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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존탑일층(惟存塔一層)
탑만 한 층 남았구나는 뜻으로, 방랑하던 양녕대군 이제(李禔)가 가난한 산속 암자에서 쓴 시의 말구이다.
惟 : 오직 유(忄/8)
存 : 있을 존(子/3)
塔 : 탑 탑(土/10)
一 : 한 일(一/0)
層 : 층 층(尸/12)
출전 : 김시양(金時讓)의 자해필담(紫海筆談)
제승축(題僧軸) / 이제(李禔)
스님의 두루마기에 쓰다
山霞朝作飯(산하조작반)
산안개로 아침밥을 짓고
蘿月夜爲燈(나월야위등)
여라(女蘿) 넝쿨에 보이는 달로 등불 삼네.
獨宿孤庵下(독숙외암하)
외로운 암자 아래 홀로 자니
惟存塔一層(유존탑일층)
오로지 탑 한 층이 남았구나.
위 시는 태종(이방원)의 맏아들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시 제승축(題僧軸; 스님의 두루마기에 쓰다)로, 조선 중기 문신 김시양(金時讓)의 문집 '자해필담(紫海筆談)'에 실려 있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은 1404년 10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엄격한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 폐위됐다. 그 뒤 궁을 나와 떠돌았다. 태종의 셋째아들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세종이다.
양녕대군은 그렇게 유랑하다 어느 산속 작은 암자에 묵었다. '승축(僧軸)'은 스님의 시 두루마기로 방명록 같은 것이다.
가난한 암자여서 아침 공양도 없었는지 안개로 밥 짓는 상상을 한다. 스님은 여라 넝쿨 사이로 보이는 달빛을 등불로 삼아 산다. 탑도 다 무너지고 마지막 한 층만 남았다. 양녕은 그 탑이 마치 자기 모습인 양 느낀다.
세자로 부귀와 권세를 다 누려보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만사 저 무너진 탑처럼 다 부질없다는 심경이 마지막 시구에 담겼다.
오늘 종일 매화가 거의 만개한 차산에서 일하는 동안 조선 초기 정치적 사건들이 떠오르면서 태종과 양녕대군의 형제들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밤에 시에 뛰어났다는 양녕대군 자료를 읽다 위 시에 눈길이 갔다.
목압서사는 목압사(木鴨寺) 절터다. 무너져 뒹굴던 목압사 탑은 인근 쌍계사 금당(金堂)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목압사 주춧돌로 추정되는 돌만 몇 개 흩어져 있다. 밤이 되면 자그만 암자에 앉아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그래서인지 위 시의 암자 모습이 절로 상상된다.
미친 척하며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준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시 '문수대(文殊臺)'도 이 시와 맥락이 통한다는 느낌이다.
문수대(文殊臺) / 이보(李補)
仙人王子晉(선인왕자진)
신선 왕자진이
於此何年游(어차하년유)
어느 해에 여기서 노닐었나?
臺空鶴已去(대공학이거)
학은 이미 떠나고 대는 비어
片月今千秋(편월금천추)
조각달은 지금까지 천 년일세.
■ 제승축(題僧軸)
제승축(題僧軸) / 이제(李禔)
(스님 두루마리에 쓰다)
山霞朝作飯(산하조작반)
아침에는 산 노을을 밥 삼아 마시고
蘿月夜爲燈(나월야위등)
밤에는 덩굴에 걸린 달이 등이라네
獨宿孤庵下(독숙고암하)
외로운 초막에서 홀로 머물며
惟存塔一層(유존탑일층)
마음에는 오직 하나 탑 한 층 쌓는다네
깨끗한 시다.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시다. 세상을 등진 채 모든 욕심을 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구도(求道)의 수행(修行)길을 걷는 한 스님에게 세종대왕의 형이자, 왕위에 오르지 않으려 짐짓 광인 흉내까지 냈던 양녕대군이 그 스님의 두루마리에 써 준 시다.
이 스님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깨달음을 향해 쌓아가는 조그만 탑이란다. 만족을 모르고 끊임없이 더 많은 소유를 위해 핏발 선 눈으로 살아가는 많은 이에게 무소유(無所有)를 몸소 실천하고 입적한 법정 스님 같은 고승이 되라고 할 수는 없는 일. 그저 부끄러움을 알라고 권하고 싶다.
(해설)
아침은 산노을로 밥을 삼고, 산노을이나 마시고. 밤에는 댕댕이덩굴에 걸린 달빛으로 등불을 삼네. 외로운 암자(또는 초막) 아래 혼자 잘 때, 오직 탑 한 층만이 있다.
아침은 산노을이나 마신다. 쌀 한톨도 없나 보다. 저녁은 달이나 본다. 쌀 한톨 없는데 초 한자루 있을 리 없다. 방은 암자(초막)에서 혼자 잔다. 집도 없고 가까운 사람도 없으니까. 모두 버렸나 보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누구일까, 그 사람? 임금 자리를 버린 양녕대군, 그런 그가 무엇을 탐하여 그걸 가지려 하겠는가? 모두 버렸다. 그러나 그도 사람, 마음속 깊은 곳에 탑 하나는 간직하고 있었다. 무엇을 기원하는 탑이었을까?
시가 너무 깨끗하다. 이런 시를 읽으면 자신의 치졸한 삶이 부끄럽게 떠오른다. 쌀독에 쌀이 가득해도 더 가지려고 한다. 불이 밝아도 더 밝은 불을 켜려 한다. 살기에 충분한 집인데도 더 늘리려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엔 기원의 탑 하나 간직할 줄을 모른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은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멋쟁이 풍류객이었다.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형이다.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폐위되고, 그 뒤 전국을 누비며 풍류를 즐겼다. 시, 서에 능하였다.
1394년 태종 이방원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며, 부인은 광산 김씨 김한로의 딸이다. 이름 이제(李禔)이고 자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1404년(태종 4) 10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1406년 부왕 태종이 어린 세자에게 양위의 뜻을 밝히자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외삼촌 민무구, 민무질이 어린 양녕에게 의탁하여 권세를 탐하다 처형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어린시절부터 정치적 파장이 있었다.
