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땅 라싸(拉薩)를 가며..(클릭)
신의 땅 라싸(拉薩)를 가며 (1)
여행은 언제나 우리들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번 여행은 텔레비전으로만 보던 칭짱(靑藏)철도로 간다니 더욱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48시간이나 걸린다는 하늘열차를 타게 되어 마치 어깨에 날개가 달린 듯하다.
행선지가 티베트의 수도 라싸(납살拉薩)라 했다. 지난해 여름에 해발 3300m나 되는 운남성 샹그리라(중디엔中甸)의 소포탈라궁이라 불리어지는 송찬림사(쑹찬린스松贊林寺)의 145계단을 힘겹게 오르던 기억과 고산증(高山症)으로 한밤을 새우던 일이 기억에 새롭다. 송찬림사는 달라이라마 5세가 건립한 티베트 불교 13대 사원 중의 하나라 했었다.
장족(藏族) 가정도 방문해 보고 그들의 도움으로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기도 하고 옥룡설산(玉龍雪山) 아래 옥빛 물 흐르는 백수하(白水河)에서 커다란 야크를 타보기도 했다. 나시족(納西族)이 성산으로 받들어 모시는 해발 5590m의 옥룡설산을 넘으면 바로 티베트라 했었다.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 고원지대, 티베트를 향한 한겨울 여행이라 방한복으로 단단히 무장을 했다.
상해(상하이上海)에서
인천공항에서 중국 동방항공 여객기로 오후 1시 20분 출발해서 두 시간 거리이지만 한 시간 시차로 상해 푸동 공항 도착이 중국시간 2시 16분이었다. 우리나라 매스컴에서 자주 소개 되던 푸동 공항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자칭 제일 잘생긴 남자라고 소개하는 장춘 태생이라는 김광서 동포 가이드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는 자신만만한 자세로 설명한다.
푸동 국제공항은 현재 삼분의 일이 사용되고 있으며 삼분의 이는 2010년에 완공된다. 이곳은 14년 전만 하더라도 시골이었다고 한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희뿌옇고 안개가 낀 것 같다. 중국의 이런 날씨는 장강과 많은 호수의 영향이고 상해에 습기가 많은 원인은 황포강 때문이다. 상해는 황포강을 중심으로 푸동(浦東)과 푸서(浦西)로 나뉜다. 황포강의 동쪽은 푸동이고 서쪽은 푸서가 된다.
우리를 금용객차(金龍客車)라고 쓰여 있는 버스로 안내했다. 외곽에 있는 공항에서 상해시 도심까지는 60km 거리다. 우선 중국 돈 100위안화는 우리 한화 13,000원, 우리 한국 돈 10,000원은 중국 돈 80위안화로 계산하면 된다는 설명이다.
상해시 버스투어가 시작 되었다. 상해시는 지역이 서울보다 10배나 크고 인구는 1,780만 명이며 2003년에 완공된 자기부상열차는 푸동 공항에서 시내 지하철 2호선 용양로(龍陽路)역까지 30km 거리를 운행하고 있다고 한다.
상해시의 위도는 제주도보다 남쪽에 위치해 있고 최고기온 16˚C, 상온 7˚C이며 오늘은 6˚C로서 제일 추운 날씨란다. 상해시 인구의 80%가 농민이고 20%가 도시인이며 1년 3모작이라 다른 지방보다 잘 산다고 한다. 중국에서 부자동네로 알려진 곳은 상해, 소주, 항주이다. 상해는 중국에서는 제일 큰 삼각주 평야지대 이고 세계적으로는 5위로 크다. 면적이 6341m
이고 예로부터 양자강의 “어미지향(魚米之鄕), 실차지지(實茶之地)”로 불리었다.
상해인구 1780만 명 중 제일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대만사람으로 80만 명이고 113개국 사람이 모여 산다. 일 년에 상해를 찾아오는 인구는 1억 명이다. 상해주변의 바닷가는 모두 황톳물이다.
