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전선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정부는 1950년 11월 20일 한국전쟁 발발 이후 방위군으로 조직된 청년방위대를 국민방위군으로 대체하기 위한 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한국전쟁 초반 북한이 남한 점령지에서 의용군을 대거 동원한데다 남한 측은 대부분의 영토를 뺏긴 상황에서 예비병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북한군이 오기 전에 미리 병력자원들을 빼돌려놓자는 의도에서 실시한 정책으로
1.군인, 경찰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 장정들을 제2국민병에 편입시킨다.
2.제2국민병 가운데 학생을 제외한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시킨다.
3.육군참모총장은 국방부장관의 지시를 받아 국민방위군을 지휘, 감독한다.
19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포되었고, 당시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단장 김윤근을 준장으로 임관시키고 국민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최소한의 기간요원만이 현역에서 차출되었고, 방위군 지휘관 대부분은 주로 청년단 출신들로 충원 되었는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소집된 국민방위군 중 서울에 모여든 방위군 숫자만 무려 50만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모으긴 했으나, 중공군의 대공세로 또다시 서울을 빼앗기게 된 정부는 방위군 장병들을 대구·부산 등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 했다.
그보다 앞서 11월 15일에 황골에는 국민 방위군에 징집영장이 나왔다
재운 재덕 형제를 비롯하여 10여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국민방위군으로 나가게 되었다.
희상은 아들을 잃은 지 몇 달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11월 21일 동내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송을 하는 가운데 재운을 비롯한 젊은이 들은 발산초등학교에 집결하였다.
거기에는 인근 부락에서 모인 사람이 200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군복을 입고 계급장을 단 사람이 연단위에서.
여러분의 국민방위군 입대를 환영한다는 간단한 인사 연설이 시작 되었다.
여러분은 국가를 위해 나서야 할 때라는 말과 함께 젊은이들을 적 치하에 두면 의용군으로 끌려가 개죽음 당하기 십상이여서 부득이 젊은이들을 소개하여 훈련을 하여 나라를 위해 애국하는 길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라는 취지의 연설이 있고 가지 않겠다는 사람은 지금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광상이와 제우가
“난 집으로 돌아갈래.”
“야 이 바보야 지금 나가면 빨갱이로 몰려서 죽고 싶어.”
재운이 말리는 말에 광상이도 제우도 움찔하고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발산 초등학교를 떠나면서 먹은 것이 마지막 더운밥 이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 되었다.
광판에 도착하니 날이 저물어 학교에서 저녁도 못 먹고 이브자리 하나 없이 새우잠을 자게 되었는데, 재운과 재덕을 비롯한 황골 사람들은 한 대 모여서 집에서 아내가 정성들여 싸준 깨보숭이와 소금을 넣고 뭉쳐서 가지고온 주먹밥을 한 덩어리씩 먹고 두덩어리 째 먹으려 할 때 재운이
“이제 고만 먹고 물로 배를 채우자.”
재덕은 두 번째 주먹밥에 손이 가려다 멈칫했다.
“야 꼴 세를 보니 내일 아침도 못 먹게 생겼으니 두었다가 내일 아침으로 먹자.”
모두 그 말에 공감을 해서 배고픔을 물배로 채우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찬마루 바닥이라 웅크리고 뜬눈으로 새우다 시피하게 생겼는데 마침 광상이가 가지고 온 이불이 하나 있어서 그나마 사촌매부고 앞뒷집 이라는 이유로 발을 집어넣고 대여섯이 이불속에 언 발을 넣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침에 일어나 그나마 어제 남겨놓은 주먹밥으로 아침을 때우고 바로 출발을 해서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 단월을 지나게 되었는데 재운은 몇 번 왔던 큰집이 생각나서 들려서 가고 푼 생각이 간절했지만 학교 마당에 집합을 해 있는 관계로 마음대로 나갈 수가 없었다.
벌써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인솔을 책임진 사람은 어떻게 민생고를 해결했는지 궁금했지만 당장 내 배가 고프니 남의 사정을 알 겨를이 없다.
