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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창 목사님의 기독교동광원 수도회 화순지역 순례기를 올려보렵니다. 현재 모습은 개축된 사진인데 이사진은 2001년도 사진입니다, mamuli0 2023. 8. 28
mamuli0 2023. 8. 28
남원 대산 동광원 전경- 동광원 제공
동광원/귀일원의 뿌리를 찾아서
- 화순 유적지 순례-
1. 이현필 생가
위치 : 화순군 도암면 원천리 (권동부락)
2022년 11월 - 권동 이현필 선생 생가
이현필 선생 생가 - 2001년 사진
이현필(李鉉弼)은 1913년 1월 28일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용하리(권동)에서 농부인 아버지 이승노(李承老)와 어머니 김오산(金烏山)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겸손과 순결의 영성으로 신행일치의 수도적 삶을 초지일관 추구하며 사랑과 섬김을 실천했던 구도자요 한국적 평신도 신앙운동의 선구자였다. 엄두섭 목사는 그를 가리켜 맨발의 성자요, 한국의 성 프랜시스라고 하였다. 그의 신앙을 따라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제자들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가 동광원이다.
동광원 식구들은 이현필 선생을 중심으로 해방 이후, 6ㆍ25동란에 허덕이던 민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 고아, 걸인, 나그네 등을 돌보며 하룻밤 재워주기 운동, 십시일반 운동을 펼쳤다. 이현필의 고아운동은 사실 1948년 여순 사건 이후 늘어난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시작된 것인데 남원에서 훈련받은 이현필의 제자들이 광주로 진출한 후에 1950년 1월 광주지역 유지들이 모여 동광원이라는 고아원을 설립하고 이현필 신앙운동에 참여한 정인세 광주 YMCA 총무가 동광원 원장을 맡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설립된 그해 여름 6.25 전쟁으로 수 많은 고아들이 몰려들어 한 때는 수백명을 돌보기도 하였다.
이현필의 신앙운동이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은 시대적 배경과 더불어 이현필의 영적 감화력 덕분이었다. 이현필의 영적 순결함으로 그가 가는 곳마다 부녀자, 청년 할 것 없이 가족을 버린 채 그를 따랐고, 그들 일행은 탁발을 하거나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면서 가난하고 버려진 이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현재 전북 남원의 동광원 본원을 비롯해 화순, 광주, 벽제 등 전국 각지에 동광원의 분원들이 세워졌고, 제자들이 순결, 청빈, 순명을 원칙으로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2022년 11월 봉선동 귀일원
1954년 고아원이 폐쇄된 후 동광원 식구들이 광주 봉선동에 자리 잡고 살면서 오갈 곳이 없는 환우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60년대 중반에 동광원 식구들이 가진 모든 토지와 재산을 모아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이 되었다. 그런데 1980년대에 귀일원에서 은퇴한 식구들이 늘어나자 남원으로 이동하여 동광원 본원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일생을 바쳐 귀일원을 세우고 헌신하다가 은퇴 후에 다시 빈손으로 돌아가 새로운 터를 닦고 시작한 곳이 남원의 동광원 본원이 된 것이다. 이렇게 현재의 기독교 동광원 수도원이 사실상 귀일원의 모태였던 것이다.
이현필의 일생을 볼 때 그 삶이 결정적으로 변한 것은 22세 때 도암의 성자라고 불리는 서른 살 위인 이세종 선생을 만난 뒤로부터였다. 감리교 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정경옥 박사는 이세종을 가리켜 “한국의 성인”이라고 신학 잡지를 통해 처음으로 소개했는데 이세종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자기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부부가 남매처럼 살았고 일제시대 당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깊은 산 속에서 지냈다. 또한 밤에는 성경을 암송하고 낮에는 가까운 마을의 처녀, 총각을 모아 성경공부를 시켰다. 이세종의 성경공부반에서 이현필이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이세종의 수제자가 되었고, 이세종의 인정을 받았다. “내가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해 봤지만 내 말을 가장 빨리 이해하는 사람은 이현필 뿐이다.”하고 하였다.