상해는 청국말(淸國末), 민국초(民國初)에 외국인에게 조차지 등의 개방으로 1940년대 초 급격히 발전되었다. 중일 전쟁 때에 전쟁피해를 덜 받아 많은 사람들이 상해로 이사를 와서 급격히 발전되었다. 그 시절에 건설된 80년~100년 전 건물을 지금도 많이 볼 수 있다.
최고시속 525km이며 보통 430km로 달리는 자기부상열차를 운행하는 상해시의 발전 속도는 세계1위이다. 이런 발전을 위해 상해시에서 푸동 지역에 배상을 많이 해주었다. 또 도농격차를 줄이기 위해 시골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토지에 대하여 개인에게 30년 사용권을 주고 토지사용료, 개인 소득세 등 세금을 모두 없앴다.
<남포대교와 상해의 빌딩숲>
버스관광 중 시계는 네 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회색구름 사이로 주황색 해가 서쪽하늘을 밝히고 있다. 어마어마한 고층아파트 숲과 빌딩들, 50층 이상 빌딩이 300개가 넘는 거대한 도시다.
고가도로에서 세 바퀴를 돌고 올라간 회전식으로 연결된 8888m라는 남포대교는 여간 미려하지가 않다. 상해에서 제일 길고 아름다운 다리로서 “남포대교(南浦大橋)”라는 휘호는 등소평의 글씨란다. 14년 동안 황포강에 남포대교 같은 다리 5개가 더 놓여 졌다고 한다.
황포강 밑에는 지하철이 두 줄로 달리고 동양에서 제일 높은 동방명주탑이 468m 높이로 개혁개방의 상징(1991년)으로서 우뚝 서 있다. 동방명주탑은 상해텔레비전 방송국에서 1억 7000만 위안화를 투자해서 이제까지 투자비를 제하고 3~4억의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일인당 50위안화의 입장료로 3600만 명이 관람을 했다는 것이다.
상해 건축기술의 우수성을 소개하는데 음악당으로 알려진 85년 전 건축된 극장건물을 통째로 2.5m 들어올려서 60m를 이동했다고 한다. 중국 제일의 부자는 전자상품 상인이다. 전국에 가지고 있는『까르푸』가 500개가 넘으며 하루수입이 1억이 넘는단다. 서민의 수입은 보통 한 달 10만원이다.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가는 상해시의 시장 경제와 개혁개방의 산물은 신흥부자들을 많이 등장시켰다. 이와 반대로 생계비도 안 되는 수입으로 빈곤층은 더욱 더 고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렇게 수많은 아파트 숲들, 35평은 우리 돈으로 4~5억 원을 주어야 살 수 있고 전망 좋은 강변 쪽은 갑절을 주어야 한다. 45평 아파트는 8~9억 원을 주어야 하는 시세이고 세를 줄 수도 있고 팔 수 도 있단다. 상해의 주택은 잘 살건 못살건 모두 집집마다 습도 때문에 에어컨이 있다. 에어컨은 20~30만 원 하는 LG, 삼성 제품을 많이 쓰고 있다.
8~10년 전에 지어진 10층 이하 아파트에는 창밖에 빨래가 많이 널려 있는데 미관상 좋지 않다. 중국인들의 자기중심적 사고는 단속반의 눈을 속여가면서 까지도 자기 이익을 취한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겉옷은 검은색 등 충충한 색인데 속옷은 빨간색 등 화려한 색을 입는단다. 우리의 상해임시정부가 있던 지역은 해가 뜨는 날은 연중 삼분의 일이 안 되고 겨울에는 안개 낀 날이 많다고 한다. 우리일행은 상해공항으로 다시 돌아와 공항의 이미지를 살려 넣은 단체사진을 찍었다.
성도(청두成都)에서
밤 9시 반 예정이던 성도로 가는 비행기탑승 시간은 한 시간이 지연되었다. 또 동방항공 여객기에 올랐다. 우리 국적기는 우선 비행기에 탑승하면 스튜어디스들이 음료수를 가져다 준 후에 기내식을 제공하는데 중국동방항공은 여러모로 서비스가 떨어진다. 늦은 점심식사를 한 후인지라 기내식이 곧바로 나와서 음료수만 마시고 그대로 내보냈는데 그것이 저녁식사이었을 줄이야….
