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특별새벽기도회 20번째 강해입니다. 「맡겨진 일을 해내고야 마는 사람의 특징」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에베소의 장로들과 이별하는 시간입니다. 새로운 사역을 위해서 예루살렘과 로마로 떠나가는 그런 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멋진 이별의 장면이 사도행전 20장에 나오는 장면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사도바울이 이 고별설교를 통해서 맡겨진 일을 해내고야 마는 사람의 특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사도바울의 이 삶의 태도를 본받아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잘 감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게 되었는가, 세 가지로 분석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안주하지 않는 삶을 살았고 두 번째는 원리를 가지고 사는 삶이었고 세 번째는 눈물이 있는 삶이었습니다.
1. 안주하지 않는 삶
첫 번째 사도바울은 안주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에베소에서 크나큰 부흥과 열매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흥과 열매를 맛보게 되면 안주하게 됩니다. 이 정도면 좋다, 이 정도면 내가 충분히 사역을 감당했다고 생각할 터인데 사도바울은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22절부터 보겠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내 앞에 위험이 있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에베소에 있는 많은 성도들과 깊은 정이 들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로운 사명을 향해서 나아간다, 이것이 바울의 태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정말로 변화를 싫어합니다. 익숙한 것을 바꾸면 굉장히 불편해 합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자기 눈에 맞는 안경 하나 깨지고 난 다음에 새로 바꾸면 똑같이 도수인데도 불구하고 초점이 바뀌어서 그런지 약간 어지러움 증상이 있습니다. 자기 눈에 맞는 안경도 바꿀 때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새로운 환경, 새로운 도전이 온다고 할 때의 거부감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룡이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멸종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안주하면 멸종됩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니까 우리가 잘 아는 핍박이 나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너무 교제권이 탄탄하고 따뜻한 모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흩어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 안주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예루살렘교회에 준 축복이 무엇입니까? 핍박이었습니다. 핍박을 통해서 흩어버리니까 그들이 나가서 복음 증거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장의 한계를 어떤 때는 핍박이라는 매를 통해서 깨 버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의 모든 도전들, 고난들을 어려움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찌 보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궤도를 바꾸는 뜻일 수도 있고 내 성장의 한계를 깨버리는 하나님의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익숙한 것과 결별해야 합니다. 새로운 교제권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믿고 난 다음에 계속해서 교제권이 똑같고 내 사역의 내용이 똑같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축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더 넓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새로운 교제권을 향해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안주하지 않는 것이 커가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특징이 있습니다. 1년마다 전체 교인들을 다 섞어버렸습니다. reshuffle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우리교회만의 특징인 항상 개척교회 같은 싱싱함이 있었습니다. 절대 텃새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1년마다 섞어버렸으니까요. 항상 새로운 교회에 온 느낌을 받습니다. 1년 동안 정든 사람들과 헤어지는 아픔도 있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새로 팀을 바꾸고 난 다음에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커플이 30-40% 증가해 버립니다. 새로운 사람 만날 수 있고 기회의 문이 열리고 기회의 교제권이 넓어집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 20-30명밖에 더 되겠습니까? 매년마다 이렇게 섞는 것을 통해서 교회가 싱싱해지고 안주하지 않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진이 너무 커졌습니다. 2년 가까이 나누지 않았는데 다시 한번 전체를 다 섞어버리는 그런 일을 하려고 합니다. 마음에 저항이 있고, 이렇게 좋은 교제권을 왜 섞을까 하는 사람도 있고, 또 ‘그날이 빨리 오기를……’ 하면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것을 우리 교회의 하나의 특징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안주하지 않는 교회이다, 교제권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교회가 되겠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복음의 원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들어가고 복음이 들어가면 누구나 다 개척자가 됩니다. 개혁자가 됩니다. 새로운 사람에 대해서 저항감이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맡겨진 모든 일을 잘 감당하는 능력의 종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피 자체를 새롭게 도전하는 성령의 뜨거운 피로 변화되는 믿음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2. 원리를 가지고 사는 삶
