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일시 |
2011. 12. 11. 일 |
순례장소 |
여우목성지 |
순례자 |
미카엘.마르띠노.알로이시오 |
소재지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 |
코스:문경-여우목성지-마원성지-문경새재도립공원-이화령고개-연풍-소조령관문앞-새재터널-문경새재 |

오늘부터 대림 3주일로 접어듭니다.
대림시기가 더할 수록 올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할테지요.
2011년 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았습니다.
흐르는 시간이 어디 매듭이 있어 두부모 자르듯 그렇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올해 역시 여기까지 와보니
마음은 그리 여유롭지 못하고 심란해져 오는 모양입니다.
날씨 또한 맵고 스산하기만 한 오늘
이름도 길도 모르는 깊은 산중 낯선 곳으로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여우목"
충청도에서 구름도 쉬고가는 조령을 넘어 이곳 여우목으로
피해오면 피빛의 죽음을 면하고 신앙을 지킬 수 있다고 여겼을까요?
문경읍 당포초등학교에 차를 두고서 여우목성지로
패달링은 시작됩니다.
잔차정비가 부실한 탓에 중간에서 몇 번이나 말썽을 부렸는지 모릅니다.
동로면으로 넘어가는
여우목고개 중턱에 큰 십자가가 우뚝 서 있습니다.
바로 그곳이 여우목성지 일테지요.
옛날 이곳으로 피난하여 온 선조 천주교신자들은
일 년 삼백예순다섯날을 늘
대림시기로 살아왔으리라 다만 짐작만 합니다.
'주여 오소서'가 아닌
'주여 어서 오소서'라고.....
Maranatha!
잎들을 땅에 다 떨구어 버린 앙상한 나목만 남은
여울목성지 겨울산은 참 쓸쓸합니다.
쓸쓸하고 조용한 깊은 산 속에서 <십자가의 길>로써나마
순교자들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성지뒤편 대미산과 저멀리 앞으로는 주흘산이 있어
그곳 정상엔 눈으로 덮혀있었습니다.
Ave Verum Corpus(경배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성체여)
W.A.Mozart
여우목[狐項里]은 이윤일(속명 제헌, 1823~1867,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우촌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다.
충청도 홍주가 고향인 이윤일 요한 가정이 상주 갈골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그 무렵에 경상도 초대 교우 서광수(徐光修, 1715~1786)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이 충북 청풍에서 살다가 가족들과 함께
이곳으로 피난 옴으로써 신자들이살기 시작했다. 1815년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 때 순교한 박경화(관명 도항, 朴甫祿, 1757~1827, 바오로)와
아들 박사의(朴士儀, 일명 사심, 1792~1839, 안드레아)의
가정이 몇 곳으로 피난을 다니다가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
또한 경상도 첫 신자 가정 중의 한 가정인 서광수의 후손들이
1839년 기해박해쯤 이곳 여우목으로 피난 와서 살았다. 당시 여우목 교우촌의 공소 회장이었던 이윤일 요한은 외교인들에게
전교하여 30여 명을 입교시킴으로써 큰 교우촌을 만들었다.
1866년 병인박해 직전인 1865년 가을에 이윤일 요한의 아들인 이 시몬과
예천 건학의 전 하비에르가 예천 포졸에게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하였으며,
이듬해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박 사도 요한 가정 등 일부 신자들은 충북 보은과 산촌으로 피난을 갔다가
1868년 충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충주를 거쳐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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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10월에 문경 포졸들이 이곳에 들이닥쳐 당시 회장인 이윤일을 비롯 30여 명의 신자들을 체포해
그와 부인, 큰 며느리(공주에서 순교한 이 시몬의 처)와 아들 하나,
그 외 많은 신자들이 압송되어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
그는 교회의 두목이라 해서 한실 공소 김 회장과 함께 경상 감영이 있는
대구로 이송되어 1867년 1월 21일(양)에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그때 나이 45세였다. 한편 이곳에 살다가 상주 경산 등지로 피난 갔던 서치보의 아들들인
서인순 시몬과 서익순(徐翼淳, ?~1868, 요한), 서태순(徐泰淳, ?~1868, 요한 또는 베드로)은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서인순 시몬은 대구의 경상 감영에서 문초를 받고 감옥에서 옥사했고,
서익순 요한은 대구에서 서울로 이송되어 가서 서울 절두산에서 백지사 치명을 하였다.
서태순 베드로는 상주 감옥에서 옥사했다.
한편 베로니카라는 노파는 이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가는 도중에 마을 앞 노상에서 순교하였다.
베로니카 할머니의 신앙 증거 병인박해 때 이윤일 성인 등 30여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갈 때의 일이다.