그런데 재덕이 잽싸게 큰집에 가서 큰어머니 효진에게 인사를 하고 왔다.
그리고 점심에 시래기죽이 나와서 모두 시래기죽을 먹고 있는데 운동장 구석 쪽에 큰집 형수가 장조카 며느리와 함께 삼배보자기를 들고 와서 손짓을 해서 재운을 불렀다.
재운이 급히 달려가서 인사를 하자
“서방님 제가 급히 주먹밥 몇 개 쌌어요. 식기 전에 드셔요.”
하면서 삼배보자기를 건네주었다.
그래도 큰할머니 하묵의 부인이 있어서 며느리와 손주 며느리가 서둘러 주먹밥을 싸서 보낸 것이었다.
가지고 돌아오면서 생각을 했다. 이걸 지금 먹으면 이따가 저녁때 무얼 먹나 하는 생각이 미치자 보자기를 풀어놓지 않고 참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을 해서 저녁 무렵 양동에 있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같이 온 황골 사람들에게 주먹밥을 한 덩이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저녁은 보리밥에 시래기 국이 나왔다.
보리밥을 거두어 집에서 가져온 삼배보자기와 큰집 조카가 준 삼배보자기에 나누어 싸고 시래기 국은 마셔 버렸다.
거기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보니 삼배 보자기 하나가 없어져 버렸다.
그세 어느 놈의 뱃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 한 끼 아니면 두 끼로 버티며 점심때는 문네기에서 때우고 섬강을 건너서 저녁에는 엄정이라는 곳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날 점심때 충주에 도착하여 학교운동장에서 점심을 먹고 수안보 까지 가서 거기서 하룻밤을 자고나서 다음날은 연풍에서 숨을 고르고 다음날 이화령을 넘어서 문경에 도착하자 불만 불평의 소리가 가득했다.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고 계속 걸리니 행색을 초라하기 그지없고 알아 눕는 사람은 그냥 민가에 버리다 시피 했다.
그나마 재운은 청년단 감찰부장이란 직함이 있어서 조금은 수월 했다고 볼 수 있었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서 가는데도 모두가 거지꼴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나마 동부에서 내려간 방위군은 덜 비참한 편에 속했다.
최소한의 기간요원만이 현역에서 차출되었고, 방위군 지휘관 대부분은 주로 청년단 출신들로 충원되었는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소집된 국민방위군 중 서울에 모여든 방위군 숫자만 무려 50만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모으긴 했으나, 중공군의 대공세로 또다시 서울을 빼앗기게 된 정부는 방위군 장병들을 대구·부산 등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사령관 지청천 등이 물러난 뒤 우익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장인 김윤근은 군사관련과는 전혀 무관한 이등병 경력조차 전무한 민간인이었음에도 하루아침에 별을 달았고 윤익헌등 청년단 간부들 역시 대령중령 등으로 고위 군 간부로 임명되었다.
윤익헌은 중화민국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한 후 귀국하여 청년 운동에 투신하여 각종 청년단체의 총무부장을 역임하였다.
그가 때때로 명분이 분명치 않게 돈을 쓴다는 의심을 받으면서도 각종 청년단체의 총무부장을 역임한 이유는 ‘돈을 만들어 내는데 그와 맞먹는 사람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윤익헌은 경기도 용인군 출신으로, 경성제일고보를 동맹휴학 사건으로 중퇴, 중화민국에서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지청천 장군 밑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해방 후에는 광복청년회, 대동청년단, 한청 등에서 총무국장직을 역임했고, 김윤근과는 대동청년단 시절부터 함께 일했다.
문제는 서울에 집결한 50만 명을 어떻게 후송하느냐 이었는데, 이들 50만 명은 걸어서 추운 혹한 속에서 천릿길을 돌파해야 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숙식도 제공되지 않았으며 보급과 겨울피복 및 군복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국민방위군의 고급 지휘관, 장교들이 장병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보급품을 횡령, 착복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혹한의 추위 속에 식량과 겨울 피복조차 지급 받지 못하고 굶주린 채 '장거리를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수많은 50여만 명의 병사들은 이동 중 아사하거나 동사하게 되었다.
