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현대시 작품상 수상작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 (외 9편)
박상순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
눈보라는 좋겠다.
폭설로 무너져 내릴 듯
눈 속에 가라앉은 지붕들은 좋겠다.
폭설에 막혀
건널 수 없게 되는 다리는 좋겠다.
겨울 강은 좋겠다.
그런 폭설의 평원을 내려다보는
먼 우주의 별들은 좋겠다.
즐거운 도시를 지난 즐거운 사람은
눈보라 속에 있겠다,
어깨를 움츠린 채 평원을 바라보고 있겠다.
무너져버린 지붕들을 보겠다.
건널 수 없는 다리 앞에 있겠다.
가슴까지 눈 속에 묻혀 있겠다.
하늘은 더 어둡고, 눈은 펑펑 내리고,
반짝이던 도시의 불빛도 눈보라에
지워지고, 지나온 길마저 어둠 속에 묻히고,
먼 우주의 별들도
눈보라에
묻히고.
즐거운 사람은 점점 더 눈 속에 빠지고
가슴까지 빠지고
어깨까지, 머리까지 빠지고.
아주 먼 우주의 겨울 별들은 좋겠다.
밤은 좋겠다.
점점 더 눈 속에 파묻히는 즐거운 사람을 가진
폭설의 겨울은 좋겠다.
파묻힌 사람을 가진 겨울은 좋겠다.
파묻힌 사람을 가질 수 있는 겨울은 좋겠다.
얼어붙은 겨울 강은 좋겠다.
폭설에 묻혀,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도 않는
건널 수 없는 다리는 좋겠다.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
눈 덮인, 막막한,
추운,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안타까운, 밤새워 바람만이 붕붕대는, 간절한,
눈 속에 다 묻혀버린,
저 먼 우주까지, 소리 없는,
겨울이 오면.
—격월간《시사사》2012년 3-4월호
유령이여 안녕
올 겨울엔 유령이 나오는 책 다섯 권을 시중에 뿌리기로 했습니다. 시원한 냉동 참치를 녹여 먹으면서 묻어둔 악몽을 불러내기로 했습니다.
참치 식당 별실에 모인 우리는 술도 한 잔 걸쳤습니다. 적당히 악령들이 퍼지면 우린 텍사스로 튈 계획입니다. 잔인한 미소를 코끝에 걸고 우리는 신이 나서 노랗게 들떠 있었습니다.
마침 그 자리는 우리가 황제 펭귄 한 놈을 냉동하기로 결정했던 장소였습니다. 첫 번째 놈으로 황제 펭귄의 냉동유령을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새로 구하기로 했습니다.
무시무시한 놈으로 구할 겁니다. 닭대가리를 닮은 놈과 왕지렁이처럼 크고 축축하되 더 질긴 게 좋겠지요. 네 번째는 영국산, 다섯 번째는 비장의 국내산으로 정했습니다.
아마 네 번째는 암놈일 겁니다. 영국에서 온 건데 잉글리쉬는 에프, F밖에 모릅니다. 에프. 아주 큰 놈입니다. 삐죽삐죽합니다. 날카롭지요. 비장의 국내산은 거대한 창자 같기도 하고, 오물 같기도 하고, 박 터진 두개골 같기도 합니다.
올 겨울엔 이 다섯을, 흉측한, 끔찍한, 이것들을, 시중에 풀어놓을 겁니다, 우린 이미 여러 번 대구탕, 알탕, 육개장, 곰탕 등을 먹으며 익숙해진 편이지만, 그래도 안 봅니다. 이것들 풀어놓고 텍사스로 튈 겁니다.
책 다섯 권. 이게 우리들의 암호지요. 지금도 우리는 신이 나서 노랗게 들떠 있습니다. 우선 오늘은 터미널로 갑니다. 각자 다른 시간에 시외버스를 타고 모처에서 만날 예정이지요. 산 채, 죽은 채, 통째, 뼈째 구워먹고 비벼먹으며 또 한 잔 걸칠 겁니다.
