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이야기
제주공항에서 KAL호텔 까지는 금방 이었습니다
택시에서 내린후 74세의 어머니는
"금방타고 금방 내리는것을 먼택시를 탔다냐"
하셨습니다
80세의 아버지 께서도
"그런게말여 걸어서와도 금방 오것그만"
하셨습니다
광주에서는 왕복 비행기표가 없으니 제주에가면 KAL호텔 대한항공에
먼저가서 표를 구하라고해서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KAL호텔에 갔습니다
호텔로비에 큰재털이도 몇개 있기에 표를 끈어올테니 어머니 아버지께
여기서 담배한대씩 피우며 잠시 기다리시라고 하였습니다
컴퓨터가 없던때라 대한항공 여직원이 서류를 뒤적이고 몇군데 전화를 하더니
광주행 항공표는없고 제주에서 여수공항 으로가는 항공표는 있다고 했습니다
(78.5.8. 광주 - 제주 다니던 F-27 이란 44인승 대한항공 비행기를타고 부모님과
제주도에갔던 이야기입니다)
그때 등뒤에서 카메라 후레쉬가 번쩍 벅쩍 하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웃으면서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를 촬영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한복을입고 똑같은 검은색 낡은지팡이를 손에잡은체
빨간 카피트가깔린 호텔객실 올라가는 계단에 나란히 앉아 계셨습니다
나를보더니 일어나시려고 했습니다
나는 웃으면서
"어머니 더 앉아있어 표아직 못끈었어"
"어머니 괜찮아 어머니 아버지 사진이 미국도가고 일본도 가것네"
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쳐다보면서 좀 쑥스러워 하시며
"그려이 앗따 번갯불같이 오사게도 (정신없이) 뻔쩍 뻔쩍 한다이"
하면서 웃으셨습니다
미국사람 두팀과 일본사람 두팀이 좋아하면서 사진을 여러번 찍었습니다
평생처음 비행기를 타보느라 긴장했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커피숍에 앉으면 비싼 커피를 마셔야할것 같으니 돈내라고 안할것같은
깨끗한 호텔계단에 앉아서 쉬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여수행 항공표를 지갑에넣고 커피숍한쪽 구석자리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앉아
계시도록하고 쌍화차를 한잔씩 잡수도록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비쌀것인디 한잔갖고 나눠 먹을란다"
하셔서 커피숍 아가씨와 한참을 웃었습니다
한시간도넘게 여관을 열몇곳을 돌아다니다가 여관집 중학생 아들방을 어렵게 얻었습니다
그것만도 큰다행 이었습니다
KAL 호텔에와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시고 가는데
어머니는
"아따 호텔서 잘얻어 먹었다이 우유도주고 맛난빵도 한개씩 주드라
그아가씨 어디사냐고 물어봤드니 해남 산다드라 해남 이여그서 얼마나 머냐?"
하셨습니다
아버지 께서는
'해남이 아마 목포 미티 (아래) 일 것이여"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49세 어머니는 43세일때 나를 낳았습니다
그때 어머니 머리는 이미 절반은 하얀했다고 했습니다
큰딸을 18세에 시집보내고 4년후에 막내인 나를 낳았는데 사위한테
부끄러워서 혼났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치아가 안좋아서 나를 낳았을때는 이빨이
절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때부터
'우리아버지가 금산군수라 설허고 팔월에는 (구정과 추석) 하인을 시켜서
다른것 (선물을뜻함) 이랑 사탕을 한말썩이나 갖고왔단다
그래서 너그 이모와 내가 어릴때부터 사탕을 많이 먹어서 이빨이 다썩어 버렸다이"
하셨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순종황제와 동갑이고 같은 전주 이씨이기에 초시만 합격하여 32세에
