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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통일신라의 고분, 탑, 불상, 범종, 음악 등 ▦ 고대 문화의 일본 전파 -------------------------------------------------------------------------- 1. 고대문화의 특징
(1) 삼국문화 1) 특성 - 전통 문화 : 서민들 소박한 설화, 음악 - 귀족 문화 : 남 북조, 불교 영향(건축, 조각, 음악) - 각기 다른 특징, 서로 영향 줌→공통적 성격 지님. 2) 고구려 : 중국과 대결→비판 능력, 외래 문화 개성적 수용, 패기와 정열 3) 백제 : 중국 문화 수입 전달에 큰 활약, 우아하고 세련된 귀족문화 4) 신라 : 소박한 옛 전통(신라 토기)→여제 영향으로 조화미(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2) 통일신라 문화 1) 여제 문화 계승→민족 문화 토대 확립 2) 국제 문화 조류에 참여←당문화 수용 3) 조형 미술, 불교 미술, 고분 중심 4) 이상과 현실 조화 : 불국토 이상 실현 추구 5) 통일과 균형미 : 조화미, 정제미 6) 민간 문화 수준 향상← 불교 대중화 2. 고분 미술
(1) 고구려 고분 1) 전기 : 돌무지무덤(석총)→고구려 초기 압록강 유역 발달 - 장군총; 통구, 계단식 7층방형, 벽화는 없음 - 맨 아래층 한변의 길이 30미터, 높이 13미터, 광개토대왕릉 추정. 2) 후기 : 굴식돌방무덤(바깥은 토총) - 무용총(수렵도, 무용도), 각저총(씨름도), 강서고분(사신도=도교적) - 사신도는 백제에 영향, 송사리 능산리 고분에 흔적 보임. - 쌍영총(기사도, 서역 영향, 모줄임천장)
(2) 백제고분 1) 한성 시대 : 석촌동(서울 송파구) - 돌무지무덤 ; 고구려 초기 계단식 석총과 유사, - 고구려 유이민에 의한 백제 건국 고고학적 증거 ☞ 백제초기 서울인 한성(하남위례성)은 어디일까? - 종전 몽촌토성,요즘은 풍남토성으로 추정함. 2) 웅진 시대 - 굴식돌방무덤 : 송산리, 소박하고 고졸한 맛 - 무령왕릉 : 내부가 아치형 벽돌무덤, 남조 영향
3) 사비 시대 : 부여 능산리의 굴식돌방무덤, 규모축소, 세련미
(3) 신라 고분 1) 고분 : 규모가 큰 것은 돌무지덧널무덤(=수혈식 적석목곽분, 천마총 등) - 도굴이 어려워 부장품이 잘 보존되어 있다. 벽이 없어서 벽화는 없다. ☞ 돌무지덧널무덤 - 땅을 파고 목곽을 넣고 그 위에 돌을 덮은 다음, 흙(봉토)를 덮었다. - 5~6세기 전성기, 다곽식이 단곽식보다 앞서 성행. 2) 천마총 ; 1973년 발굴, 돌무지덧널무덤, 천마도 발견
(4) 통일신라 고분 1) 굴식돌방무덤 유행 : 둘레돌에 12지신상(고려 조선왕릉에 계속됨), 고구려 백제 영향 ☞ 12지신상 - 지구가 태양을 도는 소위 황도의 원선상의 성수(星宿)를 짐승모양으로 나타 낸 것으로 근동→중국→우리나라로 들어옴. - 12지를 무덤 수호신으로 조각하여 무덤을 소우주로 꾸민 것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묘제. 2) 화장법 유행 : 불교 영향, 문무왕 해중릉(=대왕암, 호국 의지)
(5) 발해 ; 정혜공주(육정산 고분군, 문왕 둘째 딸) ; - 굴식돌방무덤, 모줄임천장(고구려 양식과 유사), 돌 사자상(매우 힘차고 생동감) - 정효공주묘(용두산 고분군, 문왕 넷째딸) 3. 고대의 건축,석탑 (1) 고구려 ; 안학궁터(장수왕, 평양, 사각형 한변이 620m), 고구려 벽화에 가옥구조. 목탑건립, 현존하는 것 없음.
(2) 백제 탑 1)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안정, 균형 경쾌한 아름다움), 2) 익산 미륵사지석탑(7세기 무왕 때, 목조탑 양식의 석탑,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3) 신라탑 : 1) 분황사 모전석탑(현존하는 석탑중 가장 오래됨) 2) 황룡사지 9층목탑 ;현존하지 않음,자장 건의, 백제 아비지 설계,호국 사상
(4) 통일신라 탑 1) 탑의 전형적인 형식 : 높은 기단의 3층 석탑 - 불국사석가탑, 감은사 3층석탑(장중 웅대) - 진전사지3층석탑(양양, 하대, 기단과 탑신에 부조 불상) 2) 이형탑 : 화엄사 4사자 3층석탑, 다보탑 - 건축 :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범영루 입체미
4. 불상 범종 공예 (1) 불상 1) 고구려 :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 북조 영향(뚜꺼운 의상, 긴 얼굴)+ 고구려 독창성(강인한 인상, 응은한 미소) 2) 백제 : 서산 마애삼존불→부드러운 자태 온화한 미소(자비와 포용 태도) 3) 신라 ; 경주 배리 석불 입상→푸근한 자태와 부드럽고 은은한 미소 - 삼국공통 :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날씬한 몸매 그윽한 미소) 4) 통일신라 : 석굴암-화강암 인조석굴, 균형 사실적, 불상 배치는 불교 세계 이상 표현 * 통일신라 미술의 특징 : 조화미, 정제미 5) 발해 ; 흙으로 구운 불상, 이불병좌상,
(2) 범종, 기타 1) 범종 ; 상원사 동종(가장 오램), - 성덕대왕 신종→ 맑고 장중한 소리, 연화문 당초문, 경쾌 아름다운 비천상, 웅장 화려 순수미 2) 비석 ; 사실미, 무열왕릉비 이수와 귀부, - 성덕대왕릉 둘레돌 12지신상(얼굴은 동물 몸은 사람) 3) 석등 ; 불국사 석등. 법주사 쌍사자석 등→단아하고 균형미. - 발해석등 ; 팔각단위에 중간이 볼록한 간석,그위에 창문과 기왓골 조각, 웅대함.