두 번째 사도바울은 원리를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대응하고 저 상황에서는 저렇게 대응하는 인생이 아니라 원리중심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대처가 탁월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사도바울은 자기가 에베소를 떠나고 난 다음에 흉악한 이리 같은 자들이 와서 양떼를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헛된 말로 미혹하는 자가 나올 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원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상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서 마귀의 시험이 있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원리입니다. 우리가 바다에서 항해를 할 때 파도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면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파도치는 것은 원리입니다. 풍랑이 오는 것도 원리입니다. 6월말에 비가 오고 7월에 장마 오는 것은 원리입니다. 이상하게 여깁니까? 제주도에 갈 때 비올 것을 왜 걱정합니까? 모든 것을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대처하잖아요. 32절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이런 도전이 있을 때 그 도전에서 승리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말씀을 왕성하게 선포하면 그런 모든 도전들을 다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영적인 원리를 명확히 알았습니다. 도전의 원리도 알았고 대응의 원리도 알았습니다. 원리를 가지고 접근하니까 항상 승리하더라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면 다윗도 원리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시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찬스가 왔는데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인생이 아니라 원리를 갖고 있잖아요. 여호와의 기름부은 종을 내가 죽일 수 없다는 원리, 바울은 그런 기회가 세 번 네 번이 왔다고 할지라도 원리를 품고 있는 한 절대로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리의 사람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원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삶의 중요한 원리를 붙들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십계명을 분석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전반부 1-3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다음에 4-7계명은 사람과의 관계, 나머지 8-10번째는 사물과의 관계입니다. 그 원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We should worship GOD!' 하나님에 대해서는 예배드리고, 사람들에 대해서는 'We should love people!' 사람은 사랑해야 되고 사물에 대해서는 'We should use things!' 사용해야 된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마다 무조건 예배드려야 한다. 사람에 대해서는 무조건 사랑해야 되겠다. 사물에 대해서는 무조건 사용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타락이 무엇입니까? 원리를 저버리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예배해야 되는데 무시해버리고 또 사람과 사물이 역전되어버렸지요. 사랑해야 될 사람을 사용하고 사용해야 될 물질을 사랑하잖아요. 여기서부터 다 깨지는 것 아닙니까. 원리입니다! 원리를 온전히 가지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재정전문가 래릿 버킷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빚지는 사람을 분석해 보니까 빚지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예상된 불행을 계산에 넣고 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예상된 불행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항상 최선만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돌 것만 생각하니까 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지출예산 가운데 자동차수리비는 집어넣지 않습니다. 자동차관리비라고 하면 세금과 기름값만 생각한다고 합니다. 영원히 망가지지 않는 자동차 봤어요? 수리비는 반드시 들어간다고 생각해야지요. 내 삶 가운데 사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사고 없는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내 삶 가운데 아픔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프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항상 카드 빚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고장나지 않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 같이 살아가고, 병들지 않는 몸을 가지고 있는 양 살아가고, 충치 먹지 않는 강철치아를 갖고 있는 양 살아갑니다. 나체주의가 아니면서도 갈아입을 옷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양 살아갑니다. 이런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예견된 불행 아니에요? 이런 것이 오면 시험에 빠졌다고 하고 어려움이 빠졌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히 있는 일입니다. 다음 주에 제주선교를 가게 됩니다. 제주선교에서 비가 오거나 딜레이가 되거나 여러 가지 상황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다 예측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시험이라고 생각도 안 해요. 그것은 당연히 벌어질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면 한두 명 배탈 날 수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제주선교 안 하고 집에 있어도 배탈 나요. 당연히 벌어질 일들입니다. 그것을 예측하고 있어야지요. 건물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건물 다 짓고 난 다음에 수리유지비에 대해서 생각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첨단건물은 건물유지비가 건축비의 10%를 잡아먹는 건물도 있습니다. 보통 5% 정도는 잡아야지요. 아주 거의 쓰러질 흉가같이 유지하려고 하면 1, 2% 잡아도 되지만…… 건물을 유지하기 위한 계산이 있어야 됩니다. 이런 것을 계산하는 것이 바로 원리중심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대충 살지 마십시오. 항상 원리를 붙들고 원리를 세워가면서 일을 할 때 어떤 일을 맡긴다고 할지라도 잘 감당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될 줄로 확신합니다.
