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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차 2010년 1월 산성탐방 안내
일시:2010년 1월 18일 월요일 오전 9시
탐방장소: (천안)위례성-천흥사지-만일사-사산성-직산형관아-직산향교-백제토성
준비물: 점심(김밥 등 도시락), 수첩과 필기도구, 나침반, 카메라, 줄자, 휴대용 낫,
신청: 참가하실 분들은 미리 댓글로 신청을 바랍니다. 차량문제로 진행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탐방코스 안내
위례성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직산 위례성이라고 불리고 있는 이곳은 그 동안 일부 학자들에 의해 부정된 바 있었던 백제의 첫 도읍지로 최근에 와서 재조명 되고 있다.
위례산성은 위례성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축성된 산성이다. 직산의 구호가 위례산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례성의 성민을 전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산성이다.
백제의 시조 온조가 만주지방의 고구려를 떠나 이곳 직산까지 와서 처음으로 도읍을 정하고 개국한 곳은 현재의 직산읍, 성환읍, 입장면, 성거지방이고, 위례산성을 난시소용의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보면 1,690척의 성이 있고, 우물이 하나 있다고 전해지고 있고 온조왕 13년(BC 5)에 이곳으로 부터 경기도 광주지방으로 천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성거산성
고려 태조는 직산의 수혈원에 들렸다가 동쪽의 성거산을 바라보니 오색이 영롱하여 그의 아름다움을 보고 영험이 있는 산이라 믿으며 제사를 지내도록 했으며, 산 이름을 성거산이라 칭했다는 직산현지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은 군사기지로 되어 있어 확실한 조사는 할 수 없다.
백제는 산성이나 읍성을 축조할 때 반드시 익성을 축조하는 축성법을 사용하였다. 고로 성거산성은 위례산성의 익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본다면, 성거산성도 삼국시대 때 축성된 것이 분명하다. 이 곳 산성은 군사통신기지 설치 당시에 성곽이 많이 파괴되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천흥사지
당간지주
두 지주가 60c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 있으며, 이중 기단위에 당간과 지주를 받고 있다.
기단부 안상을 조각 장식한 수법이나 양지주 각면에 선문을 조각해 낸 것과 치석한 조법 등의 각부 양식수법은 전체적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형태에서 퇴화한 일면을 보이고 있어 조성 연대를 고려초기로 보게 한다.
특히, 이 곳 천흥사지에서 출토된 성거산 천흥사 동종의 명문에 의하면 당간지주도 같은 시대에 사찰을 창건하면서 같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볼 때, 건립 연대는 현종연간인 서기 1010년 전후일 것으로 본다.
5층석탑
이 석탑은 신라시대 석탑양식을 이어 받은 고려시대의 5층석탑이다. 기단은 이중기단을 갖추었는데 하층기간은 지대석면석으로 구성되었으며,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없이 1면에 7구씩의 안상을 새겼다.
상층기간의 면석에는 4개의 우주만이 새겨져 있다. 탑신부에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체감률은 작은 편이다.
옥개석은 평박하고 낙수면은 경사가 완면하며 전각의 반전이 큰 편이다. 현재 상륜부는 전부 없어서 원래의 상태를 알 수 없으나, 석탑 자체에서 나타나는 형식과 양식에서는 수려한 수법을 보이고 있고, 양식적 특징을 갖춘 탑으로 천흥사 동종(1010)과 시대를 같이 하는 고려초기의 탑이다.
천흥사 동종
구성요소로 볼 때 신라종의 특징인 단용, 음관, 상대, 하대, 유두, 당좌 및 비천상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대표적인 고려 전기종으로서 외형상으로는 신라종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유사점이 많으나 구성이 간소화되었고, 위패형의 명문곽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명문에 의하면, 1010년에 주성된 종임을 알 수 있고 규모는 종고 1,676mm, 구경 955mm, 두께 88mm로 현존하는 고려 전기종 중에서 최대의 종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금속공예실에 전시되고 있는 이 종은 천흥사가 폐사된 후, 어떤 이유인지 남한산성에 옮겨져 사용되던 것을 광주군청으로, 다시 덕수궁 미술관에 있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만일사
법당
이 사찰은 법당에 안장된 동제관음보살상의 배면에 통화 20년이라는 글로 보아 고려 목종 5년(1002)경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법당은 1970년에 개축한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이고 전통 건축보다는 형식화된 구조이다.