4) 귀족 호화 생활 ; 안압지, 포석정 5) 글씨와 그림 ① 글씨 - 광개토대왕릉 비문 ; 웅건한 서체 - 김생 ; 질박하면서 굳센 신라 독자적 서체, 집자비문(고려)
② 그림 - 천마도 ; 신라의 힘찬 화풍 - 화엄경 변상도 ; 섬세하고 유려한 모습 - 솔거; 황룡사 벽화 - 신라 김충의 그림 5. 음악. 향가 (1) 음악 1) 고구려 : 17종 악기, 왕산악 거문고(진의 7현금 개량) 2) 백제 : 고구려와 비슷, 일 음악에 영향줌(삼국 공통) 3) 신라 - 길쌈대회 회소곡, 옥보고, 백결 방아타령, - 우륵(가야 출신, 가야금 전래, 12악곡) - 3죽(대중소 피리), 3현 (거문고, 가야금, 비파) ☞ 삼국지 위지 동이전(3세기말 진나라 진수) ‘우리 민족 가무 좋아함’ (2) 향가 1) 내용 ; 승려와 화랑, 불교 공덕 염원, 화랑 찬양 - 삼국유사에 14소 향가 전함. 2) 혜성가, 서동요, 통일후 월명사 충담사 등 지음 3) 향가집 ; 삼대목: 진성여왕때 대구화상과 위홍지음, 전하지 않음 * 기타; 황조가, 을지문덕 오언시, 신라 회소곡, 백제 정읍사, 발해 양태사 詩 다듬이 소리 6. 고대 문화의 일본 전파 (1) 일본의 발전 1) 야마토(大和)정권 : 3세기말~4세기초 규슈북방 오사카 근처, 최초 통일정부, - 삼국문화 전래→야마토 정권 탄생, 아스카 문화 2) 아스카문화 - 아스카는 야마토정권 서울, 불교가 전래된 552년 대화개신 645년 사이의 문화 - 쇼토쿠태자(聖德太子, 573~621)에 의한 문화. 율령국가 터전,불교문화 토착화 ☞ 쇼토쿠 태자 ; 일본 요메이왕(用明王)의 둘째 아들. 아버지가 죽고 593년 숙모인 스이코왕(推古王)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어 섭정.사재로 호오류사 지어 불교 포교. 3) 다이카개신(大化改新, 645) - 쇼토쿠태자 사후 나가노에 왕자와 후지와라씨가 소가씨를 타도한 후 개혁. - 7세기이후 수 당 문화 수용, 당의 여러 제도를 모방, 국왕권과 중앙 집권강화, 이때부터 일본 국호 사용. (2) 고대문화의 일본 전래
1) 백제, 가장 큰 영향 ① 학문 기술 전래 - 왕인, 아직기 ; 한문(논어 천자문), 유교 충효 사상, 각각 근구수, 근초고왕 때 - 단양이 고안무 등 오경박사, 무령왕 때 - 의박사, 역박사 - 아좌태자 ; 쇼토쿠 태자 초상화 - 관륵 ; 천문 역법, 무왕 때 ② 불교 전래 - 노리사치계, 552년 불교 전래, 성왕 때 - 혜총 ; 계율종 전함, 위덕왕 때 - 백제 가람 양식, 백제 오층탑 -부여정림사지 5층석탑→일본에 영향줌 2) 고구려 ① 학문, 불교 - 혜자 ; 쇼토쿠태자 스승, 영양왕 때 - 담징 ; 5경, 종이, 먹, 붓, 전함, 호오류사 금당 벽화 그림 - 혜관 ; 삼론종 전함, 영류왕 때 - 도현 ; 일본세기, 보장왕 때 ② 일본 다카마쓰 고분벽화 -고구려 강서수산리 고분벽화 영향 -1972년 나라 아스카 지방에서 발견, 고구려계통 여인도, 성좌도, 4신도 3) 신라 : ① 조선술 ② 축제술→ 한인의 연못 ③ 음악도 전래 4) 통일신라 문화→ 하쿠호 문화(白鳳文化) ① 견신라사(일본 사신)→ 원효, 강수, 설총 유불 문화 수입 ② 의상의 화엄사상→ 심상이 전래, 일본 화엄종 ③ 신라의 정치 제도→ 다이카개신 이후 전제 왕권 확립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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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보충 자료】 ◈ 창건 시기 ㅇ 경북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토함산(吐含山) 기슭, 대한불교조계종 25敎區本寺의 하나로 그 경내는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 경내면적은 11만 7541평이다. ㅇ 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그 중 하나는 《佛國寺古今創記》로, 여기에 보면 528년(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하였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었고,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한편, 《불국사 事蹟》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되었다고 하였다. ㅇ 이상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이 확실하다. ◈ 김대성 전설 《三國遺事》 권5 <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ㅇ 金大城 : 빈곤한 대성은 부처님께 하나를 바치면 만 배의 리를 얻을 것이라는 시주승의 이야기를 듣고 부자 복안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여 얻은 수묘의 전을 보시하였다. 얼마후 대성이 죽었는데 이 날밤 국상 김문량의 집에서는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모량리 대성이 너희 집에 환생할 것이니라.” 김문량이 알아보니 과연 대성이 죽은 지라 그날부터 부인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좌수를 펴지 않고 있다가 7일만에 펴니 大城이라고 새겨진 금간자가 있었다. ㅇ 대성은 전생의 어머니를 모셔다가 아울러 봉양하였다. 장성하여 사냥을 좋아하여 토함산에서 곰을 잡았는데 꿈에 곰이 나타나 “ 네 어찌 나를 죽였느냐, 환생하여 너를 잡아먹으리라 ” 하였다. 대성이 용서를 비니 곰이 말하기를 “네가 능히 나를 위하여 불사를 세워 주겠느냐? ” 하는 고로 대성이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장수사를 지었다. 또 깨달은 바 있어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석굴암)를 세우고 공양하였다. ◈ 임진왜란중 소실 ㅇ 1593년 5월 임진왜란의 병화로 80여종의 2,000여 칸의 대가람이 불에 타버리자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으로 또는 승려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그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ㅇ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舍利藏置)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8.15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1970년 2월부터 1973년 6월까지 불국사 복원 공사를 하여 유지(遣址)만 남아 있던 무설전,관음전,비로전,경루(經樓),회랑(廻廊)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극락전․범영루(泛影樓)․자하문(紫霞門)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 사상적 배경 ㅇ 모든 사찰이 그러하듯이 여기에 다듬어진 돌들, 나무들, 그리고 적절히 꾸며진 공간(空間)들은 모두 사람의 정성이 깃든 곳이며, 그 정성은 우선 연약한 인간의 비원(悲願)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구원(救援), 부모의 명복(冥福), 국가와 민족의 안녕, 부처의 가호(加護), 그 모든 것을 비는 절실한 염원(念願)이 이곳 돌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 하겠으며 이러한 정성으로 이룩된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佛國), 즉 이상적 피안(彼岸)의 세계 그 자체라 하겠다. 이 불국을 향한 염원은 대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하나는 《법화경(法華經)》에 근거한 석가여래의 사바세계(娑婆世界) 불국이요,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 또는 《아미타경》에 근거한 아마타불의 극락세계 불국이요, 또 하나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불국이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一廓)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루어 놓았다. ㅇ 이곳에 정성을 바친 승려와 선현(先賢)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나 주요한 인물만을 열거하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 영제부인(법명 法流), 절을 중건한 지소부인, 헌강왕비(憲康王妃) 권씨(법명 秀圓), 의상의 제자 표훈(表訓), 불국사의 개조로 불리는 김대성, 탑을 조성한 백제의 예술가 아사달(阿斯達), 그에 대한 애정을 자비(慈悲)로 승화시킨 아내 아사녀(阿斯女), 지금은 불타 없어졌지만 광학장강실(光學藏講室) 벽에 석가상을 수놓았던 경문왕(景文王)의 공주로서 비구니가 되었던 원해(遠海) 등은 모두 이 절에 염원을 건 사람들이다. ㅇ 고려시대에는 지율(持律)이 엄하기로 이름난 유가학승(瑜伽學僧) 해원(海圓)이 이곳에 살았으며, 조선시대에는 효령(孝寧),안평(安平),영응(永膺) 등의 대군(大君)과 세종,노산군(魯山君), 왕실의 대비(大妃),상궁(尙宮) 등의 지성(至誠)이 끊임없이 불국사로 쏠렸다. ◈ 문화재 경내에는 다보탑(多寶塔, 국보 20), 3층석탑(국보 21), 연화교․칠보교(蓮華橋․七寶橋, 국보 22), 청운교․백운교(靑雲橋,白雲橋, 국보 23),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 국보 26),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27), 사리탑(舍利塔, 보물 61) 기타 많은 문화재가 잔존한다.