3. 눈물이 있는 삶
마지막 세 번째 눈물이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불도저같이 전진만 하는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에게는 가슴이 있었습니다. 눈물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야든지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꼭 세 단계로 가더라고요. 어떤 사람이든지 대가가 되기 위해서 자기 분야의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반드시 실력이 있어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의사라고 하면 환자들을 잘 고쳐야 합니다. 공학자라면 공학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목사라면 설교의 능력, 자기분야의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실력에 탁월하지 않은 절대 대가가 될 수 없습니다.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미스코리아라고 하면 최고의 외모를 갖고 있든지…… 자기분야의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력만 갖추고 다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지난주간에 어떤 공학하는 형제하고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자기는 공학을 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공학에서 탁월하기 위해서는 공학 다음에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력이라고 말하는 목회의 기초를 갖추고 있고 그다음에 리더십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공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다음에 인간관계입니다. 리더십이에요. 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술뿐만 아니라 어떻게 병원을 운영해 나가가야 할 것인지, 다른 의사들과 무슨 관계를 맺어야 될 것인지, 환자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을 것에 대한 리더십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세 번째 절정은 인격입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인격으로 다 깨어지는 것입니다. 인격자가 되어야지 그것이 마지막 완성된 일꾼으로 서는 것입니다. 세 단계로 움직이면 되는 것입니다. 실력에서 리더십으로, 리더십에서 인격으로! 인격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눈물이지요. 가슴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인격 있는 사람, 가슴 있는 사람, 사랑 있는 사람, 눈물 있는 사람을 키우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19장을 보니까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31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눈물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눈물을 갖고 있어야 파괴력이 있습니다. 변화될 수 있습니다. 원래 사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스데반이 잡혔을 때 “저 사람은 죽어야 되” 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그의 마음 가운데 은혜가 소용돌이치고 눈물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도 주안에서 마지막 절정은 눈물로써 이 모든 것을 푸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동족들, 죽어가는 동족들을 향한 눈물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9장3절을 보니까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눈물 흘리잖아요. 눈물이 있을 때 비로소 영혼들을 건질 수 있습니다. 다음주에 우리가 제주선교를 떠나게 됩니다. 제주도의 많은 영혼들을 우리는 눈물로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 영혼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품게 해 달라고, 하나님 이 영혼 변화시켜 달라고 간구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 태풍이 왔을 때에 신문에 찍혀있던 사진 한 장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웹 사이트에서 그 사진을 구할 수 있으면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태풍이 부는데 벼가 막 쓰러졌습니다. 그 벼를 끌어안고 하늘 쳐다보면서 우는 농부의 눈물이 담긴 사진이었는데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살려달라는 애정, 눈물 속에 숨겨져 있는 그 곡식을 사랑하는 애정, 농사를 사랑하는 애정, 농부의 눈물,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쓰러진 벼 하나를 끌어안고 우는 눈물이 있습니다. 벼보다야 우리 영혼이 훨씬 더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역자들,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주의 백성들, 영혼들 붙들고 쓰러진 벼를 안고 눈물 흘리는 농부처럼 눈물 흘릴 줄 알면 영혼 건질 수 있습니다. 웹 사이트 상에서도 낙서장에 몇 번 올라왔던 글인데 굉장히 애타는 마음으로 어떤 자매가 글을 올렸습니다. 아주 눈물을 흘리면서 너무 애절한 마음으로…… 내용이 뭔지 아십니까? 개를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잃어버린 개를 찾는다고 합니다. 찾아주면 50만 원을 준다고 합니다. 진짜 찾아주면 협의에 의해서 더 줄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바라보면서 ‘이 여자 개를 무지 사랑하는구나.’ 저는 그것이 밉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개 한 마리 찾겠다고 50만 원 걸고 이렇게 애타게 찾고 이 동네 벽마다 전봇대마다 붙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우리 웹 사이트를 알았는지 웹 사이트에 올리고 개…개…개…… 남영동에도 보니까 극장 앞에도 붙어있고 반지 파는 데 앞에도 붙어있고,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개 한 마리 찾겠다고도 그렇게 애정을 갖고 뛰지 않습니까? 영혼 찾는 사람들이 가슴에 불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눈물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눈물 가지고 일하면 영혼들 건져낼 수 있고 무슨 일이라도 감당하는 하나님의 종이 될 줄로 확신합니다. 특별새벽기도회의 마지막 시간, 눈물로써 우리 사역의 모든 것들이 세례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맡겨진 일을 해내고야 마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안주하지 않습니다. 개척자정신이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는 대충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원리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눈물로써 이모든 것들을 끌어안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입니다. 이런 백성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믿음의 종입니다. 이런 사명자로 거듭나는 은혜의 종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같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안주하지 않는 삶, 원리를 붙드는 삶, 눈물이 있지 있는 삶이 되게 해 달라고 다같이 간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특별새벽기도회 20번째 강해입니다. 「맡겨진 일을 해내고야 마는 사람의 특징」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에베소의 장로들과 이별하는 시간입니다. 새로운 사역을 위해서 예루살렘과 로마로 떠나가는 그런 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멋진 이별의 장면이 사도행전 20장에 나오는 장면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사도바울이 이 고별설교를 통해서 맡겨진 일을 해내고야 마는 사람의 특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사도바울의 이 삶의 태도를 본받아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잘 감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게 되었는가, 세 가지로 분석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안주하지 않는 삶을 살았고 두 번째는 원리를 가지고 사는 삶이었고 세 번째는 눈물이 있는 삶이었습니다.