이현필은 25세 때부터 28세까지 전남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에 들어가 기도생활을 하면서 이세종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를 따르는 수도자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는 30세 전후로 지리산의 오감산이나 서리내에 들어가서 깊이 기도하였다. 산에 깊이 파묻혀 금식과 말씀 묵상의 생활을 하였고, 이때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명의 소년, 소녀들을 모아서 성경을 가르치고 생활훈련을 시켰다. 장소는 남원에서도 몇 십리 들어가는 지리산 골짜기 서리내라는 곳과 그 앞산을 타고 내려오면 갈보리라고 불리는 동산이었다. 서리내에서 행해진 교육은 보름씩 산 속에서 행해졌으며 말씀과 경건훈련과 노동이 함께 이루어졌다. 갈보리 역시 서리내와 함께 수도의 도량이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 말씀을 들었다. 이현필은 특히 복음의 핵심으로 겸손과 순결사상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하여 갈보리와 서리내는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가 되었고 이곳에서 훈련받은 식구들이 훗날 동광원의 모체가 되었다.
이현필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신을 본받는 경건훈련을 진행할 때에는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주독립정신과 청빈과 검소의 삶을 강조하였다. 그 자신 스스로 짚신과 고무신을 신었고, 산중 길을 걸을 때에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옷에 불을 때지 않은 차가운 방에서 지내며 하루에 한끼도 먹지 않는 청빈하고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것이 그가 보았던 예수의 삶이었고 스스로 예수의 거룩한 삶을 본받고자 노력하며 본을 보였다. 그는 스승 이세종과 마찬가지로 식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였다. 그는 산중의 기도생활 중에서 겪은 여러 신비적인 경험에 대하여 일체 침묵하였고 오직 성경만 가르쳤다. 다만 산중의 기도 생활이 매우 은혜롭고 황홀했다고만 하였다. 그와 있으면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 그는 모든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믿고 빈대나 벼룩마저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때 교회나 지도자들이 이현필을 금욕주의자 또는 산중파라고 부르며 비방하였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찾아와서 보고 들은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는 길이 “이것이다, 바로 이 길이다!”하고 소리쳤다. 이현필은 지리산 봉우리마다 깨끗하게 가득 쌓인 흰 눈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수도하였다. 거룩한 삶, 수도의 길을 위해 세상도 청춘도 모두 바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께 주신 은혜를 기뻐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아, 십자가! 아, 십자가!”하고 찬양 하였다.
거룩한 스승 이세종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된 이현필 역시 화학산 기도 3년, 지리산 기도 4년, 모두 7년이란 산기도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애통하는 사람이 되었고 청빈한 수도자 프란치스코처럼 가난과 겸손의 거룩한 성자의 모습을 이루어 갔다.
이처럼 변화된 이현필의 주위에는 여러 훌륭한 인물과 명사들이 모여 들었다. 호남의 명사요, 나환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최흥종 목사는 이현필을 아들처럼 사랑했다. 서울 중앙 YMCA 총무요, 평화주의자로 20세기 종로의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현동완 선생도 이현필을 방문하고 그의 집회에 참석하였다. 광주 YMCA 총무 정인세는 유도 2단에 덴마크 체조 교사이기도 했던 인물인데 YMCA를 그만두고 양복을 벗어버리고 넥타이를 풀어버리고 이현필 운동에 몸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한국의 공자요, 작대기 철학자로 이름난 삼각산 도인 유영모 선생은 이현필을 사랑하여 한평생을 이현필과 교제하였고 동광원 수양회 강사로 자진하여 봉사하였다. 1946년 처음 만나서 이현필이 세상 떠난 1964년까지 한결같이 서로 존경하는 도의를 지켰고 진리와 구도를 향한 열정을 나누었다.