◈ 無影塔 ㅇ 현진건(玄鎭健)의 장편 역사소설. 1938~39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ㅇ 사비성의 아사달 석공이 아내 아사녀를 두고 불국사의 석탑을 만드는데 동원되었다. 다보탑은 쉽게 완성하였으나 석가탑은 시간이 많이 걸렸다. 4월 초파일 탑돌이 때 온 귀족의 딸 玉娘(구슬아가씨)이 아사달을 사모하였다. 한편 사비성의 아사녀는 아사달의 연적이었던 팽개의 치근거림을 피해 3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남편을 찾아 불국사를 찾아왔다. 아사녀는 문지기 승려의 제지로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탑의 그림자가 영지(影池)에 비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다. 친절을 베풀던 노파는 아사녀를 귀족의 첩으로 팔아 넘기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를 눈치챈 아사녀가 불국사로 뛰어가는데 옥랑과 몸종이 주고받는 소리를 엿듣게 되었다. '나는 아사달님 없이는 하루도 못살 것 같다. 곧 탑이 완성되면 아사달님을 따라 사비성으로 가겠다.' 라고 말하는 옥랑의 말을 오해하고 아사녀는 그만 그림자 못에 빠져 죽었다. 탑은 완성되고 아내의 참변을 들은 아사달은 영지로 뛰어가서 울음을 터뜨린다. 구슬아기가 뒤따라 와서 함께 도망가기를 애원하다 국법을 어긴 죄로 죽음을 당한다. 아사달은 아사녀와 구슬아기의 영상(影像)을 합해서 아름다운 탑을 조각하고는 그도 또한 영지에 빠져 죽는다. 흔히 역사소설이 왕조의 영고성쇠(榮枯盛衰)나 세도가(勢道家)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리는 데 반해, 이 소설은 한 석공의 사랑과 예술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특이하고, 낭만적인 향기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 참고 자료 < 유홍준 나의 문화 답사기 >
◈ 기하학적으로 세계 최고의 걸작품 o 본존불 명치끝을 중심점으로 양겨드랑이, 양어깨, 양 무릎, 백호를 지나는 4개의 동심원. 총 석재는 3116톤, 8톤 트럭 390대분 ㅇ 요네다 미요지의 측량 : 사용한 자는 곡척(30.3cm)이 아니라 당척(29.7cm)임을 밝힘. 주실은 반지름 12자의 원, 원형 주실의 입구 또한 12자로 이는 원에 내접하는 육각형의 한 변에 해당한다. 주실의 대좌는 원의 중심에 놓인 것이 아니라 약간 뒤쪽으로 물러나 있는데 그 위치는 입구의 12자를 한변으로 하는 정삼각형을 그렸을 때 그 꼭지점이 대좌의 앞 끝에 닿도록 했다. 그리고 대좌의 높이는 한변을 12자로 하는 정삼각형의 높이의 1/2로 하였다. o 석불사는 하늘의 조화를 따른 것. 4절(보살 십대제자 등 판석 넓이 4척), 12지(본존불 대좌 지름), 24각(둥근 본당의 지름), 48발원(본당과 전실의 너비를 합친 전체 길이) ◈ 미완성의 신비 o 석굴에는 불 보살 천 나한 모두 40분 모셔져 있다. 거기에는 절대자를 중심으로 한 천상의 질서가 정연. 그 엄청난 무게의 돌을 자르고 깎아 세우면서도 10m에 1mm 의 오차(1/10,000)도 허용하지 않았다. 세 동강난 천장 덮개돌 : 안쪽 지름 2.5m 높이 1m 바깥지름 3m, 무게 20톤 덮개돌을 눌러 주어야 천장의 낱낱의 돌이 힘의 평형을 이룬다. 이것을 세동강내어 김대성이 낙심하여 잠든 사이 천신이 와서 설치하였다는 설화는 잠든 사이 석공이 해치웠음을 의미하는 것 ◈ 보수 공사 : 석굴 바닥의 두 개의 샘 1913.10~1915.9 두께 2m 콘크리트 외벽으로 싸발라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와 칼슘의 해독으로 치명상만 주었다. 누수 현상으로 1917년과 1920년~23년 보수 공사를 하였으나 푸른 이끼가 끼어 1927년 증기사용에 의한 세척법을 강구하였다. 1961년~64년 황수영 주심으로 콘크리트 이중 돔을 씌우고 정선의 골굴석굴 그림을 참고로 석굴 전실에 목조 건축을 하였으나 결로로 인한 습기를 제거하는 냉각장치(에어컨)를 설치하였다. 본래 석굴 본당 암반 밑에 용출하는 두 개의 샘이 있어서 석굴 바닥의 온도를 낮추어 바닥 돌에서만 결로 현상이 나도록 되어있었으나 1913년 보수시 샘의 물을 연관으로 돌려 건드려서 오히려 벽면에 결로 현상이 생기게 된 것이다. ◈ 석굴암의 방향 o 석굴암은 해발 565미터이며 방향은 동동남 30도 이는 대왕암(28.5도 방향)이 있는 동해구를 바라본다는 설이 있으나 동짓날 해뜨는 방향(29.4도)과 일치한다. (남천우) 음이 쇠하고 음이 쇠하고 양이 비로소 일어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이 동짓날이다. o 본존불고 둘레의 조상들이 정면을 향하고 서 잇지 않고 들어오는 입구 쪽을 바라본다. 들어가면서 자연히 다정하게 상면할 수 있다. ◈ 뒷벽 광배가 원형이 아니라 약간 타원형 o 좌우 224.2 cm 상하가 228.2cm 로 4cm차이.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았을 때(앙각 仰角), 사각(斜角)의 시각 협착현상으로 실제보다 짧아 보이는 현상을 감안한 것으로 일정한 지점에서 보면 이 타원형이 오히려 정원으로 보인다. 그러면 일정한 거리는 어디인가? 물체를 바라볼 때 가장 알맞은 거리는 물체의 최대 높이(최대길이)의 3배이다. 3배의 거리는 물체의 양끝을 바라보는 시각이 20도가 된다. 전실의 정중앙에 해당하는데 보는 사람 눈 높이가 160cm일 때 불두는 두광의 정가운데 놓이는데 더욱 신기한 것은 이 같은 길이는 곧 좌대의 높이와 일치한다. 따라서 160cm의 눈높이를 가지려면 키가 172cm(가죽신 높이 2cm빼면 키는 170cm 이었을 것) ◈ 본존불은 누구인가? o 부다가야 마하보리사의 석가 성도상을 모델로 조영된 것이 분명하다(강우방) 본존불 인상은 항마촉지인으로 석가모니가 성도할 때 마귀를 항복시키고서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오른손 검지는 살짝 들려있다. 본존불은 왜 높이가 11.5자, 무릅사이가 8.8자, 어깨너비가 6.6자인가에 착안하여 문헌자료를 조사, 현장법사의 대당 서역기에 똑같은 수치를 찾아냈다.(마하보리사 석가 성도상 대좌높이 4.2자, 너비 12.5자 불상높이 11.5자 양무릎 사이 8.8자 양어깨 사이 6.2자) o 머리는 크게 만들고 높이 올려 착시 현상을 교정했다. 인자한 얼굴에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석굴암 본존불 감은 듯 뜬눈은 반사광선을 받을 때 빙그레 웃는 모습이 됨. 야외불들은 직사광선을 받아야 미소, 오묘한 빛의 조화. (중국 서양의 것은 부릅뜬 눈 자비보다 위엄이 느껴진다.) 항마촉지인 늘어뜨린 손가락의 검지가 중지 위에 슬며시 올려져 있다 삼매경시 자연스럽게 되는 모습. 성불의 환희를 담았다. ◈ 석굴 예찬론 ㅇ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석굴의 여러 조상들을 보면서 굴 밖의 수호신상에서 굴 안의 불보살상으로 들어가면서 힘의 세계에서 내면적 성찰의 계기로 바뀐다. 그 기법과 내용이 점차 진보된 발전의 발자취를 느낀다. (그것은 마치 미켈란젤로가 시스나 성당 벽화를 5년간 그리면서 최초작품 ‘노아의 방주’에서 ‘천지창조’사이에 보여준 미묘한 차이와 같다는 점까지 읽어 낸 것이다.) 누가 능히 이 조각에 나타난 그 뜻을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이 불상의 아름다움이 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아무런 착잡한 수법도 보지 못한다. … 그는 아무런 과장도 복잡한 것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실로 아무 것도 없는 지순(至純)의 그 속에서 작자는 불타로서 지고의 위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모든 의미는 그 단정한 용모에 모여 있다. 그는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입을 다물고 눈은 쉬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는 어둡고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석굴 안에 앉아서 깊은 좌선에 몰두하고 그것은 모든 것을 말하는 침묵의 순간이다. … 모든 것을 포함한 무의 경지다. 어떠한 참된 것도 어떠한 아름다움도 이 순간 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선 종교도 예술도 하나다.'
