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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ort Summary
이 책에는 네트웍으로 성공한 맥도날드의 창립에서부터 현재의 거대한 기업을 이루기까지 그리고 맥드날드 사의 창업자인 레이 크록이 역경을 딛고 부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다.
추천하는 글
제1부 맥도날드 신화창조의 토대
제2부 우주시대를 지향하는 맥도날드 성공 이야기
후기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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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7년간이나 종이컵 판매를 하고 난 뒤 새로운 기회라고 여겨진 멀티믹서기를 전국의 약국, 소다수 판매점, 우유 가게에 팔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국 각지에서 전화를 걸어 지역과 판매점에 상관 없이 “캘리포니아 주 샌 버나디노의 맥도날드 형제가 가진 멀티믹서와 똑같은 것을 구입하고 싶다.”고 말했다. 직접 그들을 찾아나선 나는 무려 여덟 대나 되는 믹서를 가지고 한 번에 40개의 쉐이크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당시 대부분의 가게에서는 150달러나 되는 그 기계를 한 두 대 들여놓고 쉐이크를 판매하는 정도였던 것이다.
현지의 대리인과 직접 통화를 한 나는 곧장 그곳으로 날아가 햄버거를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무척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식당 주변에는 파리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깔끔하게 복장을 챙겨 입은 종업원들은 자신의 외모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식당 주변의 모든 것을 깔끔하고 청결하게 유지했던 것이다. 심지어 주차장까지도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날 저녁 맥도날드 형제와 만난 나는 그들이 설명하는 판매 시스템의 간편성과 효율성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들은 메뉴 생산 과정을 최소한의 공정으로 줄여 최소의 노력으로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유지하였다. 맥도날드 가게에서는 오직 햄버거와 치즈버거만을 팔았는데, 모두 같은 공정으로 구워져 15센트에 판매되었으며, 4센트를 더 지불하면 치즈 한 조각을 얹어 주었다. 그리고 간단한 음료는 10센트, 16온스의 밀크쉐이크는 20센트, 커피는 5센트를 받았다. 맥도날드 가게가 지닌 사업성에 매료된 나는 그들에게 이 가게의 전국 체인점을 열 것을 제안했다. 1954년, 시카고로 돌아오는 나의 서류 가방 안에는 맥도날드 형제와 계약한 서류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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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삼촌의 약국에서 소다수를 파는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그 아르바이트를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친구들과 함께 작은 레코드점을 차릴 수 있었다. 사업이 실패로 끝난 후 에는 무료하게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2학년 봄 학기가 끝날 때쯤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휘말리게 되었고, 나는 그것을 기회로 삼아 커피콩과 다른 신상품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방문판매업을 시작하였다. 그후에는 적십자 사 구급차 운전기사로 일을 하다가 싸구려 무도회장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을 방문하던 손님이었던 에델을 만나 결혼하였다. 결혼을 하려면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설득에 따라 종이컵 회사에 취직하여 판매를 맡게 된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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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컵을 판매하는 세일즈 생활은 그리 쉽지 않았다. 종이컵 사업은 계절적인 영향을 많이 받아 겨울이 되면 판매가 저조해졌다. 그래서 나는 주요 타겟을 청량음료 판매점으로 삼아 공략하기 시작했다. 종이컵은 유리보다 위생적이었고, 더구나 깨질 위험도 없었으며, 값이 매우 싼 편이었기 때문에 누가 한 두 개쯤 집어간다고 해서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러한 장점을 꿰뚫은 나는 그것을 판매의 주안점으로 삼았고, 습관적인 타성만 극복된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종이컵 세일즈가 쉬워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다섯 시간 정도 잠을 자고, 세일즈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다른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종이컵 사업은 내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대로 번성해 나갔고, 그에 따라 자신감도 비례하여 증가했다. 고객도 늘어나기 시작했을 즈음, 당시 신문에는 플로리다의 경제 호황에 대한 기사가 끊이지 않고 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플로리다 주로 이주하여 부동산 판매 회사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그 일도 부동산 시장이 침체하기 시작하여 오래 하지 못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플로리다를 떠나온 것은 매우 적당한 때였다. 우리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동산 경기의 붕괴로 인해 불황이 일어났다. 내가 다시 플로리다로 가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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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부터 1937년까지 10년간 종이컵 사업은 크게 성장했다. 금주법이 시행되어 술을 팔 수 없었던 가게에서 술 대신 아이스크림을 팔기 시작하여 용기로서의 종이컵 시장도 커진 것이다. 대공황으로 인한 엄청난 불황에도 불구하고 나의 종이컵 판매는 기업 고객들을 확보함에 따라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감봉과 보조금의 삭감을 강요하는 회사를 잠시 떠나기도 했지만 다시 돌아와 열심히 일을 했으며, 전반적인 경제가 불황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회사는 꾸준히 성장했다. 또한 에델은 무척 검소하게 생활을 했기 때문에 우리의 저축은 계속 늘어만 갔다.