무학인 이세종과 초등교육도 제대보 못 받은 이현필, 이에 반하여 당대의 석학이요 스승이었던 유영모, 이들의 만남은 동광원의 영성 형성에 중요한 것이었다. 온몸으로 말씀을 실천했던 이현필과 온몸으로 말씀을 묵상했던 유영모의 만남은 동광원 영성, 한국적 기독교 영성의 새로운 길을 돌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15세에 연동교회에서 세례받은 교인이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 교장이었으며 동경 물리대에서 수학한 과학자요 여러 동양 경전을 공부한 유명한 한학자였다. 다석 유영모를 존경했던 현동완 선생이 서울YMCA에서 연경반을 만들어 다석을 강사로 초빙하였다. 현동완 선생이 아니었으면 다석의 연경반 강의가 이뤄질 수 없었다. 다석은 연경반 강의를 통해 수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함석헌도 그의 제자 가운데 하나였다. 유영모가 이현필을 만난 것은 현동완과 정인세와의 관계성 속에서였다
2. 이세종 생가와 기도터
위치 :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2022년 11월 - 이세종 선생 사시던 집
이세종 선생 생가 - 2001년 사진
동광원의 이현필을 이야기하자면 그의 스승 이세종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세종은 호세아를 닮은 성자라고 불리어지는데, 그가 복음을 접한 후 성경 말씀에 따라 순결을 지키기 위해 남매 사이로 지낼 것을 요구하였으나 부인이 이를 거부하고 두 번씩이나 개가하였고, 그때마다 지게로 직접 살림을 져다 주었으며, 부인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는 아무 말 없이 받아준 것에서 비롯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세종은 한때 화순 도암 동광리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으나 복음을 접한 후 성경 말씀에 따라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평생 청빈과 순결, 곤충과 미물까지도 돌보고 아끼는 생명존중의 삶을 살았다. 이런 이세종의 믿음과 그가 성경을 통해 깨우친 지혜는 그의 제자들에게 전수되었으며 특히 이현필이 나타나 스승의 도를 전수하면서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세종은 성경을 깊이 읽으면서 거듭나는 경험을 한 이후로 이제 “영찬”은 죽고 이 세상에 없으므로 공이라 해서 이공(李空)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세종은 가족의 족보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먹으로 칠하여 보이지 않게 하였으며,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이공”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이공은 기도 중에 “도인은 화려해서는 안 된다”는 영음을 세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이때로부터 이세종은 세상을 버리고, 재산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살생을 금하고, 아내와 해혼하여 남매처럼 지냈으며, 성경이면 족하다고 다른 책은 보지 않았으며, 육식을 금하고, 남의 신세를 지지 않았다.
이세종은 자아를 버리고 가정과 재물을 초월하여 오직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웃 사랑하기만을 힘썼다.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파고들었다. 말씀을 파고 또 파서 말씀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생수를 퍼내어 기쁨으로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항상 아버지의 뜻을 좇아 사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삶을 본받아 살고자 노력했다. 이세종은 항상 제자들에게 '파라, 파라, 깊게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하면서 성경말씀을 깊이깊이 파고들도록 가르쳤다. 말씀 속에서 영생의 샘물이 터져 나오기까지 깊이 기도하지 않으면 참된 믿음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공의 평소 모습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공 마지막 수도처 한새골 - 2022년 11월
“어느 해인가 광주 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다고 해요. 이 소식을 들은 이공(이세종) 어른은 사경회 한 주간 동안 먹을 음식을 미리 준비하여 광주로 갔답니다. 광주에 가서 보니 시가지 한 복판으로 흐르는 광주천 개울가에 많은 거지들이 움막을 치고 살고 있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본 이공은 걸인들이 살고 있는 천막에 들어가 가져온 모든 음식을 나눠주었대요. 그래서 사경회 기간 동안 자기는 내내 금식하면서 말씀을 들어야만 했답니다. 사경회를 마치고 광주에서 도암 등광리에 있는 집을 향해 약 80리나 되는 길을 걸어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오다가 너무 지쳐서 길가에 그만 쓰러져 누워버리고 만 것이었죠. 한참 동안 쓰러져 있는데 갑자기 뱃속에서 뜨거운 성령의 불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답니다. 그 후 몸이 가벼워져 자기 몸이 바람에 날리듯 가볍게 집까지 쉽게 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 <호세아를 닮은 성자>