징집된 이들은 명부도 없고 군번도 없고 무기도 없고 군복도 없는 군대. 일명 '죽음의 대열', '해골들의 행진'이라 불린 바로 그런 군대가 국민방위군이었다.
불과 100여 일 사이에 50만의 방위군 장병 중 무려 약 5만 명이 사망했다.
본래 국민방위군을 창설할 때, 정부는 후방에 51개의 교육대를 설치하고 병력을 이곳에 집결하도록 했다.
즉 국민방위군 병력을 약 50만 명으로 잡으면 1개 교육대당 1만 명 정도가 할당되는 셈이었는데, 그러나 교육대의 기간요원들은 병력이 오더라도 이들을 받아들일 능력도 의사도 없었다.
'돌려차기'식으로 '서울이나 한강 이북에서 떠난 병력이 집결지에 도착하면 수용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김해로 가라하고, 김해의 교육대에 가면 진주로 가라하고, 진주의 교육대는 또 마산으로 가라'고 하는 식의 수법으로 각 교육대 간부들은 이들을 며칠씩 수용한 것으로 서류를 꾸며 정부에서 지급한 예산과 식량을 빼돌려 부정 착복, 공금횡령을 저질렀던 것이다.
고위 간부들의 국민방위군 예산 유용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50만 병력을 운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숱한 간부와 기간장병들의 월급은 예산의 어디에도 계산되지 않았고, 그런 와중에 국민방위군에 소속된 이들은 훈련소 갈 때마다 '돌려치기'식으로 당하면서 아무런 군수품도 보급품도 못 받게 되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거나 혹은 훈련소 입소하지만 보급품이나 식량도 없이 아무것도 못 받고 훈련소 안에 갇혀 지내듯이 지내게 된다.
이렇게 되어 혹한의 추위 속에서 아사자와 동사자가 무더기로 속출하였고, 이 비극적인 상황에 국민방위군 고위간부들은 군수품이나 보급품을 횡령하거나 부정 착복해서 빼돌린 돈으로 장부상으로 '병사들을 위해 젤리공장을 짓는다.'고 써놓았다.
이렇게 무능한 정부에 의해 굶주린 병사들은 훈련을 빌미로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탈취하고 잔칫집과 굿판을 습격하는 등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은 가는 곳마다 동사자, 아사자가 대량 발생했으며 참혹한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게 된 것이었다.
이들에 대한 명부도 없으니 몇 명이 동원되었고,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죽었는지는 오늘날 현재에도 정확히 모른다. 추측 상으로 정부의 공식기록인 '한국전란1연지'에는 천 수백 명 사망으로 돼 있지만, 당시 소문으로는 5만 명 내지 10만 명이 죽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중앙일보 간행의 '민족의 증언'에 따르면 '50만 명의 대원 중 2할 가량이 병사나 아사했다'고 정리되어있고, 부산일보 간행의 '임시수도 천일'에는 사망자가 5만여 명으로 정리되어 있다.
역사학자 중에서는 이승만을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영익 교수조차 이 사건을 "9만 명가량의 군인이 동사, 아사, 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군 입대 기피현상이 증가하였고, 이승만 내각의 신뢰도는 급격히 실추된다.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 도착한 국회의원 이철승이 우연히 국민방위군에 속해있던 친구를 만나게 된 그가 아사 직전인 친구의 사연을 듣고 진상 조사에 착수하여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의복과 보급품을 횡령·착복한다는 첩보를 입수했고, 국민방위군들에게 전달해야할 50여 억 환을 착복했다는 의혹을 접한 뒤 조사해보니, 그 결과 고위 간부들이 군인들의 의복, 식량 등에 관한 비용 약 72억 환을 착복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바로 이철승의원 등은 의혹에 대한 증거 자료와 사진들을 제출, 국회에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상 조사를 요구하며 자유당 정권을 비판,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실을 폭로하게 하였다.