내 버스엔 황혼이 걸렸습니다. 안주머니에 넣은 노란 지폐가 내 심장을 쾅쾅 때립니다. 가슴이 뜁니다. 실핏줄이 떨립니다. 살코기 같은 버스를 몰고 가는 황혼의 운전기사는 냉동 참치대가리를 닮았습니다. 뒷자리엔 새 같은 사내가 뻣뻣하게 뻗어 있습니다.
나도 이승에선 한번쯤, 깊게 묻은 끔찍함을 드러낸 섬뜩한 유령이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나 세 번째로 우리가 택할 대단한, 흉측한, 그것들이, 우리들이 되어도 좋겠습니다. 무시무시한 닭대가리, 질긴 가죽지렁이라면 좋겠습니다.
내 시간엔 황혼이 붉습니다. 좋겠지요. 그래요. 갑니다. 튑니다. 황혼이 붉습니다.
—계간《세계의 문학》2011년 가을호
왕십리 올뎃
왕십리는 왕십리.
하늘 아래 왕십리. 가을 왕십리.
부서지는 낙엽 언덕
내려올 때에도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왕십리의 왕십리. 둘도 없는 왕십리.
겨울, 왕십리는 보았음.
가을날의 그녀가 목도리를 두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음.
언덕 아래 누워 있던
목 없는 겨울 아줌마의 어떤, 누구라고 들었음.
그녀에게 들었음.
그해 겨울, 그래도 왕십리는 왕십리.
목 없는 사람들이 몰려와
눈보라 골짜기에
가을밤을 새하얗게 밀어 넣을 때에도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왕십리.
여름, 웨딩홀 앞에서도 왕십리.
목 없는 나무가 있고, 겨울이 있고
목 없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의 봄이 있고
그녀도 거기 있었음.
그래도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왕십리.
왕십리를 걸었음.
지난 봄, 지하철 역 앞에서
그녀를 보았음. 봄날의 그녀는
왕십리를 초대했음. 결혼식에 초대했음.
미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초대했음.
그러나 왕십리는 왕십리.
가을 잎 떨어지는 왕십리에 있었음.
그날은 슬금슬금, 가을비를 안고서
비 내리는 왕십리를 종일 걸었음.
삐딱하게 주차를 한, 타조 알 같은
차에서 내리는 여자와 맞닥뜨렸음.
여자가 소리쳤음.
왕십리?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달걀 같은 여자가 따라 내렸음.
왕십리?
두 여자는 그녀들끼리 마주보고 소리쳤음.
왕십리?
그래도 왕십리는 왕십리. 뿌리치고 걸었음.
비 내리는 왕십리를 마냥 걸었음.
가을 왕십리.
봄이 와도 왕십리, 밤이 와도 왕십리.
낼모레도 왕십리.
가을 왕십리.
울긋불긋 단풍들 것 같지만 그건 아닌 왕십리
그래서 쓸쓸할 것 같지만 그건 아닌 왕십리
그래서 무너질 것 같지만 그건 아닌 왕십리
물결치는 왕십리, 그래봤자 왕십리. 리얼 왕십리.
왕십리의 왕십리, 아직 왕십리.
타조알도 올뎃. 낼모레도 올뎃. 하늘 아래 올뎃.
가을 가득 올뎃.
둘도 없는 왕십리. 끝도 없는 왕십리.
가을날의 왕십리. 올뎃 왕십리.
—계간《창작과 비평》201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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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작품상 수상작은 위의 3편 외에도 ‘장화 신고 장화 벗고, 오늘 시인 언니 병신 돋는다, 시크 소티의 예언자, 음악은 벽 속에 있다, 나는 네가, 요코하마의 푸른 다리, 슬픈 감자 200그램’ 등 7편이 더 있어서 수상작은 모두 10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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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 1962년 서울 출생. 1991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목화밭 지나서 소년은 가고』『Love Adag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