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땅을 그제(2002년 9월 26일, 목)처음 밟아 봤다.
이 나이 먹을 때까지 설악산을 한번도 못 다녀왔던 이유로… 군대생활도 101보충대 출신으로 경기도지방에서 했다는 이유로… 혹, 다녀왔다 해도 필름이 끊겨 기억에는 없다는 이유로… 강원도 땅을 밟았다는 기억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제 춘천 친구(장승호-고향 초등, 중학교 동창으로 현역군인, 전방부대 원사)집에 놀러 가서 신세지고, 어제 내려오면서 충청도 청주에 들려 부강교회 출신 마순영(이귀옥)집사 부부를 만나 저녁을 얻어먹고 밤9시쯤 집에 들어 왔던 것이다.
그제 오전10시에 집을 출발하여 농수산물 시장에서 배를 구입했다. 가져갈 선물이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아 배를 한 상자 구한 것이다. 삼례IC를 거쳐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11:40에 죽암휴게소에서 좀 쉬고 중부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음성휴게소에서 역시 좀 쉬고 중앙고속도로에 들어가려는데 판교IC를 못 찾았게 되었다. 춘천 길은 초행길에 처녀비행(?)이라는 것 때문에 고생 좀 하다가 강릉 도착인 영동고속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중앙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영동선에 들어가기 전 중부고속도로를 타면서 정오에 하는 재미있는 라디오 토크프로를 듣다가 판교IC를 놓쳐 곤지암 톨게이트까지 가서 U턴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한 마디 하고 가겠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장애인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지난달에 중국을 다녀 올 때 느꼈지만 아직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경제적으로 후진을 면치 못하다보니 그런지 몰라도 장애인에 대한 편의가 없었던 것이다. 일 예로 비행기 삯도 DC가 없었으며 모든 편의시설에도 장애인을 배려하는 모습이 없었던 것이다.
말이 옆으로 흘렀지만 이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아주 잘해 놓은 휴게소가 있기에 적어 보겠다. 중부고속도로 음성휴게소에 장애인을 위한 주차장시설이 아주 잘 되어 있었다. 요새는 휴게소마다 장애인을 위한 주차장 표시를 해두고 있지만 말뿐이고 힘센 사람(?)이 들어가 주차해 놓으면 그만인데 음성휴게소는 달랐다. ①먼저 위치선정을 잘해두고 있었다. 화장실 바로 앞쪽에 있어서 장애인들이 화장실 이용하기에 아주 편리했다. 일반 휴게소에서는 장애인주차지역과 화장실과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 일 보고 오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②다음은 장소표시가 특이했다. 진녹색으로 표시해두고 '여기는 장애인 차량만 주차합니다.'는 라는 의미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어서인지 차가 밀려 있어도 일반차량은 감히 그곳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왔다가도 눈치를 보고 슬슬 그 자리를 피해 주고 있었다. 다른 휴게소에서는 보지 못할 구경거리를 음성휴게소에서 봤던 것이다. 차들이 많아 복잡한 휴게소 주차광장에 장애인차량을 위해 신경을 써준 음성휴게소 소장님께 이 땅의 장애인들을 대표해 이 지면을 통해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다시 이야기는 중앙고속도로 이어진다.
문막휴게소에 들려 가스를 충전하고 출발하려는데 친구의 연락이 왔다. 지금 어디에 왔느냐는 물음과 함께 춘천에 진입하면 바로 있는 한방병원 근처 다방에 들어가 쉬고 있으라는 연락이 있었고 곧 퇴근하여 오겠다고 하였다. 친구의 말대로 춘천한방병원을 오후4:30에 찾았고 그곳에서 쉬며 운동하며 놀다가 친구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때가 저녁 먹을 시간이어서 저녁을 대접하겠다며 식당에 데리고 갔다.
'춘천' 하면 대표적인 먹거리는 막국수와 닭갈비라는데 춘천닭갈비의 명가라는 식당에 가게 되었고 친구가 자기부인을 호출하니 나와 주었다. 초면이었으나 즉각 나와주니 고마웠고 만약 그 자리에 나와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날밤 여관신세를 졌을 것 같다. 갈 때부터 내 생각에 여관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친구부인의 친절에 감동이 되어 그 날 밤을 친구 아파트에서 묵었던 것이다.
친구의 신분은 육군 원사였다.
전방 모 부대 모 연대 통신중대 행정보급관으로 우리 때는 '인사계'라고 불렀던 보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친구가 내 소식을 접했던 것은 사촌 제수씨를 통해 아름아름 알게 되었던 것 같고, 그래서 지난해 여산 부사관학교에 교육받으러 왔다가 나에게 연락이 되어 이십 수 년 만에 처음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룻밤을 그 친구 집에서 묵었다.
그리고 친구가 날 위해 출근도 늦게 하기로 하고 '춘천' 하면 대표적인 볼거리인 소양댐을 구경시켜 주었다. 소양댐은 높이 123m, 길이 530m, 저폭(저수지 둑 바닥 폭)이 550m 이었고 1973년 박정희대통령시절에 완공되었으며 1996년에 보완되었다는 안내문을 보았다. 춘천에 사는 사람들은 소양댐에 대한 자부심이 많은 것 같았고 친구 역시 소양댐에 대한 자랑이 컸다.
