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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각지역 출발
충주호
면적 67.5㎢, 높이 97.5m, 길이 464m, 저수량 27억 5000t으로, 1985년 충주시 종민동·동량면 사이의 계곡을 막아서 만든 충주댐으로 인해 조성되었다. 육지 속의 바다로 불릴 만큼 소양호(29억t) 다음으로 담수량이 큰 호수이다. 주변 경관이 뛰어나고, 풍부한 수량과 넓은 수면, 심한 굴곡과 경사도로 인해 붕어·잉어·향어·백연·떡붕어·송어 등의 어종이 풍부해 사철 낚시꾼으로 붐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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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사적 제170호. 1969년 지정. 동서재(東西齋)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 전교당(典敎堂:보물 210)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굴도리집. 상덕사(尙德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 원래는 이황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가르치며 학덕을 쌓던 곳으로, 1575년(선조 8) 한호(韓濩)의 글씨로 된 사액(賜額)을 받음으로써 영남(嶺南) 유학의 연총(淵叢)이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은 모두 무사석계층(武砂石階層)이며 방주(方柱)의 사용이나 초공(草工)을 끼운 대들보의 간략한 가구(架構) 등 전체적으로 간소하다. 서원 안에는 약 400종에 달하는 4,000권이 넘는 장서와 장판(藏板) 및 이황의 유품이 남아 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 때에는 소수서원(紹修書院)·숭양서원(崧陽書院) 등과 더불어 정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69년 문화체육부에서 해체 복원하여 면목이 일신되었다.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있는 서원이다. 1574년(선조 7) 이황(李滉)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門人)과 유림(儒林)이 세웠다.
안동 국학문화회관
(1박)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한국국학진흥원 내에 위치한 국학문화회관은 지하 1층, 지상 4층, 연건평 2천166평 규모로 67개 객실을 비롯해 최신 음향과 조명시설을 갖춘 강의실, 회의실, 식당 등으로 꾸며졌다.
이곳에서 학생과 교원, 공무원, 기업체 직원 등을 대상으로 전통문화 체험연수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특강 5개 과정 52과목, 체험교육 20과목, 현장교육 20과목 등 총 92개 과목이 개설된다.
특강은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한 인성함양과정과 전통생활문화의 관광문화창출과정 등 전통문화의 현대적 활용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된다. 리더십 양성과 개발, 팀워크 강화 전략 등 직장인의 업무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업무혁신과정도 마련돼 있다.
체험교육은 태껸과 활인심방, 생활풍수 배우기, 목판 찍기 등 심신수양에서 예술분야에 이르기까지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해보는 과정이다. 현장교육은 안동 인근에 있는 문화유적지를 방문, 전문해설사로부터 현장 강의를 듣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문의 054)856-7337.
안동,「국학문화회관」예약 하늘의 별따기 !
청량사
전국에서 연수, 수련회 등 문의쇄도 이어져
안동시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내에 위치한 국학문화회관이 전통문화체험연수와 각종 전국단위 학술대회 개최가 이어지면서 벌써부터 예약에 어려움을 겪는 등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2일차)
6월13일
07:00
기상
일요일
07:30
조식
북어국
09:00
버스탑승 완료
09:30
청량사 관람
11:00
하회마을로 이동
12:00
하회마을 도착 및 중식
하회마을
13:30
하화마을 입장
14:00
하회탈춤 공연 관람
15:00
병산서원으로 이동
15:30
병산서원관람
16:30
여행 마감 인사 및 작별
봉화 청량산 청량사
백구야 훤사(喧辭)하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뜨지 마라 어주자(魚舟子)알까 하노라"
☞ 훤사하랴: 야단스러우랴, 떠들어 소문내랴.
☞ 어주자: 배타고 고기잡는 사람, 어부.
글을 읽으며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던 퇴계 이황.
무릉도원같은 청량산을 아끼는 마음을 그는 그렇게 노래했다.