특별히 금산 군수로 부임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공부하느라 장가를 미쳐 못갔다고 거짓말한후 금산 외할머니한테
새장가들어 8남매를 낳았고 어느땐가 금산 외할머니가 금산 친정에가고 없을때
결혼할때 데리고온 몸종인 셋째 외할머니를 임신 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 형제는 11남매이며 현재 85세-72세까지 3남매가 살아 있습니다 )
85년 여름에 김해에 다녀오다가 금산 군청에가서 확인해보니 이희학 이란 이름의
역대 군수는 없었습니다
어머니께 금산 군청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더니 큰소리로 화를내시면서
"야이놈아 우리 아버지가 17년간이나 금산 군수를했어 이놈아
금산군수 하고나서 완주 군수도 2년이나 했단다 이써근놈아
늬외삼촌들도 다알고 사창 부안촌 춘수리 새내 등계물 사람들도 다알어 이놈아 "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23세 때부터 43세 때까지 아들일곱 딸셋을 낳았습니다
아들넷 딸하나는 돐지나고부터 네살사이에 잘크다가 홍역으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열번도넘게
"그죽은 것들중에 늬큰성보다 세살덕먹은 해만이가 있었는디 참말로 이뻤다이
말도 잘듣고 말귀도 다알아듣고 외할머니 심부름 다허고 너그 아부지가 어디 갔다오면
말캉 (마루) 에서 훌떡훌떡 뛰면서 아부지 아부지 험서 불렀다이"
하시면서 네살때 홍역 앓다죽은 그예쁜아들 이야기를 자주 하였습니다
열을낳아 다섯기르고 다섯은 죽어버렸으니 반타작 한것입니다
금년에 (2012년) 85세인 큰누나와 20살 터울인 나까지 우리 5남매는 부모님 제사때나
친척 누구 결혼때등 일년에 몇번씩 반갑게 만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16살되던 음력 3.26.날 22살먹은 아버지와 결혼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그때 너그 아버지 양쪽다리 두개를 합쳐놔도 내다리 한개보다 가늘었다이"
하셨습니다
어머니한테 장가오기전 아버지는 하루에 2끼니만 먹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아침에 밥한그릇 점심은굶고 저녁에 죽한사발 을먹고 죽도록 일만했다고 했습니다
딸만둘인 외할머니는 빼빼마르고 볼품도없는 사위를 그래도 사랑해주며 좋아 하시면서
삼시세때 쌀밥만 먹였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매끼 외할머니 어머니 이모 세사람보다 밥보다 밥을 더잡수셨다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90 몇년전 그때 다른사람들은 보릿고개를 지나며 먹을것이 없어서
모두가 얼굴이 누렇게 뜨는판에 우리아버지는 쌀밥을 3끼씩 먹더니 얼굴이 뽀얀하고
살이 붙더라고 했습니다
외할머니는 그래도 남편그늘 근처에서 딸들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편이 작은 각시와사는 정읍 소성 춘수리 근처로 이사오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든고향 고창 부안면 사창의 수많은 논밭과 산을 머슴들에게 벌어먹고
약소한 선자를 받기로하고 점쟁이가 가르쳐 주는데로 6살 4살먹은 딸을데리고
소성면 두암으로 이사를 왔다고 했습니다
점쟁이가 이사즉시 외할아버지 옆으로 가지말고 좀 떨어진곳에서 설 (구정) 을 지나고
가까운곳으로 이사 하라고해서 두암에서 설을두번 지내고 차마 춘수리로는 이사가기가
그래서 옆동내인 부안촌으로 이사를 왔다고 했습니다
한동내에서 8년을 살았어도 그당시 대단한 인텔리이고 부자였던 외할머니는
아버지네 집과는 내왕도 없었고 그져 훈장댁 둘째 아들이니 배운것도 있을것이고
봉제사도 안맞으니 좋다고 하면서 어머니를 시집 보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 우리 어머니가 참 무식헌것들한테 둘려갖고 나를 너그 오가네집에 시집 보냈어야 "
하였습니다
신혼초부터 한동내 이기에 거의날마다 동생들이 아버지 한테와서 일하러 오라고하면