ㅇ 又玄 高裕燮(1905-1944, 한국미술사의 아버지) 예찬론 '거대한 연화대좌도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9척 고상이 항마촉지의 인상으로 온화하고 엄숙한 봉의 눈을 반개하고 동해 창파를 굽어살펴 듬직이 앉아 계신 위용! 결가부좌하신 발모습도 평안하고 두루 원만하시거니와 무릎도 섬세한 듯 둥글고 무릎까지 뻗어 내린 긴 손도 살찐 듯 부드럽고 온화하시거니와 양어깨 양팔도 풍만하고 원융하시고 가슴도 장엄하시거니와 등줄기도 곧고 엄숙하시고 귓밥도 길게 늘어뜨리고 입술도 두툼하니 내리셨거니와 콧날도 우뚝하시고 눈동자도 빼어나거니와 머리도 원만하시다. 피도 없고 물도 없고 가슴도 없고 정도 없는 화강 거석에서 맥박이 충일하고 신성이 횡일하고 호홉이 가지런하고 온화함이 구비된 위대한 이 상이 드러날 때 환희는 조각공의 손끝에 있지 아니하고 신라 천지에 휩싸였을 것이요, 우주 속에 메아리 쳐 퍼졌을 것이다.'
ㅇ 三佛 金元龍 선생의 미술사관 '석굴암의 조각들은 8세기 중엽 신라 조각의 결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이 조각들은 외형과 내면의 미를 함께 융합한 최상의 종교조각이라고 할 수 있으며, 6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2세기 동안에 연마된 신라인들의 조각 기술을 총집산하고 결산한 감이 있다. 침울한 표정, 조용한 미소, 이러한 과거 동작들이 지양되고 이제 신라 불상들은 고요한 정밀의 심연 속에서 정좌(靜坐)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멈추어진 웃음을 신라 불상들은 다시 되찾지 못하고 만다. 그리고 그 얼굴은 시대가 내려가면서 점점 굳어지고 무서워지고 무표정해 지고 그리고 차디찬 형식적인 佛顔으로 타락하고 마는 것이다. 석굴암의 불상들은 이러한 하강이 시작되기 전의 고비에 서 있는 분수령 같은 존재이다.'
ㅇ 유홍준의 감상 '석불사 석굴 조각은 맹목적 보편성을 드러내는 아카데미즘이 아니었다. 신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인간적이고, 인간적이라고 말하기엔 절대자의 기품이 강하였다. 엄숙하다고 말하기엔 온화하고, 인자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엄했다. 젊다고 생각하려니 너무 의젓하고 노숙하다고 말하기엔 너무도 탄력이 있었다. 남성으로 보려니 풍염하고 여성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건장하였다. 그리하여 혹자의 ‘아버지라고 보려하니 너무 자비롭고, 어머니로 보려하니 너무 엄격했다.’ 는 말도 생각났고, ‘이 세상의 질서와 평화가 저 한 몸에 있다’는 말도 생각났다.'
석굴암 대불 청마 유치환 목놓아 터뜨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의 돌로 눈감고 앉았노니 천년을 차가운 살결 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흐르는 숨결을 보라 먼 솔바람 부풀은 동해 연잎 소요로운 까막까치의 우짖음과 뜻없이 지새는 흰 달도 이마에 느끼노니. 뉘라 알랴 ! 하마도 터지려는 통곡을 못내 견디고 내 여기 한개 돌로 적적(寂寂)히 눈감고 가부좌하였노니. 석굴암(石窟庵) ☞ 두산동아 백과 ㅇ 신라 때 오악(五岳)의 하나인 토함산(吐含山)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石窟寺刹).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 국보 제24호. 경북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 소재.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ㅇ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듯이 경덕왕 대에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신라의 기명(記名) 방식에 의해 대성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ㅇ 석굴의 기본적인 평면구조는 전방후원(前方後圓)의 형태를 취하면서 네모진 공간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로 나뉘어져 있다. 주실에는 단독의 원각(圓刻) 본존상(本尊像)을 비롯하여 보살과 제자상 등이 있으며, 전실에는 인왕상(仁王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을 부조(浮彫)하여 배치하였다. 이 전실의 기능은 곧 예배와 공양을 위한 장소이다. 천장은 궁륭형(穹形)의 둥근 양식이며, 그 위에 연화문(蓮花紋)의 원판을 두어 천개(天蓋)로 삼고 있다. 조각상의 배치는 전실부터 시작하여 팔부신중(八部神衆) 8구, 인왕(仁王) 2구, 사천왕 4구, 천부(天部) 2구, 보살(菩薩) 3구, 나한(羅漢) 10구, 감불(龕佛) 8구와 본존여래좌상 1구가 있다. 이들 불상의 배치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ㅇ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 불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 대암암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원력(願力)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특히 석굴암의 방위(方位)가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海中陵), 즉 대왕암(大王巖)이 자리잡고 있는 곳을 말한다. ◈ 신앙심이 빚어낸 완벽한 조형미 ☞ 경향 신문 1997.01.04 신년 해돋이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 있다. 신라의 신비를 간직한 세계적 문화 유산, 토함산 석굴암이다. 석굴암이 동해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어 일출을 보기가 좋은데다 해면에서 올라온 해가 바다를 지나 물결처럼 육지를 가로지른 산들을 실루엣처럼 비춰 주는 장관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석굴암은 해발 565m의 토함산 동쪽 산자락에 있다. 불국사에서 토함산 동쪽 위로 꼬불꼬불 난 석굴로를 따라 8km쯤 올라가면 석굴암 매표소, 여기서 오른쪽 산허리의 비포장길을 따라 잠시 걷다 보면 아담한 산사와 왼편 돌계단 위쪽의 목조 건물이 눈에 띈다. 정면 3간, 측면 1간의 편액도 없는 목조 건물, 이 안에 있는 석굴과 석불이 95년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한 석굴암이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이다. 석굴암은 일제 때부터 잘못 부르고 있는 이름이다. 창건에 관한 유일한 기록인 삼국유사는 신라 경덕왕 때 재상을 지낸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운 것으로 전한다. 삼국유사는 751년부터 불국사를 세우던 김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이를 완성했다는 ������사중기������의 내용도 함께 전하고 있다. 이를 삼국사기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김대성은 불국사를 창건하다 23년 만에 죽었으며 석불사는 불국사와 같은 시기 혹은 그 이전에 완성되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본래 석굴 사원(차이티아)은 인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길고 네모난 앞방(전실)과 원형의 주실로 구성되며 주실 안에 탑과 불상을 모신 것이 기본 양식이다. 석굴암은 크고 작은 석재를 쌓아올려 만든 인공 석굴 사원이다. 전실과 주실, 이 둘 사이의 비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존불을 포함해 모두 40구의 불․보살․나한 등을 전실 좌우벽과 주실 내부의 원형벽 및 벽 위의 감실 등에 모셨다. 원래 주실 벽 위 10개의 감실에는 각 1구씩의 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나 2구는 일제 때 도난당해 8구밖에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현재의 불․보살상은 모두 38구다. 하나하나의 조각품들에 담긴 아름다움과 완벽한 조형미는 통일 신라기에 최고도로 발달한 석조 기술과 예술적 안목을 보여 준다. 특히 본존불의 당당하고 풍만한 신체, 간결하고도 힘있는 옷주름, 광배와의 조화 등은 붓다의 무상 정각을 상징하는 가장 완벽한 조형물로 평가된다. 이같은 조형 예술을 담은 석굴의 내부 구조는 철저히 계획된 것이며 신라인의 신앙심을 예술과 과학으로 빚어 낸 결과이다. 주실의 천장은 낱개의 돌을 5단의 돔형으로 쌓아올린 뒤 맨 위에서 천장 덮개 돌로 눌렀으며 각각의 돌이 어긋나지 않도록 낱돌과 낱돌 사이에 30개의 팔뚝 돌을 쐐기처럼 박아 놓았다. 이렇듯 짜 맞춘 듯한 구조를 1708년에 나온 불국사 사적기는 '삼베를 짜듯 돌집을 만들었다(직조석)'고 했다. 본존불을 비롯한 주실 내부의 비례 또한 신비에 싸인 과학의 소산이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 주실 내부는 29.7cm를 1자로 하는 당척을 사용, 12자를 기본으로 하면서 정사각형과 정삼각형, 원에 내접하는 다각형 등의 다양한 비례 구성으로 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이 밖에도 석굴 밑에서 솟아나는 2개의 샘물을 이용한 온․습도 조절, 불상뒤의 광배를 상하가 길쭉한 타원형으로 만들고 천장을 반구형의 반지름보다 높이 해 아래쪽에서 보는 사람의 눈에는 완벽한 원형과 구형으로 보이도록 고려한 점, 동짓날 해뜨는 방향과 일치시킨 석굴의 방향 등 석굴암의 과학성을 보여 주는 사례는 많다. 1) 통일신라 고분 ◈ 12지 신상 ㅇ원래 지구가 태양을 도는 소위 황도의 원선상의 星宿를 짐승모양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근동지방에서 일어나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 온 것. 이것을 무덤에 배치하는 것은 무덤 안을 소우주로 만드는 동시 십이지로 하여금 무덤의 수호신 구실을 하도록 하는 것으로서 이것 역시 중국에서 시작됨. ㅇ 그것을 돌에 새겨 봉토주위의 호석(護石)으로 발전시킨 것을 통일신라 사람들의 창안 1986영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토용(土俑 ; 사람, 토마, 태견상 등) 과 청동 12지상이 출토됨. 12지를 청동상으로 만들어 무덤 안에 둔 것은 이번이 처음.