양녕은 성품이 자유분방하여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고 사냥을 좋아했고 기생을 탐하여 궁궐 내 처소에 여자를 불러들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그리하여 부왕인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고, 부왕은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 뜻에 부합하지 못하고, 남의 첩인 어리(於里)라는 여자를 탐하여 임신까지 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궐 밖에서 아이를 낳게 되었고 그의 비행을 감싸주던 장인 김한로는 귀양을 가게되었다. 황희도 세자 양녕을 두둔하다 처벌을 받았다.
결국 유정현(柳廷顯) 등의 상소로 폐세자되어 경기도 광주로 물러나 살게되었다. 양녕이 폐세자 되자 뒷날 세종이 된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책봉되었다. 당시 양녕은 자신의 비행을 충녕이 태종에게 고한 것으로 알고 충녕을 원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은 이러한 양녕의 자유분방한 기질을 잘 알았기에 그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는데 양녕을 탄핵하는 상소는 모두 물리고 받지 않았다고 전한다.
양녕이 궁궐을 나와서는 타고난 그의 기질대로 한량으로 생활하였는데 시, 서예, 음악 등 예술에 관심을 가졌고 일생을 풍류객으로서 자유분방한 생을 지냈다.
호탕한 기질로 술을 좋아하고 기생들과 어울렸으나 이러한 기질이 정도를 지나쳐 그의 문란함은 세종에게 여러차례 상소로 올려지기도 했다. 특히 여자와 어울린 간통사건이 많았으며 양녕의 자녀들도 방탕한 생활로 세간에 회자되었다.
문종이 사망하고 어린 단종이 보위에 오르자 정치적으로는 세조를 지지하였고 그가 일으킨 계유정난에는 직접적 개입하지 않았지만 세조가 조카(단종)와 정적(김종서 등 사육신)을 살해하는데 동조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에도 그의 방탕한 생활은 계속되었지만 정치적으로 세조를 지지한 덕분에 오히려 보호를 받았다. 69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서울 숭례문의 편액(扁額) '숭례문(崇禮門)'이 그의 필적이라는 설이 있다.
■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 ~ 1462. 9. 7)
양녕대군(讓寧大君)은 조선시대 초기의 왕세자이자 왕족, 정치인, 화가, 시인으로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성은 이(李), 휘는 제(禔), 자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조선 세종, 효령대군, 성녕대군의 친형이다.
1404년(태종 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9년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유정현(柳廷顯) 등의 상소로 폐위되었다.
그뒤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세자가 되었다. 세자 폐위 이후에도 자유분방한 활동이 문제시되어 여러 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평소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으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실전되었다. 일설에는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다.
증(贈) 의정부좌의정 광산군(光山君)에 증직된 광산 김씨 김한로(金漢老)의 딸이자 본처인 수성군부인 김씨 사이에서 3남 5녀를 두었으며, 첩에게서 7남 12녀를 낳았다.
임진왜란 때의 장수 이순신은 그의 7대손이고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 이흔의 15대손이었다. 양녕대군은 서예에 능하여 숭례문과 경회루 등의 현판에 이름을 썼다.
생애
출생과 왕자 시절
양녕대군은 1394년에 정안군과 군부인 민씨(뒤의 원경왕후)의 장남으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곧 1402년(태종 2년) 3월 8일 제(褆)란 이름을 받았고 동년 4월 18일에 원자(元子)로 책봉되었다.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6년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다. 어려서 학자인 계성군 이래(李來)의 문하에서 효령대군, 충녕대군 등과 함게 수학하였으나 수업은 뒷전이고 참새나 바깥 풍경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였다 한다.
1407년(태종 7년) 입조하라는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제의 명을 받고 1407년 9월 25일 하진표사(賀進表使)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이때 완산부원군 이천우(李天祐), 단산부원군 이무(李茂), 계성군 이래(李來), 제학 맹사성(孟思誠), 총재 이현(李玄), 서장관 집의 허주(許稠) 등 백여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연경에 다녀왔다.
영락제는 그에게 특별히 시를 지어서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조선의 왕자 제가 조공 닦으러 만리 길을 찾아오니
나이는 불과 열다섯이나 인재가 될 만하다. 글 읽고 도를 닦아 스스로 버리지 말고 부지런히 힘써서 집안 일을 훼손하지 말라. 예부터 화복(禍福)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요, 높은 산도 갈리고 바다도 옮겨지나니 조심하고 조심하라."
세자 시절
1407년(태종 7년) 14세에 광산 김씨 김한로의 딸과 혼인하였다. 김한로는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사위인 그가 폐위된 것을 전후하여 한때 유배 당하기도 했다.
1407년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고 태종은 외척 제거 목적으로 민무구 형제의 옥사를 계획한다. 양녕은 이들 두 외삼촌이 억울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을까 겁을 먹고 외숙인 민무구 형제가 태종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도 외면하였다.
1409년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410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사가 발생했다. 이 일로 원경왕후는 병석에 누웠고, 친정에서 동생 민무휼과 민무회가 문병차 대궐을 출입했다. 이때 민무휼과 민무회 형제가 양녕대군을 찾아가 두 형의 억울함을 하소연을 했다.
양녕대군은 어릴 때 외가에서 자라난 터라 이들과 가까이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양녕은 두 외삼촌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했다.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품성이 잘못되었다며 도리어 외가를 비난했다.
양녕이 세자로 책봉된 뒤, 대군시절 스승이던 계성군 이래가 빈객 겸 세자의 스승으로 결정되어 왕자들을 가르쳤다. 이래는 고려말 신돈에게 저항하던 선비인 이존오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를 닮아 그만큼 강직한 선비였다.