큰집 논이나 밭에가서 일을하고 끼니때밥은 우리집에와서 먹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 너그 오가들은(할아버지와 큰아버지를 뜻함) 참 염치도없고 속없는 사람들 이다이
작은 아들이라고 자식한테 숫가락 젓가락 한개도 안주고 장가보내 놓고도 한달이면
스무닷세는 불러다 밥도 안먹이고 일만시키고 #@&^^@$ "
우리 아버지는 신혼때부터 어머니한테 석이죽어서 평생을 쥐어살며 61년을 해로하다
83세봄에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결정적인 동기는 논(畓)열너마지기와 밭(田)다섯마지기를 사기당했기 때문 이었습니다
사기를친 사람은 어머니의 친정 작은아버지 (이홍기님) 였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빼빼 마른것이 붕알만 두개달고 장가온 주제에 우리어머니 (내겐 외할머니) 전재산을
협잡꾼인 우리 작은아버지 입에다 넣어주어 버렸단다"
란말을 수십번도 더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땅문서와 가장의 인감도장만 있으면 정읍에있는 일본사람한테 돈을빌릴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랫동내 춘수리에사는 처작은 아버지의 달콤한 꼬임에 빠졌는데
사기당한 내용은 일본에서 광목을 사다팔면 20배가 넘는 장사가 된다는것 이었습니다
작은 외할아버지가 쌀120 가마니값을 주고산 광목은 부안 줄포항으로 들어왔는데
말구루마 (달구지) 로 10대분량 이었다고 했습니다
말구루마 한대분량만 정읍으로 갖고와 아버지 보는데서 도매로 넘겼는데
돈의 분량이 밀가루포대 한자루 였다고 했습니다
우리아버지는 그광경을보고 금방 부자가 될것같고 기와집도 짓는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말구루마 9대분량은 아버지몰래 부안에 팔아서 부안 백산면에 논을 석섬지기를
(한섬지기는 20 마지기이고 4000평임) 사버렸다고 했습니다
한달넘게 처작은 아버지를 찾으러 다닌다고 정읍 부안 고창등 이곳 저곳으로
찾아다닌 아버지는 밥도굶고 아까운 고무신만 많이 달아졌다고 했습니다
그일로 외할머니는 시동생을 고소해서 다섯달 보름동안 정읍 유치장에 가두어
두었으나 하늘같던 논밭은 날라가 버렸다고 했습니다
(정읍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법원이 있었고 경찰서의 유치장이 전주교도소 대용감방 역할을
지금까지 하고있는데 2013년 부터는 고향마을 옆동내 마꼴에 교도소가 개소 된다고 합니다)
그일로 어머니와 동갑인 어머니의 사촌동생 (이종현님)은 우리아버지를 깍듯이 모시며
어쩌다 우리아버지가 백산 외삼촌 집에가면 꼭 닭을잡아서 대접 하였으며
최고의 VIP 를모시듯 하였다고 합니다
1899.12.22.생인 우리 아버지는 초등학교 문턱도 못가봤습니다만
1905.9.생인 사촌 외삼촌은 5년제 정읍농업학교 (지금 정읍농고) 를
졸업 하였다고 했습니다
명절에 큰어머니께 (우리 외할머니) 세배를 드리고 나서는 사촌매형인
우리 아버지께도 꼭 절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늘처럼 우러러보는 사촌처남이 세배 절을하니 맞절하는 우리 아버지가더
긴장하면서 공손하게 절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외삼촌을 가장 존경하고 어려워하고
좋아 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6살 차이였고 두분다 이상하게도 각각 82세 음력 동짓달에
교통사고를 입어서 똑같이 83세에 돌아 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직행버스를 시내버스 인줄알고 손을 들었더니 버스가 아버지의
오른손을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날 마침집에 갔더니 어머니는 어디갔는지 안계시고 아버지가 머리에
피가 많이묻은 어린애 기저귀를 감고 혼자서 안방에 누워 계셨습니다
오른손에는 버스의 검은 기름때가 그데로 범벅이고 솜저고리는 많은피가
