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세쿼이아가 울창한 삼림 쉼터에서 커피 한 잔으로 피로를 달래며 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도무지 생각지 못한
일이다. 사람과 산비둘기는 잠시도 어울릴 수 없는 관계다. 그런데 그곳에서 함께 호흡하는 광경을 본 것이다. 그것은 산 비둘기에 대한 이야기다.
비둘기 한 쌍이 우리 곁에서 모이를 주워 먹고 있다. 옆에서 사진을 찍고 구구 소리를 내도 날아가지 않는다. 산 비둘기는 야생 동물로 사람을
멀리하는 습성이 강하다. 간혹 산에 올라갔을 때 이놈들을 본다면 100m 정도 떨어져 있어도 혹시 자기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을까 두려워 멀리
날아간다. 인간과 야생 동물이 함께 호흡하며 정겹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인간이 더 노력해서 친구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삼성산 성지(聖地)에 도착했다. 다리 입구엔 "기도하는 곳입니다. 삼성산성지"란 팻말을 붙여
놓았다. 작은 다리를 건너자 마자 원추리란 야생화가 아름답게 피어있다. 원추리는 우리를 보곤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을 한다.
인사하며 활짝 웃는 모습은 왜 이리도 고울까? 그녀의 웃음속엔 행복이 가득하다. 그녀을 보는 순간 필자도 가슴에 기쁨과 행복이 넘쳐난다. 이렇게
필자와 그녀는 마음과 마음이 통했나 보다. 서로 행복을 감추지 못하고 웃음을 토해냈으니 말이다.
성지(聖地)로 들어갔다. 산비탈을
이용해 자연적으로 야외 성당을 만들었다, 제일 밑에는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제대를 설치해 놓고 비탈에 신자들이 앉을 수 있게 나무 의자를 보기
좋게 배치해 놓았다. 훌륭하게 미사를 볼 수 있는 야외 성당이다. 아마도 초창기의 성당이 이러하지 않았나 싶다. 필자는 기도도 하지 못하고
성호만 긋고 급한 마음에 여기저기 다니며 사진찍기 바빴다. 삼성산(三聖山) 성지(聖地)는 기해박해(1839년) 때 새남터에서 서양인
성직자로는 처음으로 천주교를 전교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아, 1839년 9월 21일(음 8월 14일)에 군문 효수의 극형으로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范)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鄭) 신부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군문
효수(軍門梟首)= 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 앞에 매다는 일이나 그러한 형벌을 이르던 말을 말한다.
삼성산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 효소(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라우랜시오 앵배르 범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 신부,
성 야고보 샤스탕 정 신부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이들은 1836년 이래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던 중 이국적인 외모를 감추기 위하여
상복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으며, 밤낮으로 험한 산길을 걸으며 전국에 흩어져 있는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 복음 전파에 힘썼다. 아울러 모방
신부는 당시 소년이었던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 최방제 프란치스코 등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 최초의 조선인 신부를 양성함으로써
조선 천주교회에 큰 업적을 세웠다. 한편,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세 성직자는 교우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스스로 관가에 나아가
자수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軍門梟首刑)으로 1839년 9월 21일 사형을 당하였다. 이때 앵배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샤르탕 신부는 35세였으며, 이들의 유해는 20여 일간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다가 후에 교우들의 노력으로 노고산(지금의 서강대
뒷산)안장되었고, 1843년 박 바오로 등에 의해 다시 발굴되어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58년 후 1901년
박 바오로 아들 박순집의 고종으로 조선 제8대 교구장 뮈텔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 성직자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 학교를 거쳐 같은 해
다시 명동성당 지하 묘지로 옮기게 되었다. 세 성직자는 1925년 7월 25일 시복되었으며, 1970년 봄 오기선 신부에 의해 그동안 아무런
표시도 없이 방치되어 오던 삼성산이 세 성직자의 매장되었던 곳으로 확인됨에 따라, 같은 해 5월 12일 김수환 추기경과 노기남 대주교 및
박순집의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 비석을 세우고 축성식을 가지면서 삼성산 안장터는 성지로서 최소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인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세 성직자가 시성의 영광에 오르자 이를 기념하여 서울대교구에서 묘지
부근의 땅 1만 8천여 평을 매입했다. 1988년 명동성당에서 성인 유해를 일부 옮겨와 안치하고 축성식을 가졌다. 이후 관할 본당인
삼성산 성당에 의해 관리되고 있으며, 세 성인을 기념하기 위해 월례 미사는 이들의 순교 일인 매월 21일, 주일 미사는 부활 제2주일부터 연중
제34주일까지 봉헌하고 있다.