양녕대군이 한참 거짓 미치광이 노릇을 궁리할 때 별감으로부터 계성군의 출입을 보고받자 일부러 방석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서, 개 짖는 시늉을 하였다. 이래는 들어서자 이 괴상한 세자의 행동에 놀라 제지하고 양녕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양녕은 개의 소리를 짖어대며, 마치 물어뜯을 것처럼 뛰어다니다가 이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도 했다. 이래가 다시 양녕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비로소 양녕은 처음 맞이하는 것처럼 대하였다.
이래는 밤 동안에 무척 초췌해 보이는 세자의 안색을 보고 개처럼 짖는 소리를 병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양녕은 부인하였고 이래는 이후 태종에게 그 날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였다. 그 뒤로도 이래는 세자의 언행을 낱낱이 임금 태종에게 아뢰었다.
세자는 이래 등 사부들이 와도 글을 배우려 하지 않고 다른 짓을 하였다. 동궁의 뜰 앞에 새덫을 해 놓고는 글을 배우다가도 새가 치이기만 하면 쏜살같이 달려나가곤 하였다.
또한 조정의 하례 때에는 머리가 아프니 배탈이 났느니 하고는, 동궁에서 혼자 새덫을 놓고 참새사냥을 즐기거나 드러누워 뒹굴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품행이 자유분방하여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부왕인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고, 부왕은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심지어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가 궁으로 데려온 한 기생 출신 첩의 존재를 알게 되자 태종은 그 기녀를 사형에 처했다. 양녕대군은 부왕 태종 역시 여러 여인을 첩으로 거느리는 것을 언급하며 항의하다가 끌려나가기도 했다.
이후에도 양녕의 품행은 자제되지 않았고 이에 유정현 등이 상소를 하여, 세자에서 폐위시킬 것을 상주하였다. 이때 유일하게 그의 세자 폐위를 반대한 것은 이조판서 황희 등 소수였다. 1418년 그는 세자에서 폐위되고 양녕대군에 봉해졌으며, 그 대신에 아우인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부왕과의 갈등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여색을 금하고 인군으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쌓으라 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부왕 태종이 여색을 밝히고 후궁을 들이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가 들인 후궁을 태종이 내침으로서 부왕 태종과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1417년 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王親錄)을 열어봤다가 발각, 이것이 소문으로 퍼지면서 부왕 태종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 또한 전중추 곽선(郭旋)의 첩을 취한 사실도 밝혀졌다.
당시 조선에서 붓을 잘 만든다고 소문이 난 김호생이란 이가 있었다. 그는 사족 출신으로 붓을 만들었는데 호기심에 양녕은 김호생을 찾아가 그가 붓을 만드는 것을 보았고, 몰래 대궐에 들어와 세자에게 붓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비밀리에 출입하던 중 내시에게 발각되어 도주하다 붙잡혀 어전에서 태종에게 심문을 받았다.
태종은 양녕이 몰래 시중의 잡것들을 불러들여 장난을 치는 등 체통없는 짓을 한다 하여 잡는 대로 혹 귀양보내기도 하고 혹 죽이기도 했다는데, 김호생에게 붓을 만들게 한 뒤 그의 재능을 본 뒤 오히려 기특히 여기고 김호생에게 특별이 공조(工曹)로 보내 필장(筆匠)직을 내렸다.
세자 폐위 전후
어느날 밤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던 중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의 재질이 뛰어나나 셋째 아들이라 아쉽다고 대화하는 내용을 엿듣게 되었다. 원경왕후 역시 태종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이 뒤로 양녕대군은 일부러 미친 척 가장하였다.
부왕과 모후의 뜻이 양녕대군에게서 떠나있다는 것을 간파한 효령대군은 열심히 공부하였다. 하루는 양녕대군이 술을 잔뜩 마시고 효령대군을 찾아갔다. 그는 효령에게 "공부해야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으니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크게 낙심한 효령대군은 매일 북을 치는데, 여느 스님과 달리 팔에 힘이 들어가 북 가죽이 늘어질 정도로 세게 쳤다.
그래서 속담에 늙은이의 늘어진 뱃가죽을 효령 북이라 부르기도 한다. 결국 충격을 견디지 못한 효령대군은 모든 공부를 중단하고 출가, 합천 해인사로 들어갔다.
1418년(태종 18년) 유정현 등이 세자 양녕을 탄핵하였다. 이때 그에 맞서서 양녕을 비호한 이는 황희 등 소수였다.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될 것을 예상하자 그의 동생 효령대군은 독서를 열심히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생을 찾아가 세자 자리는 충녕에게 넘길것 같으니 헛된 꿈을 꾸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부왕 태종이나 모후 원경왕후의 뜻이 모두 충녕에게 있음을 안 효령대군은 이후 불교에 전념하게 된다.
세자 폐위 배경
김시양(金時讓)은 저서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세가지 추론을 하였다.
첫 번째로는,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 즉 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이 곧 폐하여 세종을 세웠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양녕대군과 동생 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해서,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겨나 경기도 이천군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종대왕이 몰래 양녕대군을 불러 위로했다고 한다.
그가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세자 책봉 직후라는 설과 세자 책봉 후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부왕의 침전으로 문안차 들어가던 중 그는 문 밖에서 다음과 같은 부왕 태종과 모후 민씨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부왕 태종은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더라면, 장차 백성들이 요순의 다스림을 받아 태평성대에서 살게 될 것이라"며 한탄하였고 모후 민씨 역시 "충녕이 맏이었어야 할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세자 즉 양녕대군의 계속된 비행으로 아버지 태종이 몇번 질책하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태종)은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 하는 상소를 올려 태종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여 이천군으로 귀양보내고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 주었다고 한다.
그해 5월 결국 세자에서 폐위되고 만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지난 날 부왕 태종과 방석, 방번, 그리고 방간 등 숙부들과의 골육상쟁을 떠올리며 최종적으로 충녕에게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는 전승도 전한다.
세자 폐위 이후
이후 출궁을 청하는 상소가 거듭되어 태종은 하는 수 없이 출궁을 명하였고, 경기도 광주의 사저로 내려갔다. 떠나는 양녕대군에게 여자 종 13인과 남자 종 10여 인을 데리고 가게 하였다.