흐르다 엉켜서 갑옷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정읍병원으로 모시고가 상처를 꿰메고 치료하였습니다
아스팔트길 모서리에 머리를다쳐 피를흘리며 길가에 앉아있으니 어떤 젊은
아기엄마가 귀저귀를 꺼내서 머리를 동여매 주셨다고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젊은 엄마께 감사드리며 그분이 한없이 고맙답니다
나도 그엄마처럼 교통사고나 등산사고등 어떤 사고를보면 꼭 거들어주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옆동내인 등계물 먼친척집 제사에 다녀오시다가 찻길을 건널려고
서있으니 친절한 승용차 운전사가 문을열고
"할머니 먼져가세요"
하면서 손짓을 하기에 고마워서 차앞을 지나다가 그운전수에게
"떡 좋아허요 떡좀 줄까요"
하니
"예 좀 주세요"
하더랍니다
차앞에서 친척집 제사에서 얻어오던 떡을 꺼내는데
뒤에서 과속으로 달려오던차가 서있는차를 못보고 충격해 버렸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2 - 3 m 앞으로 튕기면서 엉덩이뼈가 6조각으로 부서졌다고 했습니다
가해차량 운전수는 방위병으로 제대한지 3일된 청년 이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후 돌아가실 때까지 근3개월간 간호를 하시면서
애쓰신 큰형수님께 한없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수시로 문병오는 여러 친척들과
어머니가 다니시던 원불교 교당의 교무님께서 교인들과 매주 일요일 오후에
오시기에 어머니 방에서 냄새라도 날까봐 날마다 몇번씩닦고 방향제를 뿌리고
참으로 정말로 고생 하셨습니다
나는 죽을때까지 큰형수님의 고마움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형수님 그때 참으로 수고 많으 셨습니다
작은 형수님이나 우리집 사람은 멀리 산다고 어머니 속옷한번도 안빨아 드렸습니다
그러기에 모두들 큰아들과 큰며느리를 그렇게 중하게 생각하가 싶었습니다
제주시내 구경
여관에서 아침밥을 잘먹고 여관주인의 소개로 택시기사님도 좋은분을 소개 받았습니다
제주시내 용두암 삼천당등 이곳 저곳을 잠깐씩 구경하고 다녔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어디를가나 다른사람들의 관심의 대상과 구경거리 였습니다
한복입고 지팡이짚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같은 노인 관광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조금 나이들어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어디서왔냐 몇살 잡수었냐를 묻곤 하셨습니다
하루종일 구경한다고 이곳저곳 다닐려면 힘드실것 같았는데 택시타고 잠깐씩 걸으니
조금도 피곤하지안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제주 만덕공원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때 방영되던 김만덕 연속극을 재방송까지 다보시며 열렬한팬
이셨기에 김만덕 할머니의 일생을 축소해놓은 만덕공원을 아주좋아 하셨습니다
만덕공원 에서는 제주시도 잘보이고 한라산도 아주 잘보였습니다
1년에 두달정도만 잘 보인다는 한라산이 아주맑게 잘보여서 다행 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만덕할머니 프로필을 읽더니
"영감도 저것좀 읽어보제"
하셨습니다
아버지 께서는
"다 읽었어 연속극이랑 똑 같그만 "
하시면서 두분이 만덕할머니 연속극 이야기를 도란거리 셨습니다
두할머니 할아버지의 대화를 신혼여행온 젊은 부부들이 신기해하며 어떤팀은
웃으면서 사진도 찍어갔습니다
용두암 해변
용두암을 구경하고 새참으로 살짝데친 문어회를 잡수셨습니다
3000원하는 문어회를 어머니는 구경만 하시고 아버지께서 다잡수셨습니다
푹삶지 안아서 내입에는 그랬으나 무슨고기든 잘잡수는 아버지 께서는 초장을
듬뿍 묻혀서 맛있게 잘 잡수셨습니다
"앗다 많이 주어서 점심밥 안먹도 되것다"
하셨습니다