1. 안주하지 않는 삶
첫 번째 사도바울은 안주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에베소에서 크나큰 부흥과 열매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흥과 열매를 맛보게 되면 안주하게 됩니다. 이 정도면 좋다, 이 정도면 내가 충분히 사역을 감당했다고 생각할 터인데 사도바울은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22절부터 보겠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내 앞에 위험이 있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에베소에 있는 많은 성도들과 깊은 정이 들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로운 사명을 향해서 나아간다, 이것이 바울의 태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정말로 변화를 싫어합니다. 익숙한 것을 바꾸면 굉장히 불편해 합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자기 눈에 맞는 안경 하나 깨지고 난 다음에 새로 바꾸면 똑같이 도수인데도 불구하고 초점이 바뀌어서 그런지 약간 어지러움 증상이 있습니다. 자기 눈에 맞는 안경도 바꿀 때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새로운 환경, 새로운 도전이 온다고 할 때의 거부감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룡이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멸종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안주하면 멸종됩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니까 우리가 잘 아는 핍박이 나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너무 교제권이 탄탄하고 따뜻한 모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흩어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 안주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예루살렘교회에 준 축복이 무엇입니까? 핍박이었습니다. 핍박을 통해서 흩어버리니까 그들이 나가서 복음 증거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장의 한계를 어떤 때는 핍박이라는 매를 통해서 깨 버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의 모든 도전들, 고난들을 어려움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찌 보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궤도를 바꾸는 뜻일 수도 있고 내 성장의 한계를 깨버리는 하나님의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익숙한 것과 결별해야 합니다. 새로운 교제권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믿고 난 다음에 계속해서 교제권이 똑같고 내 사역의 내용이 똑같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축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더 넓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새로운 교제권을 향해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안주하지 않는 것이 커가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특징이 있습니다. 1년마다 전체 교인들을 다 섞어버렸습니다. reshuffle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우리교회만의 특징인 항상 개척교회 같은 싱싱함이 있었습니다. 절대 텃새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1년마다 섞어버렸으니까요. 항상 새로운 교회에 온 느낌을 받습니다. 1년 동안 정든 사람들과 헤어지는 아픔도 있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새로 팀을 바꾸고 난 다음에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커플이 30-40% 증가해 버립니다. 새로운 사람 만날 수 있고 기회의 문이 열리고 기회의 교제권이 넓어집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 20-30명밖에 더 되겠습니까? 매년마다 이렇게 섞는 것을 통해서 교회가 싱싱해지고 안주하지 않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진이 너무 커졌습니다. 2년 가까이 나누지 않았는데 다시 한번 전체를 다 섞어버리는 그런 일을 하려고 합니다. 마음에 저항이 있고, 이렇게 좋은 교제권을 왜 섞을까 하는 사람도 있고, 또 ‘그날이 빨리 오기를……’ 하면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것을 우리 교회의 하나의 특징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안주하지 않는 교회이다, 교제권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교회가 되겠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복음의 원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들어가고 복음이 들어가면 누구나 다 개척자가 됩니다. 개혁자가 됩니다. 새로운 사람에 대해서 저항감이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맡겨진 모든 일을 잘 감당하는 능력의 종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피 자체를 새롭게 도전하는 성령의 뜨거운 피로 변화되는 믿음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2. 원리를 가지고 사는 삶
