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
국적 : 영국
음악장르 : 록, 팝
결성연도 : 1960년
주요멤버 :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대표곡 : <아이 원트 투 홀드 유어 핸드(I Want to Hold Your Hand)>(1964), <노르웨이산 가구 (Norwegian Wood)>(1965), <예스터데이(Yesterday)>(1965), <인 마이 라이프(In My Life)>(1965), <헤이 주드(Hey Jude)>(1968), <렛 잇 비(Let It Be)>(1970)
1960년 영국의 리버풀에서 결성된 록 밴드. 존 레넌,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가 주요멤버이다. 1962년 데뷔싱글 <러브 미 두(Love Me Do)>로 시작하여 1970년 마지막 앨범 《렛 잇 비(Let It Be)》를 남기고 해산하기까지 비틀스만의 철학과 선율이 담긴 음악 양식을 선보이며 대중음악의 스펙트럼을 확장시켰다.
생애 및 활동사항
영국의 록 밴드 비틀즈(The Beatles)는 잉글랜드 북서쪽에 위치한 항구도시 리버풀에서 탄생했다. 밴드의 리더 격인 존 레논(John Lennon: 1940~1980)은 쿼리뱅크 고등학교에 다니며 비틀즈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아마추어 스키플 밴드 쿼리멘(the Quarrymen)을 결성해 공연을 펼쳤고, 1957년 교회 축제행사에서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 1942~ )를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음악세계에 공감했고, 밴드 활동을 함께하는 데 동의했다. 이후 폴이 자신과 같은 학교에 다니며 음악적 교류를 쌓았던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을 쿼리멘에 소개했고, 이듬해인 1958년 조지 해리슨은 팀의 리드 기타리스트로 합류했다. 존은 리버풀 미술대학에서 만난 스튜어트 서트클리프(Stuart Sutcliffe)를 베이시스트로, 이후 피트 베스트(Pete Best)를 드러머로 영입하고 함부르크로 연주여행을 떠났다. 스튜어트는 함부르크에서 밴드를 탈퇴했고, 폴이 그를 대신해 베이스 기타를 맡았다.
쿼리멘이란 밴드는 '조니 앤드 더 문독스(Johnny And The Moondogs)', '롱 존 앤드 더 비틀즈(Long John And The Beatles)', '실버 비틀즈(The Silver Beetles)' 등으로 이름을 바꾸다가 1960년 마침내 '비틀즈(The Beatles)'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이 이름은 존이 생각해낸 것으로, 버디 홀리(Buddy Holly)의 밴드 크리케츠(The Crickets, 귀뚜라미들)를 참조하여 비틀즈(Beatles, 딱정벌레들)라는 이름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이름은 음악용어 비트(beat)와 비트문학을 연상시키며, 1950~1960년대 미국 비트운동이라는 사회·문학 운동을 암시하기도 했다.
1961년 2월 21일 비틀즈는 리버풀 매튜 스트리트에 있는 캐번 클럽(Cavern Club)에서 역사적인 첫 무대를 가졌다. 비틀즈는 이곳에서 2년 동안 300회 이상의 라이브 공연을 하며 많은 관객을 끌어 모았다. 그러던 중 음반 가게를 운영하고 있던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의 눈에 띄면서 본격적인 음반활동을 시작했는데, 브라이언은 비틀즈의 매니저를 자처하며 우선 의상과 헤어스타일을 교체하고 레코드 계약을 추진했다. 결국 EMI 산하 팔로폰(Parlophone)의 녹음 기술자였던 조지 마틴에게 오디션을 보게 되었는데, 이때 밴드의 드러머였던 피트 베스트가 탈락되고 링고 스타(Ringo Starr : 1940~ )가 영입되었다. 링고 스타는 당시 최고의 드러머였으며, 무엇보다 밝고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로 존과 폴, 조지가 그의 합류를 간절하게 원했다. 1962년 8월 비틀즈는 드디어 존과 폴, 조지, 링고 이렇게 4인조 밴드로 정착했다.
1962년 9월 비틀즈는 첫 싱글 <러브 미 두/피.에스. 아이 러브 유(Love Me Do/P.S. I Love You)>를, 이듬해인 1963년 2월 데뷔앨범 《플리즈 플리즈 미(Please Please Me)》를 발표했다. 비틀즈는 1963년 영국 앨범차트에서 데뷔앨범 《플리즈, 플리즈 미》로 30주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2집 《위드 더 비틀즈(With the Beatles)》로 다시 21주 동안 1위를 차지하며 무려 51주 연속으로 1위에 오르는 대기록을 세웠다. 1964년에도 《어 하드 데이스 나이트(A Hard Day's Night)》와 《비틀즈 포 세일(Beatles for Sale)》로 28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비틀즈의 음악은 이전의 그룹과는 확연히 구별되었다. 존과 폴, 조지는 모두 뛰어난 작곡가이며 유능한 가수였다. 이들의 음악은 로큰롤과 모타운 팝, 리듬 앤 블루스 같은 미국 흑인음악에 바탕을 두었으며,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척 베리(Chuck Berry), 버디 홀리,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 에벌리 브라더스(The Everly Brothers)를 모범으로 삼고, 여기에 훨씬 더 강력하고 밝고 활기찬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특히 단순한 멜로디와 이를 뒷받침하는 멤버들의 화음과 코러스, 솔직하고 직접적인 노랫말, 그리고 베이스, 드럼, 리드 기타, 리듬 기타 등 악기 네 대가 어우러진 완벽한 앙상블은 당시 다른 밴드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비틀즈는 자작곡을 부르고 연주했으며, 멤버 전원이 노래를 부른 첫 로큰롤 밴드였다.