휴전선과 인접해 있는 평화의 댐부터 시작해서 그 밑에 화천댐, 춘천댐, 의암댐, 소양댐, 팔당댐을 지나 서울 한강으로 유입된다는 말과 함께 그러기 때문에 그 소양댐은 서울 시민의 상수원, 인근 주민들의 농업 용수와 중화학공업의 공업용수로 아주 중요하고 댐을 어찌나 잘 축조해 놨던지 금년에 있었던 그 물난리에도 소양댐은 끄덕 없었다는 자랑으로 소양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곳에서 한가지 뜻 있는 구경을 했다.
춘천에는 102보충대가 있었다. 101은 의정부에 있고 103은 대구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102보충대에 입소한 장정들이 자대로 팔려 자대에 가기 위해 소양댐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101보충대 출신인데 보충대에 입소하자 그 보충대 기간병이 하던 말… '너희들 101보충대에 정말 잘 왔다. 만약 102보충대로 갔더라면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죽겠네"라는 말을 했을 텐데 너희들 101보충대에 오게 된 것을 행운으로 알아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시 말해 101보충대는 경기도지역으로 팔리고 102보충대는 강원도지역으로 팔렸기 때문인데 강원도 산골에서의 그 힘든 군대생활을 두고 한 말이 당시 군인들 세계에 회자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102보로 입소했던 장정들이 사복 벗어 고향으로 보내고 군복으로 갈아입고 자대에 팔려 자대 훈련소에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인제 원통 양구 지역에 있는 사단으로 가는 모양이었는데 아직 그들에게는 사제의 티가 남아 있어 히히덕거리던 모습이 천진난만해 보였다. 그러나 훈련소에 입소해 트럭에서 내려 연병장에 모여 대열을 정비하자 말자 쪼박모자를 눌러쓴 조교의 호령이 떨어진다. '저기 보이는 축구골대 좌에서 우로 선착순 5명, 뛰어~ 갓!' 5명에 끼지 못한 병력을 집합시켜 '엎드려 뻗쳐'를 시작해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쪼그려 뛰기 30회'를 실시하게 되면 그 히히덕거리던 웃음은 사라지고 군기가 바싹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ㅎㅎㅎ
그런데 그 소양강 선착장에서 배가 그 장정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죽겠네'라는 그 지역으로 말이다.
11:30이었는데 이름점심을 먹기 위해 소양댐 밑에 있는 막국수의 명가를 찾아갔다. 그리고 막구수를 아주 잘 먹었던 것이다. 막구수를 점심으로 들고 12시에 친구집을 출발해 춘천-중앙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중부고속도로-청주를 거쳐 저녁을 먹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 군인친구 부인에 대해서 한 마디 하겠다.
과연 어떻게 생겼고 나와는 통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는데 친구의 호출에 두말없이 나와준 그녀가 고마웠으며 집에 가서도 허물없이 잘 대해주었기에 고마웠다. 안 그랬으면 여관신세를 졌을 텐데 말이다. ㅎㅎㅎ 집에서 놀지 않고 한림대 부설 유치원에서 유치원생들의 부식을 책임지고 있었다. 한 마디로 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아침에 출근으로 바빴을 텐데 아침밥 준비를 잘해 주었다.
그리고 청주 일신여고 교사인 마순영집사를 학교에 찾아가 만나게 되었고 부인 이귀옥집사를 불러내 같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 같은 교회 다니는 수곡동에 있는 권사님 가게였는데 제법 운치가 있었고 이귀옥집사가 하룻밤 자고 갔으면 했지만 그냥 왔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1박2일 코스의 강원도 춘천여행을 마쳤고 어젯밤을 푹 쉬고 이 아침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처음 내 계획은 춘천을 거쳐 내가 군 생활했던 중부전선을 돌고 돌아 2박3일의 스케줄을 생각했었는데,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했던 말과 같이 판교에서 약간 헤메는 바람에 그 생각은 싹 사라져 1박 코스로 마쳤던 것이다. 하기야 5박6일의 중국여행도 감당했었는데 그땐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다음은 내가 들렸던 음식점에 대한 글이다.
첫날 저녁을 대접받았던 음식점은 24년 전통의 맛을 자랑하는 춘천 서사동의 '명동 대원 닭갈비'집이다. 춘천 닭갈비집의 명가인 모양인데 그 골목의 식당은 거의 닭갈비집이었다. 그 집에서 닭갈비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그곳에 친구 부인이 왔던 것이다.
또 한곳은 소양강을 구경가서 댐 둑 바로 옆에 있는 '소양호휴게소'에 들려 커피를 한잔 마셨으며 세 번째는 이른 점심으로 댐 밑으로 내려와 '명가막구수(구 호반막국수)'집에서 막국수를 맛있게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주에 내려와 마집사 부부를 만나 수곡동에 있는 '시작가든'에서 한방 오리찜을 대접받았던 것이다. 그 집은 맛도 맛이려니와 가든의 형태가 특이했다. 몇 채의 원두막이 있었는데 여름에는 그 원두막에서 모기향 피워놓고 음식을 먹는 것도 운치가 있을 것 같았다. 어제도 그 원두막에서 먹었던 것이다. 그 집 주인 권사님과는 친한 모양인데 은혜생활이 충만한 권사님이었었던지 내가 목사 신분이라는 것을 알고는 음식값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 여행은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
졸지에 장애인이 되어 살아온 지난 8년… 방콕생활 4년에 그 뒤부터 운전으로 바깥활동이 시작되어 시작된 바깥나들이… 수없이 많은 나들이의 종지부를 찍고 이제 김제 시온재활교회에서의 협동목회에 힘을 쏟아 보기 위한 일환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