두 번째 사도바울은 원리를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대응하고 저 상황에서는 저렇게 대응하는 인생이 아니라 원리중심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대처가 탁월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사도바울은 자기가 에베소를 떠나고 난 다음에 흉악한 이리 같은 자들이 와서 양떼를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헛된 말로 미혹하는 자가 나올 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원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상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서 마귀의 시험이 있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원리입니다. 우리가 바다에서 항해를 할 때 파도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면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파도치는 것은 원리입니다. 풍랑이 오는 것도 원리입니다. 6월말에 비가 오고 7월에 장마 오는 것은 원리입니다. 이상하게 여깁니까? 제주도에 갈 때 비올 것을 왜 걱정합니까? 모든 것을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대처하잖아요. 32절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이런 도전이 있을 때 그 도전에서 승리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말씀을 왕성하게 선포하면 그런 모든 도전들을 다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영적인 원리를 명확히 알았습니다. 도전의 원리도 알았고 대응의 원리도 알았습니다. 원리를 가지고 접근하니까 항상 승리하더라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면 다윗도 원리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시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찬스가 왔는데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인생이 아니라 원리를 갖고 있잖아요. 여호와의 기름부은 종을 내가 죽일 수 없다는 원리, 바울은 그런 기회가 세 번 네 번이 왔다고 할지라도 원리를 품고 있는 한 절대로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리의 사람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원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삶의 중요한 원리를 붙들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십계명을 분석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전반부 1-3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다음에 4-7계명은 사람과의 관계, 나머지 8-10번째는 사물과의 관계입니다. 그 원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We should worship GOD!' 하나님에 대해서는 예배드리고, 사람들에 대해서는 'We should love people!' 사람은 사랑해야 되고 사물에 대해서는 'We should use things!' 사용해야 된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마다 무조건 예배드려야 한다. 사람에 대해서는 무조건 사랑해야 되겠다. 사물에 대해서는 무조건 사용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타락이 무엇입니까? 원리를 저버리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예배해야 되는데 무시해버리고 또 사람과 사물이 역전되어버렸지요. 사랑해야 될 사람을 사용하고 사용해야 될 물질을 사랑하잖아요. 여기서부터 다 깨지는 것 아닙니까. 원리입니다! 원리를 온전히 가지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재정전문가 래릿 버킷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빚지는 사람을 분석해 보니까 빚지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예상된 불행을 계산에 넣고 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예상된 불행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항상 최선만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돌 것만 생각하니까 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지출예산 가운데 자동차수리비는 집어넣지 않습니다. 자동차관리비라고 하면 세금과 기름값만 생각한다고 합니다. 영원히 망가지지 않는 자동차 봤어요? 수리비는 반드시 들어간다고 생각해야지요. 내 삶 가운데 사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사고 없는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내 삶 가운데 아픔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프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항상 카드 빚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고장나지 않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 같이 살아가고, 병들지 않는 몸을 가지고 있는 양 살아가고, 충치 먹지 않는 강철치아를 갖고 있는 양 살아갑니다. 나체주의가 아니면서도 갈아입을 옷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양 살아갑니다. 이런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예견된 불행 아니에요? 이런 것이 오면 시험에 빠졌다고 하고 어려움이 빠졌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히 있는 일입니다. 다음 주에 제주선교를 가게 됩니다. 제주선교에서 비가 오거나 딜레이가 되거나 여러 가지 상황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다 예측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시험이라고 생각도 안 해요. 그것은 당연히 벌어질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면 한두 명 배탈 날 수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제주선교 안 하고 집에 있어도 배탈 나요. 당연히 벌어질 일들입니다. 그것을 예측하고 있어야지요. 건물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건물 다 짓고 난 다음에 수리유지비에 대해서 생각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첨단건물은 건물유지비가 건축비의 10%를 잡아먹는 건물도 있습니다. 보통 5% 정도는 잡아야지요. 아주 거의 쓰러질 흉가같이 유지하려고 하면 1, 2% 잡아도 되지만…… 건물을 유지하기 위한 계산이 있어야 됩니다. 이런 것을 계산하는 것이 바로 원리중심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대충 살지 마십시오. 항상 원리를 붙들고 원리를 세워가면서 일을 할 때 어떤 일을 맡긴다고 할지라도 잘 감당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될 줄로 확신합니다.