중평리 여우목 밑의 마을(현재 개신교 교회가 들어서 있는 곳)에 살던
베로니카란 80대 할머니도 함께 포졸들한테 붙잡혀 가게 됐다.
고령의 베로니카 할머니는 다리를 절면서 잘 걷지를 못했다. 자연히 끌려가는 대열에서 자꾸 처지자 포졸들이 고함을 지르며 나무랐다.
“왜 할머니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놓아줄텐데 절뚝거리며 따라 가느냐?”고.
그렇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베로니카 할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포졸들에게 되물었다.
“살아계신 천주님을 어떻게 계시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느냐?”며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증거했다. 노쇠한 베로니카 할머니와 포승줄을 끌어당기는 포졸들과 실랑이가 세 번째 오가다
우두머리 되는 자가 칼을 빼들었다.
“그래, 죽는게 소원이라면 죽여주지” 베로니카 할머니는 끌려가다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죽임을 당했다.
베로니카 할머니가 돌아가신 그 자리에
‘여기는 중평리, 여우목 성지 1.5km’라는 표지석(사진)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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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돈 아우구스티노 가문
서상돈(1851∼1913)이 조선시대와 구한말에 걸친 신앙 자유기에 한국교회 발전에 기여한 바는 지대하다.
또 그는 지물상과 포목상을 통해 이룩한 막대한 부(富)를 바탕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
사회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상돈의 고조부인 서광수로부터 내려온 뿌리 깊은 천주교 신앙이 더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서상돈의 집안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1784년 전후이다.
상돈의 고조부이며 대구 달성 서씨 20세 손인 서광수가 여섯 아들과 함께 천주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듬해 천주교의 첫 박해인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
서광수는 달성 서씨 문중에서 파적 당하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이후 상돈의 조부 치보(서광수의 손자)는 경북 문경 여우목으로 옮겨와,
성 이윤일 가정과 함께 포교활동을 했다.
현재 여우목에는 치보와 아들 인순의 묘가 성지 내에 자리하고 있다.
당시 상돈은 병인박해로 대구 감옥에 갇혀 있는 삼촌 인순을 자주 방문했는데,
먹을 것이 없어 피고름이 묻은 멍석을 뜯어 먹으며 생활하는 삼촌을 보고,
이후 거상(巨商)이 된 후에도 절대 쌀밥을 먹지 않았다.
또 봄, 가을 곡식 창고 문을 열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등 자선, 구휼 사업에 힘쓴 것도 이 일이 있은 후부터라고 한다. 서상돈은 1895년 대구 읍내에 임시 성 요셉 성당을 지을 때 집 매입부터 수리까지
1,000여 달러 이상을 봉헌했으며, 현 계산동 성당 터에 기와집 십자 성당을 건축할 때인
1897년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11년 대구대목구가 설립되고 드망즈 안세화 주교가 부임하자
상돈은 주교관 부지로 현재 중구 남산동 교구청 자리 1만여 평을 교회에 헌납했다.
당시 상돈의 사촌 동생인 동정녀 서 마리아는
자신이 살고 있던 남산동의 기와집을 비워 드망즈 주교의 임시 주교관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서상돈의 증손자로 손꼽히는 성서학자인 서인석 신부(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자신이 성서학 연구에 평생을 몸담을 수 있었던 것은 선대 순교자와 집안 어른들이 보여준 성서 사랑에 연유한다고 밝혔다.
서상돈의 직계 후손 외에도 천주교 시조라 할 수 있는 광수의 후손 중에도 성직자와 수도자가 꾸준히 배출되고 있다. 서상돈의 직계 후손으로는 공석. 인석 신부와 준석 수녀가 있다.
또 서상돈의 삼촌인 인순, 명순, 태순의 후손들로는 정도, 형석, 태석 신부, 그리고 외손으로도 신부 1명, 수도자 3명이 있다.
서상돈의 증조부 유오의 형제 유덕, 유도의 후손 중에는 친손으로 정혁 신부와 성직자 3명. 수도자 1명이,
외손으로 오윤수 신부 외 성직자 1명, 수도자 10명이 배출됐다. 여우목 성지가 조성된 데는 서상돈의 증손자 공석 신부를 비롯한 후손들의 노력이 컸다.
이들은 버려지다시피 했던 묘소를 찾아 지난 99년부터 성지로 조성할 1,300여 평의 토지를 헌금으로 구입하고
서상돈의 삼촌인 순교자 인순과 인순의 아버지 치보가 묻혀 있는 묘소를 이장하는 등 성지 조성을 위해 노력해 왔다.
박해를 피해 방방곡곡을 떠돌다 타향에서 생을 마감한 선조 순교자들.
잡초만 무성한 채 역사 속에 묻힐 뻔했던 거룩한 순교 정신이
100여 년이 넘게 신앙을 이어 온 후손들의 헌신으로 그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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