비행기 날개 사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무수한 별빛들, 성도공항에 이른모양이다. 어둠속에서 지상을 밝혀주는 아름다운 빛, 귀가 멍멍해지고 사뿐히 하강하는 느낌을 받는다. 옛 촉한의 수도, 어둠과 밝음의 조화를 비집고 번쩍번쩍 내리 비추이는 헤드라이트 빗살들과 활주로표지 빛들을 따라 띄엄띄엄 서있는 비행기 사이사이로 미끄러져 거대한 공항건물 앞에 섰다. 밤 10시 20분이다.
“유림”이라는 이름의 가이드가 나타나 안내를 받고 공항을 나와 버스에 탑승하니 시각은 10시 50분이 지났다.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성도(청두成都)는 이천 년 동안 그 이름 그대로 변하지 않은 고도(古都), 옛 촉한의 수도였고 사천성의 성도(城都)이다. 쌍류공항은 중국 5대 공항중의 하나로 국제선12편, 국내선 97편이 운항되고 있다.
중국 인구 13억 정도 중 사천성의 인구는 1억 2천만이었는데 현재는 8천 6백만 명이고 삼협댐 건설로 인해 나머지는 사천성에서 독립해 나간 중경(重慶)에 속한다. 성도에는 많은 사찰이 있는데 도당(道堂)이 114개, 절(寺)이 300여 개가 되는 옛 문화의 보고이다.
사천성의 주요 관광지로는 구체구의 석회암 관광지와 옛 스님들이 남긴 귀중한 문화재와 경전이 있는 문수원(文殊園), 두보가 빈곤할 때 4년간 살았다는 두보초당(뚜푸차오탕 杜甫草堂), 유비와 제갈량의 삼국시대 고사를 간직한 사당 무후사(武侯祠), 최초의 여류시인으로 당대(唐代)의 기녀시인이었던 설도(薛濤)의 조각상이 있는 망강루공원(望江樓公園)이 있다.
사천요리는 입안이 짜릿짜릿하고 매콤해서 먹다 이빨 세 개를 끊어내도 모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사천의 개는 해를 보면 짖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태양을 볼 수 있는 날이 드물다는 뜻이다.
강수량은 적지만 중국 4대 분지 중의 하나로 쌀 생산량이 1위이다. 안남미와 요리 여덟 가지에 탕 하나가 기본 식생활일 정도로 중국인은 “8”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4”를 좋아하는 것은 민간에서 좋아하는 차문화(茶文化) 영향이다. 여자들은 마작이 보편화되어 차를 마시며 여유 있게 오락을 즐긴다.
사천성 여자는 미인이 많다. 부부가 직장생활을 하는데 여자는 퇴근 후 옆집에 가서 마작을 즐기고 남자는 집에서 가사를 돌볼 정도로 사천성의 남자들의 지위는 아내에게 쩔쩔맬 정도란다.
늦었지만 “雪夜炙”(설야자)라고 하는 한국식당에 가서 돼지고기 삼겹살을 구우며 감자와 두부를 넣은 담북장으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였다. 젊은 주인은 이곳 사천대학에서 4년간 의 유학생활을 한 후 이 식당을 경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든 호텔을 찾아 1414호에 입실하고 나니 자정이 넘었다. 졸졸졸 나오는 물에 겨우 목욕을 하고 여행 첫 밤을 맞이했다.
1월 19일 눈을 뜨고 창밖을 내다보니 주위가 모두 30층에 가까운 빌딩숲이다. 서둘러 21층 가든 식당으로 내려가 흰죽과 만두 하나로 가볍게 조찬을 했다. 유서 깊은 옛 도시의 문화체험을 위해서 가이드의 안내대로 버스에 올랐다.
사천성은 등소평과 양귀비의 고향이며 판다 곰은 사천성의 명물이고 이 사천성 서창시(西昌市)에는 세 개의 중국 위성 발사 기지의 하나인 중국 서창위성 발사중심(中國西昌衛星發射中心)이 있어 중국의 실질적인 우주 항공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단다.