국회에 진상조사단이 꾸려지면서 곳곳에서 아사자와 동사자들의 시신과 기근, 질병에 걸린 방위군 병사들을 목격한 야당의원들에 의해 국회는 1월 15일 '제2국민병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한다.
그러나,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과 국방장관 신성모는 이러한 진상규명 움직임을 '불순분자와 제5열의 책동'이라며 사건의 은폐를 시도했다.
1월 말 내무부 장관 조병옥은 시체들의 사진과 수집한 낡은 옷과 식량 등의 증거를 들고 경무대로 찾아가 국방부장관 신성모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이승만은 승인을 거부하였고, 조병옥은 이승만과 언쟁을 벌였다.
서울특별시장을 지냈으며 이승만의 최측근 인사의 한사람이었던 윤보선 역시 경무대의 이승만을 찾아가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국민방위군 참사의 최종적 책임이 이승만에게 돌아갈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방패막이'를 자임하고 집요하게 수사를 방해하지만, 들끓는 여론 때문에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은 빼돌리고 부사령관 윤익헌만 처벌하자는 선에서 처벌을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당시 국민방위군 부사령관 윤익헌을 수사했던 김태청(金泰淸, 뒤에 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냄)은 '윤익헌의 씀씀이에 기막혀 자신은 물이라도 윤익헌이 돈 쓰듯이 해보았으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회고했다.
한편 재판부 구성에도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재판부 구성에서도 당시 현역장성 가운데 방위군과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고 동시에 신성모 및 김윤근과 각별한 사이에 있던 이선근 국방부 정훈국장을 임명하였다."는 점이 제기되었다.
서둘러 구성된 군사법정을 통해서 재판 개시 3일 만에 김윤근에게는 무죄가, 윤익헌에게는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하였으나, 이 소식을 들은 여론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만 갔을 뿐이었다.
단 한 달여의 행군 끝에 9만 명이 목숨을 잃고도 아무도 실질적인 책임을 지지 않았던 희대의 사건 국민 방위군 참사는 한국전쟁 기간 중 보도연맹 사건과 더불어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었는데 도 그냥 구렁이 담 넘어 가듯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 와중에 동시에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마저 겹치면서 다급해진 이승만은 국방장관 신성모와 내무부장관 조병옥 법무장관 김준연을 동시에 해임하고 이기붕을 국방장관으로 임명, 내각을 재개편하면서 국회에서의 국민방위군사건 중간발표의 중지를 요청, 사건의 확산을 무마하려 했다.
이에 윤보선은 경무대를 찾아가 이승만에게 신성모와 김준연 및 국방부, 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외 방위군 간부들의 처벌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공비들의 술책이라며 현혹되지 말라고 대응하였고, 정부에서는 즉시 공비들의 발호이며 루머라고 언론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진상조사위 서민호의원은 발표를 강행, 국민방위군 간부들 대부분이 상부의 명을 빙자하여 예산을 함부로 착복 사용하였음을 밝혔다.
국회 조사위원회의 보고에 의하면 1950년 12월 17일부터 1951년 3월 31일까지 유령인구를 조작하여 착복한 것이 현금 23억 원(圓), 쌀 5만 2천 섬이나 되었다고 했다.
또한 국민방위군 사령부에서 제시한 통계를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식료품비의 조달액수와 실제로 집행된 액수의 차이가 무려 20억 원에 달함으로서 결국 3개월 동안 55억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방위군 고위 간부층이 착복한 것으로 드러났고, 부사령관 윤익헌에 대한 기밀비용이 105일 동안 무려 3억 1천755만원이나 지출되었고, 국회 내에 관련된 정파에 1억 원이나 흘러간 것 등 밝혀지면서 이 착복한 규모는 매우 큰 규모의 복잡하여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려면 최소 6개월이 걸릴 것'이라는 충격적인 중간 발표결과가 나왔다.
