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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4 순창 강천사-임실 옥정호 출렁다리 나들이
자유인 조동화는 호남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순창 강천산을 다녀왔다.
순창 강천사를 나들이를 가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이리중학 동창생 4명이서 승용차 한 대로 나들이 했다.
익산에서 9:00에 출발 승용차로 60km 떨어진 강천사 주차장에 도착, 약 2km를 걸어 강천사를 답사하였다.
단풍으로 물든 강천산에 들어오니 웬 사람들이 많은지 인산인해였다.
강천사를 탐방하며 느낀점은 스님들도 몇 않되고 작은 절로 느껴졌으며, 조선시대 강천사 절 부근 삼인대에 의인들이 모여 거사의 장소로 사용된 것 같네요.
유수같이 흘러가는 황혼의 시간!
무상한 세월의 여로에서 다양한 세월 낚는법을 터득해야 보람찬 황혼의 인생을 즐겁게 보낼수 있는거지요.
세월낚는 비결이 쉬운일은 아니기로서니 인생의 후반전을 보람차고 활기있게 살아야 하는데 건강관리가 행복의 첩경입디다.
건강 잃으면 아무것도 없지요.
태초에 인간은 맨발로 걸으면서 살아왔다.
하루일과중 걷는일 1만보 실천이 나의 가장 큰 목표이다.
천고마비 수확의 계절에 강천산 계곡의 맑은물과 기암괴석과 바위들이 어우러져 맑은공기와 풍광이 아름다운 강천산 숲속을 걷는 기분이 좋았다.
11월의 강천산은 단풍이 알록달록 잘 들어 뜻깊은 나들이였다.
숲속에 들어오면 왜 기분이 좋고 몸이 가벼워질까?
피톤치드 덕분이여.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이런 명언을 했지요.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일에 열중하라. 이것이야말로 이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약보다도 강력한 효력을 지닌 영약인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는 ‘걷는 것은 인간에게 최고의 보약’이라고 말했다.
강천사 단풍길 1만보 걸을수 있어 행복하였고, 풍광이 아름다워 눈이 즐거웠다.
중식후 귀로길에 임실 붕어섬에 건설된 출렁다리를 걸어서 옥정호를 구경하였다.
그누가 인생은 나그네라 말했던가?
한세기를 풍미했던 사람들도 떠나가고 인생무상 아니던가?
2023년도 11월을 질주하고 있구나.
어떻게 사는삶이 잘사는 삶일까?
인생무상 화무십일홍 그려려니 긍정적으로 살면 되야.
덧없고 부질없는 삶의 여로에서 좋은일 많이 많이 하시고 그려려니 즐거운 시간 됩시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되찾을 수 없는게 세월이니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순간순간을 후회 없이 잘 살아야 하지요.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살아볼만한 세상, 기왕지사 이세상에 왔으니 즐겁고 행복을 꿈꾸며 그낭 저낭 살아야 하지요.
이리도 한세상 저리도 한세상 세월은 흘러갑니다.
정답없는 인생, 내가 하고자 하는것 하면서 행복 느끼며 살면 그것이 행복아닐까 생각해본다.
조동화의 벗님들!
건강합시다.
행복합시다.
감사합니다.
<강천문(剛泉門)은 강천사로 들어가는 입구로 일주문을 대신한다.>
안양루(安養樓)
순창 강천사 2층 누각 현판에는 安養樓라 적혀 있다.
2층 누각 강천사 안양루는 경내로 들어가는 관문이기도 하다.
불교에서 안양이라함은 극락을 뜻하는 말로 안양세계(安養世界)는 곧 극락세계(極樂世界)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이 문은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의미가 있다.
<대웅전은 불상을 모시고 예불과 불공, 기도, 법요 등 불교의 핵심 의식과 신앙 행위가 행해지는 장소이다.
강천사 대웅전 정면 기둥에는 네 개의 주련(柱聯)이 걸려 있는데 예불을 드리고 있어 앞문을 활짝열어 잿혀 우측한개만 보인다.
사찰 절에 와서 주련의 뜻을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성 싶구먼. 부처님이 이세상에서 최고라고 찬양하는 내용이다.
天上天下無如佛(천상천하무여불) 천상천하 부처님 같은 분 안 계시고
十方世界亦無比(시방세계역무비) 시방세계 누구도 비길 만한 자 없네
世間所有我盡見(세간소유아진견) 세상의 모든 존재 내가 다 보았지만
一切無有如佛者(일체무유여불자) 그 어떤 존재도 부처님 같은 이 없네>
<심우당이란 진리를 찾는집으로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출입금지구역이다.
