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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 (따름 노래 “성전 오른쪽에서”)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47,1-2.8-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 복음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2,13-22>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
오늘은 로마의 주교좌성당인 라테라노의 성 요한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이 성전은 기원 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반포되어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끝난 후, 324년 황제가 자신의 별궁을 성전으로 세우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성전은 가톨릭교회의 모교회로서, 전 세계에 퍼져있는 주교좌성당 전체와 대등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첫째로 꼽히는 성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와 화답송의 시편에 나오는 ‘성전에서 흘러나와 하느님의 도성을 기쁘게 하는 강물’은 교회의 생명을 지탱하고 자양분을 제공하는 은총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전 정화는 교회 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은총의 물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쇄신하는 표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고 진정한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제시하십니다.
곧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성전으로 내어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을 당신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1코린 3,16)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나무에 둥지를 틀듯, 우리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동굴을 파고 들어와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존재요, 그분의 소유요, 그분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이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결코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주님께서 주님 되시게 해드려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기꺼이 주님의 소유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면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타인을 위해, 교회와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비로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여, 우리 몸은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교회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이 고귀함과 존귀함 앞에 겸허하게 경배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몸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을 경배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 형제 안에 계시는 그분을 경배하는 일,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대성전의 봉헌을 기념하는 이날, 우리는 성전과 교회의 축복과 더불어 ‘우리 자신’을 거룩한 성전으로 축복해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학교나 병원이 더 성전다운 성전이 될 수 있는 이유>
저는 라떼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이나 성 베드로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낼 때마다 ‘하느님께서 이 큰 성전들을 짓기를 원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이런 성전을 짓기 위해 돈을 걷어야 했고 그것 때문에 개신교가 생겨나는 계기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라떼라노 성전 앞에는 거지로 사는 수도원의 회칙을 승인받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올라온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 성전의 크기에 놀라는 모습이 청동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그 모습은 절대 ‘성당 멋지다!’라는 모습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도 커다란 성전을 짓고 빚을 갚고 또 유지 보수하기 위해 많은 돈을 쓰는 것보다는 성전의 더 본질적인 의미에 충실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양원역’은 우리나라 민간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기차역이자 가장 작은 기차역입니다.
물론 허구가 가미되긴 하였겠으나 양원역이 세워지게 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기적’(2021)입니다.
천재 준경의 목표는 단 하나, 마을에 기차역을 만드는 것입니다.
마을이 작아 기차가 서지 않기에 마을 주민들이 굴을 지나고 다리를 지나다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준경은 천재인데 일부러 꼴찌를 합니다.
공부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사실 공부 때문에 갖게 된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를 좋아하는 국회의원의 딸이 있습니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라희는 그의 능력을 발휘해 볼 것을 종용합니다.
그러나 준경은 오로지 마을에 기차역을 만들기 위해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물론 라희가 이것도 도와줍니다.
그러나 준경은 라희에게 더 가까이는 다가가지 못합니다.
준경의 누나 보경은 동생과 함께 살면서 동생의 친구가 되어줍니다.
동생은 누나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 도시로 나가지 않았고 시골집에 누나와 함께 삽니다.
준경은 누나가 섭섭해할까 봐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도 못 합니다.
아버지 태윤은 기차를 운전하는 기관사인데, 아들을 지나치다 보아도 아는 척도 안 합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둘은 서먹하기만 합니다.
어느 날 대통령이 그 지역에 역을 만들어도 좋다는 허가를 해 줍니다.
하지만 돈은 지원해주지 않습니다.
준경은 자신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땅을 평탄하게 하고 손수 역을 세우려 합니다.
그러자 보다 못한 마을 사람들도 도와줍니다.
그렇게 우리나라의 첫 민자역인 양원역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태윤은 기차역을 통해 아들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준경의 어머니는 준경을 낳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누나 보경도 사실은 준경이 환시를 보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전교 1등을 해서 상을 받아 올 때 기차 때문에 다리 난간에서 몸을 피하다 동생의 트로피 때문에 물에 빠져 죽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신 때문에 죽었고, 누나도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은 준경을 그 집에 잡아놓고 있었습니다.
준경이 그렇게 만들려고 한 양원역은 어떻게든 그런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은 의지였습니다.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누나도 죽게 했다고 생각할 줄 알고 아버지께 칭찬받기 위해 만들기로 한 것이 기차역입니다.
그는 기차역만 있었어도 자신을 낳다가 엄마가 죽을 필요가 없었고 누나도 죽지 않았을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 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는 천재성을 펼칠 수도 없고 결국 자신을 믿어주는 라희에게도 갈 수 없습니다.
