갈아 일어남이나 한편 기쁘고 한편 슬픔을 일컫는 말을 일희일비(一喜一悲),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는 뜻으로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함을 이르는 말을 일구이언(一口二言) 등에 쓰인다.
▶️ 瀉(쏟을 사)는 형성문자로 泻(사)는 간체자, 泻(사)는 속자, 㵼(사)는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寫(사)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瀉(사)는 ①쏟다, 붓다 ②흘려보내다 ③설사하다(泄瀉--) ④게우다, 토하다(吐--) ⑤드러내다, 나타나다 ⑥짠땅(염분이 스며 있는 땅) ⑦개펄(갯가의 개흙이 깔린 벌판)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배탈 등이 났을 때 누는 묽은 똥을 설사(泄瀉), 뱃속에 들어 있는 것을 설하여 밖으로 나가게 함을 사하(瀉下), 설사하는 약을 사약(瀉藥), 액체와 침전물을 분리하는 방법을 경사(傾瀉), 쏟아져 나옴이나 흘러 나옴을 사출(瀉出), 쥐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주위에 물도랑을 빙 둘러 내어 지은 창고를 사고(瀉庫), 위로는 토하고 아래로는 설사함을 이르는 말을 상토하사(上吐下瀉), 위로는 토하고 아래로는 설사하면서 배가 질리고 아픈 급성 위장병을 이르는 말을 토사곽란(吐瀉癨亂), 강물이 쏟아져 단번에 천리를 간다는 뜻으로 조금도 거침없이 빨리 진행됨 또는 문장이나 글이 명쾌함을 일컫는 말을 일사천리(一瀉千里) 등에 쓰인다.
▶️ 千(일천 천/밭두둑 천/그네 천)은 ❶형성문자로 仟(천), 阡(천)은 동자(同字), 韆(천)의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열십(十; 열, 많은 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人(인)의 뜻을 합(合)하여 일 천을 뜻한다. ❷지사문자로 千자는 숫자 '일천'을 뜻하는 글자이다. 千자는 사람의 수를 나타내기 위해 만든 글자이다. 千자의 갑골문을 보면 사람을 뜻하는 人(사람 인)자의 다리 부분에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이것은 사람의 수가 '일천'이라는 뜻이다. 고대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천’ 단위의 수를 표기했다. 예를 들면 '이천'일 경우에는 두 개의 획을 그었고 '삼천'은 세 개의 획을 긋는 식으로 오천까지의 수를 표기했다. 千자는 그 중 숫자 '일천'을 뜻한다. 후에 천 단위를 표기하는 방식이 바뀌면서 지금은 千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千(천)은 (1)십진(十進) 급수(級數)의 한 단위. 백의 열곱 절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일천 ②밭두둑, 밭두렁 ③초목이 무성한 모양 ④아름다운 모양 ⑤그네 ⑥반드시 ⑦기필코 ⑧여러 번 ⑨수효가 많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갖가지의 많은 근심을 천우(千憂), 만의 천 배를 천만(千萬), 아주 많은 수를 천억(千億), 여러 번 들음을 천문(千聞), 썩 먼 옛적을 천고(千古), 썩 오랜 세월을 천추(千秋), 엽전 천 냥으로 많은 돈의 비유를 천금(千金), 백 년의 열 갑절로 썩 오랜 세월을 천년(千年), 한냥의 천 곱절로 매우 많은 돈을 천냥(千兩), 백 근의 열 갑절로 썩 무거운 무게를 천근(千斤), 십리의 백 갑절로 썩 먼 거리를 천리(千里), 수천 수백의 많은 수를 천백(千百), 많은 군사를 천병(千兵), 천 길이라는 뜻으로 산이나 바다가 썩 높거나 깊은 것을 천인(千仞), 많은 손님을 천객(千客), 여러 가지로 변함을 천변(千變), 천 년이나 되는 세월을 천세(千歲),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천만인(千萬人), 썩 많을 돈이나 값어치를 천만금(千萬金), 하루에 천리를 달릴 만한 썩 좋은 말을 천리마(千里馬), 천 리 밖을 보는 눈이란 뜻으로 먼 곳의 것을 볼 수 있는 안력이나 사물을 꿰뚫어 보는 힘 또는 먼 데서 일어난 일을 직감적으로 감지하는 능력을 일컫는 말을 천리안(千里眼), 천 년에 한 번 만난다는 뜻으로 좀처럼 얻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이르는 말을 천재일우(千載一遇), 천 번을 생각하면 한 번 얻는 것이 있다는 뜻으로 많이 생각할수록 좋은 것을 얻음을 일컫는 말을 천려일득(千慮一得), 천 가지 생각 가운데 한 가지 실책이란 뜻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하나쯤은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을 천려일실(千慮一失), 마음과 몸을 온가지로 수고롭게 하고 애씀 또는 그것을 겪음을 일컫는 말을 천신만고(千辛萬苦), 천 년에 한때라는 뜻으로 다시 맞이하기 어려운 아주 좋은 기회를 이르는 말을 천세일시(千歲一時), 천 리나 떨어진 곳에도 같은 바람이 분다는 뜻으로 천하가 통일되어 평화로움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천리동풍(千里同風), 여러 시문의 격조가 변화 없이 비슷 비슷하다는 뜻으로 여러 사물이 거의 비슷 비슷하여 특색이 없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천편일률(千篇一律), 천 가지 괴로움과 만가지 어려움이라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이르는 말을 천고만난(千苦萬難), 천만 년 또는 천 년과 만 년의 뜻으로 아주 오랜 세월을 이르는 말을 천년만년(千年萬年), 무게가 천 근이나 만 근이 된다는 뜻으로 아주 무거움을 뜻하는 말을 천근만근(千斤萬斤), 울긋불긋한 여러 가지 빛깔이라는 뜻으로 색색의 꽃이 피어 있는 상태를 형용해 이르는 말을 천자만홍(千紫萬紅), 천차만별의 상태나 천 가지 만 가지 모양을 일컫는 말을 천태만상(千態萬象), 천금으로 말의 뼈를 산다는 뜻으로 열심히 인재를 구함을 이르는 말을 천금매골(千金買骨), 썩 많은 손님이 번갈아 찾아옴을 일컫는 말을 천객만래(千客萬來), 오래도록 변화하지 않는다는 말을 천고불역(千古不易), 수없이 많은 산과 물이라는 깊은 산속을 이르는 말 천산만수(千山萬水), 여러 가지 사물이 모두 차이가 있고 구별이 있다는 말을 천차만별(千差萬別) 등에 쓰인다.