계속된 토의과정에서 정치자금 관련 의혹을 받고 헌병수사대 또는 재판과정에서 사실심문을 위해 소환되었던 의원들의 거의 전부가 발언에 나섰다.
이들 중 지청천 의원만이 윤익헌과의 오래된 친분관계 속에서 생활비조로 금전을 수수한 적이 있다고 인정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혐의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하였다.
그리고 청년운동에 오랫동안 관여했던 여러 의원들의 발언 속에는 금전수수 혐의는 완강히 부인하면서도 김윤근, 윤익헌 등 방위군 간부와 김종회, 박승하 등 한청 출신 의원들이 주축이 되어 청년단 출신 국회의원을 규합 내지는 포섭하여 정치 세력화하는 움직임이 제2대 국회에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이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또한 김정식(金正植) 의원은 구체적으로 김윤근, 윤익헌 등과 협의하여 청년단 출신 신정동지회 의원들이 적극 참여했었다고 밝혔다.
특히 서범석 의원은 김윤근과 윤익헌이 앞으로 있을 유엔 감시하의 남북통일 선거가 열릴 경우 한청 계열의 국회의원을 각 지방대표로 추천해서 남북총선거에서 주도권을 차지하자는 방안이 논의된 적이 있다고 밝히고, 이는 "윤익헌이 당치 않은 정치운동을 구상했기 때문이며" 또한 김윤근, 윤익헌에게 "정치적으로 어떠한 동태가 있었음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정치자금 의혹에 대한 치열한 논쟁 끝에 국회는 결국 정치관련 무혐의라는 판결을 내린 법원의 판결을 수용하여 방위군 비리에 국회의원이 관련되었다는 혐의는 사실무근인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한편 재운과 재덕형제는 대구에 도착하여 재운은 나이가 많은 광상을 비롯한 몇 명을 빠져서 포항으로 가고 재덕을 비롯한 서너 명은 현역대상이 되어서 대구농림고등학교에서 군번 0180480을 받아 목에 걸고 그때부터 기초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동료들하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줄을 서도 종으로만 섰는데 그게 뜻대로만 되지 않았다. 키에 맞추어 세우다 보니 본의 아니게 재덕을 키가 작아서 따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배고 품의 고생이 컸다고 할 수 있는데 그래도 재덕은 겨울에는 점심을 아예 굶다 시피해서 그런대로 견딜 만 했다.
M1소총을 지급받아 조준 발사 방법 등을 배우고 총검술 각개전투 분대전투 소대전투 중대전투 그리고 야간에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알기, 화생방 훈련, 개인호, 여러 가지 참호를 만드는 법을 배우고 사격 훈련과 야간에 머리위로 기관총을 쏴 대며 포복과 철조망 통과 하며 한 달 정도 맹훈련 끝에 대구 보충대로 가서 대기 중 중공군이 춘천을 지나 홍천까지 밀리자 부대가 이동을 시작했다.
아침부터 행군이 시작 되었는데 저녁까지 연병장에는 출발을 하지 않은 병사가 있을 정도로 대 이동이었다.
이등병 재덕은 하루 종일 걸어야만 했다.
풍기에서는 민가에 들려서 건빵을 주고 고추장과 김치로 바꿔가지고 분대원 모두가 오랜만에 꿀맛 같은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죽령을 넘어서 전세가 긴박했는지 G.M.C.가 와서 병력을 원주에 집결 시켰다.
원주에 집결 후 하루가 지나서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차량을 타고 이동하여 오전 아홉시 쯤 오음산 아래 창봉리 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미군 포부대가 있었고, 우리 소대는 오음산 남서쪽에 있는 골안골로 향했다.
소대장이 분대장들을 모아 놓고 지시를 했다.
“지금부터 한 시간 후인 열두시에 오음산 정상을 탈환 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지금 쯤 미군의 지원 포사격이 시작 되었다. 우리소대는 이곳 골안골 서쪽 능선을 타고 오음산 800 고지에서 대기후 12시 공격을 개시 한다.”