1839년 기해년이 되어 조정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돌고 있었는데, 세도 정치가들의 갈등이 더한
시점에 외국인 신부들의 입국 사실이 알려지자 정치적으로 교우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유진길 성인과 조진철 성인 정하상 성인 등
교회의 중진들이 서소문 형무소에 참수되고 성 앵베르 주교님은 한양을 떠나 수원 상골 마을에서 피신 중이었다. 그러나 배교사 김순성에 의해
피신처가 발각되고 성 앵베르 주교님은 교우들의 피해를 염려하여 자수하시었고, 다른 두 신부(모방샤스땅)에게 편지를 보내 자수를 권유하셨다. 이
권유에 두 분의 신부님도 자수하여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세분의 성인들은 두 손을 뒤로 돌려 묶인 채 가마에 태워져 호송돼 형장으로
가셨고, 성인들의 옷을 바지만 남기고 모두 벗긴 다음 두 손을 앞으로 묶고 긴 막대기를 두 팔 밑으로 넣었으며 두 개의 화살로 양쪽 귀를
위아래로 뚫고 얼굴에 횟가루를 뿌린 뒤 형장의 주변을 세 바퀴나 도셨다고 한다. 다시 무릎을 꿇게 하여 말뚝에 붙들어매단 후 12명의
병졸이 둘러싸 돌면서 한 번씩 성인들의 목에 칼질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서양인에 대한 최초의 사형선고였고 1839년 9월
21일(음력 8월 14일)에 군문 효수라는 극형으로 한강의 새남터에서 순교하셨다. (삼성성당 홈페이지 중 각색)
천주교의 슬픈
역사를 가슴에 안고 발길을 돌렸다. 이제 호압사(虎壓寺) 쪽으로 간다. 호압사(虎壓寺)는 지난번 호암산(虎岩山) 등산할 때 기록을 남겼다.
호압사(虎壓寺) 경내를 또 한 번 살펴보았다. 지금부터는 석수역으로 가면서 아름다운 삼성산을 볼 것이다. 우리는 호암 늘 솔길로 접어들었다.
걷기 편할 뿐 아니라 데크를 아름답게 깔아 놓았다. 호암 늘 솔길은 "언제나 솔바람이 부는 길"이라는 뜻으로 시민공모 결과 선정되었다.
호압사(虎壓寺) 입구에서 잣나무 산림욕장을 지나 호암산 폭포까지 총 1km이고, 보행 약자를 포함하여 누구나 쉽게 산을 이용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가는 도중에 "신선길"이 있다. 신선길은 시흥동 지역의 토템 신앙으로 기도를 올리던 장소로 유명하다. 토템 신앙은
하늘의 해와 달, 별자리, 땅 위의 산과 들, 바다와 계곡, 동네의 우물, 바위와 고목, 가택의 대들보와 부뚜막, 심지어 화장실과 굴뚝까지도
우주 만물을 신으로 모시는 형태이다. 신선길은 150m의 돌계단과 주변에는 많은 돌탑이 쌓여 있으며, 이 길은 한 우물과 서울
호암산성으로 연결된다.
호압사 산책길은 관악산에서 시작하여 호암산, 석수역으로 연결되는 서울 둘레길 5코스의 일부 구간으로 거리는
3.7km이다. 전통사찰인 호압사에서부터 경사가 완만한 산행길을 따라 잣나무 산림욕장, 호암산 폭포, 칼바위 등 호암산의 아름다운 지역 명소가
위치하여 잠시 쉬며 산림욕과 사색을 즐길 수 있고 멋진 풍광과 함께 자연을 즐길 수 있으며, 삼국시대 유물인 호암산성, 한우물 등 역사유물도
함께 구경할 수 있어 지역주민의 사랑을 받는 산책로이다.
이 회장과 함께 삼성산 천주교 성지를 비롯해 호압사를 거처 호암 늘
솔길를 약 3시간 30분을 걸었다. 천주교 성지를 보고서 종교의 힘이란 참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종교가 아니라면 어찌 타국에 와서 자기가
죽을 것을 각오하고 신자들을 죽음에서 구하려 하겠는가? 결국 주교를 비롯해 신부 두 분은 형벌 중 가장 무서운 군문 효수형(軍門梟首刑)을 받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필자는 알지 못했던 역사를 많이 배워간다. 삼성산(三聖山)을 돌면서 수필 3편을 쓸 수 있게 도와주신 이상갑 회장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