▶️ 里(마을 리/이, 속 리/이)는 ❶회의문자로 裏(리)의 간체자이다. 裡(리)와 동자로 田(전; 밭)과 土(토; 토지)의 합자(合字)이다. 밭이 있고 토지(土地)가 있는 곳으로 사람이 있는 곳을 말한다. 또 거리의 단위로도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里자는 '마을'이나 '인근', '거리를 재는 단위'로 쓰이는 글자이다. 里자는 田(밭 전)자와 土(흙 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밭과 흙이 있다는 것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란 뜻이고 이런 곳에는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니 里자는 '마을'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里자가 마을 단위의 소규모의 행정구역을 뜻했기 때문에 1리(里)는 25가구가 함께 모여 사는 마을을 의미했다. 또 里자는 거리를 재는 단위로 사용되기도 하여 1리는 약 400m의 거리를 말했다. 그래서 里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마을'이나 '거리'라는 의미를 함께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용한자에서는 주로 발음이나 모양자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里(리)는 숫자(數字) 다음에서 이(里)의 뜻으로 ①마을 ②고향(故鄕) ③이웃 ④인근 ⑤리(거리를 재는 단위) ⑥리(행정 구역 단위) ⑦속 ⑧안쪽 ⑨내면(內面) ⑩이미 ⑪벌써 ⑫헤아리다 ⑬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동네 방(坊), 마을 부(府), 골 동(洞),마을 촌(邨), 마을 촌(村), 마을 서(署), 마을 아(衙), 마을 려/여(閭), 마을 염(閻)이다. 용례로는 마을이나 촌락을 이락(里落), 일정한 곳으로부터 다른 일정한 곳에 이르는 거리를 이정(里程), 행정 구역의 이의 사무를 맡아보는 사람을 이장(里長),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에서 삶을 이거(里居), 동네의 어귀에 세운 문을 이문(里門), 마을으로 지방 행정 구역인 동과 리의 총칭을 동리(洞里), 고향이나 시골의 마을을 향리(鄕里), 천 리의 열 갑절로 매우 먼 거리를 만리(萬里), 십 리의 백 갑절로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를 천리(千里), 상하로 나눈 마을에서 윗마을을 상리(上里), 아랫마을을 하리(下里), 해상의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를 해리(海里), 남의 고향에 대한 미칭을 가리(珂里), 자기가 살고 있는 동리를 본리(本里), 북쪽에 있는 마을을 북리(北里), 지방 행정 단위인 면과 리를 면리(面里), 사방으로 일 리가 되는 넓이를 방리(方里), 산 속에 있는 마을을 산리(山里), 풍속이 아름다운 마을을 인리(仁里), 다른 동리나 남의 동리를 타리(他里), 짙은 안개가 5리나 끼어 있는 속에 있다는 뜻으로 무슨 일에 대하여 방향이나 상황을 알 길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오리무중(五里霧中), 붕새가 날아갈 길이 만리라는 뜻으로 머나먼 노정 또는 사람의 앞날이 매우 요원함을 일컫는 말을 붕정만리(鵬程萬里), 강물이 쏟아져 단번에 천리를 간다는 뜻으로 조금도 거침없이 빨리 진행됨을 이르는 말을 일사천리(一瀉千里), 천 리 길도 멀다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먼길인데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달려감을 이르는 말을 불원천리(不遠千里), 말이 천리를 난다는 뜻으로 말이 몹시 빠르고도 멀리 전하여 퍼짐을 일컫는 말을 언비천리(言飛千里), 바다와 육지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음을 이르는 말을 수륙만리(水陸萬里)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