◈ 大王岩 ㅇ 30대 문무왕 (제위 661-681)은 군왕으로서 사치와 영화를 멀리하고 검소한 생활로 모범을 보였고, 유언하기를 ������나는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지 오래며 죽은 후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佛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고자하니 火葬을 하여 동해 바다에 장사 지내라.������(삼국유사) 신문왕이 부왕의 유언을 따라 화장한 후 수중릉을 만들었다. ㅇ 대왕암(사적 158호)은 경북 경주시 감포부근, 감은사지에서 4km 대본 해수욕장에서 200m 위치의 바위섬. 동서와 남북으로 십자형 수로 중앙에 4평가량 수중 못. 길이 3.6m 너비 2.85m 두께 0.9m 의 거북 모양의 화강석 밑에 납골처. (散骨處라는 설도 있다.) 신라 오악학술 조사단이 발표 ㅇ 그러나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한차례도 없었기에 그 돌의 실체는 아직도 베일에 쌓여 있다. 그 돌 밑에 과연 문무왕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 최근엔 울산 방어진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 바로 문무왕의 수중릉이란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 주장 역시 근거가 미약하다. 82년 문화재관리국은 문제의 넓적한 돌을 조사하기로 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수중 다이버가 바다 밑으로 뛰어 들기 직전, 발굴단은 조사를 갑자기 포기했다. 왜 그랬을까.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고고학자 조유전 국립민속박물관장은 ������비록 진위 논란이 재연될지라도 하나의 금기로 그냥 놔두는 것이 좋을 거란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의 비밀이 있어야 신비스러움이 유지되고 그래야만 대왕암의 의미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진위 여부가 아니라 대왕암에 서려있는 문무왕의 나라 사랑 정신이기 때문이다.������ ◈ 감은사지 (感恩寺址) 경북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용당리(龍堂里)에 있는 신라 때의 감은사 절터. 사적 제31호.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대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신문왕이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나라를 지키는 사찰로서 682년(신문왕 2)에 완공하였다. 《삼국사기》에 있는 바와 같이, 이 절의 금당(金堂)은 해룡이된 부왕의 휴식을 위해 절의 본당인 금당에 휴식 공간을 마련하고 금당아래 동향으로 통로를 만들었다 한다. (삼국유사) 절터는 동해가 산기슭에 있는데, 거기에는 큰 3층석탑 2기가 동남으로 흐르는 대종천(大鐘川)을 앞에 두고 서 있다. 금당터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지표(地表)에는 원형 주좌(柱座)가 각출(刻出)된 1개의 초석이 있고, 곳곳에 사각형 초석(楚石)과 대석(臺石)이 있으며, 금당 마루를 이루었던 장대석 등이 있다. 중문터와 회랑터의 남쪽 절반 및 금당터의 대부분이 밭이 되었고, 회랑터 북쪽 절반과 강당터는 민가에 들어가 있다. ◈ 感恩寺址三層石塔 감은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2기의 화강석제 석탑. 국보 제112호. 높이는 동․서 탑 모두 13.4 m이다. 2중의 기단에 사각형으로 쌓아올린 3층 석탑으로, 동․서 두 탑이 같은 규모와 구조이다. 2중기단 중의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面石)을 같은 돌로 만들었으며, 모두 12장의 석재로 이루어졌고, 상층기단은 면석을 12장으로 만들었다. 갑석(甲石)은 하층이 12장, 상층이 8장이며, 탱주(撑柱)는 하층에 3개, 상층에 2개를 세웠다. 탑신은 초층이 우주(隅柱)와 면석을 따로 세웠고, 2층은 각 면을 1장씩, 3층은 전체를 1장의 돌로 앉혔다. 옥개는 옥개석과 받침들이 각각 4개씩이며 받침은 각 층이 5단의 층급을 이루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과 3.3 m의 철제 찰간(擦竿)이 남아 있다. 많은 석재를 이용한 수법은 백제의 석탑과 같으나, 그것이 목조탑파를 충실히 모방한 것인데 반해 이 석탑의 조형수법은 기하학적으로 계산된 비율에 따른 것이다. 감은사는 682년(신라 신문왕 2)에 창건되었으므로 이 탑의 건립도 그 무렵으로 추정되어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석탑이다. 1960년에 서쪽 탑을 해체, 수리할 때 3층 탑신에서 창건 당시에 넣어둔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 萬波息笛, 利見臺 ㅇ 대왕암과 감은사 중간지점에 큰 용이 나타나는 것을 지켜 본 곳이라는 이견대가 있다. 동해에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므로 일관에게 물으니 이는 문무왕이 해룡이 되어 삼한을 보호하며 김유신을 대신으로 하강시켜 왕에게 큰 보배를 전할 것이라 하였다. ㅇ 신문왕이 이견대에 나가 바라보고 뜬 산에 이르러 붙었다 합쳐졌다 하는 대를 얻어 적(笛)을 만들어 부니 적병이 물러가고, 가뭄에 비가 오고, 비올 때 개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이 잠잠해 졌다 한다. 2) 서동 설화에 얽힌 비밀 ◈ 서동 전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변장하여 경주에 간 서동은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선화 공주 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서동이를 밤이면 안고 간다.” 는 서동요를 퍼뜨리게 했다. 공주는 귀양길에 서동을 만나 함께 백제 땅으로 갔다. 서동은 마를 캘 때 보아둔 황금을 찾아 공주의 희망대로 신라 궁전에 보냈다. 사자사의 지명 법사가 도력으로 날라다 주었다. 황금을 선물을 받은 진평왕은 마음이 풀려 딸에게 편지를 썼고 이런 사실이 백제 땅에 알려지자 서동의 인기는 급상승하여 백제의 왕이 되었다 서동의 출생은 홀로지내던 어머니가 잠든 어느 날 밤, 집 옆에 있던 연못의 수호신인 용이 방에 들어와 어머니와 통하고 서동을 나았다는 것이다. ◈ 숨겨진 역사의 모습 용이란 상서로운 동물로서 고대 사회에서는 고귀한 신분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서동의 아버지는 궁정의 최고 권력자 중의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때 백제는 귀족을 중심으로 정치가 행해지고 있었다. 28대 혜왕과 29대 법왕이 얼마 못 가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도 왕위를 둘러싼 극심한 혼란과 다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서동이 선화공주를 맞이한 시점은 역시 왕위 계승자로 신분이 인정된 뒤일 것이다, 무왕 (30대, 600-641년재위) 이전에 백제와 신라는 결혼 동맹을 맺어 남하하는 고구려의 예봉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신라는 동맹을 저버리고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땅을 독점해버렸다. 이즈음 왕위에 오른 무왕은 멀어진 신라와의 관계를 회복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설화에서 황금더미로 표현된 엄청난 예물을 보내서 신라왕의 환심을 사서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는 비상한 방안을 강구했고, 이후 무왕은 신라왕의 후원을 배경으로 약했던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 하지만 왕권이 안정되자 무왕은 정복군주가 되어 무려 열네 차례에 걸쳐 신라를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고, 익산 미륵사(규모가 거대함)를 비롯해 대규모의 사치스런 공사를 벌였다. 그러자 백성들은 무왕에게 등을 돌렸고, 무왕은 아들 의자왕에게 멸망하는 백제를 넘겨주는 비운의 왕이 되었다. 3) 대표적 향가 ◈ 안민가(안민가 : 충담사) 군은 아비요 신은 사랑스런 어미라 민을 즐거운 아이로 여기시니 민이 은혜를 알지로다. 구물구물 사는 물생들 이를 먹여 다스리니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 소냐 나라를 지닐 줄 알지로다. 군답게 신답게 민답게 할지면 나라는 태평하리라. ◈ 찬기파랑가(충담사) 헤치고 나타남 달이 흰 구름 쫓아 떠가는 어디에 새 파란 냇물 속에 기랑의 모습 잠겼어라 은하수의 많은 물 자갈에 랑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까지 쫓고자 아! 잣나무 가지 높아 서리 모르는 화랑이여.