해체복원시 본래의 주춧돌 등 부재를 묻어 버려 아쉬움이 있다.
1982.8.13일 법당 앞마당에서 삼국시대 것으로 보이는 금동보살입상이 발견되어 80만원의 보상금을 받고 귀속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마애불
마애여래좌상은 법당 뒤의 자연암반에 돋을새김한 것이나 원래 미완성이고 또한 마멸이 심하여 윤곽을 알아보기 어렵다.
머리 부분은 장방형이고, 얼굴의 윤곽은 거의 알아볼 수 없으며 두 어깨는 거의 수평으로 당당하게 보인다.
수인이나 법의 등도 알아보기 어려우나 통견으로 보이며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앞부분과 두부 위쪽 양편에 흠이 있어 보호각을 설치했던 듯싶다.
석불좌상
이 석불좌상은 만일사 관음전 뒤편 축대 위에 작은 자연동굴 속 암벽에 조각되어 있다.
동굴 안은 매우 좁아 겨우 예불을 할 수 있는 정도이며 천정은 평평하게 되었고 만수가 되고 있다.
좌불은 높이 164cm로 별로 크지 않으나 대좌 밑에서 올려다보면 대형같이 느껴진다. 남북을 향해 있고, 불두에는 육계가 없으나 매우 둥글게 되어 있고, 이마에는 흰 유리구슬로 백로를 끼웠다.
목에는 삼도가 새겨져 있으나 목 부분 이상은 시멘트로 새로 만들어서 불두가 신체에 비해 좀 크다. 법의는 우견편으로 깊게 음각되었다.
발은 결가부좌하였는데 오른손은 무릎 위로 내려 강마촉지를 결하고 왼손은 왼발 위에 얹어 놓았다. 무릎사이의 너비는 약 1m이다. 원래 불두를 잃은 것이 아쉽다.
5층석탑
본래 마당에 있던 것을 1970년 법당 해체 복원시 지금 위치에 옮겼다.
기단부는 하대중석, 상대중석, 상대갑석으로 되었으며, 하대중석에는 우주와 안상이 희미하게 되었고, 상대갑석에는 앙연문이 조각되어 있다.
5층의 몸돌 4면마다 여래좌상이 부조되어 있는데 1층 몸돌은 옮길 때 잘못된 듯 거꾸로 되었다. 지붕돌은 받침이 2단이고 반전이 있다. 전체 높이는 227cm로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천성사명 금동보살입상
금동불의 높이는 127cm이고 연화대좌의 높이는 34cm이다. 어깨너비는 33cm이고 팔의 깊이는 41cm이다.
오른손에 감로수 병을 들고 있는데 감로수병의 크기는 16cm이다.
왼손에는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는 청심환을 들고 있고 관의 높이는 13cm로 화려하며 관머리에 아미타상이 있다.
불상의 배변 아래쪽에 통화 20년 천흥사라는 각자로 보아 본 관음상의 제작연대는 1002년(고려목종5)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중국 요의 침입에 시달렸던 고려가 외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불사를 일으켜 천흥사를 창건하고 이 절에 봉안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땅에 묻혔던 것을 일제 때 사금을 채취하던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발굴되어 왜인들이 매입 보관하였다가 2차대전 말기에 철물 공출할 때 공출되었던 것을, 주지 임흥군 화상이 거두어 지금의 만일사에 봉안되었다.
직산 사산성
사산성은 성환읍에서 동쪽으로 약 6km거리에 있는 직산관아와 직산향교가 소재한 옛 직산고을의 북쪽에 있는 176m의 성산의 정상부분을 둘러쌓은 백제시대의 성으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사산성은 토성이며 둘레가 2,947척이며 성안에 우물터가 1개소가 있다고 전하나 찾을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기록은 둘레가 약 700여 칸이라고 하였다.