고기라고는 조기와 마른 명태만 잡수는 어머니는
"너그 아부지는 고기는 먼고기든 (무슨고기든) 다잘먹어 그비린것을 참 맛나게도먹데"
하셨습니다
한시간쯤후 택시기사님이 소개하는 값도싸고 맛있는 식당에 갔는데
반찬도 맛있고 해물탕이 참 맛있었습니다
택시기사님이 밥은 더잡수어도 돈을 안받으니 더잡수라고하니 어머니와 아버지는
밥을 반그릇씩 더잡수시며 아주좋아 하셨습니다
서귀포 천지연폭포
제주시에서 첫차로 5.16 도로로 한라산을 횡단해 서귀포에 왔습니다
터미널과 가까운 여관에 여관비를주고 짐을 맞겼습니다
택시를타고 천지연 폭포에 갔습니다
택시에서 어머니가
"제주도 사람들이 음식이랑은 참맛나게 잘해먹는데 먼말인지 (무슨말인지)
당초 말귀를 못알아 듣것어이"
하시니
아버지 께서는
"제주도가 일본하고 가까워서 일본말이 많이 세꼇다드만 (섞였다고 하드만) "
하셨습니다
한참을 배를잡고웃던 택시기사님이 제주도 방언을 몇가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어제 저녁은 친누나같은 애녀누나의 큰언니집에 초대되어 잘먹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녁을 잡수면서
"제주도가 섬이람서도 별것이 다있네 이것은 무엇인가 참 맛있그만이"
하시면서 맛있게구운 큰옥돔을
"조구 (조기) 같기도하고 맹태 (명태) 같기도 한것이 참맛나네"
하셨습니다
아버지 께서도
"호텔이랑 여관 안봤는가 번쩍번쩍 하는것이 서울이랑 똑같그만
제주도가 집도다 잘꾸며놓고 다부자들만 사는가벼이 (사는가보네) "
하셨습니다
희철이네 엄마는 두노인의 질문에 대답하느라 밥을못먹고 있었습니다
초저녁 잠이많은 어머니는 어젯밤에 늦게 주무시고도 새벽부터 바쁘셨습니다
스리퍼를 안신고 양말만 신은체 화장실을 갔기에 양말이 흥건히 젖어 버렸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께
"누가 바닥에다 물을 업질런는가 화장실 갔다가 양말을 다버렸어"
하셨습니다
아버지 께서는
"내가 그말 한다는것을 깜빡 잊었그만 나도 양말이 젖어서 꽉짜서 이불밑에 넣놨어"
하셨습니다
여관복도 타일과 화장실 바닥이 깨끗하니 계속 맨발로 다니셨다고 했습니다
(그당시 그여관에는 각방에는 화장실이없고 층마다 공중 화장실이 있었습니다)
나는 혼자서 한참 웃다가
어디서든지 스리퍼나 신발을신고 다니는것 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정방폭포 가는길 (사진 송희철)
80세의 아버지는 계단을 잘내려 가시고 올라갈때는 힘들어 하셨습니다
74세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정반대 이셨습니다
6살 이라는 나이 차이에서오는 체력 차이인가 싶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서귀포 - 천지연폭포 - 정방폭포 - 바닷가를 다니셨기에
피곤하시고 배도 고프셨을 것인데 밥생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항상 무엇이든지 잘 잡수시는분들 이신데 좀이상 했습니다
오후에는 중문단지로가서 구경할것도 많고 많이걸어 다녀야하니
점심밥을 잡수셔야 한다고 했더니 자장면이나 잡순다고 했습니다
두분다 밀가루음식을 좋아하시기에 곱배기로 잡수시라고 했더니
어머니와 아버지는 동시에 손사레를 치시면서 싫다고 하셨습니다
내가시킨 간자장 곱배기가 나오기전에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자장면을 다잡수고 입을 닦으셨습니다
간자장은 곱배기이기에 양도많고 고기도 많이들어 있었습니다
면을 다먹고 났어도 고기랑 양파등이 퍽많이 남았습니다
옆에 앉아계시던 어머니께서 수저를 두개들더니 한개는 아버지를 드리면서
"이것좀 먹어봐 간간하고 맛날것같네"
하셨습니다
자장면 한그릇 분량은되어 보이는데 두분이 금방 다잡수어 버렸습니다
중문해수욕장 언덕에 앉아서 어머니께
"평생처음 어버이날 효도한다고 제주도에 모시고 왔는데 이러면 쓰것는가"
했더니
"너한티 해준것도 없는디 너혼자 돈쓰는것이 미안헌게"
라고 하셨습니다
3년후 81년 여름 휴가때
7세 5세 4세 3남매를 데리고 우리 다섯가족이 제주도에 갔습니다
함덕 해수욕장 1박후 - 성산포 - 서귀포 - 중문 해수욕장 까지오는데