사천성은 옛사람이 “천부지지(天府之地)”라고 한 청장고원(칭짱고원靑藏高原) 아래 음푹패인 분지로 겨울이 없다고 할 정도로 영하로 기온이 내려가지 않는 아열대지방이다. 매일 비가 오고 습도가 높아서 신경통 관절염과 같은 질병이 많은데 집집마다 산초 같은 화초를 심어 두어 화분이 습기를 증발시키는 효과를 얻는단다.
중국인이 죽을 때까지 못하는 세 가지가 있는데 동서로 시차가 네 시간이나 나는 넓은 영토라 다 가보지 못하고 종류가 많은 음식을 다 먹어보지 못하고 다 배우지 못 한다는 것이다. 사천은 그 지방어가 강해서 북경표준어로 말하면 사천사람들이 잘 못 알아듣고 서로 의사소통이 힘들다.
사천요리의 발전은 촉한시대 이후 북경에서 온 관리들의 주방장들에 의해서 음식문화가 진일보하게 되었다. 사천요리(四川料理)는 만한전석요리((滿漢全席料理), 북경요리(北京料理), 광둥요리(廣東料理)와 함께 중국 4대 요리 중의 하나로 샤브샤브가 유명하다.
옛날 중경의 변방까지 정벌 나온 칭기즈 칸 병사들의 회식이 있었는데 술만 마시고 음식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음식이 아까워 끓여서 먹으니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샤브샤브가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거리는 자전거 왕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많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모습들은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그래서 그 모습에 한눈을 팔다가 가끔 서로 부딪는 마찰사고가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문수원(文殊園)
<문수원과 문수원 가는길>
옛 목조 건물군(建物群)이 죽 늘어선 거리에 3대 관음전(觀音殿)이며 불교 중심지로 문수원(文殊園)이 있다. 문수원의 입구를 통과하면 천왕전(天王殿), 삼대관음전(三大觀音殿), 대웅전(大雄殿), 설법당(說法堂), 장경루(藏經樓) 등 전형적인 청대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건물들이 차례로 들어서 있다. 특히 삼대사전(三大士殿) 안에는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의 불상이 있으며,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의 본존불이 안치되어 있고, 양 옆 벽에는 16존자의 상이 있다.
설법당의 관음전 앞에는 사과 등 과일제상이 차려져 있고 90세쯤 되어 보이는 수염이 긴 노스님이 범바우 두건을 어깨까지 내려오게 쓰고 목탁에 맞추어 책을 펴놓고 좌우로 몸을 흔들며 독경을 하고 있다. 고풍스런 전체분위기는 중국민간의 전통악기인 비파소리가 들릴 듯 한 느낌이 든다.
두보초당(뚜푸차오탕 杜甫草堂)
두부초당은 시성(詩聖) 두보를 후세사람들이 기리기 위하여 공원화한 대단한 문화유적이었다. 깡마르고 검은 얼굴의 두보 동상은 전신상과 흉상이 여러 점 있다. 석상(石像)도 검은 화강암과 판석(板石)에 전신상과 반신상 등 여러 형상으로 표현해 놓았다.
대아당(大雅堂) 벽면에는 근현대의 내로라하는 유명정치가들의 방문사진이 적나라하게 걸려있다. 모택동, 등소평, 김일성, 키신저, 존슨, 강택민에 이어 우리나라 김영삼, 노태우, 박근혜 등이 방문날짜별로 기록되어 있다. 또 우리 귀에 익은 시인들의 형상으로 가득한 곳이다
전국시대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과 동진시대 도연명(陶淵明)과 육조시대의 궁정시인 왕유(王維)가 고대시인이라면 당송팔대가시인(唐宋八大家詩人)들인 진자앙(陳子昻), 백거이(白居易), 이상은(李商隱) 황정견(黃庭堅), 육유(陸游), 신기질(辛棄疾)과 함께 중국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여류시인으로 영광스러운 자리에 이청조(李淸照 宋.1081~1141)가 홍일점으로 서 있는 것이다.