또한, 청량산을 일러 '입을 벌리고 들어갔다가 입을 다물고 나오는 산'이라고도 한다는데,
수려한 경관에 놀라 입을 벌리고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는 그 비경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려워서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고 해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어 예로부터 소금강으로 불려진 명산이다.
기록에 따르면 청량산은 고대이래로 '수산(水山)'으로 불려지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금탑봉에 자리 잡은 상청량암(上淸凉庵)과 하청량암(下淸凉庵)이 널리 알려지면서
산 이름이 청량산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그 구체적인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청량산은 주세붕(周世鵬)이 명명한 12봉우리(일명 6.6봉)가 주축을 이루며, 태백산에서 시원하는
낙동강이 산의 웅장한 절벽을 끼고 유유히 흘러가며, 뫼뿌리마다 많은 신화와 전설을 담고 있다.
청량산에는 청량사 유리보전(琉璃寶殿)과 응진전(應眞殿)을 비롯한 20여개의 절터와
퇴계 이황이 공부한 장소에 후학들이 세운 청량정사 (淸凉精舍),
서성(書聖) 김생이 글씨 공부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김생굴, 대문장가 최치원이 수도한 풍혈대(風穴臺),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와서 쌓았다는 산성 등 많은 유적과 선현들의 자취가 남아 있으며,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1982년 8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도립공원이라 해봤자 면적이 고작 48.76㎢로서 북한산 국립공원의 절반크기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 오르다 보면 만나게 되는 청량사(淸凉寺).
중앙에 보이는 건물은 강원으로 이용되고 있는 심검당(尋劍堂)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은 수행공간이다.
이 곳 좌측으로는 유리보전과 5층석탑이 위치해 있다.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창건당시에는 승당 등 33개의 부속건물을 갖추었던 대사찰로, 봉우리마다 자리잡은
암자에서 흘러 나오는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청량산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또한 한 때는 신라의 고찰인 연대사(蓮臺寺)와 망선암(望仙庵) 등 크고 작은 26개의
암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불교의 요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불교를 억압하는 주자학자들에 의해 절은 피폐하게 되어,
현재는 청량사와 부속건물인 응진전만이 남아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이며, 현판글씨는 공민왕의 친필이다.
이 곳에 모셔진 약사여래불은 특이하게도 종이를 녹여서 만든 지불이라고 한다.
유리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八作)지붕을 한 다포계(多包系)의 집이다.
공포는 외1출목(外一出目) 내2출목의 형식으로 첨차의 짜임이 고졸(古拙)하고
쇠서의 내부 끝은 연화형(蓮花形) 조각을 새기고 있으며, 전면 중간기둥 위에는 용두(龍頭)와
용미(龍尾)를 주두(柱枓) 밑에 내외로 뻗게 하고 있어 조선 후기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1990년에 세워졌으며, 부처님의 진신사리 5과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영화 '워낭소리'에서 노부부가 죽은 소의 극락왕생을 비는 장면이
이 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그 위쪽으로 5층석탑과 유리보전이 보인다.
청량사 동쪽 바로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 위에서 바라 본 청량사의 전경이다.
맨 아래 건물은 사찰내의 전통 다원(茶園)이자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라 불리워지는 안심당이다.
연화봉이 좌측으로 높이 솟아있는 가운데, 청량산이 포근히 품고있는 형상이다.
금탑봉(金塔峰)의 중층(中層)에 위치하고 있는 어풍대는
내청량과 외청량을 연결하는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청량지(淸凉誌)'의 기록에 따르면, 열어구(列御寇, 고대 중국의 인물)가 바람을 타고
보름동안 놀다가 돌아갔다고 하여 어풍대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경유대(景遊臺) 등이 나열되어 있으며, 이들 대에서는 기암절벽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는
청량산의 연화봉 기슭 한가운데, 연꽃 같은 봉우리와 연꽃 꽃술 자리에 자리잡은 듯한
청량사의 모습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하회마을
16:30 ~ 여행 마감 인사 및 작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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