고객 중에 기존의 방법보다 훨씬 더 시원하고 더욱 더 진한 밀크쉐이크를 만들어내 큰 수익을 얻고 있는 랄프 설리반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또다른 고객 중 한 명인 얼 프린스와 그들을 동업으로 이끌었다. 사업 제휴 결과 매일 같이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던 얼 프린스는 쉐이크를 미리 만들어 금속 통에 보관했다가 판매를 했기 때문에 세척해야 하는 우유 통들이 싱크대에 가득 쌓이자 결국 쉐이크를 보관하는 금속통의 위쪽 부분을 잘라 원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원통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좁아지는 부분은 슬리브 관처럼 16온스 종이컵 속으로 들어가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원통의 위쪽 부분과 컵의 가장자리가 정확하게 일치하였기 때문에 그 안에 쉐이크를 담아 그대로 믹서기에 올려놓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그리고 얼은 기존의 싱글 믹서로는 밀려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5대의 믹서가 배치되도록 고안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엄청난 양의 밀크쉐이크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한 발명품이자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은 상품이었다. 얼이 멀티믹서를 개발한 후 나는 그 기계를 회사로 가져가 실연을 해보였고, 그 기계에 매료된 회사 경영자 존 클락은 서둘러 새니터리 컵 앤드 서비스 사가 멀티믹서의 독점 공급자가 되는 계약에 사인을 했다(클락은 일선에서 새니터리 컵 앤 서비스 사의 사장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고, 그 회사의 대주주는 뉴욕에 있는 코우 형제였다. 그리고 클락은 서비스 컵 사에서 생산하는 릴리 컵의 중서부 지역 독점 판매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발명품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본사 대신 나는 얼 프린스와 동업을 시작하였다. 대신 멀티믹서 계약권은 내가 갖고 ‘프린스 캐슬 판매’로 이름 지은 내 회사의 지분 60%는 멀티믹서 계약권을 갖고 있던 새니터리 컵 사가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매우 악랄하고 지독한 조건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내 목을 조이는 덫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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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제품 멀티믹서를 판매하기 위해 독립한 후 멀티믹서의 판매 실적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재정상태는 늘 불안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새니터리 컵 사는 60%의 지분을 가진 동업자였기 때문에 나의 급여를 제한할 수 있었고, 클락은 내가 릴리 튤립 컵 사를 나왔을 때와 같은 수준으로 급여를 동결해 놓은 상태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코우 형제는 멀티믹서와 아무 관련이 없었고, 클락은 지분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현금 6만 8천 달러를 요구했다. 나는 힘겹게 그 채무를 이행해야만 했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로 들어서게 해주었다. 그리고 2차대전이 끝날 때쯤에는 멀티믹서 사업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경영할 수 있었다.