사산성의 규모는 평면형으로 보았을 때 동서길이 300m, 남북길이 150m가 가장 높은 곳에 이르러 협소한 평탄지가 있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비교적 완만하게 경사된 북쪽사면을 포용해서 성벽이 구축되었으며, 성벽의 구조는 곳에 따라 약간의 석괴를 혼축한 부분이 잔존하나 대부분이 토축에 의존하였다. 추정서문지에서 북문지에 이르는 성벽은 1.2-1.5m이다.
또한, 수구의 좌우에 연결된 성벽은 계곡의 어귀에 가까운 해발 85m의 평지를 동서로 통과하였으며, 특히 수구로 부터 서반주는 형태가 완연하게 잔존하고 있으며 1985년 충남대학교에서 실시한 일부 발굴조사에서 문지석과 화살촉, 토기편,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직산현관아
이 관아는 경기와 호서지방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어 호서계수아문이라 쓴 현액을 아문에 달았다. 아문은 중층 누문 형식으로 초익공계의 팔작집인데 아래층에는 간마다 판문을 달아 드나들게 하였고 위층은 마루를 깔아 누로 사용하게 하였다.
아문을 들어서면 한단 높은 터에 솟을대문 행랑채가 있고 이를 들어서면 동헌이 된다. 동헌은 정면 7칸 측면1칸 반의 팔작집이지만, 오랫동안 면사무소로 사용되어 많은 부분이 변형되었다.
동헌 뒤에는 현감의 살림채인 내동헌이 있는데 이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으로 민도리집 양식의 팔작집이다. 이 또한 변형된 곳이 많다. 91년에 삼은리에 있던 객사를 관아 앞에 있던 창고를 헐어내고 이전하여 세웠다.
직산향교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전란 후에 다시 세워져 몇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였다.
주 건물인 대성전이 5칸으로 인근의 향교보다 큰 건물이다.
명륜당은 팔작으로 5칸이며 서쪽에 세워졌던 서재는 없어지고 동재만 남아 있으나, 1997년 서재를 복원하고 명륜당의 내삼문은 평열문으로 되었고 동서로 협문이 한칸씩 설치되었다.
외삼문은 솟을문으로 되었다. 향교에 배향된 인물과 제사 시기는 다른 향교와 같다. 동서묘가 없으며 위패는 모두 대성전에 모셨다. 경서류와 청금록, 선생안, 선안, 절목, 노비안, 전답문기 등 많은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백석동 선사유적 및 백제토성
백제토성은 천안시에서 조성한 천안 제3산업단지의 용수저장 시설지구에 위치한, 표고 120m의 산릉을 정점으로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구릉은 동향으로 지맥을 형성하고, 구릉 정상부가 돌출형식으로 솟아 있는 지역으로, 96년 3월부터 5월까지 공주대학교 박물관 발굴조사팀의 조사결과 확인된 유적으로 백제시대의 토성 및 토성부대시설과 토성내에 잔존한 무문토기 주거지 3기가 있다.
토성의 둘레는 약 260m의 규모이며 축조는 풍화암반인 경사면을 절단하여 판축을 위한 지반을 정비한 후, 시설한 영정주공 및 영정주혼적이 120-150cm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고 판축의 토성에서 직선 5-6m의 거리에 지반을 굴착한 의호가 있다.
성내의 시설은 토성과 관련된 수혈 주거지 3기와 성내의 정상 및 북단에 용수저장시설로 추정할 수 있는 340cm, 깊이 160cm의 구덩이 2개가 있다. 이외에 서의 남단에는 요지와 관련된 유구로 추정되는 불에 탄층이 있기도 하다.
첫댓글 어디에서 모이는지요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신영주, 강은주 참석합니다.
윤기옥, 유인호, 송순자 참석해요.
참석합니다(조동문)
이종세 유효득 참석
인원 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