한문으로 주련이 걸려 있어 담넘어로 찰각 담아왔다.
月照諸品靜 월조제품정
心持萬緣輕 심지만연경
知機心自閒 지기심자한
獨坐一爐香 독좌일로향
金文誦兩行 금문송양행
달 비추니 온갖 품류 고요하구나.
마음이 고요하니 온갖 인연 가볍고
근기 아니 마음 절로 한가하도다.
홀로 앉아 한 줄기 향을 사르고
경전의 글 두어 줄 읊어 본다네.>
신말주 정부인 설씨부인 이야기
설씨부인 권선문(薛氏婦人勸善文)은 성종조 대사간을 지낸 신말주(申末舟)[1429~1503]의 정부인(貞夫人) 설씨(薛氏)[순창설씨1429~1508]가 지은 것이다.
설씨는 사직(司直) 설백민(薛伯民)의 딸로 1429년(세종 11) 순창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명하여 여성으로서의 문장과 필재(筆才)가 탁월하고 정숙한 덕성을 갖추어 덕망이 높았다. 또한 불교와 유교에 조예가 깊고, 서화에도 높은 수준을 갖고 있었다. 설씨 부인은 1482년(성종 13) 봄 간밤의 꿈이 신험(神驗)함을 생각하고 손수 권선문(勸善文)을 짓고 강천산의 아름다운 경계 속에 세워질 암자의 설계도까지 그려 부도암(浮圖庵)[순창군 강천사의 전신]의 승려 약비(若非)로 하여금 많은 불신자들에게 돌려 시주를 구하게 하였다.
➡신말주는 신숙주의 동생으로 조선 전기 전주부윤, 진주목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경력과 중요한 업적을 이룬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신이다. 그러나 ‘숙주 나물’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그는 절개를 저버리고 영달을 선택한 변절자의 한 표상으로 지목되어 상대적으로 폄하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신숙주는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 신송주(申松舟), 신말주(申末舟)로 이어지는 5형제 중 셋째였다.
<설씨부인 권선문 전문>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불교의 인과설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선악의 업을 짓는 것이 인연이 되어 이로 인한 타일(他日)의 과보가 있게 된다고 한다. 내가 여성으로 그 참된 묘리를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지난 옛날의 불적(佛跡)을 고찰하면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자비행으로 가르치고 인과법으로 요유(擾柔)하여 중생을 제도하므로 비록 역대의 명왕(明王), 철후(哲候), 현경(賢卿), 준사(俊士)가 모두 교풍에 따라 부처님을 앙모하고 불사를 궁행(躬行), 복습(復習), 정근(精勤)함으로써 능히 속세의 사마(邪魔)를 물리치고 진세(眞世)를 깨닫는 길에 나아가는 자가 끊임없이 계속함을 보면 불교 신앙이 이로움이 없다면 어찌 이러한 형적이 나타나리오. 그래서 나도 평소에 이를 믿고 기꺼이 따르는데 금년 봄 어느 날 밤 꿈에 작고하신 어머니 형씨가 하관(霞冠)을 쓰고 운거(雲裾)를 날리며 허공에서 내려와 나를 향하여 앉아 조용히 말씀하시기를 ‘명일(明日)에 어떤 사람이 와서 선한 사업을 함께 하자고 청할 것이니 모름지기 마음으로 즐겁게 따르고 게을리 하는 뜻을 갖지 말라. 이것이 너의 복을 짓는 원인이 되리라.’ 하였다.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꿈이 깨어 일어나 앉아 날 새기를 기다렸더니 아침때가 되기 전에 문밖에서 사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사람을 시켜 나가 본즉, 근리(近里)에 사는 평소에 잘 아는 ‘약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를 맞아 찾아온 연유를 알아본 즉 본군(本郡) 광덕산(廣德山) 중에 산수가 가장 청려(淸麗)한 곳이 있어 옛날에 ‘신령(信靈)’이라는 중이 이곳에 잠시 초사(草舍)를 지어 부처님을 모셨는데 다년간의 한서와 풍우에 표요(漂搖)되어 옥사(屋寺)가 파괴되고 장원(墻垣)이 퇴락하여 마침내 빈터가 되어 운산연수(雲山烟水)에 영원한 한을 남긴 채로 있었다. 그런데 뒤에 중조(中照)라는 뜻있는 중이 있어 여기에 사찰을 중창할 뜻을 세우고 불자들에게 널리 권하여 원납전(願納錢)을 거둘 때에 약비도 적은 성납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불전을 신축하여 단청을 마치고 절 이름은 옆에 부도가 있음을 빌어 부도암이라 하니 그 규모는 비록 작다 해도 도량이 청정함은 어느 사찰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뒤 고명한 인사들이 진경에 처하면서 심성 수양을 목적하고 즐거이 찾아 들었는데 오직 한스러운 것은 창사 당시에 너무 바삐 서둘러 공사가 거칠고 기초가 견고하지 못한 탓으로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지금은 기둥이 기울어지고 건물이 퇴락하였다. 