아버지 태윤은 고등학생 아들이 자신이 기뻐할 것이라 믿어 손수 만든 작은 간이역을 들어가 보며 모든 것을 준경에게 말해줍니다.
사실 태윤이 일만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준경을 낳을 때 집에 늦게 도착해서 준경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누나 보경이 죽을 때도 기차를 몰던 기관사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상을 받을 때 자신만 즐기면 아내에게 미안할 것 같아서 다른 사람이 운전하겠다는 것까지 뿌리치고 누나를 보냈던 것입니다.
준경의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에 아버지도 큰 책임이 있었기에 준경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인데, 준경은 아버지가 자신을 원망하는 줄 알고 괴로워했던 것이고 아버지의 칭찬을 듣기 위해 역을 세우려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준경이 다시 꽃필 수 있도록 기차를 태우고 차를 몰아 나라에서 주최하는 수학 경시대회에 나가게 해 줍니다.
준경은 전국 1등을 하여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준경은 드디어 누나와 엄마의 숨결이 깃든 집을 떠날 수 있게 되었고 꿈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양원역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아버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공간이었고, 자신 안에 있는 죄책감을 아버지가 해결해 주어 이전의 자신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공간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세워야 하는 성전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그런 성전을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모든 죗값은 당신이 다 치러놓았으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께서 머무실 작은 간이역을 만들지 않는다면 주님은 영원히 우리의 무서운 심판자로 외부에 서서 계십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예수님께서는 이 돈으로 성전을 짓기를 원하실까, 학교를 짓기를 원하실까?’를 생각하셨던 것을 떠올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떠올려야 우리가 어떤 성전을 지을지 알게 됩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학교를 세우는 것이 성당을 짓는 것보다 주님께서 더 기뻐하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행위 안에 주님께서 이태석 신부님의 마음에 자리를 잡으시는 것입니다.
내 죄를 인정하고 주님을 내 안에 받아들이기 위해 내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를 원할 때 내 안에 성전이 세워지고 주님께서 머무실 공간이 마련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들어오시고 주님께서 “너는 죄 없다.”라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또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와 하나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고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머무실 우리 마음 안의 작은 간이역, 그런 성전을 만들어야 합니다.
큰 성전을 벽돌로 지었다고 주님께서 오지 않으십니다.
성전을 지을 때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산다면 우리의 성전은 벽돌로 된 커다란 건물이 아닌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 학교나 병원, 유치원이나 무료급식소 등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건물이 마치 양원역처럼 우리 내면 성전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미사를 하면 어떻고 병원에서 하면 어떻습니까?
이런 성전이 오히려 진정 내 안에 주님의 공간을 마련하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성전이 되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 안에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이웃사랑을 실천하려는 마음으로 지어지는 양원역과 같은 참성전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전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교구장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입니다.
대성전의 공식 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복음사가 대성전’입니다.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전 세계 모든 지역교회의 유대관계 안에서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웁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표현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 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써 이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1코린 3,16.17)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요한 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 하고 말합니다. (묵시 21,22-23)
성전이란 특정 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 만나는 곳, 함께하는 곳이니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에서의 모든 만남이 거룩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거룩함으로 속됨을 정화해야 하고 우리의 거룩함이 세상의 속됨을 이겨가야 합니다.
그 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마지막에 하느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노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의미는 환전상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분명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 대신 ‘돈’과 물질이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니 그 결과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썩으면 산천이 썩고 사람이 무너져서 종교도 무너지고 모두가 망그러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악한 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에 흠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도 그곳에 거룩함을 지닌 백성이 없다면 이미 성전의 품위는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진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더 소중합니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하신 주교님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더 큰 성전인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고 상처 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 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 ‘너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허물을 벗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답게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걷어내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우리의 곳간은 천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곡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곳간은 있으나마나입니다.
따라서 알곡이 되기 위한 수고와 땀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알곡을 만드는 일입니다.
영혼의 정화를 통해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입어 겉모습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 영혼의 상태를 잘 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합니다.
혹 마음의 성전에 흠이 간 것이 있으면 그 흠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고치는 방법 아시죠?
고해성사입니다.
성사를 자주 보고 새 삶을 시작하시기 바라며 보속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물이 새거나, 낡아서 파손된 곳이 있다면 놀랄만한 열성으로 빨리 복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그처럼 고귀한 손님께 부당한 거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를 하고 집안을 정돈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영혼에 존귀하신 그분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고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거룩함을 간직한다면 대성전이든 마당이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면 어디에서든 거룩함으로 빛나야 하겠습니다.
