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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산군이 38線 전역에서 남침 개시. 6·25 전쟁 발발한 그 시각에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개막 이 두 사건은 똑같은 시간(서울 기준시 새벽 4시 정각)에 동시에 발생했다.
6월 25일 새벽 폿소리가 들렸다. 재운은 아침 일찍 내용을 알아보기 위하여 지서에 내려갔다
“여보시오 이순경 새벽부터 포 소리가 들리던데 뭔 일 난거 아니오?”
“쟤네들이 새벽에 포를 쏘고 넘어오다가, 지금을 우리가 밀어내고 게네들이 쫓겨갔데요”
“아 그래요 다행이내요”
그러나 포 소리는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먹고 다시 지서에 내려가 보니 지서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튿날은 되니 피난을 가야 하니 말아야 하니 모두가 웅성거렸다.
저녁 무렵 이제는 가평쪽에서도 포 소리가 들렸다.
다음날 지나고 철원서 그들의 치하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진호내가 제일먼저 짐을 꾸려서 피난을 떠났다.
6월 28일 서울이 조선인민군에 점령당했고. 황골에서도 피난민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날 재운은 아무리 생각해도 청년단 감찰부장이라는 감투가 마음에 걸려서 방하리 처갓집에 들려서 성동이를 데리고 피난을 가려고 나섰다가 벌써 인민군이 술어니 고개를 넘었다는 소식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차금돌이 찾아 왔다.
“형님 인민군 환영대회가 있으니 지서 앞으로 나오세요.”
다음날 지서 앞에 가 보니 지서에는 인공기가 달려 있었고 인민군 10여명이 있었다.
면 인민위원장의 환영사가 있었고 조선민주주의 공화국만세를 불렀다.
매일 모여서 정치학습이라는 걸 하는데, 주로 대한민국의 토지개혁을 비판하는 내용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는 지주나 일제에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공평하게 나누워 주고 공평하게 사는 사회를 만들었다고 하면서 이제 미제와 일제 앞잡이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공평하게 토지를 나누어 준다고 했다.
그러나 좁은 산간 마을에 소작을 붙이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은 곳이지만 몇 몇은 마음이 흔들이고 있었으나, 재명이는 재운 재덕을 불러서 이런 난세에는 어느 곳에도 붙지 말고 그저 조용히 있는 게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라고 하면서 경거망동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재운이가 대한청년단 감찰부장을 맡은 게 제일 걱정이었다.
얼마 후 인민군은 두 명만 남고 이내 전선으로 떠났고 차금돌이 공회당에서 인민재판이 있으니 모두 모이라고 했다.
유 제광이가 두 손이 묶이어 있었고 그 옆에는 인민군이 총을 메고 서 있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차금돌이 나서서 유제광을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
“지금부터 일제 앞잡이 이며 악덕 지주인 유제광에 대한 인민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유제광은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악덕지주이며 일제에 협력을 한 자로서 우리 인민군이 남조선을 해방시키는 과업에 협조를 하지 않고 쌀을 세 가마나 부엌에 독을 묻고 혼자 호의호식 하려는 반동 악질반동분자로서 오늘도 피 흘려 싸우는 위대한 인민군대를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는 자로서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합니다.”
제광은 무릎 꿀린 체 앉아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틀거리며 300m를 걸어서 내무서(지서)로 끌려가고 마을 사람들도 따라서 걸어갔다.
그의 처가 딸아이를 등에 업고 아들 효상이의 손을 잡고 따라 걸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하나 그를 위하여 말한 마디 할 수가 없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제광의 두 눈은 수건으로 가려졌고, 이내 금돌이가 총을 들어 겨누고 10여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소리와 함께 제광의 머리에서는 피가 튀었고 그의 처는 털썩 주저앉았다.
모든 마을 사람들은 경악했다.
금돌은 순간 괜히 했어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서 안으로 들어가면서 문을 광 닫았다.
제광의 시신은 몇 사람의 친한 사람들이 모여서 장사를 지냈다.
그로부터 마을은 차금돌 일행을 슬 슬 피하고 젊은이 몇, 몇을 빼고는 가까이 하려고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이지 않게 마을 사람들은 두 패로 뉘어지고 서로가 서로를 믿지 않는 분위기가 되어갔다.