◈ 모죽지랑가(득오곡) 간봄 그리매 모든 것이 시름이로다. 아담하신 모습에 주름이 지시니 눈 돌이킬 사이에 만나옵기 지 남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올길 쑥구렁에 잘 밤은 있으리
* 선덕여왕 때 수졸공이 기병 3천으로 죽령을 넘어가는데 한 중이 고개 길을 닦고 있었다. 서로 마음에 감동되었다. 한달 쯤 되어 꿈에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죽었다 한다.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라 하고 죽령고개에 장사지냈다 과연 아들은 낳았는데 죽지라 하였으며 화랑이 되어 김유신과 더불어 부사가 되어 삼국 통일에 공을 세웠는데 낭도 득오곡이 향가를 지었다. 4) 음악, 그림 ◈ 음 악 ㅇ 왕산악 ; 악선, 거문고 탄주할 때 현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는 전설. 진이 7현금을 보내왔는데 타는 법을 몰랐으나 국상 왕산악이 본양대로 두고 개량하여 100곡을 지음. ㅇ 신라에 전해지고 옥보고가 지리산에서 거문고 학습 50년, 30곡 지음. ㅇ 우륵 : 대기야(고령) 국왕 가실이 음악 애호 12현의 거문고를 만듦. 신라에 투화 진흥왕때 음악진흥에 기여함. ◈ 그 림 ㅇ 솔거와 황룡사 벽화 : 진흥왕 때. 나무할 때 葛根으로써 바위에 그리고 밭갈 때 호미로 모래에 그렸다. 스승이 없어 천신께 心視하여 신탁 받기를 원하였다. 꿈에 노인이 '나는 신인 단군으로 네 지성에 감동되어 神毫를 주노라' 檀君御眞을 천본에 가깝게 그렸다. 이 규보는 솔거의 단군어진찬에 이르기를 嶺外家家神祖像 當年半是出名工 ( 영밖의 집집이 단군 신조상 보니 당년에 명공이 났나 보다 ) 황룡사 벽화에 새가 날아와 앉으려다 미끄러지다. 해가 오래고 색채가 흐리므로 그 사승이 단청을 입혔더니 새가 다시는 오지 않았다. ◈ 慧昭 진감국사와 쌍계사, 범패, 차 ㅇ 진감선사는 익산의 매우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가 당시로서는 갖기 어려웠던 최(崔)씨 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육두품 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0세 안팎의 나이에 생선장사로 나서 가족을 봉양했다고 한다. 중국행 세공사(歲貢使)에게 뱃사공을 하게 해 달라고 청탁해 입당(入唐)한 것은 804년. 그의 나이 서른 하나였다. 워낙 부모에 대한 효도의 심정이 컸던 탓에 불가에 입문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ㅇ 중국에서 그는 스승인 신감(神鑑) 선사(남종선(南宗禪)의 창시자 마조(馬祖) 도일(道一)의 80대 제자)의 제자가 되어 6년을 보낸 배우고 남종선의 본거지 소림사를 찾아가서 그곳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ㅇ 서기 830년 그는 26년만에 고국 신라로 돌아왔다. 흥덕왕때였다. 흥덕왕대를 가리켜 신라말의 분수령이었다고 말한다. 흥덕왕은 822년 김헌창의 난과 825년 그의 아들 김범문의 난을 연이어 맞은 후 해이해진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개혁정치를 단행했다. 상주(尙州)의 장백사(長栢寺)에 거처를 마련하고 국사(國事)를 돌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진감이라는 말 뒤에는 국사(國師)라는 표현이 붙었다. 흥덕왕 사후 신라 정계에는 836년에서 839년의 만 3년 사이 무려 5명의 임금이 즉위하는 혼린한 시기였다. 그는 미련없이 왕실과의 관계를 끊고 향한 곳은 지리산 쌍계사였다. 민애왕은 그에게 귀의하여������혜소������(慧昭)라는 호를 직접 내리고 쌍계산문의 경비를 지원했다. ㅇ 범패(梵唄)는 불교의 의식(儀式)음악으로 북․징과 함께 혼자 내는 단성(單聲)음이 특징으로, 불가(佛家)에서는 아직도 중요한 위치를 잃지 않고 있다. 현재 국가에서는 이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놓고 범패의 보존과 계승을 강조한다. 불교의 원산지인 인도에서 시작됐지만 중국을 거쳐 일찌감치 국내에도 전파됐다. ㅇ 진감은 범패의 도입자요 대가였다. 진감 이전에도 범패는 있었다. 그가 귀국하기 60년 전인 760년대 이미 범패승이 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그러나 불가에서는 진감을 진정한 범패의 도입자로 보는 이가 많다. ㅇ 887년(진성여왕 1년) 신라 최고의 석학 최치원(崔致遠)이 썼다는 비문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가 혜소에 대한 사료로는 거의 유일하다. 거북등 위에 놓인 비문의 높이는 무려 3.63m. 비신 높이만 2.13m에 폭 1m인 이 비문은 아직도 지리산 쌍계사에 우뚝 솟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 비문에는 진감과 범패에 관해 기록되어있다. ㅇ 쌍계사는 우리 차의 本鄕이다. 차의 종자를 처음 국내에 들여온 인물이 신라 흥덕왕 때의 문신이었던 김대렴(金大廉)이었고, 또 그가 처음 종자를 뿌린 곳이 이곳 쌍계사이기 때문이다. '흥덕왕 3년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씨를 가져 오니 왕은 이를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이같은 주장에 좋은 근거가 된다. 진감이 쌍계사로 들어온 것은 이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후였다. 최치원이 쓴 비명에도 차에 대한 진감의 철학이 담겨 있다. '중국의 차를 공양하는 이가 있으면 돌솥에 불을 때 가루를 만들지 않고 차를 달여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어떠한가를 가리지 않고 다만 배만 적실 뿐이라고 했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싫어함이 다 이같은 것이다.' 1) 아스카(飛鳥)문화 ◈ 고대 일본 ㅇ 한서지리지 : 「낙랑 해중에 왜인이 있었는데 나누어지기 백여국」 ㅇ 후한서 (위서) 왜인전 : 「BC 57년 백여국 왜인국 가운데 奴國 (博多 부근)이 낙랑군을 통하여 후한에 공물을 바치고 광무제로부터 印綬를 받았다」 ㅇ 3C에는 30여국으로 통합, 그 가운데 여왕인 귀미호(鬼彌呼)가 다스리던 사마태(邪馬台)국 이 그 중심 ㅇ 4C (수수께끼의 세기)의 일본 大和정권은 아직 나라 분지를 지배하는 호족 연합정권 (한반도 침략 불가) ◈ 아스카시대 ㅇ 스이코(推古)치세(592~628)중심으로 그 전후시기 불교전래(552)부터 대화개신(645) 까지. 야마토조정의 皇居가 나라 부근 아스카지방 이었기 때문. 쇼토쿠태자 활동과 왕실이 권력을 집중해 나가는 격동기. 불교문화 개화시기. ㅇ 5C 전후 응신 인덕조~ 5. 6C 초의 雄略 欽明朝 시기의 이주민이 직접영향 줌. ㅇ 조정에서는 기술을 가진 이주민 집단을 部民(배노다미)가운데 品部(시나배)라 함. 선진기술을 지닌 이주자를 “ 今來才伎 ”라고 예찬 환영. ※ 종래 短甲 갑옷→桂甲(철판을 기워 만듦)으로 개량, 기마전의 전력 향상 ※ 수혈식 분묘는 횡혈식 석실분으로 바뀜. ◈ 불교 전래와 발전에 기여함. ㅇ 일본서기에 흠명 13년 552년 백제 성왕이 불교를 전함. (일본서기 이전의 기록근거로 538년이 정설임. 모노노배(物部 )씨와 나까도미(中臣)씨는 반대 소가(蘇我)씨의 승리로 수용, 성덕태자는 14세로 소가씨와 가까운 사이 ㅇ 최초의 절 : 飛鳥寺, 백제인 건립. 혜자 (고구려), 혜총 (백제)은 포교에 종사 ㅇ 607년 法隆寺 건립 : 한국의 기술자들에 의해 건립. 두 번째 훌륭한 사원. ㅇ 일본 국보 제1호인 목조 미륵보살반가상 : 경도 大秦寺(廣陵寺), 야스퍼스는「思惟 의 최고 표현」이라고 찬사. 한반도산 소나무로 우리가 만들어 준 것 ㅇ 610 고구려 영양왕이 승 담징과 법정을 파견 담징은 나라 법륭사 금당벽화(推古미술의 꽃 ; 극동 3대 예술-운강석불, 석굴암, 법륭사 금당벽화) 그림. (키 7척 쯤의 여모의 입불상)