또한 특별히 배려하여 그가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였던 여인도 데려가게 하였고, 그 외에 일상 쓰던 여러 가지 가재도구도 다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런데 다만 매와 활은 두고 가게 하였다고 한다. 태종은 모든 것을 양녕 대군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도록 명령하였다.
대궐을 떠나던 날 양녕대군은 광나루 포구에서 "앞으로는 이 땅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며 한탄하고 눈물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광주의 사저로 나온 양녕대군에게 책이라고는 다만 논어(論語)와 대학(大學) 이외의 책은 금지시켰다. 그뒤 그는 팔도 각지를 유랑하며 사대부, 풍류객, 기녀들과 사귀면서 일생을 마쳤다.
1418년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동생 세종대왕은 이천군에 유배된 형 양녕대군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동생의 즉위 이후에도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세종의 즉위 뒤에도 여러 번 비행을 저질렀는데,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사후 비행의 강도가 더해졌다.
과거의 왕세자였고 현재 왕이 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일거일동이 세밀한 관찰과 감시의 대상이 되어 번번이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언관들로부터 탄핵되었다.
그의 비행에 대해 신하들은 여러 번 탄핵하였으나 세종은 그를 배려해 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453년에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수양대군의 편을 들어 그를 독려했고, 심지어는 안평대군을 사사시키라고 간청까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계유정난이 끝나자 단종을 죽이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동생 세종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이에 대한 이유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양녕대군의 사랑
양녕대군이 세자직에서 폐위되고 세종대왕이 왕이 되게 된 이야기를 전했다. 유교 사상을 근간으로 하던 조선시대에도 사랑 때문에 왕위를 포기한 사람이 있었으니 세종의 큰 형 양녕대군이었다.
태종의 큰 아들 양녕은 한 여자에게 반했다. 지주추부사 곽선의 '처'를 보고 한 눈에 반하게 된 것이다. 엄격한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서 양녕은 어리에 대한 마음을 포기해야 했다.
이후 양녕은 갑자기 어리의 집 앞에 나타나 어리를 궁으로 데려갔다.
실록에 따르면 양녕은 그 상황에 대해 "내가 어리의 집을 찾아갔더니 어리가 마지못해 나왔는데 어리는 어쩔 수 없는 천상 미인이었다"고 전했다.
이후 어리를 평생 곁에 두겠다고 다짐한 양녕. 이후 어리의 남편 곽선에게 선물을 보내며 다시는 어리를 찾지 말라고 협박했다. 불륜 행각을 대놓고 벌였던 것이다.
양녕이 대신의 첩을 궁으로 데리고 들어왔다는 소문이 개성에 있던 태종의 귀에 들어가기 됐다. 신하들이 양녕을 폐위하라고 하자 양녕은 태종에게 반성문을 보내고 어리를 보내기로 약속했다.
태종은 양녕의 반성문에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세자직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후 태종은 갑자기 돌변해 양녕을 세자직에서 폐위시켰다.
이는 양녕이 태종에게 직접 보낸 편지 때문이었다.
어리와 생이별을 해야 했던 양녕은 병에 걸렸고 이를 지켜보던 세자빈은 어리를 몸종으로 변장시켜 궁궐에 들였다. 이를 알게 된 태종은 어리를 먼 곳으로 보내 버린 것이다.
이에 양녕대군은 화를 참지 못하고 태종에게 항의 글을 보냈고 태종은 결국에 세자를 폐위시켰다. 이는 양녕대군이 25살, 어리를 만난 지 채 2년이 안 된 시간이었다. 결국 양녕대군은 강화로 추방돼 하루 하루를 술로 지세웠다.
어리는 결국 꽃다운 나이에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어리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양녕대군은 그날 이후 자신과 어리를 불행하게 만든 아버지 태종에 대한 원망 때문에 비뚤어진 삶을 살기 시작했다.
결국 양녕대군의 아들은 양녕대군 때문에 죽게 됐고 양녕대군은 아들의 죽음으로 자신의 모든 잘못을 참회하게 됐다.
사망
1462년(세조8년)에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시와 서에 능하였으며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의 현판의 글씨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자녀는 정실에서 3남 4녀를 두고, 측실에서 7남 12녀를 두었다.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나라의 예장을 받지 말며, 묘비도 세우지 말것이며, 상석도 놓지 말고, 산소 치장을 극히 검소하게 하라"고 하였다. 강정(剛靖)의 시호가 내려졌다.
사후
장지는 경기도 금천군 강적골 곤좌간향에 안장되었는데,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산65의 42번지 곤좌간향이다. 사후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석물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7대손 참판 만(曼)과 8대손 성항(性恒)이 상의하여 단출한 상석을 놓고 짤막한 묘비를 세웠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탄 전야인 8월 26일 밤 갑자기 파괴되었다.
사후 그는 음란함과 문란함의 대명사가 되어 그의 시문과 작품 중 상당수가 인멸되거나 사라졌다. 또한 1457년(세조 2년)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시까지 언급되며 문제시되었다. 그러나 숙종 때 숙종이 우연히 퇴락한 그의 사당을 발견함으로서 복권되고 사당 개수의 명이 내려졌다.
후일 1966년 1월 소설가 박종화가 그의 일대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 양녕대군을 부산일보에 연재하여 1968년 12월 31일까지 연재하였다.
작품
숭례문 현판
후적벽부 병풍
어리출궁항의문
가족 관계
본부인 수성군부인 광산김씨에게서 3남 5녀를, 첩실에게서 7남 12녀를 두어 자녀수는 총 10남 17녀이다.
정부인은 수성부부인 광산김씨(隨城府夫人 光山金氏)로 광산군(光山君) 김한로(金漢老)의 딸이다.
적1남 : 순성군(順成君) 희안공(僖安公) 이개(李豈)
적2남 : 함양군(咸陽君) 이안공(夷安公) 이포(李布)
적3남 : 서산군((瑞山君) 이혜(李?)
