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군옥(李羣玉) 시(詩)는 16세기를 대표하는 명필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1525~1575)가 당나라 이군옥(李羣玉)의 오언율시를 쓴 것이다. 그는 낙동강 지류 천보탄(天寶灘) 가에 매학정(梅鶴亭)을 짓고 살았던 처사(處士)로서 회소(懷素)의 방일한 초서를 애호하고 또 회소를 바탕으로 독특한 서풍을 보인 명나라 동해옹(東海翁) 장필(張弼)(1425~1487)을 따랐다. 이 초서는 회소와 장필을 배워 활달하고 운동세가 많은 획법과 변화로운 짜임을 잘 구사한 예이다. 이 필적은 황기로(黃耆老)의 사위 덕수이씨(德水 李氏) 옥산(玉山) 이우(李瑀)(1542~1609)의 후손인 이장희(李璋憙)(1909~1998)가 수집한 것으로 그의 장손에 의해 기증되었다. 하단 부분에 몇 글자 탈락되었으나 황기로(黃耆老)의 묵적 가운데 대폭(大幅)이며 그의 특징이 잘 나타난 대표작이다.
차운시(次韻詩)는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1525~1575)가 다른 사람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짓고 쓴 초서이다. 말미에 “축(軸)에 청천(菁川:柳希齡, 1480~1552), 영천(靈川:申潛, 1491~1554), 귤옹(橘翁:尹衢, 1495~?), 송강(松江:趙澄, 1511~1574), 서하(西河:?)의 시(詩)가 있어 몇번씩 반복함에 그칠 수 없어 이에 시를 짓다”라고 하여 제작동기를 알 수 있으며 말미에 “고산 매학정 주인 쓰다(孤山梅鶴亭主人書)” 라고 한 것에서 진적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 필적은 지금의 소장자가 입수할 때 가로로 긴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던 것을 액자로 개장한 것이다. 오랜 세월에도 글씨가 손상되지 않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또 [백봉(白峯)]이란 솥모양 인장[鼎形印]이 다섯 군데 찍혀있고 말미에 [태사지후 충신지손(太師之后 忠臣之孫)]이란 장방인(長房印)이 찍혀있는데, ‘백봉(白峯)’은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수빈(金壽賓)(1626~?)의 호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선평(金宣平)이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의 한 사람이므로 그 후손에게 이러한 인문(印文)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초서 필적은 규모는 작지만 필획이 매우 간정(簡淨)하고 운필이 활달하여 황기로(黃耆老) 글씨의 진면목을 대할 수 있는 뛰어난 수작(秀作)이다.
황기로(黃耆老)의 본관은 덕산(德山), 자는 태수(鮐叟), 호는 고산(孤山)·매학정(梅鶴亭)으로,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합격하고 벼슬은 별좌(別坐)를 지냈다. 만년에 낙동강의 서쪽 보천산(寶泉山) 위에 정자를 짓고 고산정(孤山亭) 또는 매학정梅鶴亭)이라 이름을 지어 그곳에서 필묵(筆墨)과 독서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조선시대의 명필. 필법이 뛰어났고 특히 초서를 잘 써 초성(草聖)이라 불렸다.
황기로 초서-이군옥 시 보물1625-1호
소 재 지; |
강원 강릉시 죽헌동 177-4번지 |
16세기를 대표하는 명필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1525~1575)가 당나라 이군옥(李羣玉)의 오언율시를 쓴 것이다. 그는 낙동강 지류 천보탄(天寶灘) 가에 매학정(梅鶴亭)을 짓고 살았던 처사(處士)로서 회소(懷素)의 방일한 초서를 애호하고 또 회소를 바탕으로 독특한 서풍을 보인 명나라 동해옹(東海翁) 장필(張弼)(1425~1487)을 따랐다. 이 초서는 회소와 장필을 배워 활달하고 운동세가 많은 획법과 변화로운 짜임을 잘 구사한 예이다. 이 필적은 황기로(黃耆老)의 사위 덕수이씨(德水 李氏) 옥산(玉山) 이우(李瑀)(1542~1609)의 후손인 이장희(李璋憙)(1909~1998)가 수집한 것으로 그의 장손에 의해 기증되었다. 하단 부분에 몇 글자 탈락되었으나 황기로(黃耆老)의 묵적 가운데 대폭(大幅)이며 그의 특징이 잘 나타난 대표작이다.
황기로 초서-차운시 보물1625-2호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1525~1575)가 다른 사람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짓고 쓴 초서이다. 말미에 “축(軸)에 청천(菁川:柳希齡, 1480~1552), 영천(靈川:申潛, 1491~1554), 귤옹(橘翁:尹衢, 1495~?), 송강(松江:趙澄, 1511~1574), 서하(西河:?)의 시(詩)가 있어 몇번씩 반복함에 그칠 수 없어 이에 시를 짓다”라고 하여 제작동기를 알 수 있으며 말미에 “고산 매학정 주인 쓰다(孤山梅鶴亭主人書)” 라고 한 것에서 진적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 필적은 지금의 소장자가 입수할 때 가로로 긴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던 것을 액자로 개장한 것이다. 오랜 세월에도 글씨가 손상되지 않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또 [백봉(白峯)]이란 솥모양 인장[鼎形印]이 다섯 군데 찍혀있고 말미에 [태사지후 충신지손(太師之后 忠臣之孫)]이란 장방인(長房印)이 찍혀있는데, ‘백봉(白峯)’은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수빈(金壽賓)(1626~?)의 호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선평(金宣平)이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의 한 사람이므로 그 후손에게 이러한 인문(印文)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초서 필적은 규모는 작지만 필획이 매우 간정(簡淨)하고 운필이 활달하여 황기로(黃耆老) 글씨의 진면목을 대할 수 있는 뛰어난 수작(秀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