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경연의> 34p.
曰 父皇勿憂 小子一亂乙平 府兵三千人乙率大江乙溯上 大嫂川口上陸 扶芬奴其母与家奴三千人乙率來謁曰 此地方臣故鄕 臣鄕導爲 逆者斬 順者降 芻牟軍一千乙與
先鋒乙爲 烏伊千卒乙率右巡 摩离七百騎乙率左掠 芻牟三百騎又三軍乙指揮 鎭撫
乙主張 殺戮乙避 良民畜産乙勿犯 民望洽然 到处投降者相連 兵不血刃 大嫂川一帶
扶芬奴勇素 畏芬奴 號令下歸 芻牟扶芬奴乙百倍勇聞知 誰敢抵抗 白熊王狶敦
아뢰기를, "父皇(부황)께서는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小子(소자)가 이 하나의 亂(난)을 평정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府兵(부병) 3,000명을 거느리고, 大江(대강)을 거슬러 올라가, 大嫂川(대수천) 어귀에 上陸(상륙)하였다.
이때 扶芬奴(부분노)가 그 어머니와 家奴(가노) 3,000명을 거느리고 와서 뵙고 아뢰기를, "이 地方(지방)은 臣(신)의 고향이옵니다. 臣(신)이 鄕導(향도)가 될 터이니, 逆(거역)하는 자는 베고, 順(순응)하는 자는 항복시키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芻牟(추모)의 군사 1,000명을 주어 先鋒(선봉)으로 삼았다. 烏伊(오이)는 1,000명 군사를 거느리고, 右巡(우순)하게 하고, 摩离(마리)는 700 기병을 거느리고, 左掠(좌략)하게 하였으며, 芻牟(추모)는 300 기병과 三軍(삼군)을 指揮(지휘)하였다.
그들은 鎭撫(진무)를 主張(주장)하여, 殺戮(살륙)을 피하고, 良民(양민)과 畜産(축산, 가축)을 범하지 않으니, 백성들의 望(망)이 흡족하여, 到處(도처)에 투항하는 자가 相連(상련)하였다. 그리하여 兵不血刃(병불혈인)으로 大嫂川(대수천) 一帶(일대)를 평정하였다.
이는 扶芬奴(부분노)의 勇素(용소) 덕분이었으니, 芬奴(부분노)를 두려워하여, 號令(호령) 下(하)에 歸(복속)하였다. 芻牟(추모)도 扶芬奴(부분노)의 백 배나 되는 勇(용감함)을 들어 알았으니, 누가 감히 抵抗(저항)하겠는가, 白熊(백웅)의 王(왕) 狶敦(희돈)...
*오타 수정 완료되었구요.
*府兵 군사 제도가 西魏(서위, 535년~557년) 때 만들어졌다고 하므로, 추모경연의가 쓰여진 시기는 535년 이후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국 지도를 얻었는데, '혼하' 대신에 '동가강'이 적혀 있죠.
大嫂川(대수천)은 扶芬奴(부분노)와 한 몸이 되서, 같이 나옵니다.
熱水河(열수하)가 보입니다.
哈泥河(하니하)의 지류일텐데..
이게 아마 大嫂川(대수천)이 될거에요.
가령 <길림읍지><통화읍지>같은 책자에, 哈泥河(하니하)로 들어가는 지류로서, 大嫂川(대수천) 이름이 크게 바뀌지 않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