적1녀 : 영천군주(永川郡主) - 지돈녕 이자에게 출가(出嫁)
적2녀 : 현주(縣主) - 중추부사 이번(李蕃)에게 출가(出嫁)
적3녀 : 영평현주(永平縣主) - 주부 김철균(金哲勻)에게 출가(出嫁)
적4녀 : 현주(縣主) - 군수 박수종에게 출가(出嫁)
적5녀 : 재령군주(載寧郡主), 이자(李孜)에게 출가(出嫁)
이름 미상
서1남 : 고정정 이겸
서2남 : 장평부정 이흔, 사후 도정으로 추증됨. 이승만의 15대조
서3남 : 계천도정 이성
서4남 : 봉산부정 이순
서5남 : 안창정 이심
서6남 : 밀산부정 이광석 (선원계보에는 밀산(密山)부정으로 쓰여 있으나, 실록에는 돌산(突山)부정으로 기록됨)
서7남 : 금지부정 이광근
어리
서1녀 : 상장 이종경의 처
이름 미상
서2녀 : 현주, 부령 김암의 처
서4녀 : 현주, 현감 김승간의 처
서5녀 : 현주, 사직 김오의 처
서6녀 : 현주, 현령 김원의 처
서7녀 : 현주, 좌리공신 영의정 청성부원군 한치형의 초취(첫번째부인)
노비 출신
서3녀 : 현주, 부사 권치중의 처
서8녀 : 현주 이구지, 별좌 권덕영의 처
이름 미상
서9녀 : 현주, 창승 석번의 처
서10녀 : 현주, 봉사 김의의 처
서11녀 : 현주, 정남 임중의 처
서12녀 : 현주 이건이
야화
충녕대군이 왕이 되고 나서 어느날 양녕대군이 효령대군이 있는 절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은적이 있었다.
효령과 중들이 그걸 말리려 했지만 양녕의 말 한마디로 모두 잠잠해졌다. "내가 살아서는 임금의 형님이고, 내가 죽어서는 불자의 형님인데 내가 무엇이 두렵겠느냐?"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세종보다 오래 살며 사냥도 하고 인생을 즐기며 살았다고 한다.
시(詩)
영매(詠梅)
讀書三月不窺園(독서삼월불규원)
책 읽느라 석 달 동안 동산 엿보지 못했더니
未覺園林綠已繁(미각원림록이번)
어느 새 숲에는 녹음 이미 짙었어라.
梅子欲成春自去(매자욕성춘자거)
매실은 모두 익고 봄은 절로 가는데
慢將幽思立黃昏(만장유사입황혼)
부질없이 그윽한 생각으로 황혼속에 서있다
글 읽노라 정원도 돌아보지 못했는데
어느덧 원림에 녹음이 우거졌네
매실이 익어가니 봄도 다 갔는데
부질없이 깊은 생각에 황혼도 모르네
제향산승축(題香山僧軸)
山霞朝作飯(산하조작반)
아침에는 산 노을을 밥 삼아 마시고
蘿月夜爲燈(나월야위등)
밤에는 덩굴에 걸린 달이 등이라네
獨宿孤庵下(독숙고암하)
외로운 초막에서 홀로 머물며
惟存塔一層(유존탑일층)
마음에는 오직 하나 탑 한 층 쌓는다네
산의 노을로 아침에 밥을 짓고
숲 사이 돋는 달로 밤에 등불을 삼네
외로운 암자 찾아와 홀로 자니
중들은 어디가고 탑만 서 있네.
아들 서산군의 울화병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의 세종 32년의 기사에 의하면 3남 서산군의 비행과 사고 원인에 대해 아버지 양녕대군이 그의 첩을 빼앗았기 때문이라 기록하였다.
그에 의하면 "혜(譿)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아들인데, 사랑하는 첩을 아비에게 빼앗기고 심화병을 얻어, 술김에 자주 사람을 죽인 까닭에,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라는 것이다.
노비 왕손
양녕대군에게는 노비 출신 첩에게서 얻은 딸과 노비 외손녀가 있다. 양반이 여종에게서 얻은 자녀들은 중인이 되고, 왕족이 여종에게서 자녀를 얻었을 경우에는 천민으로 간주하지 않고 왕족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왕족이나 양반이 노비에게서 얻은 자녀는 조선의 법률상 천인이 아니기에 천인과 결혼할 수 없다.
그의 8번째 서녀 이구지는 남편 권덕영의 사후 권덕영의 종 천례(天禮)와의 사이에서 딸을 얻었는데 이름은 준비(准非)이다. 준비는 1488년 무렵 평민에게 출가하였으나 남편의 인적사항은 전하지 않는다.
종과 간통하여 얻은 딸을 시집보내는 과정에서 간통 사실이 드러나 김종직 등의 탄핵을 받고 관아로 끌려가 추국 당하면서 왕실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구지는 사사되었으나, 종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 준비는 이미 시집갔으므로 연좌되지 않았다.