비틀즈는 여세를 몰아 1964년 2월 7일 미국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다. 이틀 뒤 당시 미국 최고의 인기 TV 프로그램이었던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영국 음악의 미국 침공’ 흔히 말하는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시작이었다. 비틀즈의 <에드 설리번 쇼> 출연은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지가 20세기 록 음악계의 역사적 사건을 정리하면서 당당히 1위에 올려놓았을 만큼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비틀즈는 <아이 원 투 홀드 유어 핸드(I Want to Hold Your Hand)>를 시작으로 빌보드 싱글차트에 이름을 올렸으며, 전미 순회공연에서 가는 곳마다 이른바 ‘비틀마니아 Beatlemania’로 불린 광적인 팬들을 몰고 다녔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음악도 성장해갔다. 비틀즈는 자유로운 음악 형식과 편곡을 시도, 발라드풍의 <예스터데이 (Yesterday)>를 비롯하여 복잡한 리듬의 <페이퍼백 라이터(Paperback Writer)>, 동요풍의 <옐로 서브머린 (Yellow Submarine)>,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엘러너 릭비(Eleaner Rigby)> 등 다양한 노래를 선보였다. 이는 젊은 팬들을 사로잡았으며, 다른 연주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서양예술음악 애호가들로부터도 큰 호감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팬들의 지나친 애정에 대한 부담과 음악에 대한 개인적 관심차로 비틀즈 내부에 불화가 생겼다. 그즈음 존은 일본의 전위 예술가인 오노 요코(Ono Yoko)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미술과 퍼포먼스, 반전 시위 등을 함께 하며 예술적 교감과 사랑을 이어갔지만, 이로 인해 존이 밴드 활동에 소원해지자 비틀즈 멤버들은 오노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급기야 비틀즈의 해체를 야기시켰다는 대중의 따가운 눈총까지 받게 되었다.
1966년 여름, 미국에서의 순회 공연을 끝으로 긴 침묵의 시간을 가졌던 비틀즈는 1967년 6월 1일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발표했다. ‘가상 밴드’라는 아이디어에서 착안해 만든 이 작품은 전 곡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구조적인 완결성과 예술적인 완성도, 시대를 앞서나간 실험정신, 그리고 각종 녹음기술이 집약된 당대 록 음악이 거둔 최대의 쾌거였다. 이 앨범은 음악적으로 최상의 완성도를 보여준 비틀즈의 최고 명반임에 틀림없지만, 이것을 준비하는 동안 비틀즈 멤버들은 서로 다른 예술적 관심사를 분명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제5의 비틀’이라 불릴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비틀즈는 급속히 해체 위기에 놓였다.
비틀즈는 1969년 1월 30일 영국 런던의 애플 스튜디오 빌딩의 옥상에서 즉흥 콘서트를 가졌다. 이는 비틀즈 멤버들이 함께한 마지막 연주가 되었다. 그리고 1970년 폴 매카트니가 해체를 공식 선언하고 이익 배당에 관해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후 법적 분쟁이 이어지다가 1975년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이들은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으며, 해체 후 일부에서 재결합도 시도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밴드는 해산되었지만 존과 폴, 조지, 링고는 솔로 아티스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존과 폴의 그늘에 가려 상대적으로 빛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조지는 솔로 앨범인 《올 싱스 머스트 패스(All Things Must Pass)》(1970)를 통해 음악적 역량을 마음껏 선보였으며, 인도 음악과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을 이어갔다. 링고는 컨트리 앨범 《부쿠 오브 블루스(Beaucoup of Blues)》를 발표했고, 영화에 출연하면서 배우 경력을 쌓아갔다. 폴은 아내 린다 이스트먼(Linda Eastman)와 데니 레인(Denny Laine), 데니 세이웰(Denny Seiwell)과 함께 밴드 '윙스(Wings)'를 결성해 비틀즈 시절 못지않은 큰 성공을 거뒀다.
오노 요코와의 결혼과 '베드 인(Bed-in)' 시위 등 정치, 사회적 문제에 민감하게 관여했던 존은 《이매진 (Imagine)》을 포함한 몇 장의 앨범을 공개한 뒤 5년 만에 새 음반을 준비했다. 그런데 컴백을 며칠 앞둔 1980년 12월 8일 존은 뉴욕 맨해튼의 자택 앞에서 열성팬이 쏜 총에 맞고 쓰러졌다.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과다한 출혈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한편, 수년간 암으로 투병해온 조지는 2001년 11월 29일 미국 LA에서 58세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