외적인 건물의 화려함보다도 마음의 성전을 빛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의 찬미, 말씀 선포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성모님의 발현 장소로 강복하시길 청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전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 주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요한 2,16)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고파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내쫓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제물로 바칠 짐승이나 돈을 성전 안에서 고르고 또 바꾸다 보니 장사치들의 존재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신 겁니다.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집은 외적으로 성전 건물을 가리키지만, 내적으로는 아버지께서 머무르시며 당신 백성과 통교를 나누시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외적인 예식과 제물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과 인간이 나누는 사랑의 침묵과 머무름도 간과할 수 없는 본질이지요.
아버지께 제물을 들이대기 전에 먼저 고요히 존재 대 존재로 마주하는 것이 우선일 겁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9)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성전이라 일컬으십니다.
사람들이 알아듣건 알아듣지 못하건,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실 당신의 앞날을 이 말씀으로 계시하신 겁니다.
아버지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현존하시는 성전입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환시로 봅니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에제 47,9.12)
예언자는 천사에게 외적으로 이끌려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흐르는 장면을 봅니다.
그 물이 강으로 흘러가면서 온갖 생물을 살리고, 바다로 흘러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납니다.
이 물이 지닌 힘은 그 원천인 성전의 생명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물과 피를 쏟으신 장면이 떠오릅니다.
성전이신 예수님의 몸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는 교회에 생명을 주는 성사입니다.
이 은총은 흘러가 닿는 곳마다 살리고 되살리며 거듭 생명을 줍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예수님의 몸에서 흘러나와 세상에 보내어진 물이 아닐까 관상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과 사랑을 가득 채워 우리를 세상으로 흘려보내시니까요.
주님의 생명력으로 충만해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는 아직도 죽음의 그늘 밑을 걷고 있는 이 세상에 은총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파견되어 세상 구석구석으로 스며드는 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물을 흘려보내는 또 다른 성전이기도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성령께서 현존하시는 성전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성전 중의 성전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내며 또다른 성전인 우리 존재가 예수님의 바람과 기대에 맞게 잘 정돈되고 질서와 조화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있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으로 세상 안에서 조용히 주님의 생명을 퍼뜨리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생명의 강, 은총의 강 - 성전 정화; 마지막 보루인 교회>
“하느님 아버지, 어머니 교회(Deus Pater, Mater Ecclesia)”.
제대로 된 아버지가, 어머니가 없는 작금의 세상에 참 따뜻하게 느껴지는 인상적인 말마디입니다.
바로 지난 10월 28일 오후 7시(로마 현지 시각 낮 12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의 사목 표어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참으로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와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어머니 교회를 모시고 함께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은 천복(天福)의 사람들입니다.
만추(晩秋)의 요즘 역시 이런 하느님 아버지와 어머니 교회를 느끼는 수도원 분위기입니다.
마침 어제 써놨던 짧은 ‘노년의 향기’란 시도 생각납니다.
“참/편안하고/넉넉한/초연하고 담백한
가을/낙엽의 향기/노년의 향기”
참 편안하고 넉넉한 하느님 아버지, 어머니 교회 같은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행복한 삶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같은 장엄한 아름다움의 불암산을 배경한 어머니 교회같은 수도원입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마음을 다잡아 온 이 말마디 또한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간절한 소망은 예수님처럼 이런 하느님 아버지의 부성애와 어머니 교회의 모성애를 닮았으면 하는 것 하나뿐입니다.
수도원의 청원자 형제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수사님은 휴가 가지 않습니까?”
“갈 데가 없습니다.
휴가 다녀온 지 수십년은 된 듯합니다.”
“수사님은 수도원이 집이 되었네요.”
“그렇습니다. 주님 계신 주님의 집 수도원 여기가 바로 제 고향집입니다.”
새삼 33년 동안 정주한, 늘 편안하고 따뜻하고 넉넉한 여기 수도원 성전이 제 참 고향집임을 깨닫습니다.
사찰(寺刹)의 두 빛나는 보물같은 자산은 노승과 노목이란 말을 잊지 못합니다.
제가 절이나 수도원에 가면 우선 확인하는 것이 셋이니 절이나 수도원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노승(老僧)과 노목(老木)과 오래된 건물입니다.
노승이자 고승(高僧)이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참으로 이런 셋을 갖춘 절이나 수도원이라면 저절로 경배(敬拜), 감복(感服)하는 마음이 됩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대성전입니다.
바로 오늘 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무려 700년 역사의 건물입니다.
이런 건물은 그대로 역사 교과서요 보고 배우는 바도 참으로 클 것입니다.
이 라테라노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거의 천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각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널리 알리고자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미사를 드립니다.
