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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새로운 피조물의 일상”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말씀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새 것을 말합니다(17절). 새 것, 반대는 본문에서는 이전 것이라고 했지만 새 것 반대는 옛 것? 낡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예수님 믿는 우리를 새 것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낡은 것인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새 것입니다. 새 것으로 여기십니다. 왜 새 것입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씻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성령으로 우리 영을 다시 회복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였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살아났습니다. 자다가 깨어난 것이 아니라 죽었던 우리 영이 다시 그리스도의 생명을 불어넣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의 삶은, 일상은 어떠합니까? 어떠해야합니까? 당연히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의식하고 가장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다르게 14절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새 피조물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는 자입니다. ‘강권하다’는 말은 ‘쉬네케이’인데 ‘휘어잡다’는 뜻이기도 하고 ‘지배하다’, ‘강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끼어서 꿈쩍도 하지 못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얼마나 그 사랑에 감동되었으면 끼어서 꿈쩍도 하지 못한다고 했을까요. 너무 무서운 일을 보고 눌려서 몸을 가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눌려 걸음을 뗄 수조차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누구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여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붙들려 그 사랑을 전하는 것을 일평생 사명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 사랑을 알고 나서 그가 평생에 간직해오던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왜 그런 귀중품을, 보물을 배설물로 여겼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 귀한 보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듯 학자는 자신의 학문에 대한 긍지가 대단합니다. 바울은 그런 긍지와 자부심마저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 고상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나를 강권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무엇에 잡혀 살아가는가?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들고 근육을 움직여 일어서게 만드는 근원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돈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명예나 권력 때문일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출세하려고. 성공하려고.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달라야 합니다. 나를 기동하게 하는 힘이 그들과 다르지 않다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존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하는 목적이 똑같고 돈을 버는 목적이 똑같고 공부하고 공부시키는 목적이 똑같다면 그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매여 그 사랑이 우리를 일으키고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고 그 사랑이 우리를 이끄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함이 우리의 목적이어야 하고 이유여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입니다.
지난해 다니엘 기도회를 통해 좀 더 알려진 고승준이라는 목사님이 계신데, 이분은 서울대 수학과를 나와서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은혜를 받아 신학공부를 다시 결심합니다. 수학박사 학위를 받고 수학교수가 되어야 할 분이 신학대를 다시 가서 어린 학생들과 신학공부를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순종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이용규 선교사도 역시 서울대 역사학과를 나와서 하바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도 몽골 선교사로 자원하면서 그가 쓴 책이 있습니다. “내려놓음”입니다. 그 다음에 나온 책은 “더 내려놓음”입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이 나를 위해 내려놓은 것은 이보다 더 위대하고 크다고 합니다. 왜 이러한 일이 가능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기 때문입니다. 롬5:3에 표현대로는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 부은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져서 충만해지길, 날마다 인도받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다고 하던 일 그만두고 신학 공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만나는 사람에게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답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늘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올해의 표어를 실천하려면 그리스도의 사랑에 먼저 강권하게 붙들려야 가능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표어가 정말 힘들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유익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전13:2,3에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라고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리고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열매도 맺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 3:14-15에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가게 된 증거가 사랑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을 얻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것인데 거듭남의 증거도 결국 형제사랑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사랑이 아니라 더 나아가 미워한다면 이는 살인과 같으니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너희도 다 아는 바가 아니냐? 라고 합니다. 사랑은 노랫말처럼 바보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랑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사랑의 분량이 곧 주님을 닮은 분량입니다. 사랑이 나타나는 분량이 곧 주님이 내 안에서 나타나고 영광을 받으시는 분량입니다.
세상일들도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고 발전해 감을 보게 됩니다. 즉 사랑의 힘으로, 사랑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리프트처럼 들어 올리고 감당하는 힘입니다. 만일 우리 안에 사랑이 있으면 제일 즐거운 게 사랑함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제일 어려운 게 또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미움과 시기, 질투로 인해 일어나는 일은 상처와 아픔, 고통일 뿐이지만 그러나 만일 사랑으로 일어나는 일은 그 결과도 아름답고 감동이 있고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미움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나, 탐욕으로 일어나는 일들은 결과도 비참합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증거하는 분명한 사실들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행한 일들은 기쁨과 감격을 선사합니다.
우리 역사에만 보더라도 고려 말에 문익점이 목화씨 몇 알을 붓통에 넣어 와서 산청에 심어 목화제배에 성공하여 솜이불을 보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마 우리 의류 역사에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그야말로 의류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문익점이 혼자 따뜻하게 솜이불 덮고 자려고 그렇게 목숨을 걸고 목화씨를 가지고 왔을까요? 이 또한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허준이 평생을 바쳐 전국의 약재를 연구하여 동의보감을 남긴 것도 환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요한 교수가 119 엠뷸런스를 개발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든 것도 사랑의 힘입니다. 잘못된 길을 안내한 지도를 따라가다 얼어 죽은 아버지와 같은 그런 일을 다른 사람들이 당하지 않게 해야겠다는 결심에서 정확한 지도를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또한 사랑 아닙니까.
링컨대통령이 노예를 해방시킨 것도 다름 아닌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릴 때 시장에서 흑인 어머니와 딸이 서로 다른 주인에게 팔려가면서 통곡하던 그 눈물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강도만난 자의 이웃’도 그 사마리아 사람은 덜 바빠서 도와준 게 아닙니다. 가진 것이 풍족해서도 아닙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비를 베풀려는 사랑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사와 레위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신 것은 너희도 사랑의 사람이 되라고 한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가난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은 새마을운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제안하고 맡았던 분이 류태영박사입니다. 류박사는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어렵게 공부하면서 덴마크가 농업으로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유학가려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편지를 쓰라는 지혜를 주십니다. 덴마크 코펜하겐, 프레드릭 9세 앞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두 달 뒤에 덴마크 외무성에서 답이 왔습니다. 합격서와 장학생선발, 비행기표까지 제공하면서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오라고 합니다. 류박사가 나중에 외무성국장을 찾아가서 왜 머슴의 아들인 나에게 이런 특혜를 제공해주는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뭐하고 했을까요? 당신은 당신만 잘 살려고 공부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나라와 국민을 잘 살게 하고 싶다는 편지에 우리가 감동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자신만 배불리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 살게 하려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박대통령이 유박사를 청와대에 초청해서 농촌을 살릴 수 있는 계획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당장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그게 새마을운동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사랑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멸망 받는 것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과 큰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보내주셔서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엡2:4에서 이것을 정확히 말씀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눅1:77이하에도 말씀합니다. “주의 백성에게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합니다.
사랑은 이처럼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결국 위대한 일을 하게 합니다. 위대한 일을 하니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죽음보다 강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 손과 발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선한 행동의 근원이 됩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가장 늦게 내리는 사람은 선장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세월호를 통해 보았지 않습니까.
오늘 바울도 말씀합니다. 이 사랑이 나를 강권하고 있다고. 그리고 이 사랑이 있는 자들의 삶은 곧 화목케 하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18,19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버려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에게도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합니다. 곧 화목케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고 했습니다. 화목이 어디서 옵니까? 화목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사랑이 나타나고 증거될 때 화목이라는 결과가 자연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화목이 오래 지속되면 그게 평화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게 해야 합니다. 그 사랑으로 화목을 이루고 진정한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한 해, 그런 교회와 가정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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