▶️ 惟(생각할 유)는 ❶형성문자로 唯(유)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묻다, 알아보다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 隹(추, 유)로 이루어졌다. 마음에 묻다, 전(轉)하여 생각하다의 뜻이 있다. 또 음(音)을 빌어 발어(發語)의 어조사로 쓰인다. ❷형성문자로 惟자는 '생각하다'나 '사려하다', '오직'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惟자는 心(마음 심)자와 隹(새 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隹자는 꽁지가 짧은 새를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추→유'로의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惟자는 단순히 '생각하다'나 '사려하다'를 뜻하기 위해 心자가 의미요소로 쓰인 글자이지만 실제로는 '오직'이나 '오로지'라는 뜻으로 쓰이는 편이다. 그래서 惟(유)는 ①생각하다, 사려(思慮)하다 ②늘어 세우다 ③마땅하다, 들어맞다 ④~이 되다 ⑤오직, 오로지 ⑥오직, 홀로 ⑦생각컨대 ⑧이(어조사; 伊, 是) ⑨~와(접속사) ⑩~으로써, 때문에 ⑪예, 대답(對答)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만 단(但), 다만 지(只), 생각 념(念), 생각 사(思), 생각 상(想), 생각할 임(恁), 생각할 륜(侖), 생각할 억(憶), 생각할 려(慮), 생각할 고(考)이다. 용례로는 마음으로 생각함을 사유(思惟), 삼가 생각함을 공유(恭惟), 삼가 생각하건대를 복유(伏惟), 삼가 생각함을 앙유(仰惟), 다시 생각해 봄을 고유(姑惟), 두루 생각컨대를 통유(統惟), 공경히 생각함을 장유(莊惟), 매 위에 장사 있나는 속담으로 매질하는 데 굴복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말을 유장무장(惟杖無將), 의리의 유무는 따지지 않고 이해 관계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말을 유리시시(惟利是視), 분주하고 다사多事하여 날짜가 모자란다는 말을 유일부족(惟日不足), 먹는 것을 백성들은 하늘과 같이 여긴다는 말을 식유민천(食惟民天), 옷은 새 옷이 좋고 사람은 옛 사람이 좋다는 말을 인유구구(人惟求舊), 죄상이 분명하지 않아 경중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가볍게 처리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죄의유경(罪疑惟輕) 등에 쓰인다.
▶️ 存(있을 존)은 ❶회의문자로 侟(존)과 통자(通字)이다. 子(자; 약한 아이)와 在(재; 만물이 살고 있다)의 생략형(省略形)으로 이루어졌다. 아이가 살고 있음을 불쌍히 여겨 동정을 베푼다는 뜻이다. 전(轉)하여 오래 살다, 있다의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存자는 '있다'나 '존재하다', '살아있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存자는 才(재주 재)자와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才자는 땅속에서 올라오는 초목을 그린 것이다. 存자는 이렇게 어린 초목을 뜻하는 才자와 子자를 결합한 것으로 본래는 어린아이의 안부를 묻는다는 뜻으로 쓰였었다. 여기서 안부라고 하는 것은 생존 여부를 묻는다는 뜻이다. 조그만 병치레에도 쉽게 목숨을 잃었던 예전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在자는 이렇게 '안부를 묻다'라는 뜻으로 쓰이다가 후에 '있다'나 '존재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存(존)은 ①있다, 존재하다 ②살아 있다 ③안부를 묻다, 노고를 치하하고 위로하다 ④존문(存問)하다, 문안하다 ⑤보살피다, 살펴보다 ⑥보존하다, 보전하다 ⑦편안하다 ⑧관리하다, 관장하다 ⑨생각하다, 그리워하다 ⑩가엾게 여기다 ⑪마음이 향하다, 쏠리다 ⑫세우다, 설치하다 ⑬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다다르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재(在), 있을 유(有), 날 생(生),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 폐할 폐(廢), 빠질 몰(沒), 꺼질 멸(滅), 패할 패(敗), 죽을 사(死), 죽일 살(殺), 없을 무(無)이다. 용례로는 현존하여 있음 또는 있는 그것을 존재(存在), 보존과 폐지를 존폐(存廢), 생존하여 자립함을 존립(存立), 계속하여 존재함을 존속(存續), 제도나 설비 따위를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둠을 존치(存置), 아직 살아서 목숨이 붙어 있음을 존명(存命),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 또는 생존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존부(存否), 삶과 죽음 또는 존재와 멸망을 존망(存亡), 살려 주어 양육함을 존육(存育), 다른 지방에 임시로 머물러 삶을 존접(存接), 꿋꿋하게 주견을 가짐을 존주(存主), 잊지 않고 생각에 늘 지니어 둠을 존념(存念), 남아 있거나 남겨 둠을 존류(存留), 마음속의 생각을 존심(存心), 없애지 않고 보존하여 둔 원안의 문건이나 안건을 존안(存案), 본디의 양심을 잃지 않도록 그 착한 성품을 기름을 존양(存養), 셈에서 어떤 것을 넣거나 빼거나 함을 존발(存拔), 위로하여 안심하게 함을 존무(存撫), 이미 존재함 또는 이전부터 있음을 기존(旣存), 의지하고 있음을 의존(依存), 보호하여 남아 있게 함을 보존(保存),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생존(生存), 지금 생존함을 현존(現存), 함께 도우며 살아나감을 공존(共存), 실제로 존재함을 실존(實存), 남아 있음을 잔존(殘存), 엄연하게 존재함을 엄존(嚴存), 언제나 존재함을 상존(常存), 같이 있음이나 함께 생존함을 동존(同存), 쓰고 난 뒤에 남아 있는 돈이나 물건을 여존(餘存), 건강 따위를 소중히 보존함을 정중하게 하는 말을 온존(溫存), 양친이 모두 살아 계심을 구존(俱存), 제 힘으로 생존하는 것을 자존(自存), 존속하느냐 멸망하느냐의 매우 위급한 때 또는 죽느냐 사느냐의 중대한 경우를 이르는 말을 존망지추(存亡之秋), 죽고 사는 중대한 시기를 일컫는 말을 존망지기(存亡之機), 어떤 존재는 인정하나 그 존재하는 까닭을 논하지 않음이나 그대로 버려 두고 이러니저러니 더 따지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존이불론(存而不論), 몸을 편안하게 보존하는 길을 일컫는 말을 존신지도(存身之道), 낡은 예의나 허례를 버리지 못하고 그냥 남겨둠을 일컫는 말을 존양지의(存羊之義) 등에 쓰인다.