소대장의 명령이 신호라도 되듯이 ‘꽝’ 하는 포 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처음 포 소리에 귀가 먹먹했지만 차츰 귀에 익어 가는지 적응이 되어갔다.
목적지인 800고지에 다가 갈수록 포가 날아가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쉬 이 ‘꽝’ 이곳이 바로 전장이 구나 저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대기 하는 동안 재덕은 열여덟 살 먹었다는 이기석 일병에게
“이 이병 몇 시나 되었냐?”
겁먹은 표정으로 잔득 웅크리고 앉아 있던 이 이병은 잘 알아듣지를 못했는지 대답이 없었다.
“야 이 이병 몇 시나 되었냐?”
그 제서야 알아들었는지
“김이병 님 11시 40분입니다.”
이윽고 수류탄 이 배당되고 각자의 탄띠에는 탄환을 꽂고 준비가 되자 12시가 되자 포사격이 멈춰지고 소대장의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돌격 앞으로.”
그렇게 850고지에 들어서자 따르륵, 따르륵 중공군의 따발총이 불을 뿜었다.
누가 지시를 하지 않아도 각자가 바위틈으로 깊은 곳으로 몸을 숨겼다.
소대장이 소리를 질렀다.
“1분대 돌격 앞으로! 1분대 돌격 앞으로! 2분대 3분대 엄호 사격하라!”
‘탕, 탕, 탕, 따르륵, 따르륵.’
“이 분대 돌격 앞으로!”
소대장의 명령소리에 이 분대장이 복창을 했다.
“이 분대 돌격 앞으로!”
재덕은 용감하게 튀어나가서 미리 보아둔 바위 뒤 까지 접근을 했다.
그렇게 몇 번의 약진을 하는데 우측 900고지에서 따르륵 거리며 총알이 날아 왔다.
적은 오음산 정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대장이 긴급 지원포사격 요청을 했다.
몇 분 후 오른쪽 900고지에 포가 떨어지기 시작 했고,
오음산 정상을 향해 돌격을 해 나가는데, 쉽지가 않았다.
소대장의 단말마 가까운 돌격명령에도 좀처럼 소대원 들은 움직이지를 않는다.
겨우 마지못해 몇 발자국을 옮겨 바위틈이나 깊은 곳에 박혀서 몇 번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렇게 십여 미터를 더 오르는데도 20여 분이 걸렸다.
이윽고 그 말로 만 듣던 방망이 수류탄이 던져지고 발아래 근처에서 쾅 소리와 함께 터지자 입을 바짝바짝 타고 더욱 바위틈으로 몸을 밀착 했다.
벌써 대오는 흩어진지 오래고, 따르륵 거리며 날아오던 따발총 소리가 조금 멈춘 듯 했다.
숨을 고르고 있는 가 아니면 총열이 달아서 식히느냐 그러는가 아니면 총알이 떨어졌나? 소대장이 외침 소리가 들렸다
“각 분대는 3분대를 엄호하라! 3분대 돌격 앞으로!”
다시 사격이 시작 되고 따발총도 불을 뿜었다.
“위생병! 위생병!” 하는 외침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총에 맞은 모양이다.
소대장의 단말마에 가까운 외침은 계속되고 있었다.
“1분대 돌격 앞으로! 2분대 엄호 사격하라 엄호 사격!”
다음은 우리의 차례인가 우리가 나가야할 차례구나
“이 분대 돌격 앞으로!”
분대장의 복창소리가 들렸다.
“이 분대 돌격 앞으로!”
그렇게 열 발 자국도 못가서 미리 보아둔 바위 뒤에 붙어 숨었다.
다시 방망이 수류탄이 굴러와 저만치 아래서 ‘꽝’ 소리를 내면서 터졌다.
다시 소대장의 외침소리가 들리고 총알이 날아가는 핑 소리와 바위에 파파 박 하고 박히는 소리가 내 심장에 박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게 벌써 2시간째 전투는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전투는 재덕의 소대 만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서쪽능선을 타고 올라오는 1소대 도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다.
