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은 결코 기회주의자도 친일분자도 아닙니다. 1932년 대구사범학교, 1937년 문경보통학교 교사, 1940년 만주군관학교, 1942년 일본육사, 1944년 만주군 소위, 1945년 광복군,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 1961년 군사혁명, 이 모든 결단들은 오직 시대의 실존상황을 뛰어넘는 수단이며 죽음을 각오한 선택입니다. 박정희를 보면서 '여명의 눈동자'의 최대치를 생각합니다. 박정희, 그는 '엄청난 성취동기를 가진 행동인'일 뿐입니다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조선인 흔적 지우기
그 당시 창씨개명은 '거의' '누구나 다'하는 일상적인 식민지 백성의 '살아가기'의 한 방편일 뿐입니다. 대표적인 민족시인 윤동주도 창씨개명을 했습니다.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육사를 가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을 해야 했습니다. 군인되기의 한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이것 역시 '~카더라'수준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런 걸로 박정희를 폄하한다면 그런 정도의 이야기로 박정희를 최고의 독립투사로 만드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습니다. 근거없는 소설쓰기는 이제 그만 중단해야 합니다.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1
가장 먼저 방문한 나라가 일본이고 최초로 대외정책을 밝힌 기자회견의 주제가 한·일 교섭의 재개이며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라고 일본어로 말한 것이 염일론자(일본을 미워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친일이겠지만 박정희는 당장 대한민국을 구해내기 위한 3억달러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귀하라면 어떻하시겠습니까?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2
3억달러의 청구권자금을 받아 '거대한 빈민굴'이었던 대한민국을 가난의 굴레에서 구해내고 경제개발을 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는 대신 그 3억달러를 포기하고 계속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제 35년간의 피해보상을 하라고 데모를 계속해야 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