3. 눈물이 있는 삶
마지막 세 번째 눈물이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불도저같이 전진만 하는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에게는 가슴이 있었습니다. 눈물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야든지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꼭 세 단계로 가더라고요. 어떤 사람이든지 대가가 되기 위해서 자기 분야의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반드시 실력이 있어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의사라고 하면 환자들을 잘 고쳐야 합니다. 공학자라면 공학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목사라면 설교의 능력, 자기분야의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실력에 탁월하지 않은 절대 대가가 될 수 없습니다.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미스코리아라고 하면 최고의 외모를 갖고 있든지…… 자기분야의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력만 갖추고 다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지난주간에 어떤 공학하는 형제하고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자기는 공학을 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공학에서 탁월하기 위해서는 공학 다음에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력이라고 말하는 목회의 기초를 갖추고 있고 그다음에 리더십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공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다음에 인간관계입니다. 리더십이에요. 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술뿐만 아니라 어떻게 병원을 운영해 나가가야 할 것인지, 다른 의사들과 무슨 관계를 맺어야 될 것인지, 환자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을 것에 대한 리더십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세 번째 절정은 인격입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인격으로 다 깨어지는 것입니다. 인격자가 되어야지 그것이 마지막 완성된 일꾼으로 서는 것입니다. 세 단계로 움직이면 되는 것입니다. 실력에서 리더십으로, 리더십에서 인격으로! 인격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눈물이지요. 가슴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인격 있는 사람, 가슴 있는 사람, 사랑 있는 사람, 눈물 있는 사람을 키우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19장을 보니까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31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눈물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눈물을 갖고 있어야 파괴력이 있습니다. 변화될 수 있습니다. 원래 사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스데반이 잡혔을 때 “저 사람은 죽어야 되” 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그의 마음 가운데 은혜가 소용돌이치고 눈물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도 주안에서 마지막 절정은 눈물로써 이 모든 것을 푸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동족들, 죽어가는 동족들을 향한 눈물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9장3절을 보니까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눈물 흘리잖아요. 눈물이 있을 때 비로소 영혼들을 건질 수 있습니다. 다음주에 우리가 제주선교를 떠나게 됩니다. 제주도의 많은 영혼들을 우리는 눈물로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 영혼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품게 해 달라고, 하나님 이 영혼 변화시켜 달라고 간구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 태풍이 왔을 때에 신문에 찍혀있던 사진 한 장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웹 사이트에서 그 사진을 구할 수 있으면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태풍이 부는데 벼가 막 쓰러졌습니다. 그 벼를 끌어안고 하늘 쳐다보면서 우는 농부의 눈물이 담긴 사진이었는데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살려달라는 애정, 눈물 속에 숨겨져 있는 그 곡식을 사랑하는 애정, 농사를 사랑하는 애정, 농부의 눈물,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쓰러진 벼 하나를 끌어안고 우는 눈물이 있습니다. 벼보다야 우리 영혼이 훨씬 더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역자들,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주의 백성들, 영혼들 붙들고 쓰러진 벼를 안고 눈물 흘리는 농부처럼 눈물 흘릴 줄 알면 영혼 건질 수 있습니다. 웹 사이트 상에서도 낙서장에 몇 번 올라왔던 글인데 굉장히 애타는 마음으로 어떤 자매가 글을 올렸습니다. 아주 눈물을 흘리면서 너무 애절한 마음으로…… 내용이 뭔지 아십니까? 개를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잃어버린 개를 찾는다고 합니다. 찾아주면 50만 원을 준다고 합니다. 진짜 찾아주면 협의에 의해서 더 줄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바라보면서 ‘이 여자 개를 무지 사랑하는구나.’ 저는 그것이 밉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개 한 마리 찾겠다고 50만 원 걸고 이렇게 애타게 찾고 이 동네 벽마다 전봇대마다 붙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우리 웹 사이트를 알았는지 웹 사이트에 올리고 개…개…개…… 남영동에도 보니까 극장 앞에도 붙어있고 반지 파는 데 앞에도 붙어있고,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개 한 마리 찾겠다고도 그렇게 애정을 갖고 뛰지 않습니까? 영혼 찾는 사람들이 가슴에 불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눈물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눈물 가지고 일하면 영혼들 건져낼 수 있고 무슨 일이라도 감당하는 하나님의 종이 될 줄로 확신합니다. 특별새벽기도회의 마지막 시간, 눈물로써 우리 사역의 모든 것들이 세례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맡겨진 일을 해내고야 마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안주하지 않습니다. 개척자정신이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는 대충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원리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눈물로써 이모든 것들을 끌어안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입니다. 이런 백성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믿음의 종입니다. 이런 사명자로 거듭나는 은혜의 종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같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안주하지 않는 삶, 원리를 붙드는 삶, 눈물이 있지 있는 삶이 되게 해 달라고 다같이 간구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