중조가 이를 개축코자 뜻하지만 힘이 미약하여 감히 발의를 못하는 터였다. 약비가 말하기를 ‘듣자오니 부인께서 이런 일을 좋아하신다 하는데 여기에 시주를 허락하시려는지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어젯밤 꿈이 상기되면서 대체 이런 기험한 일이 또 있겠는가.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생시에 영명(英明)한 자질이 있어 온갖 착한 일만을 하고 악한 일은 일체 하지 않았으니 필시 상계(上界)의 존귀한 자리에 계시면서 미래의 운수까지 소명하게 알아서 나에게 이 선업을 알려 주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일은 내가 즐거워하는 바인데 하물며 어머님이 명하는 것을 거역하겠는가. 내가 이 일에 주간이 되어 하나의 원당을 짓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이 암자의 작은 규모로 보아 이에 수요되는 재정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니 나 혼자만의 재력으로 담당하기가 어려우리요마는, 이런 일을 하는 데는 천만인이 원(願)을 같이 함으로써 뒤에 복된 업인을 맺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다만 세인들이 한이 없는 욕심에 쫓겨 몸이 마치도록 생활에 골몰하는 바람에 능히 이러한 보시에 출원을 못하게 되는 것이니 어찌 능히 천하의 모든 사람을 다 효유(曉諭)하여 선업을 짓게 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불경에 이르기를 고사(古寺)의 수리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이는 두 범천(梵天)에 나아갈 복을 받는다고 하였으니 첫째는 공덕을 쌓는 일을 함에 있어서 선한 근기를 맺게 되고 둘째는 신자(臣子)가 되어 인군과 어버이에게까지 복을 받게 될 것이니 이러한 고사 보리(補理)의 시주를 버리고 더 좋은 일이 또 있겠는가? 만약에 참으로 불심이 있는 사람이 이 일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이 선인(善因)에 참여하여 크게는 인군과 어버이에게 복되게 하고 작게는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나아가서 만물을 이롭게 하는데 이르고자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리오. 이러한 까닭에 나는 이 일을 여러 불신자들에게 알리고 또 이러한 뜻을 가지는 사람에게 효유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다만 내 자신이 직접 나아가 다니면서 널리 권유를 한다는 것은 여자로서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이 권선문을 지어 중조 스님으로 하여금 널리 권선을 구하게 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사를 물었더니 약비가 대답하기를 ‘이것이 곧 자기와 중조 스님이 부인에게 원하는 바라.’ 하기에 나는 곧 광덕산 부도암의 도형을 그리고 권선의 글을 써서 나의 지극한 정성을 나타내 보여 무릇 나와 같이 불심을 받드는 사람들이라면 이 글을 보고 각자의 의향에 따라 시주에 응함으로써 이 업인에 동참하면 심히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혹 이러한 불교의 이치를 믿지 않고 나의 말을 일종의 무언(誣言)이라 보는 사람도 없지 않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에 다음에 불교의 인과보응설이 실제적으로 험증되는 사실로써 쉽게 탐비할 수 있는 근대의 사건을 들어 그 대강을 말하고자 한다. 여말에 한 동량승이 옥륜사(玉輪寺)를 개수하면서 금상불을 주성하려고 원납전을 구할 즈음에 신자와 서민들이 다투어 시주를 하였다. 그때 한 늙은 산장관(散將官)이 시주할 뜻은 있었으나 지극히 가난하여 시주할 재물이 없기 때문에 13세 된 여식을 사역승(使役僧)으로 바치면서 수납하기를 간곡히 원하므로 하는 수 없이 받아 들였다. 이때에 장군으로 재직한 사람이 연로한데도 아들이 없어서 사역승으로 바친 여아를 양녀로 사 가는데 대가로 포 500단을 그 아버지 산장관에게 지급하여 궁핍을 면하는 즉보(卽報)를 받게 되었다. 또 최시중(崔侍中)이라는 사람은 집 근처에 절이 있어 매양 관청에 갈 때나 돌아올 때에 사문(寺門)에 이르면 곧 말에서 내려서 절을 향하여 배례를 하고 보행으로 절 앞을 지난 뒤에 말에 오르며, 과일이나 곡물 등 새로운 것을 먼저 불전에 올리고 혹 원당에 나아가면 손수 차를 다려 불전에 공양하기를 오랫동안 계속하였다. 그런데 홀연히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네가 나를 섬기는 것이 근실하다. 