“참다운 구제란 자기가 쓸 몫에서 떼어 내어 하는 것이다. 자기가 먹을 것 안 먹고 해야지, 먹고, 입고, 쓸 것을 다 쓰고 남은 것으로 구제하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다! 헐벗은 사람에게 옷 한 벌 주더라도 자기가 입은 옷이 다 해어져 누더기가 되기까지 입으면서 주어야 참 동정이 된다.” - 이세종 <동광원 사람들, 김금남>
“한남지방 화순이라는 곳에 이상한 사람이 한 분 계신다. 그는 서양 요리를 먹고 비단 옷을 입은 성자가 아니라 헐벗고 굶주린 성자이다. 그는 학식도 지위도 없는 산골 농부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운 후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고난을 즐겁게 받고 있다. 그는 음식을 먹어도 사람이 차마 먹지 못할만한 것을 먹고 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주어도 결코 먹지 아니한다. 그는 불쌍한 거지나 어려운 삶을 사는 빈민들을 생각하면 부드러운 밥이나 맛있는 반찬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잘 때에 이불을 덮어도 몸을 절반만 가리고 잔다. 왜 다 덮지 않느냐고 물으면 추운데 잘 곳이 없이 길가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차마 이불을 끌어다 덮기 어려워 손이 떨린다고 한다. 나는 다만 그의 순진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아 실천하여 보려는 열성만을 존경하고 사표 삼고 싶은 것이다.” - 정경옥 교수-
한영우 장로님 마지막 수도처 등광리 - 2022년 11월
이세종이 예수를 알지 못했을 때는 여느 보통사람과 별로 다른 점이 없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면서 부지런히 살림을 모았다. 머슴으로 시작했지만 근면함과 성실함 덕분에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다. 서른이 다 되어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었다. 아들 낳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열심히 무당을 따라다니며 산당에 제상을 차리고 기도를 했다. 그러다 그만 무당이 죽고 말았다. 그때 누군가 그에게 복음을 전했다. 기독교의 복음을 접하고 그는 모든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사람으로 변화 되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의 화신이 되었다.
우선 자기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서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 빚 문서를 모든 사람들 앞에서 불살라버렸다. 가진 땅의 절반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용해 달라며 장로교 전남 노회에 기부하였다. 그리고 남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이세종은 의식주 문제를 초월했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를 초월했고, 성문제도 초월했다. 그는 자기의 몸과 마음을 자유자재로 통솔할 수 있었다. 대로는 수십일 동안을 굶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루에 일곱 번을 먹기도 했다. 특히 음식에 대한 절제가 철저했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묻는 제자에게 “어디를 가든지 자기욕심을 내지 말고 무엇이나 봉사 하려고 해야 한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보고도 탐이 나서 따라가다가는 반드시 시험에 빠질 것이다.” 하고 탐욕과 정욕을 경계했다.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가 강요되었다. 그는 신사참배를 피하여 산속으로 들어갔다. 산에 들어가 풀뿌리와 거친 죽으로 연명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그가 떠날 때 남겨놓은 것은 바가지 2개뿐이라 한다. 그때가 해방을 3년 반을 앞두고 있던 1942년 2월의 이른 봄날이었다.
4. 동광원 화순 분원
2022년 11월 - 중촌 도암 분원
1949년에는 도암면 봉하리 청소골에 삼칸 초기집을 매입하여 고아 8명을 데리고 고아사업을 최초로 시작하였으며, 1954년에는 광주 동광원이 해체된 이후 다시 돌아온 고아들 55여명을 데리고 대포리 산 아래에 움막을 치고 돌보기도 하였다. 1955년에는 수레기 어머니, 김은연, 김춘일 등이 용강리 마을에 수해가 나자 구호물자를 동네에 나누어 주었다.
1955년 백춘성 장로는 어머니의 회갑잔치 대신에 "걸인잔치"를 베풀었는데 그때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이현필은 도암으로 갈 제자들을 제비뽑기로 선발하였다. 이때에 뽑힌 사람이 방순갑이었다. 보모 임연임과 유녀반 7명, 보모 방순갑과 남애주와 자립반 10명이 도암으로 향하였으며, 이때에 김준호도 함께 동행 하였다. 도암에 도착한 식구들은 식량이 없어서 쑥을 죽으로 쑤어서 생활을 유지하였다. 이처럼 힘든 식사준비는 이연남씨 어머니가 도맡았다.