▶️ 塔(탑 탑)은 ❶형성문자로 嗒(탑), 墖(탑)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흙 토(土; 흙)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荅(답, 탑)으로 이루어졌다. 탑은 흙으로 만들므로 土(토)를 덧붙였다. ❷형성문자로 塔자는 '탑'이나 '층집', '사찰'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塔자는 土(흙 토)자와 荅(좀콩 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荅자는 '답→탑'으로의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塔자는 사찰에 있는 탑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질 때 부처님의 형상은 알려지지 않은 채 들어왔다. 그래서 열반하신 부처님의 사리를 탑에 봉안해 모시게 되었는데, 이것이 탑의 시초이다. 그러니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축조물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탑은 인도에 존재했던 무덤 양식에서 기원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유골을 매장한 무덤'이라는 뜻에서 스투파(stupa)라고 했는데, 塔자는 이 '스투파'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래서 塔(탑)은 (1)대개 절에 세워지는 부처의 유골(遺骨), 유품, 머리카락을 안치(安置)하고, 공양(供養)하기 위하여 세운, 좁고 높은 건축물(建築物). 목재(木材)나 석재(石材) 따위를 다듬어 만듦. 후에는 영지(靈地)임을 나타내거나 덕을 앙모하는 뜻으로 세워진 것들을 두루 일컫게 됨. 삼중탑(三重塔), 오중탑, 칠중탑 따위가 있음 (2)어떤 일을 선전(宣傳), 기념(紀念)하기 위하여 세워진 높고 좁은 부분. 공(功) 등의 뜻으로 ①탑(塔) ②층집 ③절, 사찰(寺刹) ④탑처럼 생기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탑에 관한 기록을 탑지(塔誌), 탑의 등불을 탑등(塔燈), 동네 어귀에 세우거나 쌓아서 동네 수호신을 상징하는 돌탑이나 돌무더기를 탑신(塔神), 건물의 옥상에 돌출한 부분을 탑옥(塔屋), 뾰족탑에서 탑의 맨 위의 뾰족한 부분을 탑첨(塔尖), 탑이 우뚝 솟아 있는 모양을 탑세(塔勢), 탑의 맨 꼭대기를 탑정(塔頂), 탑처럼 생긴 모양을 탑형(塔型), 나무로 만든 탑을 목탑(木塔), 돌로 쌓은 탑을 석탑(石塔), 뾰족한 탑을 첨탑(尖塔), 절에 있는 탑을 사탑(寺塔), 절에 세운 탑으로 부처님의 유골 즉 사리를 모신 무덤을 불탑(佛塔), 귀한 보배로 장식한 탑 또는 미술적 가치가 많은 탑을 보탑(寶塔), 한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탑을 사탑(斜塔), 불경을 안에 넣고 쌓은 탑으로 경문을 새긴 탑을 경탑(經塔), 부처의 사리를 모셔 둔 탑을 골탑(骨塔), 다리의 입구나 다리의 기둥 위에 탑 또는 문같이 만든 구조물을 교탑(橋塔), 탑 모양으로 된 꼭대기에 등이 있는 높은 시설물을 등탑(燈塔), 달걀 모양의 탑이 있는 장소란 뜻에서 묘지를 이르는 말을 난탑장(卵塔場), 우골은 학비 마련을 위해 학부형이 내다 판 소의 유골의 뜻으로 학생의 등록비를 재원으로 하여 건물이 섰다 해서 대학을 빈정대어 이르는 말을 우골탑(牛骨塔), 이집트의 피라밋을 번역한 말로 그 모양이 金자와 비슷한 데서 온 말로 길이 후세에 전하여질 만한 가치가 있는 불멸의 업적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금자탑(金字塔), 예술지상주의의 사람들이 속세를 떠나 정적한 예술만을 즐기는 경지 또는 학자들의 현실 도피적이고 관념적인 학구 생활을 이르는 말을 상아탑(象牙塔) 등에 쓰인다.
▶️ 一(한 일)은 ❶지사문자로 한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젓가락 하나를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하나를 뜻한다. 一(일), 二(이), 三(삼)을 弌(일), 弍(이), 弎(삼)으로도 썼으나 주살익(弋; 줄 달린 화살)部는 안표인 막대기이며 한 자루, 두 자루라 세는 것이었다. ❷상형문자로 一자는 '하나'나 '첫째', '오로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一자는 막대기를 옆으로 눕혀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막대기 하나를 눕혀 숫자 '하나'라 했고 두 개는 '둘'이라는 식으로 표기를 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그래서 一자는 숫자 '하나'를 뜻하지만 하나만 있는 것은 유일한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오로지'나 '모든'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一자가 부수로 지정된 글자들은 숫자와는 관계없이 모양자만을 빌려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一(일)은 (1)하나 (2)한-의 뜻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나, 일 ②첫째, 첫번째 ③오로지 ④온, 전, 모든 ⑤하나의, 한결같은 ⑥다른, 또 하나의 ⑦잠시(暫時), 한번 ⑧좀, 약간(若干) ⑨만일(萬一) ⑩혹시(或時) ⑪어느 ⑫같다, 동일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한가지 공(共), 한가지 동(同),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리 등(等)이다. 