그러나 남리응양부에 사는 노병(老兵)의 신심은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그가 사람을 시켜서 찾아본 즉 과연 한 노병이 있었다. 그가 직접 노병을 찾아가서 그대가 이웃 절의 부처님에게 올리는 특별한 치성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내가 중풍으로 일어나지 못한지 7년이라 다만 새벽과 저녁에 이웃 절의 종소리가 들리면 그 쪽을 향하여 합장을 하였을 뿐이라.’라고 하였다. 그 노병을 중하게 대우하여 매양 녹을 받을 때마다 1곡[16두]의 쌀을 주었다. 여기에서 저 산장관이 여아를 바친 지성이 당시에 부(富)의 보(報)를 받게 되고, 불구의 노병이 합장한 치성은 일생의 생계에 도움을 받은 응보가 있었음을 본다면 나의 말이 헛된 무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뜻에서 감히 이를 증언으로 한다. 정부인(貞夫人) 설씨(薛氏).”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설씨부인권선문첩(薛氏夫人勸善文帖)
설씨부인권선문첩(薛氏夫人勸善文帖), 보물 제728호)은 가로 40cm, 세로 317cm 크기의 조선시대 서화첩이다. 16폭의 이 서화첩은 묵필(墨筆)로 쓴 14폭의 권선문과 2폭의 사찰 채색도로 되어 있는데, 양쪽 표면에는 채색문양이 있는 비단을 붙였다. 뒷면에는 후손들의 집에 전해 내려오던 서간문과 권선문이 실려 있고, '성화 18년(성종 13년 1482) 7월 정부인 설'이라는 연대와 인장이 찍혀 있다.
1455년 세조(世祖)가 무자비한 유혈 쿠데타로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린 신말주(申末舟)는 아내 정부인(貞夫人) 설옥천(薛玉川)의 고향 순창 남산대(南山台)로 내려와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세월을 벗삼아 은둔했다.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인 신말주는 조선조 문종(文宗), 단종, 세조대의 문신으로 대사간(大司諫)까지 지낸 사람이다. 설옥천은 1429년(세종 11년) 순창에서 사직(司直) 설백민(薛伯民)의 딸로 태어났다. 설옥천은 어려서부터 덕이 많고 총명하였으며, 문재가 뛰어났다고 한다.
1482년(성종 13) 봄 어느 날 밤 꿈에 세상을 떠난 친정어머니 형씨(刑氏)가 나타나 설옥천에게 '내일 어떤 사람이 찾아와 너와 함께 선업(善業)을 짓자고 청할 것이니 기쁜 마음으로 따르되 게을리 하지 말아라. 이것이 너의 복을 짓는 큰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 과연 지난 밤의 꿈대로 약비(若非)라는 사람이 설옥천을 찾아와 '옛날 광덕산에 신령(信靈) 스님이 초암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폐사가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중조(中照) 스님의 대원은 이 절을 중창하는 것입니다. 소승도 그 아름다운 뜻을 본받아 부도암(浮圖庵)이라는 작은 암자를 세워 지키고 있습니다만 이 암자도 초라하여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에 중조 스님과 뜻을 합하여 새 절을 짓고자 합니다만 역량이 부족하여 부인께 시주를 구하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간밤의 꿈이 신험(神驗)하다고 여긴 설옥천은 두 승려의 원을 도와주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절의 중창에 소요되는 재정을 혼자서 감당할 능력도 부족하고, 또 이런 일은 불자 대중들이 힘을 합쳐 선업을 짓게 함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설옥천은 손수 권선문을 짓고, 사찰의 설계도까지 그려 서화첩으로 만들어 악비로 하여금 대중들에게 돌려보게 하여 시주를 구하도록 했다.
신사임당의 작품보다 72년이나 앞선 설씨부인권선문첩은 조선시대 여류문인이 쓴 필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서화첩이며, 사대부 집안의 정부인이 쓴 글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 서화첩은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5층석탑
1979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316년(충숙왕 3)에 덕현선사(德賢禪師)가 강천사 중건과 함께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조각하여 건립한 것으로 전하는 5층석탑이다.>
<강천사 모과나무
삼인대가 바로 앞에 바라보이는 곳에는 수령이 약 300년 된 강천사 모과나무(전라북도 기념물 제97호) 고목이 서 있다. 모과나무의 높이는 약 19m, 수관 폭은 3.1m이다.