도암 청소 - 고아원 터
그 후 1956년 봄, 이현필, 정한나, 이희옥, 노종순, 방순녀, 김정순, 방순남이 보모로 소녀반 30여명을 데리고 가서 식구들이 모두 60여명이나 되었다. 동네 청년들에게 야학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소녀반 30명은 1962년 이후에 광주로 다시 나왔다. 화순군 도암면 분원은 1962년 동광원 제2회 총회를 개최한 곳이기도 하며, 양인운, 이성제가 소년반을 훈련시키기도 하였다. 한 때 도암 분원에는 60여명이 생활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이국자 언님과 몇몇 사람만이 생활하고 있다.
동광원 화순 분원을 오랫동안 지키며 살았던 분이 김춘일 원장이다. 김춘일 원장은 동광원 식구들의 생활에 감동을 받은 어머니의 권유로 목포 성경학교를 다니다가 동광원 진도 분원을 방문하여 이현필 선생도 만나보면서 점점 마음을 굳혀가지 시작하였다. 김춘일은 1952년도부터 진도 분원에 가끔씩 다녀보다가 1953년 늦은 봄에 양림동 YMCA 회관에 있는 동광원에 가입하여 생활하다가 그해 겨울에 화순군 도암면으로 옮겨와서 본격적인 동광원 수련생활을 시작하였다.
동광원 진도 분원 - 오장로 귀주 어머니 곽칠금 어머니 춘일 언님 국자 언님이 있음
김춘일원장은 자신이 동광원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곽칠금 어머니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1984년부터는 남원 대산면 운교리로 이동하여 곽칠금 어머니를 보살폈으며, 곽칠금 어머니께서 1985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다음에는 다시 화순군 도암 분원으로 돌아 와 수도생활을 하다가 2013년에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춘일 분원장은 스승 이현필과 오북환장로님에 대한 회고록을 작성하여 <동광원 사람들>에 수록되었다. 그가 회고한 한 도막이다.
어느 때 새벽마다 강당에서 기도하는데, 시꺼먼 물체가 닥쳐오곤 하였다. 어떤 시련을 이기기 위해서 싸울 때에, 이 같은 각종 환상이 있었다. 음성도 없고, 시꺼먼 물체가 기도할 때마다 나타나고...이렇게 답답한 심정이다. 그리하여 이 선생님께 사정을 이야기를 하였더니, “집에 불이 붙었는데 손가락에 침 발라서 꺼볼라 해 보시오” “큰 구루마에 짐을 싣고 손가락 하나로 끌어보려고 하시오” 하셨습니다. 내 힘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로 주님의 십자가에 의지해야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5. 도구박골
위치 : 호암리에서 우치리 가는 도중에 있는 왼쪽 금성산 골짜기
도구밖골 수도처
이세종은 말년에 세상과 사람을 떠나 산에서 산으로, 보다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옛날 이집트의 안토니처럼 깊은 산에 숨어 철저한 고독과 침묵 속에 살았다. 고독과 침묵은 모든 수도자들이 영성을 길러가는 두 가지 방편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다.
화학산 도구박골은 주위 십리 안에 인가가 없는 수도의 적지였다. 이세종은 이 도구박골에서 돌로 울타리를 쌓아놓고 그 안에 있는 큰 바위에 올라 앉아 매일 하늘만 쳐다보면서 명상하였다. 얼마 후 더 깊은 산 자기의 마지막 장소를 찾아 거기서 떠나 화학산 각시 바위 넘어 한새골에서 최종 말년을 보냈는데 그곳은 인가가 전혀 없는 산중이었다.