이 분위기를 차금돌 자신도 감지하고 있었다.
어쩌다 완장을 차고, 마을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처지가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재운의 할아버지와 자기의 증조할아버지의 인연 때문이었는지 하루는 재운을 찾아와서
“형님 나 좀 보세요. 왜 저그 방하리 사는 왜 성만이 있잖아요.”
“응 성만이 내가 잘 알지”
“근대 게가 면 인민위원 회의에서 우리 면에도 불순분자를 색출해야 한다고 해서 면 인민위원장이 군 가족 경찰가족 그리고 면이나 군청에 다닌 사람 대한청년단 간부를 적어 올리라고 하데요”
“그래서”
“황골에는 없다고 하니까. 청년단 감찰부장이 두 사람이나 되잖아 그러데요.”
“그래서.”
“한 사람은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을 했고, 한 사람은 억지로 맡은 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니까, 적어 올리라고 해서 형님 이름을 적었어요.”
“그래.”
“그래서 말인 데요, 형님 피하세요.”
“아 알았네.”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만 것이었다.
하기야 재광이 다음 차례는 재운이가 될 것은 뻔한 것이어서 연순에게 만약 인민군이 오거나 하면 피해야겠다고 했다.
그러던 연순이 어느 날 태어 난지 얼마 안 되는 막내 희동이가 유난히 보체서 업고 옥순이의 손을 잡고 사립문은 나서다가 습관처럼 큰 길 쪽을 내다보았는데 차금돌이 총을 멘 인민군 한 명하고 논둑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연순은 급히 돌아 들어와 마루에 앉아 짚신을 삼던 재운에게 달려와,
“여봐요! 성동 아버지 빨리 빨리 숨, 숨어요! 인민군이 와요”
재운은 급히 벽장으로 올라가 숨었고, 이윽고 도착한 금돌이가 눈을 끔벅이며
“형님 어디 가셨어요.”
“애 아버지는 방하리 친정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아침 일찍 방하리에 갔어요.”
그때 인민군이 엄마 손을 잡고 있던 옥순에게 한마디 했다.
“참 예쁘게 생겼구나. 몇 살이니”
“여덧살”
“너의 아버지 어디 갔니?
“울 아버디 음 음 벽산에 올라갔어.
연순은 깜짝 놀라 옥순을 잡아끌며
“이 이놈의 기집에 아버지가 언제 산에가 이년이 거짓말도 잘해 네가 아까 외갓집에 안 데리고 간다고 울고불고 하구서”
하며 잡아끌고 부엌으로 들어갔고 인민군과 차금돌은 집안을 한 바퀴 돌아본 후, 금돌이가 연순에게 눈을 끔벅여 신호를 보내며
“형님 오시면 내무서로 오시라고 하세요.”
하면서 나가서 물개 지서 쪽으로 갔고, 연순은 바로 옥순을 불러서
“이놈의 기집에 큰일 날 뻔 했잖아, 모르는 사람이 아버지 어디 갔느냐고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 알았어, 그리고 놀다가 저기 큰길에서 우리 논둑길로 인민군이나 모르는 사람이오면 빨리 집으로 뛰어와서 엄마나 아버지 한태 알려야 한다.”
금돌이나 인민군은 마루에 있던 짚신 삼던 지푸라기며 짚단을 보면 부근으로 도망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겠지만, 금돌이가 눈을 감아준 덕분으로 재운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터는 재운은 바로 작은 황골 입구에 있는 재명의 집에서 지내다 시피 했다.
차금돌이 몇 칠에 한 번씩 사람들을 귀찮게 모이라 해놓고 정치교육을 했다,
위대한 조국통일 과업이 성취될 날이 얼마 남지않았다고 하면서 떠들어 대는데 사실은
7월 20일에는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수도를 대구로 옮겼고 8월 3일에는 다부동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홍역이 돌기 시작했다.
맨 처음 연순이 낳은 희동이가 얼굴에 붉은 반점이 돋더니 온몸으로 번졌다.
이어 윤희가 낳은 아이도 똑같은 증세가 나타났다
이에 희상은 명동이에게 병이 옮을까 전전 긍긍 했으나, 한집에 살면서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이내 희상이 낳은 명동이도 홍역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몇 칠 뒤 연순의 아들 희동이가 죽었다.