나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열심히 멀티믹서를 팔러 다녔다. 하지만 당시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이제는 새로운 사업을 찾아야만 했다. 나는 친구의 소개로 접는 테이블과 의자를 팔기 시작했지만 한 개의 주문도 받지 못하고 말았다. 이 사업의 대 실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캘리포니아의 샌 버나디노에서 8개의 멀티믹서로 엄청난 양의 밀크쉐이크를 만들고 있다는 맥도날드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직접 확인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그때 내 나이는 52세였다.
제2부 우주시대를 지향하는 맥도날드 성공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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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드라이브 인 식당의 등장으로 요식업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대공황이 할리우드 지역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생활 태도에 강한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이 식당들의 수는 점차 늘어났으며, 업자들 간의 경쟁으로 인해 서비스의 질도 나날이 향상되어 갔다.
맥과 딕 맥도날드 형제는 1937년 작은 드라이브 인 식당을 차리면서 이 업계에 뛰어들었다. 매우 빠르게 성장한 그들은 1948년, 서비스와 메뉴를 매우 간소화하여 햄버거, 감자 튀김, 음료가 전부인 식당을 열었는데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이처럼 간소한 메뉴와 서비스 때문에 맥도날드 형제는 서비스의 질적 향상에 보다 더 신경을 쓸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그 식당의 성공 비결이었다.
그 식당이 지닌 가능성에 매료된 나는 맥도날드 식당의 가맹점 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은 가맹점 총 매상액의 1.9%를 받고, 가맹점 허가를 내줄 때마다 950달러의 계약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세부 조항들로 이루어졌다.
어느 지역에서나 동일하게 설계하도록 되어 있는 맥도날드 매장의 문제점을 발견, 수정하고, 제대로 된 감자튀김을 만들 수 있게 된 다음 첫 매장을 열어 수익을 얻게 되자 나는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맥도날드 형제가 말해주지 않았던 계약상의 허점이 드러나면서 경제적으로 곤궁에 처하기도 했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매장으로 출근하여 조리 과정에서의 주의점을 알려주고 청소도 하곤 했다. 매장에 쓰레기라도 떨어져 있으면 나는 화를 냈다. 나는 완벽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성취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그 ‘완벽’을 나는 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끼는 맥도날드에서 그 ‘완벽’을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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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람이 필요했지만 재정상의 어려움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맥도날드를 위해 24시간이라도 바치겠다는 열정과 끈기를 가지고 있으며, 진실하고 진정한 믿음을 주었던 해리를 만났다. 결국 주급 100달러의 조건으로 채용된 그는 우리가 곤란을 겪고 있는 법률 및 재정적인 문제에 대해 실로 감탄할 만한 연구와 노력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덧 새로운 성장 단계에 돌입하였고, 향후 몇 년을 좌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 시기에 내려졌던 기본적인 결정 중 하나가 가맹점 시스템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모기업이 재료 공급 사업에 뛰어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수익을 높이기 위해 가맹점에 판매하는 제품의 질을 저하시키는 일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맥도날드가 우리의 계획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자영 점포를 개발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자영 점포의 개발은 총체적이고 장기적이며 전국적인 마케팅 계획의 일부로 맥도날드의 매장 위치를 선점하는 강력한 시스템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가맹점 경영자에게 맥도날드의 이름만 빌려주는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메리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이를 위해 프랜차이즈 코퍼레이션을 설립하기로 하였고, 해리는 이 계획의 현실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드디어 맥도날드에서의 순익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해리는 가맹점 경영자들이 지불하는 월납액으로 대출 금리 등을 지불하고 순익을 남기는 방법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리고 가맹점 경영자들로부터 규정된 매일 납부액이나 매출액의 일정 퍼센트 중에서 큰 쪽을 받아들였다.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상당한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점포의 위치가 몹시 나쁘지 않는 한, 품질과 서비스가 성공을 보장하였으므로 나는 기본적인 서비스 내용을 언제나 반복하여 강조했다. 특히 새롭게 개업하는 곳일 경우에는 더욱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이유로 나에게는 회사 경영을 담당할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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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아낸 사람은 프레드 터너였다. 훗날 맥도날드의 사장이 되고 더 나아가 이사회 회장이 될 그는 원래 가맹점 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온 사람이었다. 가맹점 개업을 기다리는 동안 매장에서 운영 방법을 배우는 것이 어떻겠냐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을 시작했다. 지배인으로 활동하던 프레드는 우리가 전국에 25개의 지점을 새로 개업했던 1957년 1월부터 우리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고, 모든 지점의 개설에 관여하였다.