노목과 노승이 절이나 수도원 역사를 반영하듯 이런 건물 역시 장구한 역사를 반영하며 최고의 역사 교과서가 되어 줍니다.
계속 부수고 짓는 짧은 역사의 신축 건물들뿐이라, 전통의 깊이와 뿌리를 상실한 현대인들의 날로 천박(淺薄)해지는 모습이 참 안타깝습니다.
도대체 보고 배울 노목이나 노승, 오래된 건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노인들은 많아도 대부분 요양원에서 치매로 무거운 짐이 된 분들이 대부분이고 참으로 존경과 신뢰의 어른들은 절대 부족한 현실입니다.
요셉 수도원은 설립 후 34년이 된 젊은 수도원이지만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서서히 벌써 노령화되는 느낌이 듭니다.
33년 동안 정주해 오면서 불암산과 수도원은 그대로인데 주변 가까이에서 얼마나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는지 모릅니다.
오늘이 특히 감회가 깊은 것은 코로나로 인해 1년 훨씬 지난 후 처음으로 코이노니아 자매회가 피정 모임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6년 역사의 자매회이지만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병고로 많이 노쇠해진 여러 자매들의 모습도 목격합니다.
요즘 많이 생각나는 것이 불교의 폐사지(廢寺址)들이나 시골의 빈집들, 그리고 옛 초등학교 빈 건물들입니다.
혹자는 ‘폐허의 미학’을 이야기하지만 저는 참 비애감과 쓸쓸함에 가슴 시림을 느낍니다.
자꾸 눈길이 가는 예전 스님들이 많았을 폐사지들과 사람들이 정답게 살았던 시골집들, 학생들로 붐볐던 열기를 뿜던 초등학교 건물들 분위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특히 한창 때는 80여명 미국 수도자들이 살았던, 그러나 지금은 한국 왜관 수도자들이 파견되어 살고 있는 미국 뉴저지주의 뉴튼수도원의 옛 건물과 거기 머물 때 매일 찾았던 숱한 수도자들이 묻힌 수도원 묘지를 보면 마음 아려옴을 느낍니다.
사람이 보물이자 희망입니다.
희망의 보물인 사람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사라지면 건물도 급속히 무너져 죽어갑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 살아 있는 집들입니다.
아무리 자연환경이 좋고 건물이 좋고 전통이 좋아도 그 안에 살아 있는 보물, 수행승 수도자들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여기에 요셉 수도원에 수도자들이 없다 생각해 보시면 금방 이해될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세상의 마지막 보루인 교회가, 세상을 끊임없이 성화시켜야 할 교회가 세상에 속화된다면 존재 이유의 상실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열화와 같은 의노가 이해가 됩니다.
“이것들을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라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는 성경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성전 정화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입니다.
성전 정화는 3차원에 걸쳐 동시적으로 일어납니다.
교회 성전 건물 분위기의 정화와 더불어 교회 공동체 성전, 그리고 각자 몸의 성전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 성전의 정화입니다.
보십시오.
믿음의 한 몸 공동체가 빠지면 껍데기 교회 건물은 참 무의미한 죽은 건물이 될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 형제들이 끊임없이 날마다 찬미와 감사의 시편기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기에 비로소 동시에 정화되고 성화되어 살아나는 건물 성전, 공동체 성전, 개인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사흘만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바로 진짜 성전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된 그리스도의 한몸 교회공동체입니다.
교회가 미사를 봉헌하고 미사가 교회 공동체를 만듭니다.
성체성사 미사를 통해 양육 성장 성숙되는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 성전입니다.
미사 중 아름다운 감사송이 참 은혜롭게 이 진리를 요약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기도하는 집에 자비로이 머무르시며,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저희가 성령의 성전이 되고, 거룩한 생활로 주님 영광의 빛을 드러내게 하시나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이 집으로 교회를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가 나날이 거룩해져, 무수한 자녀들과 함께 기뻐하며, 하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나이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 말씀은 그대로 성전 미사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성전 미사의 강물같은 은총이 세상 바다에 끊임없이 흘러가 세상을 살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보루같은 성전에서 끊임없이 샘솟아 세상으로 흘러가는 강물같은 은총입니다.
“주님의 집에서 샘솟는 이 물은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말 그대로 생명의 강, 은총의 강을 상징하는 미사은총입니다.
다음 장면 역시 미사은총으로 인한 낙원의 현실을 환상적으로 눈에 보이듯 표현합니다.
“이 생명의 강, 은총의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 성전인 우리를 정화, 성화시켜 주시며, 말씀의 양식과 성체의 약으로 우리를 건강케 하시어, 우리 모두 당신 생명의 강, 은총의 강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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