오복희 전도사 - 계명산 수녀원에서
이세종의 길은 좁은 길이었다. 우리 생각에는 큰 문 열어놓고 대대적으로 전도하며 “아무나 와도 좋소!”하고 싶으나 진리는 언제나 좁은 길이다. 이 세상에서 진리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환영받는다. 세속적 기독교는 넒은 문이다. 참 신자가 찾아가야 하는 길은 좁은 문, 좁은 길이다. 좁은 문도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십자가를 지고 들어가는 좁은 문이다. 나사렛 예수의 길은 바로 이 길, 좁은 길이다
이현필이 1943년 초에 한 차례 다녀 간 후 남원 공동체는 1944년이 되면서 각각 흩어졌다. 피신의 목적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와 남원읍교회의 눈총도 있었기 때문에 일단 헤어지기 시작하였다. 강남순(김금남의 어머니)는 구례군 산동면 둔사리 서리내로, 오북환은 남원군 주천면 주레기에 있다가 전남 화순군 도암면 둔전리 도구밖골로, 서재선 집사의 가족은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로, 배영진 집사의 가족은 순창으로 떠났다.
수레기 어머니 - 손임순 어머니
오북환 가족은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구밖골로 은거하였다. 그곳에서 오북환은 이현필과 더불어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말씀 탐독과 기도에 전념하면서 노동수도자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물론 오북환은 목수였기 때문에 때로는 목수일도 하였지만, 그의 삶은 철저하게 이현필의 뒤를 따르는 수도자의 삶이었다.
오북환이 후일에 동광원의 지도자로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1944년부터 1946년 초까지 이현필의 가르침에 따라 도구밖 골에서 영적 수련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비록 가족을 대동하였지만 이미 출가한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아내와 자녀들은 하나님께 맡길 뿐이었다.
김금남이 도구박골에서 수양하던 기간에 있었던 각종 체험과 결단은 엄두섭, 맨발의 성자, 1990, 48-55 사이에 잘 기록되어 있다.
소반바위 암굴 선교사 피난처
6. 순례를 마치며
예수 그리스도 이후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프란체스코와 이현필을 평생 탐구해온 은성수도원 창립자 엄두섭 목사는 “이현필은 프란체스코와 비교해 봐도 누가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가 세운 동광원의 기본 신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따라 은총으로 순결하게 살면서 모든 이웃과 피조물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특히 고아나 장애인등 사회적 소외계층을 그 환난 가운데서 돌보는 정신이다. 그리고 지향이 같은 형제자매 들은 함께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모든 교파를 초월해서 담이 없이 살자는 것이다.
인간이 사는 길에는 뜻으로 사는 길과 정으로 사는 길이 있다. 정으로 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자연이지만 뜻으로 사는 것은 초자연적 인격과 자유의 길이기에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자연에서 자유로 비약하려면 결단과 도약이 필요하다. 더구나 이런 결단은 무너지기도 쉽다. 이럴 때 지향이 같은 친구를 만나 함께 생활한다면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기독교 신앙공동체는 바로 이런 인격적 자유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향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결단과 용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진정 이런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자연을 넘어 대자유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현대는 산산 조각 난 단편이 되어 인격이 사라지고 말았다. 인격이란 온 우주의 생명의식으로 통째로 사는 생명력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개별의식의 득세와 더불어 우리는 뿌리가 잘려진 나무처럼 근원의식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화폐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소유의식이 개별의식과 더불어 생명의식을 마비시키고 말았다. 생명의식이 마비된 인간은 조각난 파편이 되어 지구를 황폐화시키는 오염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본래의 생명의식을 회복하는 것만이 지구를 살리고 인류를 살리고 온생명을 살리는 길이다.
그런데 소유의식과 개별의식을 극복하는 길은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니다. 자본의 힘보다 권력의 힘을 앞세운다고 해서 욕정이 이끄는 단편화된 인간의 모습이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근원적인 존재의 사랑에 기반을 둔 온 생명의식이 회복될 때라야 새로운 사회는 가능할 것이다. 이현필은 말했다. “우주만물은 나와 한 몸이요 인류와 이웃은 내 지체이다. 나의 완성이 곧 우주 완성이다.” 그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고 시도하는 노력이 이현필이 시작한 기독교 공동체 즉 동광원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동광원 유적지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