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광부 출신 개인택시 사업자 이재영씨가 지난 15일 서울 상암동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관람한 후 ‘경제풍월’을 방문했다. 이씨는 일요일이지만 영업하는 날이라 손님을 모셔야 하는데도 기념관에서 파독광부 시절에 관한 화보를 꼼꼼히 들여다본 소감을 들려주고자 ‘경제풍월’ 편집실을 방문한 것이다.
‘서독으로 동냥갔던’ 박 대통령 생각
이씨는 상암동 기념관에서 “속으로 펑펑 울고 찾아왔다”고 했다. 지난 2월 박정희기념관 개관 소식을 듣고 꼭 참석했으면 싶었지만, 장거리 손님을 모시느라 참석을 못했는데 이날은 기념관을 찾은 손님 덕택에 파독광부 시절의 화보를 통해 추억할 수 있었다면서 울먹였다.
이씨는 파독광부 시절을 꿈에도 잊을 수 없다. 지금 되돌아보면 감개무량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더구나 박 대통령 기념관이 우여곡절 13년만에 겨우 개관할 수 있었다는 설명을 듣고 울컥한 심정이었다.
이 때문에 가난을 추방해준 박 대통령에 대한 흠모의 정을 가눌 길 없어 보수계 평론지인 ‘경제풍월’을 방문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씨는 파독광부 시절, 박 대통령이 서독 정부에게 동냥을 구하러 ‘국빈방문’했던 사실을 들었다.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의 노임을 담보로 상업차관을 얻어다 경제개발 종잣돈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을 듣고 알았다. 이씨는 이날 “하루 영업을 못해도 상관없다”면서 그때 그 세월을 두서없이 회고한 후 “앞으로 박 대통령을 추모하는 사업에 한줌의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말해 주었다. 그는 또한 파독광부 동료들과 종종 만나 옛일을 추억할 때마다 모두가 자신과 비슷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노라고 전해 주었다.
배고픈 시절 파독광부는 바늘구멍
이재영씨는 1976년, 어려운 선발과정을 거쳐 일행 98명과 함께 팔자에도 없던 파독광부로 떠났다. 나라가 온통 배고픈 시절이라 파독광부 시험은 고학력자들을 포함하여 수천명이 응모한 바늘구멍이나 다름없었다.
명문 충주고를 나와 공군에서 전투기 정비사 경력을 쌓은 이씨는 건강한 체력에다 전기 기술자 자격으로 당당하게 합격했다. 당초 1974년에 출국할 준비를 끝냈지만 제2차 오일쇼크 여파로 파독이 지연되어 76년 8월에야 떠날 수 있었다.
파독광부로서는 ‘막차’였다. 더구나 이씨는 신혼 3일만이었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심정이 얼마나 급박하고 가슴 설레는 장도인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씨는 신혼의 아내를 남겨둔 채 눈물을 삼키면서 “3년간 죽을 고생만 하면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확신했디.
실로 파독광부 생활에는 두렵고 고달픈 난관이 많았지만 이씨는 모든 고비를 극복하고 인생역전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에야 박정희기념관을 관람하고 새삼 감사한 마음을 표할 길이 없겠느냐고 궁리하고 있노라고 했다.
저축 꿈으로 ‘막장인생’ 설움 달래
▲(좌)서독으로 갈 광부 1진의 등정을 앞두고 결단식 장면을 보도한 1963년 12월 20일자 동아일보. (우)1964년 서독을 방문중인 박정희 대통령이 에르하르트 수상과의 회담에서 경제협력을 요청하는 모습. ⓒ 국가기록사진
이역만리 낯선 땅 광산촌에서 생소한 광부 생활은 설움이었다. 그렇지만 뜻밖에도 고향 선배와 동료를 만날 수 있었으니 한없는 기쁨이요 안도였다. 또한 일행 98명의 막차 동료들도 서로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생사고락의 동지들이었다.
현지에 도착하자 마자 재차 자격검증 시험이 있다기에 다소 놀랐다. 서울에서 한국측 관리들에 의해 선발한 과정에 오류나 허위가 섞여 있지 않느냐는 검증 과정이었다. 독일어 학습과 광산학 기초도 철저히 교육했다.
이씨는 현지 검증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무엇보다도 전기 기술자로 인정되어 청색 안전모를 쓸 수 있었던 것이 자랑이었다. 조장급은 백색, 기술자는 청색, 채탄부는 노란색 안전모로 구분되어 있었다.
자랑스런 청색 안전모를 쓰고 지하 8백54미터까지 내려가니 광장형의 넒은 공간이 나오고 그곳에서 조별로 작업반이 편성됐다. 이씨가 속한 작업반이 횡으로 12킬로를 괘도차 편으로 이동하자 시커먼 광맥이 나왔다. 섭씨 40도의 고온다습한 막장이다. 여기서부터 하루 8시간 동안 탄가루와 함께 생활하는 ‘막장인생’이 시작됐다.
히루 3교대씩 8시간의 중노동은 매일 사지(死地)를 왕복하는 고행이었다. 그러나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지상으로 올라오면 집단 숙소의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 향수를 달래는 자유시간이 찾아온다.
고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돌아와요 부산항’을 목청껏 열창하고 신혼의 아내가 보내준 편지를 읽고 나면 막장인생의 설움도 잊고 만다. 더구나 고국에 있는 어느 동료들보다 많은 노임을 받아 아내가 차곡차곡 저축하고 있으니 막장인생의 아름다운 꿈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귀국후 개인사업 실패, 택시로 재기
당시 이씨는 일용직으로 계약한 처지이지만 월평균 1천3백~2천 마르크를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서독인 광부들보다는 못했지만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할 고임금이라고 자부했다.