요리사들이 일을 하는 데 편리하도록 햄버거 빵을 낱개로 자르게 하고, 재활용이 가능한 튼튼한 햄버거 포장용 종이박스를 제작하는 등 프레드는 계속해서 조그마한 단점들을 하나씩 개선해 나갔다. 그리고 새로운 가맹점이 개업을 할 때마다 그 지역 제빵회사에 들러 맥도날드 사가 원하는 빵에 대해 일러주곤 하였다.
맥도날드는 빵과 케첩, 머스타드 등을 다른 상점보다 더 많이 구입했기 때문에 재료 시장에서의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공급업체에게 비용을 보다 더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어 맥도날드에 더 싼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비교우위의 상황을 십분 활용했다. 그 중의 한 가지 방법이 대량구매였고, 한 번에 주문량 이상의 배달을 허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매방식으로 자동적으로 재고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패티 가격을 파운드당 10달러로 정했고, 그것은 곧 업계의 표준가격이 되었다. 그리고 프레드는 패티가 포장지에 달라붙지 않도록 최적의 포장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패티가 망가지지 않도록 패티를 쌓아올릴 수 있는 적당한 높이를 알아냈고, 고기 공급업체에 포장 단위를 정해 주었다. 이러한 모든 아이디어의 목적은 요리사들의 작업이 신속하고 쉽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비용 절감이나 재고관리 등에 대한 고려도 중요했지만 조리실에서 일어나는 결정적인 일들이 우리 생산라인의 핵심공정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일한 지 1년만에 프레드는 회사 구매 분야의 상당 부분을 맡게 되었고, 신규 가맹점의 가입이 없는 동안 그는 기존의 가맹점을 관리하였다. 그리고 그가 가맹점을 돌아보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기록한 체크리스트는 오늘날 맥도날드의 품질 관리의 필수 요소인 가맹점 점검 양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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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운영 과정에서 필요한 대출을 받기 위한 협상 과정에서 10여 개의 지점을 묶어 하나의 회사 형태로 운영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하면 맥도날드 본사와 상관없이 확실한 수입 기반이 보장될 수 있었다. 따라서 만약 최악의 상황에 놓인다 하더라도 규모를 조금 축소하고 다른 이름으로 우리 회사 매장들을 가동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 또 다른 이름의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자금 투입이 불가피했다. 이를 위해 해리가 동분서주한 결과 우리는 우리 주식의 약 22.5%를 가져가는 조건으로 3개의 보험회사로부터 150만 달러를 대출받았다.
이 대출금은 맥도날드의 60년대를 열어준 신호탄이 되었다. 물론 우리 지점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지만 그나마 150만 달러의 대출이 없었더라면 시작조차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1960년 여름, 오하이오 콜럼버스에 우리 스스로 지은 첫 지점을 개업하였다. 그때 나는 150만 달러의 대출 건을 성사시킨 해리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는 사업을 전개하면서 많은 지점들을 사들였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지점 운영자들에게 명백하게 공개하였다. 우리는 회사가 전 지점의 30% 이상을 소유하게 되면 경영이 어려워지고 비생산적이 될 것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맥도날드가 가맹점 경영자들을 위해 준비한 슬로건은 ‘자영사업을 하십시오. 그러나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것이었고, 그것은 성공 비결 중의 하나였다.