문학의 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각기 개성 있는 모습으로 중국 최고의 시인들을 모두 한자리에 불러 모아 놓았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시성(詩聖) 두보(杜甫)와 시선(詩仙) 이백(李伯)과의 만남의 기록을 발견하였다.
杜甫李伯744.初夏李伯在洛陽相會 : 두보와 이백 744년 초여름에 이백이 낙양에 있을 때 서로 만났다.
타문일동등고회고음주논시저시두보일생최감쾌의적사 (他們一同登高懷古飮酒論詩這是杜甫一生最感快意的事) : 그들은 함께 높은 곳에 올라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술을 마시며 시를 논했으니 이것이 두보 일생에 있어서 가장 뜻 깊은 일이었다.
타문적위대우의성위중국시가사상준영적화제(他們的偉大友誼成爲中國詩歌史上雋永的話題) : 그들의 위대한 우정은 중국 시가사상에 길이 남을 화제를 만들어냈다.
화경(花徑)은 아치로 된 입구부터 대나무 터널 숲으로 된 화랑을 30미터쯤 지나면 큰 못 작은 못, 연못들이 여기저기 있고 비단잉어들이 노닐고 있다. 자태가 고운 여인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모자가 즐거워하면서 잉어 밥을 주고 있다. 팔뚝만한 비단잉어뿐만 아니라 백색잉어와 검은색에 흰 점박이 잉어들까지 모여들어 뻐금뻐금 입들을 내미는 모습이 볼 만하다.
두보가 초당에 있을 때의 정원 문(門)으로 시를 창작할 때 사용했다고 하는 “자문(紫門)”,이름이 너무 예쁘다는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호르륵 호르륵 호륵 호륵 호르륵….”
홀연히 어디서 장난감 구르는 소리가 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죽은 고목의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예쁜 새 한 마리가 짝을 부르고 있었다.
물소리 나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니 완화계곡(浣花溪谷)인가, 2m 높이의 작은 폭포가 일곱 개의 물줄기로 쏟아지고 있다. 그 앞에서 폭포소리와 견주며 한 노옹이 홀로 한시를 읊어대고 있다. 완화계(浣花溪)는 ‘맑은 강물에 비친 꽃을 강물이 씻는 듯하다’는 뜻의 두보가 살던 시절의 동네 이름이란다.
나오는 길가 초막에서『두보초당시선집』을 한 권 샀다. 시성(詩聖) 두보(杜甫) 시 한수쯤은 외워두어야겠다는 욕심에서다.
춘야희우(春夜喜雨)
두보 (杜甫)
호우지시절 당춘내발생(好雨知時節 當春乃發生) : 반가운 비는 시절을 알려주니 봄 되자 만물이 소생 하는구나
수풍잠입야 윤물세무성(隨風潛入夜 潤物細無聲) : 바람 따라 밤에 가만히 스며들어 만물을 적시는데 가늘어 소리가 없네.
야경운구흑 강선화독명(野徑云俱黑 江船火獨明) : 들길은 어둠과 함께 속삭이고 강가 고깃배 불빛만이 밝구나.
효간홍습처 화중금관성(曉看紅濕處 花重錦官城) : 새벽에 붉게 젖어드는 곳 보게 되면 꽃들이 금관성에 겹겹이 피겠지
금관성(錦官城)은 성도(成都)의 다른 이름인데 이 지방의 산물인 비단을 관리하는 벼슬을 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무후사(武侯祠)
<무후사 들어가는 입구>
『촉파』에서 사천요리로 점심식사를 하고 무후사(武侯祠)를 찾아갔다. 제갈량(諸葛亮)을 제사지내는 무후사(武侯祠)는 천 개나 된다는 말이 있다. 무후사는 많지만 그래도 무후사 중의 무후사는 그가 유비를 모시고 승상(丞相)으로 집권했던 성도에 있는 무후사다. 중국 최대의 역사박물관으로 178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혜릉(惠陵) 한소열묘(漢昭烈廟)와 무후사 건물은 청나라 강희제 11년 (1672) 중건 확장하였고 무후사 내에는 유비, 제갈량, 관우, 장비 등 촉한 영웅상 50구를 공봉(供奉)하고 있다.