◈ 유교의 전파 ㅇ 응신왕 때 아직기 왕인. 6C백제 무령왕이 오경박사 단양이 고안무를 보냄. 경도의 팔판신사 등 이주민들이 그들의 조상신을 제사지내고자 신사를 많이 세움. ㅇ 일본서기 응신왕 15년조 : 「백제왕이 아직기를 보내어 양마 두필을 貢하였다. … 아직기는 또 능히 경전을 읽을 수 있어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이에 왕이 아직기에 게 물어 가로되 만약 그대보다 나은 박사가 또 있느냐고 하였다. 대답하여 가로되 왕인이라고 하는 훌륭한 사람이 있습니다. … “응신왕 15. 6년은 서기 284,285년이나 干支 2주갑을 내린 수정 기년으로 404, 405 년이다. 일본서기 응신기 16년조에 이해에 백제의 아신왕이 훙(薨 ; 죽음)하였다 한 것으로 보아 왕인이 건너간 해를 수정 기년 405년으로 봄 * 일본서기(720) : 백제는 왕(죽음은 훙(薨) ) 왜는 대왕 (죽음은 붕(崩 ; 천자의 죽음에 쓰는 글자, 훙(薨)은 제후의 죽음) 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백제가 일본의 신하국이었다는 증거라고 억지를 부림. 이는 일본서기의 왜곡이다. 무령왕릉 지석에 붕(崩)자가 명기 되어있음.(소진철 교수) * 왕인은 근초고왕 때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일본 제2도시 동북쪽 80리에 왕인 공원이 있다. 매년 9. 28일 왕인제. ※ 602 년 백제 관륵이 역서, 천문 지리 음양서 전함. ※ 612 백제 미마지 가 伎樂舞를 전함. ※ 하쿠호(白鳳)文化 ㅇ 백제 신라 고구려 삼국문화의 영향으로 이룩된 아스카 문화와 당의 문화의 영향으로 일어난 덴뽀오(天平)문화의 과도기에 형성. ㅇ 불상 가람 배치, 탑파와 율령 및 정치 제도면에서 통일신라의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이 시대 대표적인 유물로는 약사사의 삼중탑과 약사 삼존상 등이 유명하다. ◈ 騎馬民族 日本國家征服說과 批判 ☞ 1982. 10. 1 중앙일보 , 김정학 ㅇ 江上波夫(에가미 나오미)의 기마민족설이란 기마민족(북방 아시아의 여러 민족 오 환족, 선비족, 부여 고구려족 등)이 남하하여 가야(임나)를 정복하고 국가를 세웠다. ㅇ 이 설은 종래 일본민족은 일본열도에서 기원 발전하여 大和國家를 건설하였다는 통념을 뒤집고 황국주의 자존심을 손상시켰으나 이것 역시 잔재주를 부리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ㅇ 비 판 1) 북방의 기마민족이 기원 후에 가야를 정복하여 국가를 세운 일이 없다. 2) 가야의 남쪽에 있었다는 왜는 위지 한전의「南與倭接」기사를 잘못 해독한 것. 3) 그 왜가 주도하여 북구주의 崇神왕조를 세우고 나아가서는 대화국가를 건설하였다는 것은 결국 일본국가는 왜족이 건설했다는 황국주의 사관에 귀착한다. 奈良, 平安 시대 ㅇ 7C 후반 백제 고구려의 멸망시 이주민 (최대의 이주민 물결) ㅇ 8C 후반~9C 통일 신라 내부의 사회적 모순에 따라 다시 이주 집단. ㅇ 663년 일의 백제 구원군이 백촌강 싸움서 패배. 665 백제인 관위 수여. 후대(70여명) 大化改新(645) 후의 왕조의 내실화 도모를 위한 일련의 정책 ㅇ 8C일본→ 신라 ; 공적 사절 15회, 신라→ 일본 ; 공적 사절은 21회 그러나 공적 외교 관계는 779년 이후 끊어짐. 그 뒤의 관계는 규슈의 大宰府중심의 사적 교섭과 무역관계(장보고 등, 圓仁의 입당 구법 순례기에 잘 나타남) * 大宰府(다자이후) : 백제가 망하자 齊明여왕의 뜻을 받들어 아들 중대형(뒤 천지왕)이 하카다에 전진 기지 구축, 백제 구원군 편성, 백촌강 대패후 신라군이 처들어올 것을 걱정하여 백제 유민의 기술로 산성을 만들고 大宰府는 그 정청이다. ㅇ 일본이 신라와 소원해진 이유 : 율령 체제의 강화를 급선무로 하고 있던 8C 일정부가 국내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지배 체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신라에의 출병계획까지도 세우는 등 긴장관계를 조성해 갔기떄문이다. 834년 이후 신라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정책으로 전환. 이로 인해 7백명의 신라인 반란(820) * 나라를 야마토 조정이 도읍으로 삼은 것은 710년 우리말의 「나라, 국가」라는 뜻 794년 수도를 헤이안으로 옮김. ◈ 日국보「백제관음상」「목조반가사유상」 ㅇ 일본의 대표적 국보인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 '백제관음상'과 교토(京都) 고류지(廣隆寺) '木造 반가사유상'이들 두 목조불상은 삼국시대 때 한반도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관음상은 이름에 백제가 들어있다는 점에서, 반가사유상은 얼굴과 전체적인 모습이 우리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83호)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ㅇ <백제관음상>은 대표적 백제불상인 서산 마애삼존불 왼쪽 협시보살의 얼굴과 비슷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실은 다르다. 유달리 길고 늘씬한 몸매에 길쭉한 얼굴은 백제풍이라 하기 어렵다. 오히려 중국 수(隋)나라 불상에 가까운 편. 강우방 국립 경주 박물관장(불교미술사)은 '이 불상의 이름은 17세기 이후인 에도(江戶)시대에 붙여진 것으로 백제라는 이름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ㅇ <목조 반가사유상>은 7세기 신라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주장의 근거는 나무 종류와 제작 방법, 관련 기록 등. 일본 목조불상 대부분의 재료가 히노키(檜․노송나무)인데 반해 이 반가상은 당시 신라에 많이 자라던 적송(赤松)이라는 점. 일본 목조불상이 대개 신체의 여러 부분을 따로 만들어 조립한 반면 이것은 하나의 통나무를 깎아서 만들었기에 일본양식과 다르다는 점. 또한 일본서기에 .신라 사신이 불상1구와 금탑 사리 등을 고류지에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불상이 바로 이 목조반가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적송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도 있음이 밝혀졌다. 삼국시대 목조불상이 국내에 전혀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즉 비교할 대상이 없는데도 재질과 제작방법이 일본의 보통 양식과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신라 것이라 보는 것은 무리다. 또한 일본서기에 나오는 불상이 바로 이 목조반가상이라는 주장도 지나친 추론이다. ㅇ 일본의 목조불상이 백제 신라 등 삼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엄연한 사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삼국시대 불상이라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들 두 불상도 '백제 신라의 영향을 받은 일본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학문세계에서 국수주의보다는 지적 엄격성이 우선돼야 함을 일깨워주는 대목이 아닐까. 또한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 일본 국보1호라는 것도 잘못 알려진 사실. 우리와 달리 일본 국보엔 지정번호가 없다.