애들은 가게만 보이면 무조건 하드 오징어 음료수 과자 과일등을 사달라고 졸라댔습니다
서귀포에서 택시타고 중문 해수욕장에 가면서 그2층 중국집앞을 지나가는데
순간적으로 목이 메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께서는 막내아들이 돈쓰는게 아까워서 자장면 곱배기도 안잡수셨는데
우리 애들은 구경다니다 가게만 보이면 무엇이든지 사달라고 졸라댔습니다
중문 해수욕장에서 3일째 되는날 하필 우리텐트 바로 아래쪽에
우리나라 여자와 결혼하여 애들도 3남매인 미군이 큰군 용텐트를 쳤습니다
텐트를 치자마자 번개탄에 고기와 쏘세지를 굽는데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우리텐트 말고도 여러곳에서 기막힌맛의 진원지를 찾는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우리 애들셋은 고기와 쏘세지를 사달라고 엄마를 조르고 나를 조르고 난리였습니다
땡볕에 옷을입고 뜨겁고 긴백사장을 지나서 시내버스를타고 서귀포에 갔습니다
소고기1근 삼겹살1근 쏘세지 파 마늘 상추 음료수 과일 번개탄 석쇠등을
사갖고 땀을 줄줄 흘리며 텐트로 왔습니다
이튿날 먹다남은 고기와 쏘세지등 1/3은 상했기에 쓰레기통에 버릴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때 추석이나 구정이 돌아오면 돈없는 농사꾼 아버지한테
좋은옷 사달라고 며칠전부터 조르듯 우리 애들도 내가 그랬듯 똑같았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차이점이 이런것인가 싶습니다
나는 지금도 간짜장이나 국수를 먹을때는 목이울컥 메입니다
아버지탄신 100주년 (음력)
1999.12.22. 부안촌 꽁방 산소에서 우리 5남매와 손주들이 조촐한 추모행사를 갖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서당 훈장님의 4남 4녀중 누님 형님 다음 셋째로 태어나 셨습니다
두살더먹은 큰아버지와함께 할아버지한테 천자문을 배우다가 잘못외우면 날마다
매를 맞았다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 담뱃통과 목침 (나무로 만든벼개)으로 맞아서 머리에터진
상처가 5-6곳 있었습니다
큰아버지는 장가간 후에도 큰아들이라 공부해야 한다고 명심보감과 소학 대학까지
배우다가 이틀거리로 매를 맞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와 동갑인 작은아버지는 공부를 아주 잘해서 한번도 매를 안맞았고
막내작은 아버지는 막내아들 이라고 안때리셨다고 했습니다
4남4녀를둔 할아버지는 막내고모만 천자문부터 공부를 가르쳐 주시고
막내딸과 동갑인 큰손녀딸은 공부를 일체 안시켰다고 했습니다
막내고모가 붓으로 정성들여 복사한 춘향전과 장화홍련전은
수십년간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즐겨 읽었습니다
언제가 신혼초에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날마다 맛난 쌀밥먹고 매도안맞고 욕도안먹고 이런 시상도 (세상도) 있네잉"
하면서 행복해 했다고 하였습니다
6.25때 빨치산들이 설칠때 동내 뒷산으로 1년된 송아지를 데리고 피난갔다가
송아지가 제어미 부르는 소리에 빨치산 들에게 들켜서 발길로 차이고 송아지를
뺏겨서 어머니한테 쫓겨났다는 아버지 였습니다
아버지가 송아지뺏긴 3일후 지서와 가까운 춘수리 천영이형네 집으로 큰소를갖고
피난간 어머니가 빨치산들한테 소를뺏기고 왔을때 어머니를 위로하며
어머니 병난다고 10리나되는 메다리 까지가서 외상으로 한약을 지어왔다고 했습니다
그때 소두마리는 뒷넘어논 두필지값 이었다고 했습니다
6.25. 이듬해 가을 50대초반인 아버지는 나이좀 먹었기에 빨치산들이
생각해줄 줄알고 큰집에서 자다가 잡혀서 쌀다섯말을 지게에 짊어지고
재넘어 - 새암바다 - 쌍치 - 복흥 - 담양 가막골까지 엿새를 끌려 다닌일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고생한일로 한동네 좌익 부역자 Li 씨와 신점사는 한누구를
오랫동안 서운해 하셨습니다
그들이 빨치산들에게 한마디만 해주었으면 아버지는 빠졌을것 이라고 했습니다