이 모과나무는 300여년 전 강천사 승려가 심었다는 설과 조선 후기 순창 출신의 실학자인 신경준(申景濬)이 심었다는 설이 있다. 모과나무 고목의 왼쪽 그루터기에는 단풍나무가 함께 자라고 있다. 강천사 모과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모과나무로 지금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다.>
<삼인대(三印臺)
삼인대는 중종 10년(1515)에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의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림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간 류옥의행적을 기념하기 위한 곳이다.
단경왕후 신씨는 폐위된 연산군의 처남으로 중종반정 때 피살된 좌의정 신수근의 딸이다. 반정공신 박원종 등은 자신들의 손으로 죽인 신수근의 딸을 왕비로 세우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 염려하여 중종에게 신씨를 폐출하게 하였다. 그 후 새로 왕비가 된 장경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 세사람은 각자의 직인을 소나무 가지에 걸고, 관직에서 물러남은 물론 죽음을 각오하며 폐비 신씨 복위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들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배(죄인을 먼 곳으로 보내 그곳에 거주하게 함)에 처해지는 형벌을 받았다.
영조 20년(1744)에 호남과 순창 지역의 유림이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비와 함께 비각을 세우고 삼인대라고 불렀다. 삼인대 비문은 이재가 지었고, 전액*은 유척기가, 글씨는 민우수가 썼다.>
<삼인대비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 안에 있다. 높이는 164㎝, 폭은 80㎝, 두께는 24㎝로 화강암 좌대에 대리석 비신이다. 비각 안에는 영조(英祖)·정조(正祖)의 어제 현판과 기우만이 쓴 「삼인대 비각 중수기」가 걸려 있다. 비문은 도암 이재(李縡)가 지었으며, 민우수(閔遇洙)가 글씨를 썼고, 유척기(兪拓基)가 전서를 썼다.
삼인대비각은 현재 보수중에 있었다.>
↓삼인대비문(三印臺碑文)의 개요를 새긴 비
순창 군수 충암(冲庵) 김정과 담양 부사 눌재(訥齋) 박상, 무안 현감 석헌(石軒) 유옥이 이곳에 모여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두고 중종반정 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킬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작성하였다 하여 삼인대라 한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부인 신씨를 중전에 올렸으나 훈신 박원종 등이 중전의 아버지인 좌의정 신수근이 중종반정 과정에서 살해되었으므로 그 해가 자신들에게 돌아올까 우려하여 신씨를 폐위시키고 숙의 윤씨를 왕비로 삼았으니 이분이 장경 왕후였다. 그러나 10년 후에 장경 왕후가 승하하니 이때 많은 재이(災異)가 발생해 임금께서 신하들에게 바른 말을 널리 구하니, 이때 충암 등이 유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려 신씨를 복위시킬 것을 청하는 한편 훈신들이 군부(君父)를 흔들며 국모를 폐위시켜 추방한 죄를 논열하였다. 상소가 접수되자 대간 이행(李荇) 등이 이들을 체포하여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상국(相國) 정광필(鄭光弼)이 힘껏 구명해 준 데 힘입어 도형(徒刑)[죄인에게 중노동을 시키는 형벌]에 처해진 뒤 귀양 가는 것에 그쳤는데 오랜 시일이 지난 뒤에야 유배에서 풀려났다. 처음 상소문의 초안을 잡을 당시 관직에서 추방될 것을 각오하고 세 사람의 직인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두었다 하나 상소문에는 유옥의 이름이 빠져 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김정과 박상 두 사람이 유옥에게 “우리들이 모두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있네만 자네는 형제가 없어 자네 말고는 부모를 모실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죽으면 효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네”라고 하여 빠진 것이라 한다. 이후 1699년(숙종 25)에 현감 신규(申奎)가 신씨의 지위와 명호를 회복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에서 의견이 분분하여 시행되지 못하고 별묘를 지어 받들기만 하였다. 그 후 1740년에 다시 여러 신하가 모여 의논하고 임금이 결단하여 신씨의 호를 단경 왕후로 추상하고 태묘에 올렸으며, 능을 온능이라 하였다. 이때 두 분도 모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 주고 자손을 녹용할 것을 명하였다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절의탑비(節義塔碑)
『절의탑비문』은 국한문 혼용체로 새겨져 있는데 주요 한문만 병기하여 전문을 옮겨 봅니다.