본전으로 들어가는 문엔 『명량천고 (明良千古)』라는 커다란 편액이 걸려 있다. "영명한 임금과 신하의 좋은 보필, 역사의 모범이 되다"는 뜻이다. 현명한 임금 유비와 좋은 신하 공명이 힘을 합쳐 큰일을 했음을 칭송하고 나랏일을 하는 군신(君臣)에게 모두 가슴깊이 새기도록 당부하는 역사를 회고하며 후세 사람들에게 남긴 명문이다.
유비 전에는『업소고광 (業紹高光)』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유비(劉備 : 161~223)는 하북성 탁주사람으로 한나라 말기에 의병을 모집, 천하를 다투었다. 221년 성도에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했는데 후세 사람들은 “촉한(蜀漢)”이라 불렀다. 오나라를 공격하고 대패하여 현재의 중경시 봉절인 백제성(百濟城)에서 병사하였다. 재위기간은 중국의 황제 중 가장 짧은 2년간이었다.
제갈량(諸葛亮 : 181∼234) 산동성 기남 사람으로 자는 공명(孔明)이다. 유비가 삼고초려의 예로 초빙하였다. 오나라와 연합하여 조조와 대항하는 등 중국 고대의 현명한 승상의 모범이다. 234년 위나라 북벌중 병사하여 섬서성 면현 정군산에 묻혔다. 제갈량의 시호는 충무후이며 부인은 스님의 소개로 만난 단 한 명만 두었다.
부인은 인물은 못생겼지만 인문지리에 능하여 제갈량 대신 일을 했다. 모두 제갈량이 생각하는 대로 의견까지 해결해 놓았다. 제갈량은 언제나 깃털로 된 부채를 손에 쥐고 있는데 일이 잘 안 풀려 부채를 탁 접어놓고 답답해하면 부인이 나타나서 해결하는 글까지 써서 바쳤다고 한다.
삼국의 인구를 개산(改刪)해 보면 조조의 위나라 수도는 낙양(洛陽)이고 인구는 443만 명에 군대는 20~50만 명이었다. 손권이 이끌던 오나라는 수도가 건업(建業)이고 인구는 230~240만 명이고 군대는 15~20만 명이었다. 성도(成都)가 수도인, 유비가 이끈 촉한의 인구는 90~94만 명이고 군대는 8~12만 명으로 가장 열악한 형편이었다.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등이 삼국 중 제일 열악한 촉한(221∼263)의 유비를 중심인물로 초점을 맞춘 것은 유비와 제갈량과의 인간관계를 높이 평가한 때문이 아닐까.
제갈량(諸葛亮)이 유비(劉備)가 죽은 후에는 어린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필하여 재차 오(吳)와 연합, 위(魏)와 항쟁하였으며 위(魏)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 후출사표(後出師表)는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일컬어질 정도로 천고(千古)의 명문으로 여겨진다.
명필 중의 명필이라 하는 송의 명장 악비(岳飛 : 1103~1141)의 글씨로 전출사표(前出師表), 후출사표(後出師表)는 그 길이가 각각 어림잡아 12m 정도는 되는 듯싶다. 나는 둘 다 앞과 뒤만 사진을 찍었다.
<전출사표의 시작과 끝>
연한 황매화가 만개해 있는데 꽃모양이 홍매화나 산동백 비슷하게 생긴 것이 진한 향내가 좋다. 유비의 묘는 무후사안 분재원 옆에 있다. 10~20m 높이의 향나무 삼나무와 온갖 잡목이 죽 서 있는데 1.5m 높이로 석축담장을 둥글게 쌓은 동산이 황제 묘 중 가장 작은 유비 묘인 혜릉(惠陵)인 것이다. 묘는 가로 12m 높이 18m 이다.