2) 일본과 백제 ◈ 백제의 왜국 통치 300년 ☞ 1992.11 조선일보 尹營植 ㅇ 백제는 4C 근초고왕 시대부터 시작해서 7C 백제가 망할 때까지 무려 3백년 동안 왜 열도를 개척 통치하며, 원시 왜인 사회를 문명 국가로 성장시킴. ㅇ고사기와 일본서기 등은 한반도와 왜 열도의 지배 권력이 분리되던 순간에 편찬되기 시작함. 종주본국이 사라진 후 독자적인 새 국가로 재출발하면서 그들 나름대로 역사의 정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고대사의 진실을 많이 은폐하였다. ㅇ 일본 왕실과 지배층의 계보를 정리한「신찬성씨록」을 분석하면 고대 왜열도의 역사의 실체가 밝혀진다. ㅇ 왜 열도에 정착한 백제계 후손들이 본국의 문화를 수입하기 위해 왕인 박사를 모셔감. 일본인들은 거꾸로 왜가 한반도 남부지방을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들고나와 진실을 호도함.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왜인…」의 신묘년은 진사왕과 아신왕 (침류왕 태자)의 숙질간 권력투쟁이 일어나던 시기. 당시 왜열도에 보내졌던 아신왕 추종세력이 한반도로 건너와 진사왕을 제거한 것. 신묘년 왜는 왜인이 아니고 왜 열도에 정착한 왜 통합국가를 운영했던 한인. o 천황가는 物部系, 大伴系로 크게 나눠지고 物部系의 가계는 근초고왕에서부터 시작된다. 신묘년에 건너온 武內宿禰니라는 백제계 집안이 천무의 선조. ※참고할 만한 책 : 洪元卓교수(서울대 국제경제학)「백제와 大和 日本의 起源」1994. 구다라 인터내셔널간 ◈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 기원설 ㅇ 사기들은 비류백제의 건국과 흥망에 관한 것은 빼버리고 온조백제만을 가지고 백제사를 기술하여 왔다. 온조백제의 前半史가 비류백제였으며 뒷날 온조계의 승리로 비류백제사가 말살된 채 온조백제에 통합 흡수되었을 뿐 비류백제는 한 때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멀리 왜에까지 진출했던 해상왕국이었다. ㅇ 일찍이 일본에 진출하여 그 곳에 고대 국가를 건설한 사람들이 백제인 인데 바로 비류백제인 이며 일본에 세운 왕조는 비류백제의 망명정권이었다. *百濟 = 百家濟海 ; 바다를 널리 지배했다는 뜻. 왜국 뿐 아니라 중국의 산동지방이나 양자강 아귀까지 영토를 넓혀 국력을 과시. ◈ 고대 日本 史書 편찬과 백제인의 참여 ㅇ 고대 일본의 문화는 7C경까지는 거의 전부가 한반도로부터의 이주민에 힘입은 것이다. 일본이 중국의 문화를 직접 받아들이게 된 것은 대체로 7C후반이며 주로 8C경 이후이다. 수당에 사신 유학생을 보낸 뒤부터이다. 중화사상에 물들어 일본적으로 변형하여 皇國主義思想이 된 것이다. 일본서기가 편찬 된 것이 8C초 이므로 황국주의 사상의 표현을 많이 볼 수 있다. 한반도의 여러 나라를 일본의 속국인양 왜곡함. ㅇ 일본서기의 편찬에는 백제계 사관들이 참여하였으면서 왜 한반도에 대하여 왜곡된 사관이 나왔나? 백제에서 건너간 그들 이민은 열 세대를 지나면서 완전히 일본인이 된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민족적 자각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고 歸化뒤에 쓴 탓이다. ㅇ 최인호의 「잃어버린 왕국」을 참고하면 계백장군 심복 무장 多臣夫의 아내 온사녀는 백제 난민 속에 섞여 왜로 탈출하는 배속에서 죽지만 그의 4세 어린 아들은 일본에 있는 할아버지를 찾아간다. 이 아이가 뒤의 太安萬呂(오오노야스마로)로서 1979년 나라에서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는 역사를 송습하던 여인으로부터 받아 적어 <고사기>(712)를 저술하였는데 역사라기보다 신화 등 문학적 설화집이었다. 그는 <일본서기> (720 ; 지통여왕까지)의 편찬에도 참여함. 고사기가 한반도와 단절하고 선생 일본의 자존심을 만족시켜주지 못하였으므로 천무왕의 명으로 다시 시도한 것이 <일본서기>이다. ◈ 日本 天智王의 新百濟 꿈 ☞ 최인호 소설<잃어버린 왕국> 참고 ㅇ 백제가 망하자 일본의 齊明여왕은 백제를 돕기 위해 나니와에서 주꾸시(큐슈의 후쿠오카)로 임시 수도를 옮김. 태자 中大兄(나까노 오오에)과 풍(의자왕 왕자)을 불러 자신의 출생의 비밀(백제 무왕의 딸 의자왕 여동생)을 밝히고 의형제를 맺게 하고 백제부흥을 당부한 다음 천도후 곧 죽는다. *장수왕의 침략으로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하고 한성 백제인이 웅진으로 남하하거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의 백제인 曾我(소가)는 불교세력으로 배불파 物部를 누르고 정권을 장악(성덕태자시)하고 최초의 절 비조사 등 불교문화를 보급, 100년 세도를 누려오다 中大兄(나까노 오오에), 풍, 나까도미에 의해 무너졌다. ㅇ 中大兄은 백제 구원군을 보냈으나 실패하고 동맹을 맺으려 했던 고구려가 망하자 오오미(近江 ; 백제인 집단 거주지)라는 오지로 천도, 일본 속의 신 백제를 부흥하려하였다. 中大兄은 곧 천지왕이며 국호를 日本이라 함(668) *일본이란 말은 607년 성덕태자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해뜨는 곳 천자가 해지는 곳 천자에게 편지를 보내니 …’ 라 한데서 유래함. ㅇ 천지왕은 동생 대해인의 애인 누가다(額田)을 빼앗고, 대해인을 달래기 위해 아들 대우왕자와 대해인의 딸(대해인과 액전사이의 딸)과 결혼시켰으나 천도 4년만에 대해인의 딸이 죽자 대우왕자와 대해인 숙질간에 정권다툼 (壬申의 난)이 일어났다. 세다의 다리 전에서 숙부인 대해인이 승리하여 오오미가 초토화되고 신 백제의 꿈은 무너졌다. 대해인은 수도를 飛鳥로 옮기고 天武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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