재명과 재운 재덕은 무명 기저귀에 둘둘 말아서 뒷산 애총이 많은 후미진 곳에 삽으로 두자 깊이로 파고 묻고 솔가지를 꺾어서 덥고 그 위에 큼직한 돌들을 올려놓고 내려 왔다.
이틀 후 윤희가 낳은 아이도 죽었다.
또 몇 칠 후 희상가 그렇게 마음을 졸여 하던 일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명동이가 숨을 몰아쉬며 견디기 힘들어 하더니 결국은 죽고 말았다.
백일이 지나고 벙글벙글 웃어서 어미의 마음에 있는 정 없는 정을 주더니 죽어 버리고 말았다.
에그, 진즉에 내말대로 아이도 없고 한갓진 친정에서 살았으면 홍역이 옮지 않고 명동이는 죽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몇 칠을 아들을 잃은 슬픔에 시음을 전패하고 울었다.
재덕이 위로를 한다고 하였지만 쉽게 마음이 진정 되지 않았다.
재덕은 삼동서가 똑같이 아이들을 잃었으니 마음의 상처가 같으리라고 생각을 했는지, 야속하게 평상심을 되찾아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희상은 깊은 우울증에 빠져 들고 있었다.
급기야 병이 깊어져 실없이 웃기 까지 하더니 어느 날 연동이 엉덩이를 때리는 것을 급히 말려고 때어 놓은 일이 있고 나서 몇 칠 후 검불을 긁어모아 불쏘시개를 해가지고 화로에서 부젓가락으로 불씨를 꺼내어 후 불면서 이집에는 귀신이 있으니 불 질러 버려야 한다고 하면서 불을 지를 뻔한 일까지 있었다.
그러니 쉬 쉬 했지만 미쳤다는 소문까지 나고 재덕은 오만 정이 떨어졌다.
그 무렵 성동이는 그 긴 여름을 외갓집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정찰기가 하늘을 자주 다니고 쌕쌕이(제트기)까지 자주 하늘에 보였다.
그날은 비행기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더니 이내 쾅하는 소리가 들려서 소리가 나는 가평쪽을 보니 철교를 끊기 위해 폭격기들이 차례로 급강하해서 포를 쏘고 올라가는 것을 한참 동안 재미있게 보았다.
전황은 인민군들이 예기하는 것처럼 쉽게 되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저녁에 발산리 당위원장 차금돌이 동내 사람을 모아놓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최태봉 동무가 인민공화국을 위하여 의용군에 지원했습니다.”
“우리 모두 나서서 최태봉 동무를 열열히 환송합시다.”
다음날 최태봉은 인공기를 두르고 동내 사람들은 인공기를 흔들고 소암다리를 건너 속실 까지 따라가서 손을 흔들어 보내고, 천식 부 선복과 처 용단 아들 만석과 정순은 눈물을 훔치며 발산초등학교 까지 따라 갔다.
학교에는 여러 명이 와 있었다.
그날 그곳에서 저녁까지 있다가 돌아왔다.
이튿날 용단은 먹을 것을 싸 가지고 만석과 정순을 앞세우고 학교에 가 보았으나 벌써 떠나고 없었다.
용단은 털썩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했다.
용단은 그렇게 큰아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몇 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8월 18일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겼고, 열흘 뒤 조선은행권과 한국은행권이 1:1로 바꾸는 화폐 개혁이 단행 되었다.
저번에 발산리에서는 천태봉이가 의용군에 나갔고 가정리에서도 한명을 보냈는데 방하리에는 지원자가 생각처럼 모이지 않았다.
그리고 군 인민위원회에서는 의용군을 뽑아 보내라고 닦달이니 방하리 성만은 초조해 했지만, 9월 15일 06시를 기해 인천 월미도로 유엔군과 국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개시하여 성공을 하였다.
9월 16일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인민군에 총반격 시작 했다.
추석을 일주일 앞둔 9월 18일 이번 사상교육이 있던 날 성만은
“우리의 위대한 인민군은 조국해방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불철주야로 열심히 싸워서 이승만 도당을 저 부산 앞 바다에 몰아넣을 날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동참할 젊은이들은 떨처 나서야 합니다. 우리 방하리에 그런 젊은이가 없습니까?”