「순창(淳昌)은 예로부터 절의(節義)의 고장이라 부른다. 그것은 조선 초에 두문동(杜門洞)에서 순절(殉節)했던 72현(賢) 중 순창인(淳昌人)이 다섯 분이요, 임진왜란(壬辰倭亂), 병자호란(丙子胡亂) 등 많은 국란(國亂)이 있을 때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 바친 선현(先賢)들이 그 얼마였으며 근세 독립운동(獨立運動)의 시초(始初) 병오창의(丙午倡義)가 우리 고장순창에서 시작되었다.
더욱이 순창은 조선시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비(愼妃)의 복위상소(復位上疏)를 당시 순창군수(淳昌郡守) 충암 김정(沖庵 金淨), 담양부사(潭陽府使) 눌재 박상(訥齋 朴祥), 무안현감(務安縣監) 석헌 유옥(石軒 柳沃) 삼선생(三先生)께서 상소문(上疏文)을 작성하였던 곳으로 삼선생의 절의비(節義碑)와 각(閣)에는 영조(英祖)의 어서(御書) 등이 보존 되어 있는 삼인대(三印臺) 앞에 삼인문화선양회(三印文化宣揚會) 600여 회원이 뜻을 모아 순창의 300개 마을에서 2개씩의 돌을 모아 탑(塔)을 쌓으니 순창군민의 뜻이 응집된 절의탑(節義塔)으로 순창의 역사와 함께 영원할 삼인대(三印臺) 앞에 불변의 상징돌의 기운이 쌓이고 또 쌓여서 새로운 형태로 웅기(雄起)하였으니 새롭게 다가오는 인연(因緣)들, 변질된 가치관(價値觀),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수용하고 강렬한 생명의 기운이 충만한 씨 한 톨을 얹었으니 온 세상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순창 절의정신(節義精神)의 탑으로 솟아 있도다.
지나가는 길손이여!
옷깃을 여미고 순창의 절의정신을 찬양하소서. 아니 그대의 소망을 이 탑에 기원하소서. 삼선생(三先生)과 단경왕후(端敬王后) 그리고 순창선현(淳昌先賢)의 혼(魂)이 감응(感應)할 것입니다.
모든 국민이 하나 되어 국가민족의 융성과 여러분의 소망이 성취되기를 삼인문화선양회 모든 회원은 두 손 모아 기원하면서 이 탑을 쌓습니다.
단기(檀紀) 4336년(2003) 8월 27일 삼인문화선창회(三印文化宣揚會)」
강천사 범종각(梵鐘閣)
2층의 누각(樓閣)으로 되어 있을 때는 범종루(梵鐘樓)라 하고, 단층일때는 범종각(梵鐘閣)이라고 한다.
범종은 일반적으로 동종(銅鐘)이라고도 하는데, 동종이란 사찰에서 사용하는 동제(銅製)의 범종으로, 대중을 모으거나 때를 알리기 위하여 울리는 종이다.
범종을 치는 것은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위해서며 아침 저녁으로 칩니다.
범종을 치는 시간은 사찰마다 조금씩 다른데 보통 아침은 3~4시경, 저녁은 6시경 정도입니다.
이 종이 울리면 부처님께 예불을 올리는 시간으로 지옥의 고통을 잠시라도 쉬게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범종梵鍾 4개의 佛具중 으뜸은 범종이다. 그 어떤 소리보다도 맑고 아름다우며 고귀한 해탈의 소리이다.
아침에는 28추(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4천 모두 28천이 울려 퍼지길 기원) 사시에는 18추(색계 18천에서 부처님께서 공양을 드시고 모든 신장님과 보살님이 드시도록 우리가 먹는 공양미를 천공으로 바꾸기 위해서이고) 저녁에는 33추(三十三天 - 수미산 위에 있는 天界 : 중앙에 제석천帝釋天이 있고 사방에 팔천씩 모두 합하여 삼십삼천이 있다)를 친다. 사물을 다루는 데는 아침과 저녁이 각각 다르다. 아침에는 운판, 목어, 홍고(북), 범종을 28번 올리며, 저녁에는 범종을 먼저 33번치고 홍고(북)를 올리고 목어를 친 다음 운판을 맨 끝에 친다. 법고 法鼓 고는 법을 전하는 북이라는 뜻이다.
강천사
강천사(剛泉寺)는 순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선운사의 말사로 비구니사찰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비구사찰로 변천했습니다.
여승들은 어디론가 다 떠나가고 남자스님들이 강천사를 큰 도량으로 만들기 위해 정진하고 있읍디다.
신라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원년(887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고, 고려 충숙왕(忠肅王) 3년(1316)년에 덕현(德賢) 스님이 중창하면서 오층석탑과 12개의 암자를 세웠습니다.