한참 뒤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검찰직 4급 관리가 된 고향 친구의 월급이 4만3천7백원이었다. 이씨는 이보다 5배 이상 받았으니 고생만큼 보람이었다.
그러나 도중에 집안사정으로 3년 계약을 못지키고 귀국해야만 했다.
귀국후에 아내가 착실히 저축한 돈으로 잠실 3, 5단지의 14평 아파트 두채를 장만하고 양재동의 나대지 한 필도 구입했다.
겨우 보릿고개를 넘어설 무렵, 이씨는 파독광부 생활을 통해 넉넉한 살림밑천을 마련했노라고 자부했다.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옛 인연이 닿은 박태선 장로의 신앙촌 일을 하다가 독립하여 사업 전선으로 나섰다.
전기 기술을 바탕으로 충무로에 사무실을 열고 방송 기자재 개발에 참여하여 웬만큼 성공 기반을 잡았다. 어느날 한전 배선과장으로 근무하던 고향 선배를 만나 전력용 기자재 개발에 참여한 것이 과욕이었다. 이 때문에 파독광부의 피땀으로 쌓아올린 살림밑천을 몽땅 날렸으니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살 길이 막연하여 신문광고를 보고 영어 카세트 외판원으로 나섰지만 1년간 악전고투 끝에 손을 들고 말았다. 아내와 함께 가락시장을 찾아 장사를 생각하다 ‘승리택시’의 기사모집 광고를 보고 택시기사로 팔자를 고쳤다.
사북탄광 관광하며 만감 교차
▲(좌)지난 2월 21일 상암동 박 대통령 기념관이 개관하던 날 사진전시실에서 전시물을 감상하는 관람객들 모습. ⓒ 좋아하는 사람들 (우)2006년 9월 29일 독일을 방문중인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프랑크푸르트에서 파독 광부 및 간호사 출신 동포들과 만났다. 그는 해외에서 동포들을 만날 때면 으레 한복 차림으로 동포애를 표현하곤 한다. ⓒ 연합뉴스
처음 ‘승리택시’에서는 깔끔한 외모를 보고 기사할 사람이 아니라고 퇴짜를 놨다. 이씨는 생활이 다급하여 가장 믿을 수 있는 기사가 되겠노라고 졸라대어 겨우 초보기사로 채용되어 3년간 열심히 뛰었다.
그 사이 아내가 푼푼히 주택청약에 가입하여 목동 임대아파트 27평에 당첨됐으니 재기의 발판이 마련됐다.
지하방 5백만원 사글세 신세로부터 임대아파트로 격상되고 보니 아내가 위대하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그 뒤 2007년 개인택시 사업자가 되어 오늘에 이르니 파독광부로부터 일어섰다가 좌절한 후 온갖 체험을 두루 거쳐 다시 필생의 천직을 맡은 셈이다.
이씨는 각계 자원봉사에도 열심히 나가고 개인택시 운송사업 관련 공익활동에도 참여한다. 지난해 11월에는 조합 이사장 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이 유력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조합원 자격보유기간 18일이 미달한다는 유권해석으로 낙마하고 말았다.
그 뒤 아내와 손자, 손녀와 함께 강원도 사북탄광을 관광했다. 탄광은 석탄 생산을 중단하고 막장인생의 관광지로 개발해 놨다. 광차를 타고 지하 5백미터의 갱도를 둘러보는 코스였다. 이씨의 만감이 교차할 것은 물론이었다.
갱을 나와 광업소의 〈광산연감〉 속에 35년 전 파독광부 막차 동료 98명의 명단을 발견했다. 이씨는 이를 복사하여 보물처럼 간직하며 옛 동지들을 하나둘씩 만나는 것이 즐거움이다. 이들과 그때 그 세월을 함께 추억하며 이따금씩 상암동의 빅정희기념관도 종종 방문할 계획이다.
박근혜, 붕대 감은 손이 애처롭다
택시사업은 좋은 시절이 지났다고들 한다. 택시기사 가운데 젊은이가 없어진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씨는 어느덧 개인택시 사업도 60대 이상 고령자들의 심심풀이 사업으로 전락한 것 같다고 비통해한다.
서울의 경우 64세 이상 고령 기사가 1만8백54명, 이중에는 80대 이상이 54명, 일부 90대 최고령자도 더러 있다고 한다. 택시 영업이 어려워진 것은 고유가에다 승객이 줄어들고 대중교통 육성책에 따라 버스기사들의 지위가 격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씨는 개인택시 사업을 노후의 건강관리와 사회봉사 차원에서 오래도록 하고 싶은 생각이다.
이씨는 이런저런 계기로 정치에 조금씩 관심을 보여 왔다. 지난해 서울시장 보선 때는 개인택시조합 추천으로 나경원 후보 진영에서 봉사했고, 박 대통령을 존경하는 입장에서 ‘박근헤 정치’를 멀리서 성원한다.
지난해 현충일 국립현충원에서 박근혜 대표를 만나 파독광부 출신 기사라고 했더니 각별하게 반가워하더라고 했다.
지난 4.11총선 때는 박 위원장이 붕대 감은 손으로 전국을 종횡무진 유세하는 모습이 애처롭고 든든해 보이더라고 했다.
이씨는 박 대통령을 존경하는 심정으로 ‘박근혜 정치’의 대성을 기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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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나간 사람아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