성만이 열변을 토 했지만 솔선해서 전쟁터에 나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다음날 성만은 전황이 불리하니 반동분자들을 처단하고 철수를 하라는 군 당위원회의 연락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성만은 특별 교육이 있으니 모이라고 했다.
오늘도 의례 헛소리나 하다가 끝나겠지 하면서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의 위대한 인민군대가 몇 칠 후면 부산을 해방시키게 됐습니다.”
모두 눈치를 보면서 박수를 쳤다.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오늘은 젊은이 들을 위한 특별훈련을 남이섬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반공호 구축공사를 해야 하니 삽이나 괭이를 하나씩 가지고 오시오”
그날 성동의 외삼촌 연학은 가지 않고 산에 가서 숨었다.
그래서 방하리에서 28명이 배에 나누어 타고 남이섬으로 건너갔다.
그곳에는 가평쪽에서 온 사람들도 한 20여명 있었다.
십여 명의 인민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덩이를 파라고 했다.
뒤늦게 눈치를 챘으나 이미 늦었다 섬이어서 배가 아니면 도망칠 수도 없고 총을 든 인민군이 있으니 그럭저럭 웬만큼 구덩이가 파졌을 무렵 인민군이 거총을 한 가운데 성만을 비롯한 열성분자가 죽창으로 사람이 사람을 찔러 죽이기 시작했다.
총알이 아깝다는 이유로 그렇게 자신이 찔러 죽임을 당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서너 명이 죽어가고 공포의 시간을 몰려오고 있었다.
어떤 이는 차라리 눈을 감았지만 비명소리마저 막지를 못했다.
사람이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살해를 해가는 그런 살인극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다 생각을 여러 방향으로 하던 사람 중 하나가 이대로 죽으나 도망을 치다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미치자, 한 사람이 뛰기 시작하자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피가 튀고 여기 저기 사람이 쓰러져 갔다. 모두 몇 발작국도 도망을 치지 못하고 쓰러지고 총알을 피하기 위해 쓰러진 사람도 있었지만.
“사격중지”
라는 지휘관의 소리 후 사격은 멈추었다 모두 멀리 도망도 못하고 쓰러져 있거나 부상당한 사람의 신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검시를 해가며 죽창과 대검으로 움직임이 있는 자는 가차 없이 찔러서 숨을 끊었다.
광난의 살인극이 벌어지고 삽으로 대충 흙을 덥고 배를 타고 섬을 떠났다.
그날 저녁 그들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북을 도주를 했고, 다음날 아침 배를 다고 남이섬으로 아들 들을 찾아 나선 가족들을 잔혹한 광경에 털썩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을 했다.
그날 방하리에서 끌려갔던 젊은이 중 한명만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이는 한 사람 뿐이었다.
그리고 황골에서 차금돌은 인민군과 함께 소주 고개를 넘고 있었다.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 서울 탈환. 서울을 되찾았다.
인민군이 물러나자 재운은 급히 방하리 처가로 갔다.
다행이 성동이도 무사하고 처갓집 식구들도 모두 몸 다친 사람 없이 무사했다.
그리고 재운이 이틀 후 집으로 돌아와 보니 빨갱이들을 향한 피의 보복이 시작되고 있었다.
방아리, 간내월, 박암이, 가경자, 가재골, 후동, 등 소주 고개 이쪽 넘어 에서 부역을 하거나 의용군을 내보낸 가족 이른바 빨갱이 앞잡이를 한 사람들이 줄줄이 지서로 끌려와 이틀도 안 되어 굴비 역듯 묵어가지고 내미섬으로 끌고 가서 총소리가 나면 돌아오지 못했다.
용단의 식구들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자니 도저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서에서 대한청년단원들이 선복의 집을 향하여 걸어오고 있었다.
급박해진 용단을 만석과 정순을 불러서
“너희들 용동이 작은 아버지 찾아가서 우리식구들 청년단에서 잡으러 오니 살려달라고 가서 빌어라. 그리고 정 안되면 우리 좀 숨겨 달라고 해라 너희들 까지 어떻게 하겠냐.”