강천사는 고려시대 천여명의 승려가 머물정도로 사세가 활발하였으나, 임진왜란때 대부분 전소되었고, 그 후 일부 사찰이 중건되었으나 6.25전쟁으로 또 다시 불타 버리고 지금은 대웅전과 오층석탑 등만 남아 있는 남자승려 몇 명이 지키고 있는 작은 사찰로 되었다.
조선시대에서는 성종 13년(1482년)에 신말주(申末舟, 1439~?)의 부인 설씨(薛氏)의 도움으로 중조(中照) 스님이 중창했습니다.
이후 절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으나 선조 37년(1604년)에 소요대사(逍遙大師)가 중창하였습니다.
그런데 영조 36년(1760년)에 출판된 『옥천군지(玉川郡誌)』에 '복천사(福泉寺)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 무렵 한때 복천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철종 5년(1855년)에는 금용(金容) 스님이 중창하였습니다.
근래에는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보광전ㆍ칠성각ㆍ첨성각 등이 불탔으나, 주지 김장엽(金奬燁) 스님이 1959년에 첨성각, 1977년에 관음전, 1978년에 보광전을 각각 신축하였고, 그 뒤 1992년에 보광전을 대웅전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강천사 대웅전 앞에는 오층석탑(전북유형문화재 92호)이 있고 사찰 앞 등산로 옆에는 300살 모과나무(전북기념물 97호)가 서있으며 개울 건너편에는 조선 초기 선비들의 절의를 기리는 삼인대(三印臺, 전북유형문화재 27호)가 있습니다.
<귀로길에 옥정호 출렁다리를 구경했다.
임실 옥정호출렁다리는 2023년 3월1일 정식개통되었으며
길이 420m로, 83.5m 높이 주탑은 붕어 모양을 형상화했다.
옥정호는 1927년 섬진강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인공호수로 1965년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인 섬진강댐이 완공 되면서 넓은 호수가 조성 되었다.
국사봉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섬이 붕어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옥정호 출렁다리 붕어섬 생태공원에 조성된 국화꽃과 코스모스, 구절초 등 가을꽃들이 형형색색 장관으로 볼만하여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인생은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다 생각해 보듯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흔히들 인생이란
공허한 꿈이라든가
물거품 같고 뜬구름 같다던가
불확실한 항해라던가
죽음을 향한 행진이라던가
꼭두각씨 놀음이라던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인생이란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으앙! 하고 울며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과 만나고
형제 친척들과 만나고
남편 아내 자식과 만나고
수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그러다가 다시 하나 하나 헤어져서
마침내 혼자서 죽어가는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
아득한 과거로부터
인생은 수없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생로병사 희로애락 속을 그렇게 살아왔다.
만날 땐 미리 헤어질 준비를 하고
헤어질 땐 다시 만날 꿈을 안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돌고 도는 우주처럼
인간도 영겁다생을 그렇게 흘러간다.
만남은 깨달음이요 재생이요 창조요 환희이며
헤어짐은 인고요 진통이요 방황이요 기다림인데.
인생은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
--마음,마음,마음 중에서--
인간의 노화과정
老化는 生에서 죽음에 이르는 시기의 흐름' 이라는 유명한 動物學者 "콘호드"의 말이 있습니다.
'老化'에는 개인差, 男女의 성차(性差)가 있으나 의사들은 유전(遺傳)성에 많이 관계된다고 합니다.
눈의 老化는 7~10歲부터 시작되고,45-50歲에 이르러서 비로소 노안(老眼)이 되는 것을 자기스스로 인지하고 발견하게 되며.
'미각(味覺)은 13歲 때부터 老化가 시작되니, 4~50代가 되면 味覺신경이 老化하여 13歲前 먹었던, 최고의 음식 맛을 다시는 경험할 수 없게 되며, 나이를 먹을수록 짜게 먹기가 쉽다고 합니다.
體力은 17歲부터 老化하기 시작합니다,
운동중에서 가장 체력을많이 소모하는 운동이 자유형 장거리 수영입니다.
대개 올림픽에서 이 종목에 우승하는 선수는 17~18세 전후인데, 이 승자도 4年 후 올림픽의 이 종목에서는 다시 승자는 되지 못합니다.
'혈관(血管)은 10~12세부터 老化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죽은 깨, 기미는 10세에 시작하여 25세쯤 눈에 띄게 됩니다.
특히 혈관은 스트레스가 심하면 더 老化하는데, 越南戰에 참전하여 전사한 20代 청년 병사들의 血管이 40代와 같이 老化된 상태로 된것을 많이 보았다고 합니다.
腦(뇌)는 20歲 때부터 老化하는데, 20歲가 지나면 하루 腦세포가 10萬개씩 죽는다고 합니다.