1950년대 후반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채용하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회사에 들어와 현재 맥도날드 간부가 되었거나 잘 나가는 가맹점의 사장이 된 사람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성공을 이룩한 것은 그들 자신이다. 나는 단지 동기만을 부여했을 뿐이다. 어쨌든 나는 수많은 성공담을 들었고, 또한 알고 있다. 그렇다고 맥도날드가 아무에게나 성공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맥도날드 가맹점으로 성공을 하려면 결단력과 끈기가 필요하며 상식을 갖추고 원리원칙에 충실하여 열심히 일해야 한다. 물론 특별한 재능이나 지적 능력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가맹점 경영자들에게 언제나 맥도날드 매장을 가지고 그곳에서 열심히 일한다면 반드시 성공을 거두고 백만장자가 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해 왔다.
하지만 맥도날드 형제의 캘리포니아 지점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곳에서는 그들 형제가 소유한 샌 버나디노의 지점만이 유일한 ‘순수’ 맥도날드 매장이었고, 나머지 매장들은 잡다하게 이런저런 음식들로 메뉴판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햄버거의 품질이 형편없는 것은 물론이고, 고기에는 염통을 갈아 섞었으며, 게다가 지방 함량이 높아 느끼한 맛이 났다. 그런데도 맥도날드 형제는 그러한 영업 행위에 대해 등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지역의 경영자들은 대량구매와 광고에 대한 나의 협조와 제의를 거부했다. 할 수 없이 나는 당분간 그저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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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형제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결국 270만 달러를 그들에게 주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리, 상호 등을 양도받았다. 하지만 협상의 마지막 순간에 맥도날드 형제는 샌 버나디노에 있는 레스트랑의 소유권을 주장했고, 나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맥도날드에 대한 나의 믿음은 거의 종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삼위일체나 코란, 유대 율법을 모독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나에게 있어서 맥도날드는 그에 버금가는 존재인 것이다. 나는 신과 가정과 맥도날드를 믿는다. 그나마도 회사에서는 그 순서가 역전되고 만다. 100미터 경주를 생각해 보라. 달리는 동안 신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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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서 중요한 업무뿐만 아니라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해리와 의견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재역할을 하는 마르티노가 있었지만 회사 분위기는 점점 썰렁해졌다. 해리는 자기 쪽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었지만 나는 지켜보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즈음 마침내 캘리포니아 프로젝트가 나에게 노력한 만큼의 보람을 안겨주기 시작했다.
1961년의 맥도날드 캘리포니아 지점들은 그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았고, 판매 실적도 부진하여 맥도날드 사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그 후 엄청나게 성장하여 1967년에는 캘리포니아의 판매 실적이 그 지역을 제외한 다른 모든 맥도날드 지점의 매출을 합친 것과 거의 맞먹을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초기의 난장판을 교통 정리하여 제 방향으로 돌려놓는 데 꼬박 3년을 투자하여 얻은 결실이었다.
한편 로스앤젤레스에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던 공급업체들의 횡포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에 따라 패스트푸드점 경영자들은 쇠고기가 부족해지면 고기에 구멍을 뚫는 고전적인 방법을 동원하면서까지 버텨내고자 안간힘을 썼다. 설상가상으로 캘리포니아 고기 공급업체의 본사들은 독점 납품계약을 체결하는 조건으로 그들의 가맹점에게 공공연히 뇌물을 요구하였다. 물론 납품 가맹점들은 그렇게 하더라도 그 이상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 결국 우리 지점들만 이중삼중으로 손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의 모든 패스트푸드점들이 그러한 상황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나는 정직한 경영을 지향하며 지점 경영자들을 보호해야만 했다. 하지만 공급업자들은 햄버거를 15센트에 팔 수 있는 가격으로 재료를 공급하면 그 성장의 혜택이 그들에게 돌아가게 된다는 우리의 설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곳에서 맥도날드는 아직 체인점으로서의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을 설득하기가 더욱더 어려웠다. 그 모든 문제는 결국 판매실적 부진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재료 공급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만 했다. 고기 공급자를 선택하고, 트럭 한 대가 각 지점의 창고에 들러 필요한 모든 재료를 한꺼번에 채워주는 원스톱 방식을 개발하여 양쪽에 커다란 비용 절감 효과를 가져왔다. 우리와 함께 일하게 된 종이 제품과 쇼트닝 공급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높은 성장률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의 재료 공급 문제가 해결되자 더 많은 지점들이 개업하게 되었고, 사업실적은 점점 좋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정상적인 상태에 못 미치는 상황이었는데 어느 날 1장 짜리의 TV 광고 기획서가 이 상황을 반전시켰다. 그렇게 캘리포니아에서의 고비를 넘기게 되자 회사 전체가 이익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자 튀김의 조리 시간을 적절하게 조정하는 컴퓨터를 개발하고, 공급업자들이 패티의 지방함유량을 19% 이하로 유지하게 하는 등의 노력으로 우리는 날이 갈수록 성장을 거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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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우리는 전국 각지에 110개의 지점을 개설하여 햄버거 업계의 모든 기록을 갱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총매출 1억 2,969만 달러, 순익 210만 달러의 실적을 올려 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렇게 업무 영역이 급속도로 확장되자 해리는 회사의 일상적인 사무를 떠나 기업 공개 방법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나는 본사에서도 중요한 업무를 맡아야 했다.