어느 소대가 진지를 탈환 하느냐 경쟁이라도 하듯이 3개 소대가 세 방향으로 좁혀 들고 있었다.
그렇게 900고지를 넘어서고 남은 거리는 50미터 정도 바짝 바위에 붙어서 응사를 하는데 어느 소대 누가 돌격을 해서 수류탄을 던지고 돌격하느냐만 남았다.
서쪽 능선 쪽에서 ‘꽝’ ‘꽝’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와 하면서 1소대가 돌격을 감행했다.
이어 3소대 도 오음산 남쪽고지를 탈환 하고 이어 2소대가 동쪽을 확보 도주하는 중공군을 향해 몇 발의 사격을 하고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그리고 분대장이 분대원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나갔다.
“김재덕 이병.”
“네.”
“이기석 이병.”
“네.”
“오 충선 이병.”
대답이 없다.
“ 오 충 선 이병!”
분대장이 톤을 높여 불렸지만 대답이 없자 다음 사람을 불러 나갔다.
모두 대답을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오충선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오 충선! 오충선! ”
분대원 전원이 함성 지르며 찾았지만 대답이 없다.
다른 분대 타 소대도 몇 명의 사상자가 있었고 1소대 소대장도 전사를 했다.
올라온 능선을 이곳저곳 한참을 헤매며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중공군이 물러간 참호에는 10여구의 찢겨진 중공군 시체와 방한모가 뒹굴고 있었고, 놈들이 먹다 남긴 미숫가루 쓰고 먹을 수 있는 것을 챙기고 있는데, 소대장의 지시가 있었다.
“지금 15시 30분시간이 없다. 지금서부터 내가 지정한 곳에 개인호를 파고 적의 공격에 대비한다.”
“그리고 철조망을 설치하고 지뢰를 매설 하고, 오충선이병 기관총 사수를 대신해서 부사수였던 김재덕 이병이 기관총 사수를 맏고 부사수는 이기석 이병이 해라.”
그렇게 해서 이기석이병과 둘이서 소대장이 지정해 준 곳에 둘이 들어갈 수 있는 호를 만드는데 오음산의 북쪽은 아직도 눈이 무릎이 넘도록 쌓여 있고 칼바람이 얼굴을 매섭게 때리는데 먼저 만들다 만 개인호와 새로 만들 개인호를 손질하는데 곡괭이 끝이 힘껏 내리 찍는데도 불과 3. 4 미리 밖에 찍어내지를 못했다.
그나마 공부를 하다가 온 서울 출신의 이기석 이병의 폼은 영 아니었다.
“이 이병 봐라 곡괭이는 들어 올릴 때는 쇠 부분 가까이 잡고 들어 올리고 내리 칠 때에는 왼 손을 자루의 끝을 오른손은 자루 끝에 삼분의 일을 잡고 내리쳐야 힘이 덜 들어.”
“네.”
“내가 하는 거 잘 보고 해라.”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팠는데 겨우 깊이가 일 미터도 못 팠다.
“이 이병 몇 시나 되었나.”
“네 시 반입니다.”
벌써부터 배가 고프고 해는 서산에 기울고 있는데 호는 완성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분대원 중 유일하게 시계를 차고 있는 녀석을 이기석 일병 뿐이었다.
“야 빨리들 하자.”
분대장의 독려로 부지런히 서둘러서 허리 깊이만큼 파내려 갔는데 젠장 곡괭이 끝에 돌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옆을 찍으니 깡 하는 소리와 함께 팔에 전해오는 약간의 통증 그리고 그 옆을 다시 찍어도 똑 같았다.
젠장, 다른 곳으로 옮겨 팔수도 없고 간신히 있는 흙과 돌을 퍼내고 기관총을 설치하고 놈들이 남쪽에 어설프게 설치했던 철조망을 끌어다 설치를 하는 한편 지뢰를 묻고
났는데, 꽹과리 소리가 나고 함성에 피리소리가 들리며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 되었다.
이런 저녁도 못 먹었는데 각자 호 속에 들어가 산 아래를 응시 하고 있었다.