『한소열황제지묘』(漢昭烈皇帝之墓) 대청건융오삼.삼월상완(大淸建隆五三.三月上浣)
망강루공원(望江樓公園)과 설도(薛濤)
망강루공원에 들어서니 우선 높이 6~8m 지름 2~3cm의 신이당죽(腎耳唐竹)과 용단죽(龍丹竹) 숲이 울창한 가운데 백옥으로 된 설도의 입상(立像)이 눈길을 끈다.
설도(薛濤 : 770~830)는 당나라 때 기녀였지만 일생 동안 대나무를 자신의 지조에 견주어 너무 사랑하여 시를 통해 대나무의 미덕을 찬미하였고, 이곳에서 약 500여 수의 시작(詩作)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현재까지도 90여 수의 그녀의 시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설도기념관 입구에는 설도의 조각상이 있다. 영문과 함께 실린 설도시집 한권을 샀다. 설도는 이청조 이전의 중국 최초의 여류시인으로 우리나라의 황진이 같은 시인이라 하니 그녀의 시 한 수는 알아두어야겠다.
강변(江邊)
설도(薛濤)
서풍홀보안쌍쌍 인세심형양자항
(西風忽報雁雙雙 人世心形兩自降 )
서풍에 문득 쌍쌍의 기러기 날아오니 인간 세상에 몸과 마음 모두 가라앉네.
불위어장유진결 수능야야입청강
(不爲魚腸有眞訣 誰能夜夜立淸江 )
물고기 뱃속에 진리가 있는 게 아니라면 누가 능히 밤마다 강가에 서 있으리오.
망강루공원(望江樓公園)에는 비파문항(枇杷門巷)과 설도가 물을 길었다고 전해지는 설도정(薛濤井)과 설도묘(薛濤墓), 음시루(吟詩樓)가 있다. 목조 4층 누각인 망강루(望江樓)는 숭려각(崇麗閣)이라고도 하는데 아래의 2층이 사각모양이고 위의 2층이 8각인 높이가 30M로 1886년 건축된 청나라 후기 건축물이다. 망강루에서 내려다보니 어머니강이라고 불리는 민강이 길게 흐르는 가운데 근방의 경치가 한눈에 잡힌다.
성도(청두成都)에서 라싸로
고색창연한 문화재 관람을 마치고 성도(成都)역(Chengdu Railway Station)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5시인데 라싸행 열차를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리고 있다.
하루 종일 햇빛 한 점 구경 못한 회색 하늘과 음산한 분위기의 거리는 많은 인파와 자동차만이 오가고 있다. 어디로 가려는 사람들인지, 우왕좌왕 번잡한 광경이다.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 수레로 짐을 나르는 사람들, 가로수 앞에 간이 철제 의자에 앉아 구경하는 사람, 과일 등 여러 가지 물건을 팔려는 잡상인들, 대륙의 대도시를 실감한다. 얼른 귤 두 봉지를 샀다.
21명의 우리 팀이 대합실로 들어서니 줄을 선 인파가 마치 전쟁이라도 피해가는 피난행렬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잘못하다 팀원을 잃으면 영락없이 미아가 되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짐을 챙겨 나의 열차표를 받아 쥐고 플랫 홈을 빠져나와 52열차 5호차 22번을 찾아들었다. 4인 1실로 K와 L과 S와 함께 48시간을 지내게 되었다. 열차가 출발한시각은 6시15분, 말로만 듣던 하늘열차를 탔는데 보통열차의 침대칸이다. 중국의 침대열차는 이미 계림에서 장가계, 난주에서 돈황, 심양에서 통화까지 타 본 열차와 별반 다를 것이 없으나 세면대와 화장실 시설이 좀 더 편리하게, 보기 좋게 개량되었다.
<하늘기차에서 본 산하와 양떼>
이틀 가족이 된 우리 네 사람은 가이드가 준비해준 김밥도시락을 식탁에 올려놓고 저녁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귤을 먹었다. 가볍게 씻고 나의 자리인 2층으로 올라와 책을 펴니 9시다. 이번 티베트여행 안내서를 12시까지 읽고 어둠을 달리는 열차의 바퀴소리를 들으며 움직이는 누각(樓閣)에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