부안 변산에서 순창 회문산에 이르는 빨치산들의 이동로 선상에있는
우리 고향마을 부안촌은 빨치산들 보급투쟁 으로인해 피해도 아주 많았습니다
어머니탄신 100주년 (음력)
2005.6.10. 좌는 아버지 산소이고 우는 어머니 산소입니다
뒤로 보이는 산소는 외할머니 산소입니다
의령 남씨인 외할머니께서는 고창 부안면 사창 인근에서 제일부잣집
무남독녀 였다고 합니다
옆동네 공부잘하는 가난한집 아들인 외할아버지를 데릴사위로 맞았답니다
그때 외할머니집 울안에는 머슴이 여섯집이 살았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말로는 어머니와 이모님은 머슴집 여자들 등에서만 자랐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와 이모를 낳은후 외할아버지가 벼슬한다며 객지로나가서
작은 외할머니를 둘이나 거느려서 20대 때부터 한많은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보다 4살많은 셋째 외할머니는 둘째 외할머니 등살에 못이겨서
우리 집에와서 5년간 살았는데 아랫동내 춘수리에사는 외할아버지가
젊은 세째 외할머니한테 찾아오는 날에는 방에불도 따듯하게 때주고
외할머니는 강고리 할머니 댁에가서 주무셨다고 했습니다
외할머니는 몇년후 셋째 외할머니를 군산으로 시집도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보름전쯤 치매기가 퍽 있었으면서도
"내가 인자 믿을사람은 너뿐잉게 늬가 우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산소에
늬생전에는 술어고 (술하고) 밥냄새좀 꼭 맞혀 드려라잉 꼭"
하시면서 손에힘을 주셨습니다
나는 그때 부천에 살면서 매주 금요일 밤에는 기차를타고 고향 정읍에 갔습니다
저는 매년 1-2회 외증조 할머니와 외증조 할아버지 산소에 꼭 김밥과 술을갖고
성묘를 다니고 있습니다
외할아버지 산소
외할아버지 산소 비석에는 통훈대부 금산군수 라고쓰여 있습니다
군수를 하신분이 어떻게 면장을 하였냐고 (나이드셔서 정읍 소성면장을 여러해 하셨음)
어머니와 여러번 토론을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나에게 이놈이 저놈이 하시면서 화를내시곤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 속뒤집어서 미안하네"
하면
어머니는 금방 허허 웃으시면서
"아이고 저 써근놈"
하시곤 하였습니다
외할아버지의 호적에는 둘째부인인 풍천임씨 금산외 할머니가 처로 등재 되어있습니다
언젠가는 외할아버지 제사때 밥을 두그릇만 담아놓아서 딸같은 이모들과 이년 저년 하면서
제사를 못지내게 하면서 큰싸움을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년들아 어머니가 셋인게 (셋이니) 밥을 네그릇담아 놔야하지 왜 두그릇만 담아놓고
제사 지낸다냐 이년들아"
하면서 종옥이 종기 외삼촌과 장손인 하영이형을 혼내키고 밥을 다시하여
제사를 모셨다고 했습니다
내가보아도 우리 어머니는 퍽 정의로운 여장부 이셨습니다
어릴때 어려운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시다가 아버지와
입다툼 하는것도 여러번 보았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외손등 손자손녀가 11명이나 되었을때 막내외삼촌을 낳으셨습니다
나보다 7살더먹은 막내 외삼촌은 나와는 지금도 퍽 각별하게 잘지내고 있습니다
외할아버지!
하늘나라에서는 당신의 외도로인해 일평생을 한과 고통과 슬픔속에산
의령남씨 외할머니와 진주강씨 외할머니께 사과는 하셨는지 궁금 하답니다.
[ 프로필 ]
오 해 봉
전북 정읍 출생 (1947)
현재 남양주 거주
맹호부대 소대장으로 월남전 참전
공무원 34년후 퇴임(군생활 8년포함)
2000.1. 신장 각막 골수 장기 기증
헌혈 46회 (2011.10.25 현재)
지리산 등산 105회 (2011.11.20 현재)
한국군사학회 회원
충무회 회원
청우산악회 회원
지리산문 회원
부천 젊은벗들 고문
하동송림 회원
시와늪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