땅거미가 지고 희미한 달빛아래 기어오르는 중공군들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그날 밤이 되자 다시 중공군은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고 간간히 위이잉 하는 바람소리는 귀신이 울부짖는 소리 같았다.
그나마 꽹과리 소리가 아니라면 음산하기 짝이 없는 그런 밤이었다.
순간 쉬이익 ‘쾅’ 포까지 터지는 소리가 들리니 말 그대로 오음산 이었다.
그리고 야음을 틈타 중공군 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사격을 하니 총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재덕이 방아쇠를 놓고 총열이 식을 때 까지 기다려야 했다.
“야 이일 병 수류탄, 수류탄.”
안전핀을 뽑고 하나, 둘, 셋 희미한 달빛아래 어른거리는 놈들을 향해 수류탄이 던져졌다. ‘쾅’
다시 옆에 세워져 있던 칼알빈 소총을 들어 사격을 했다.
그렇게 몇 번의 파도 같이 밀려오는 중공군들을 향해 사격을 하며 새벽녘이 다가올 무렵 전투는 소강상태로 숨을 고르는지 조용했다.
이틈을 이용해 미숫가루를 입안에 털어 넣고 수통 뚜껑을 열어 목을 축였다.
그리고 이기석 일병도 재덕을 따라 미숫가루를 입안에 넣고 물을 마시고 나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벌떡 일어나 산 아래를 살펴보고 있었다.
재덕이 깜짝 놀라
“야. 이 일병, 앉....
‘땅’ 뜨르륵.
“윽”
미처 앉아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이기석 일병이 총을 맞고 주저앉았다.
“위생병! 위생병!”
재덕이 급히 위생병을 불렀다.
상처를 살펴보니 가슴에 관통상으로 숨을 몰아쉴 적마다 쿨럭이며 피가 솟아올라 쏟아지고 있었다.
“이 이병, 이 이병 정신 차려,”
벌써 이기석 이병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고 나오는 피의 양도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위생병이 뛰어 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총알이 오가는 상황에서 이기석 이병은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위생병이 이기석 일병의 손목에서 시계를 끌러서 윗주머니에 넣고 참호를 빠져나가 뛰어가고 있었다.
“이런 개새끼.”
눈이 뒤집힌 재덕이 옆에 있던 소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위생병은 욱 소리와 함께 고꾸라지면서 때구루루 몇 번을 굴러서 굴참나무 옆에 처 박혔다.
그리고 재덕은 순간의 후회를 했으나 이내 기관총을 잡고 사격을 했다.
아무래도 부사수가 필요했다.
“박 이병! 박 이병!”
박 영수 이병이 달려왔고, 박영수가 부사수가 되어 전투를 계속해서 아침까지 버텼다.
날이 새자 중공군은 물러났고, 전사자의 시신을 옮기고, 근 18시간이 지난 다음에 주먹밥이 배급되어 겨우 허기를 때우고 나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소대장이.
“소대원 전원 집합, 소대원 전원 집합.”
40여명의 소대원이 전원 집합을 했다.
“오늘 전투에 전원이 수고 했다. 그리고 몇 사람의 전우를 일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시체 검안 결과 위생병이 아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실수였던 고의였던 이런 배신행위는 즉결 처분 깜이다. 나와라.”
재덕은 움찔 했으나 나설 수가 없었다.
즉결 처분 깜이라는데, 잠시 후 소대장이
“소대 전원 엎드려뻗쳐, 곡괭이 자루 가져와.”
부관이 곡괭이 자루를 가져오자 두 대씩 때리기 시작 했다. 중간 쯤 때리다 지쳤는지
“야 1분대장 네가, 마저 때려.”
다시 소대장이
“원산폭격 실시 열중쉬어.”
찬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모두 머리를 땅에 박고 두 손은 허리에 대었다.
첫댓글 그 전쟁 통에 비리는 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의 사지로 몰아 넣었군요.
그것도 총칼이 아니라 비리로 젊은이들이 굶어죽었다는데 분노를 느낌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