그렇게 만석은 성동이네 집으로 정순은 작은 황골과 큰황골 어귀에 용동의 집을 달려갔다.
“용동이 작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어머니 좀 살려주세요. 지금 청년단에서 우리 엄마 아버지 잡으러 왔어요. 제발 좀 살려 주고 숨겨 주세요. 잡혀가면 저희들은 죽어요. 흐 흐 흑.”
“그래. 그래 알았다 내 가서 힘써 볼게 울지 말라.”
“훌쩍 훌쩍 용동이 작은 아버지는 울 큰오빠 친구잖아요. 제발 살려주세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울고 있는 정순을 보니 친구 태봉이 생각이 나서 재덕도 눈물이 났다.
그리고 살려달라고 우는 정순을 달래줘야 갰다는 생각에 정순을 보듬어 안고 토닥였다.
“그래 정순아 걱정 말아 내가 형님하고 힘써 볼 테니 울지 마.”
“그리고 여기에 숨겨 주세요. 흑 훌쩍 .”
그리고 선복의 동생 선영의 식구들도 나와서 울면서 따라가서 지서에서 선영의 부부가 용서해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재덕과 희상이 살림을 하고 있는 건넌방에 숨어 있게 되었다.
붙잡혀 들어온 용단은 한참을 정신없이 앉아 있다가 지난날을 생각해 보니 기막히기가 그지없었다. 종년으로 태어나 주인에게 정결을 빼앗기고 주인마님이 귀머거리 머슴 남편으로 맺어줘 식도 올리지 못하고 방으로 몰아넣고 살게 하면서. 내가 종이라는 이유로 남편마저 종처럼 대우해 가며 부리는 것을 숙명으로 여기고 살다가 세상이 좋아져 종살이를 벗어나 삼남매 낳고 살면서도 큰소리 한번 못 쳐보고 우물가 아니면 일을 나가서도 다른 사람들은 오미댁 광주댁 하며 택호를 부르면서도 늘 불리느니 태봉이 어멈 아니면 만석 어멈 정순어멈으로 통용되며 잡초처럼 살아오다가 아들마저 의용군에 빼앗기고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으니 기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재운의 집에 숨어있던 만석과 재덕과 희상의 살림방에 사흘이나 숨어있던 정순까지 잡아 들였다.
그러는 동안 재운과 재덕이 여러 사람을 붙잡고 선복의 식구들을 빼 달라고 이야기 했지만 분위기가 살벌해 지더니 내일 처단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선복을 필두로 용단이 열다섯 살의 만석이 그리고 열네 살의 정순이 까지 깍지 낀 손을 머리 뒤로 넘겨서 머리를 감싸고 줄을 서서 내미섬으로 향하고 있었다.
선복의 동생 선영의 식구들도 나와서 울면서 따라가면서 선복이 식구들을 살려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재운이 한 번 더 호소를 했다
“앞장서서 빨갱이 노릇을 한사람은 처단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무식한 사람까지 죽이면 어떻게 우리가 빨갱이들 하고 다른 게 무엇이 있습니까? 불상한 저들을 죽여서 분풀이를 한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옵니까? 죽일 놈은 차금돌이 그놈이지 따지고 보면 태봉이도 불쌍하게 의용군에 끌려간 게 아닙니까. 그가 끌려감으로 인해 금돌이가 사람을 더 이상 해치지 않은 것 아닙니까. 아 방아리서는 아주 동내가 쑥밭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만한 것이 다행이라 여깁시다. 우리가 저들을 죽이는 것도 살려주는 것도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선복이내 식구들은 내가 책임질 테니 살려 줍시다.”
재운의 한마디가 설득력이 있었는지 선복의 가족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풀려났다.
그 일을 계기로 용단은 재운과 윤희의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고 도왔다.
10월 1일 대한민국 국군 3 사단 26연대가 강원도 양양군서 한국전쟁 발발 후 최초로 38선 넘어 북진을 시작했고, 유엔총회에서도 유엔군의 38선 이북 진격과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설치 결의했다.
10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요 기관과 단체 등을 평양에서 철수하면서 임시 수도를 강계로 정하고, 사흘 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평양을 버리고 철수를 했다.
첫댓글 하머트면 큰일 날 뻔 했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