특히 해리는 당시에 유행이던 대기업과의 합병 가능성을 타진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시카고에서 우리 기업의 모든 상황을 관리하기는 사실상 힘들었기 때문에 분권화 작업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회사의 권한이나 결정권은 가능한 한 가장 아래쪽 선까지 분산되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내 지론이었던 것이다. 나는 일선에서 뛰는 사람들이 본사의 지시를 받지 않고도 업무상의 결정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해리는 본사가 집중적인 통제력과 보다 우월한 권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권한이 업무와 병행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해리와의 경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제시한 방법은 전국을 몇 개의 지역으로 분할하는 것이었다.
그 즈음 보관 걱정을 하지 않고 대량으로 구입하여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최고 품질의 감자를 공급받을 수 있는 냉동 감자 튀김 기술의 개발로 나는 크게 고무되었다. 기계로 껍질을 벗기고 그 찌꺼기가 하수도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구조상에서는 감자 껍질 썩는 냄새를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교회가 금육을 명한 금요일에 매출이 급감하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대구를 이용한 생선 샌드위치도 개발했는데 이 메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업은 계속하여 기록을 경신하며 쭉쭉 뻗어나갔고, 창업 10주년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방금 사업을 시작한 것처럼 활기에 넘쳐 있었다. 그 시기에 우리는 기업 공개를 준비했고, 주당 22달러 50으로 주식이 상장되었다. 그리고 첫 달이 지나기도 전에 주당 50달러로 뛰어올랐다. 1966년, 우리는 2억 달러의 판매 실적을 올려 다시금 기록을 갱신하게 되었는데, 전 매장의 황금빛 아치에는 ‘20억 개 판매 달성’이라는 플래카드가 휘날리게 되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하며 홍보자료를 배포했다. “20억 개의 햄버거를 한 줄로 늘어놓으면 지구를 5.4바퀴나 돌 수 있는 수량입니다.”