용례로는 전체의 한 부분을 일부(一部), 한 모양이나 같은 모양을 일반(一般), 한번이나 우선 또는 잠깐을 일단(一旦), 하나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음을 고정(一定), 어긋남이 없이 한결같게 서로 맞음을 일치(一致), 어느 지역의 전부를 일대(一帶), 한데 묶음이나 한데 아우르는 일을 일괄(一括), 모든 것 또는 온갖 것을 일체(一切), 한 종류나 어떤 종류를 일종(一種), 한집안이나 한가족을 일가(一家), 하나로 연계된 것을 일련(一連), 모조리 쓸어버림이나 죄다 없애 버림을 일소(一掃), 한바탕의 봄꿈처럼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이란 뜻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일장춘몽(一場春夢), 한 번 닿기만 하여도 곧 폭발한다는 뜻으로 조그만 자극에도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태를 이르는 말을 일촉즉발(一觸卽發), 한 개의 돌을 던져 두 마리의 새를 맞추어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한 가지 일을 해서 두 가지 이익을 얻음을 이르는 말을 일석이조(一石二鳥), 한 번 들어 둘을 얻음 또는 한 가지의 일로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을 이르는 말을 일거양득(一擧兩得), 한 사람을 벌주어 백 사람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한 가지 죄와 또는 한 사람을 벌줌으로써 여러 사람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킴을 일컫는 말을 일벌백계(一罰百戒), 한 조각의 붉은 마음이란 뜻으로 한결같은 참된 정성과 변치 않는 참된 마음을 일컫는 말을 일편단심(一片丹心), 한 글자도 알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일자무식(一字無識), 한꺼번에 많은 돈을 얻는다는 뜻으로 노력함이 없이 벼락부자가 되는 것을 이르는 말을 일확천금(一攫千金), 한 번 돌아보고도 성을 기울게 한다는 뜻으로 요염한 여자 곧 절세의 미인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일고경성(一顧傾城), 옷의 띠와 같은 물이라는 뜻으로 좁은 강이나 해협 또는 그와 같은 강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접해 있음을 이르는 말을 일의대수(一衣帶水), 밥 지을 동안의 꿈이라는 뜻으로 세상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일취지몽(一炊之夢), 화살 하나로 수리 두 마리를 떨어 뜨린다는 뜻으로 한 가지 일로 두 가지 이득을 취함을 이르는 말을 일전쌍조(一箭雙鵰), 한 오라기의 실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질서나 체계 따위가 잘 잡혀 있어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일사불란(一絲不亂), 하루가 천 년 같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이르는 말을 일일천추(一日千秋), 그물을 한번 쳐서 물고기를 모조리 잡는다는 뜻으로 한꺼번에 죄다 잡는다는 말을 일망타진(一網打盡), 생각과 성질과 처지 등이 어느 면에서 한 가지로 서로 통함이나 서로 비슷함을 일컫는 말을 일맥상통(一脈相通), 한 번 던져서 하늘이냐 땅이냐를 결정한다는 뜻으로 운명과 흥망을 걸고 단판으로 승부를 겨룸을 일컫는 말을 일척건곤(一擲乾坤), 강물이 쏟아져 단번에 천리를 간다는 뜻으로 조금도 거침없이 빨리 진행됨 또는 문장이나 글이 명쾌함을 일컫는 말을 일사천리(一瀉千里), 하나로써 그것을 꿰뚫었다는 뜻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음 또는 막힘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감을 일컫는 말을 일이관지(一以貫之), 기쁜 일과 슬픈 일이 번갈아 일어남이나 한편 기쁘고 한편 슬픔을 일컫는 말을 일희일비(一喜一悲),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는 뜻으로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함을 이르는 말을 일구이언(一口二言) 등에 쓰인다.
▶️ 層(층 층)은 ❶형성문자로 层(층)의 본자(本字), 层(층)은 통자(通字), 层(층)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주검시엄(尸; 주검)部와 曾(증, 층)으로 이루어졌다. 尸(시)는 엄 호(广; 집)部가 변한 것이고, 曾(증, 층)은 지붕 위에 지붕이 겹친 높은 건물 또는 찬합 모양으로 여러 층으로 된 찜통의 뜻이 있다. 지붕이 겹치는 데서, 겹친 것을 뜻하게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層자는 '겹치다'나 '층집', '계단'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層자는 尸(주검 시)자와 曾(일찍 증)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曾자는 화로에 김이 올라오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일찍'이나 '겹치다'라는 뜻이 있다. 層자는 이렇게 '겹치다'라는 뜻을 가진 曾자에 尸자를 더한 것으로 사람이 거주하는 '층집'을 뜻하고 있다. 그래서 層(층)은 (1)물질(物質), 상태(狀態) 등의 포개어져 생긴 켜, 또는 격지 (2)같은 높이에 가지런히 있는 방들을 포괄하는 건축물의 부분 (3)서로 사이가 생기는 등급 (4)층계(層階) (5)계층, 등의 뜻으로 ①층(層) ②겹 ③층집 ④계단(階段) ⑤높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섬돌 계(階)이다. 용례로는 층층이 높이 올라가게 만들어 놓은 설비를 층계(層階), 건물에서 층과 층 사이의 높이를 층고(層高), 여러 층을 이룬 바위를 층암(層巖), 일의 많은 가닥을 층절(層節), 여러 층으로 높게 지은 누각을 층루(層樓), 높은 하늘을 층소(層霄), 층과 층 사이를 층간(層間), 서로 같지 않은 등급을 층등(層等), 극히 높은 하늘을 층공(層空), 겹겹이 여러 층으로 섬을 층립(層立), 겹겹이 쌓인 물건의 겉을 층면(層面), 거듭하여 일어남을 층생(層生), 지평선과 나란히 층을 이루고 땅에 가장 가깝게 이는 구름을 층운(層雲), 층계로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층을 계층(階層), 여러 층으로 높이 겹쳐 있는 것 또는 상공의 높은 곳을 고층(高層), 윗층 또는 윗 계급을 상층(上層), 속에 깊이 있는 밑층을 심층(深層), 단 하나의 층 또는 단 하나의 층으로 된 사물을 단층(單層), 표면의 층을 표층(表層), 여러 층으로 된 집의 아래로 부터 둘째 층을 이층(二層), 밑의 층 또는 바닥의 층을 저층(底層), 굵기나 성질이 다른 지층들이 서로 포개진 상태를 호층(互層), 석유가 괴어 있는 지층을 유층(油層), 매우 높은 층수의 건물을 이르는 말을 초고층(超高層), 어떤 무리에서 소외를 당하는 계층을 소외층(疏外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을 고위층(高位層), 높고 험한 바위가 겹겹으로 쌓인 낭떠러지를 이르는 말을 층암절벽(層巖絶壁), 부모나 조부모가 다 살아 있는 시하를 이르는 말을 층층시하(層層侍下), 일이 여러 가지로 겹쳐서 자꾸 생겨남을 이르는 말을 층생첩출(層生疊出), 사회의 각 방면과 각 계층을 이르는 말을 각계각층(各界各層)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