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6:1~12)
지난번 다윗이 사울을 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한 사울을 다윗이 존중하며 살려주었고
당시 사울이 '내 아들'이라는 달콤한 언어를 구사하며
용서를 구하던 순간이 분명이 있었음에도
오늘 본문에서 다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쫓는다.
자그마치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시도하는 일이다.
만약 3백만, 3억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다윗을 죽이려 한다면 성공할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사울은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고
성장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다수 목격하였을 것이며
본인이 직접 다윗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위험 속에서
하나님의 이끄심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깨닫고 고백했음에도
여전히 물량공세 등의 세속적 방법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에 절대 부합되지 않는 일을 고집스럽게 행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길이 아닌 세속의 길을 걷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길을 얼마나 지나왔는가 하면,
이미 꽤 지나와서 이젠 그 차이의 식별이 현저한 수준까지 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세속의 길을 접고 옳은 길로 다시 거슬러 갈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세상의 표현으로는 '회복탄력성'이 거의 없어진 것과 같은 상황이랄까?
예전에 물리를 공부할 때
용수철의 탄성계수를 학습했던 기억이 있다.
어느 순간까지는 일정한 수치를 계산할 수 있지만
용수철의 탄성이 붕괴되어 기능을 하지 못하는 순간부터는
계수를 산출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마치 그런 현상처럼
이제 사울의 세속, 악을 쫓는 상태가 심각하여
괴물의 지경에 이르렀고, 회복탄력성을 거의 없다.
그래서 한 번의 큰 일을 겪었음에도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말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거나 다윗의 위상을 깨닫는 것 등은
아직은 영적 존재로서 남은 이성적 이해를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고
사탄의 영약한 행위의 일환일 수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하나도 실체화 될 수 없는 것이라 의미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뜻을 쫓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 영적 존재의 수순은 이러하다.
반면,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 드는 세상 왕의 위협에 몸서리치며
공포에 휩싸일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번 그러한 대상을 죽일 기회가 있었어도
하나님이 기름부으심을 받은 이로써 존중하는 일을 하였고
그런 용서에도 불구하고
입술로는 다시 안 그럴 것처럼 표현한 사울이
다시 죽이려 접근하였지만, 이번에도 살려준다.
다윗이 얼마나 깊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만 사울에게 이러한 상황을 느끼도록
자신들이 왔었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조처한다.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고 스스로 자신의 향후 스탠스를 '결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너무 닮아 있다.
이러한 행동이 완벽하게 조성되도록
하나님은 사울과 부하들이 깊은 잠에 빠지도록 지원하신다.
하나님과 사울이 매우 정교하게 콜라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깨닫게 한다.
사울의 상태와 전혀 다른 하나님의 길을 쫓는 자의 모습이다.
오늘 묵상에서이에서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의 해법을 설명한다.
첫 번째는 감정을 쏟아 놓는 일이다
두 번째는 법에 호소(고소)하는 일이다.
그러나 첫 번째는 아무런 실제적 일의 해결을 기대할 수 없고
두 번째는 100% 공의로운 심판을 기대할 수 없다.
결국 완전한 해결은 하나님께 그 일을 가져가는 것이다.
물론 1,2번의 일도 하나님이 미리 장치하신 솔루션 중의 하나이기에
충분히 그렇게 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관이시고 우리가 헤아리기는 어려울 수는 있어도
분명하게 본질적으로 그 일을 해결하신다. 이것은 믿음의 영역이나
인내로 기다리면 그 깊은 뜻과 행정을 발견하게 된다.
발견하게 될 때에는 깊은 은혜의 지경에 이를 것이다.
오늘 다윗이 그렇게 했다.
보통은 자신의 칼로 사울을 죽이는 방법을 택하는 것일텐데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의 해법을 거둔다.
이래서 다윗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