뇌세포는 출산할 때 약140억개로 一生동안 늘지는 않습니다.
뇌세포 중 보통 사람이 사용하는 뇌세포수는 약 40억개이고, 20세 후부터는 하루 10만개가 노화하여 죽으니, 10年이면 3억 6천개, 30年이면 약 10억개가 죽고, 80歲 쯤 될 때는 사용하던 40억개 중반인 약20억개가 죽게 되며 노망을 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腦를 많이 쓰며 단련을 잘 시키면, 腦細胞는 덜 죽습니다.
老化방지를 위하여 글을 하루에 2 時間정도 쓰시거나 읽으시면 10만개가 죽지 않아, 老化를 방지할 수 있으므로 살아계실 때까지 건강하게 살도록 매일 글을 쓰도록 권장하는 바입니다.
특히 腦의 老化로 記憶力이 나빠지더라도 腦를 잘 쓰며 단련을 잘 시키면, 腦의 전두엽(前頭葉) 즉 창조를 관장하는 부분만은 그리 쉽게 老化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前頭葉의 단련방법으로서는 일기를 쓰거나, 편지를 쓰거나, 글을 짓는 것이 제일 좋고, 룰이 있는 운동경기를 하며 자제력을 기르고 讀書와 글 짓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TV를 보면서 필요한 것을 메모하거나 新聞을 읽으면서 언더라인을 하고 메모를 해둔다던가 라디오를 들으면서도 그것에 관련되는 배경을 상상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40代 이후부터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쉽게 여러가지 성인병이 시작되는 수가 많다 합니다.
이 成人病은 일단 발생하면 완치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高血壓, 中風, 心臟病에 가장 나쁜 것이 소금끼와 스트레스(stress)입니다.
그러므로 可能한 한 싱겁게 먹고 스트레스를 解消하도록 하며 糖尿病의 原因이 폭음, 포식, 밤 새워 노는 것,
또한 일만 죽어라 하고 취미가 없는 생활 등은 이런 성인병의 促發原因이므로 제거하도록 하며, 아직도 근치가 어려운 癌도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니,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이 있으면 곧 진단을 받아 조기 치료를 하도록 하여야 하며 初期 癌은 완치시킬 수가 있다 합니다.
특히 60~80代에는 男性은 위암(胃癌)에 대한 정기검사를, 女性은 子宮癌에 대한 정기검사를 받아 조기발견을 하는 것이 가장 필수항목입니다.
또 70견(肩), 류마치스 등도 스트레스에 의한 老化와도 관계되니,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취미생활이나 "라인댄스" 운동이 필요합니다.
60~80代는 老後를 위하여 趣味生活을 곧 시작하여, 무엇이든지 Life Work로써 활동하며 쉼이 없이 마라톤 式으로 조금씩 매일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Computer 공부, 書藝, 讀書, 골프, 여행, 음악감상, 낚시, 등산 등 무엇이던 몸과 머리를 쓰는 일을 꾸준히 趣味로 계속하는 것이 老化방지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교적 安定된 60~80代 우리님들께서는 글을쓰고 음악을 벗삼아 수준 높고 지혜로운 規則生活를 하시고 신체와 두뇌를 꾸준히 써가며 근심 걱정버리고 고민과 스트레스없이 즐겁게 살아가실 것을 간곡히 권장합니다.
참고로 조선시대만해도 평균수명이 30살을 넘지 않았습니다.
물론 거의 비슷한 시기의 로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아생존율이 극도로 낮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평균수명은 19세 로마시대의 평균수명은 28세였습니다.
16세기 유럽인의 평균수명도 21세를 넘지못했으며 1900년 미국인의 평균수명은 47세, 이씨조선 역대 왕들의 평균수명도 47세였습니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어제를 추억하고
오늘을 후회하고
내일을 희망한다.
수없이 반복되는 습관처럼
어제와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그렇게 산다.
삶이 너무나도 힘들어도
세월은 위로해 주지 않는다.
버거운 짐을 내리지도 못하고
끝없이 지고 가야 하는데
어깨가 무너져 내린다.
한없이 삶에 속아
희망에 속아도 희망을 바라며
내일의 태양을 기다린다.
낭떠러지인가 싶으면
오른 곳을 찾아 헤매고
암흑인가 싶으면 빛을 찾아 한없이 뛰어야 한다.
죽음의 끝이 다가와도 애절하게
삶에 부질없는 연민을 찾는다.
산처럼 쌓아도 재물도
호사스런 명예도 모두 벗어 놓은 채
언젠가 우리는
그렇게
그렇게
떠나야 한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
-좋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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