1966년 4월에 우리는 처음으로 주식 배당금을 지급했고, 그 다음 달에 있었던 기업 공개 후 첫 주주총회에서 나는 우리가 새로운 미국식 기업제도를 창조해 냈음을 선포하였다. 그렇게 사업이 지속적으로 확장되면서 우리는 기존의 스타일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려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드라이브 인 식당 대신 1966년 7월 좌석을 설치한 식당을 개업하여 그 가능성을 타진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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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와 나 사이에는 분쟁의 불씨가 많았다. 그 즈음 해리는 병으로 인해 회사를 떠나 있어야 하는 시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고 회사 경영진들은 크록의 사람과 해리의 사람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게다가 부동산 개발을 점차 줄여나가던 해리가 마침내 모든 신규 지점의 개발의 일시 정지를 선언해 버렸다. 더 이상 건설 투자를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이에 대해 내가 따지고 들자 그는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후 주변의 설득으로 그 의사를 철회하기는 했지만 어느 날 그는 건강 악화와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사직 의사를 밝혔고, 우리는 그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회장 겸 대표이사로 취임하였고, 그 후부터 일을 내 생각대로 풀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몇 명의 경영진이 회사를 떠났지만 해리가 떠나면 맥도날드에 대한 재계의 신뢰가 사라질 것이라는 가장 심각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1968년 초에 이르자 나는 프레드 터네에게 바톤을 넘겨주었고, 그는 내가 달려오던 속도를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고 바톤을 잘 이어받았다. 시카고의 일을 정리하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왔을 때 나는 회사의 업무보다는 서부의 햇빛을 즐기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즉, 매일매일의 업무에 시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회사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줄이고 맥도날드의 미래를 구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치열했던 전쟁터를 떠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보통 때보다 더 민감해지고 이상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내 삶에 일어나려 하는 커다란 변화의 징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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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회사에서 회장이라는 직함은 상징적인 의미만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신상품 개발과 부동산 취득에 관한 것은 내가 책임자로 나섰던 것이다. 내가 회장 자리에 오른 후 우리의 일은 점점 더 재미있게 전개되었는데 내가 맥도날드의 장래와 회사 전체의 발전을 위해 새로운 메뉴와 특성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맥도날드는 이제 초기의 맥도날드가 아니다. 하지만 맥도날드가 분권화되면서 구시대의 경영자들은 이에 적응하지 못했고, 이것저것 처리해야 할 일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있는 우리 앞에 일이 더디게 진행되도록 방해하는 사람이나 기관들도 많이 등장했지만 맥도날드는 그들과 상관없이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은 맥도날드의 새 건축양식을 세우는 것이었는데, 결국 다락 지붕이 있는 벽돌 건물, 멋진 창문, 내부 좌석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이 도입되었고, 그것이 전국에 퍼진 후 건축학 수업의 주요 주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맥도날드의 메뉴판에도 많은 변화가 있어 왔다. 필레 오 피쉬, 빅맥, 핫 애플 파이, 에그 맥머핀과 같은 새로운 메뉴의 추가는 모두 성공적이었다. 나는 언제나 시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메뉴의 목록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일부 매장에서 시험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어떤 메뉴는 조만간 전 맥도날드 매장의 메뉴판에 정식으로 이름이 올라갈지도 모른다. 우리는 본사에 완벽한 실험 주방과 연구실을 갖추고 우리의 전 제품을 실험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언제나 시장의 요구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우리 사업의 핵심은 바로 틈새 확장 전략에 있다. 세계 각지에는 아직도 우리가 끼어들 만한 틈새들이 널리 퍼져 있고, 우리는 우리의 사업을 확장시키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사실, 맥도날드의 도시 지역 진출은 매우 도전적인 일이었다. 도시에서는 지방에서 그다지 신경쓸 필요가 없는 사회·정치적 기류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 여러 종류의 활동가들이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맥도날드를 제물로 삼으려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맥도날드의 깨끗하고 건전한 운영을 환영했고, 또한 맥도날드가 지역 사회를 발달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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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샌디에고 파드레스 야구 팀을 사고 싶었다. 이를 위한 예비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계약은 길고 힘든 협상의 연속 끝에 체결되었다. 파드레스는 5년 연속 하위권에서 허덕여왔기 때문에 나는 기적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두 시즌 동안 대부분의 게임에서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샌디에고 팬들의 파드레스에 대한 응원과 지지는 대단했고, 관중의 수는 매년 극적으로 증가하였다. 그 상태에서 만약 팀 성적이 좋아진다면 더 많은 관중들이 들어올 것은 뻔한 일이었다. 나는 다른 다양한 홍보 행사를 통해 야구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더욱더 증폭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너무 수준이 낮은 상태에 있던 구단 직원들의 급료를 인상하고, 크리스마스 보너스와 성적 향상에 따른 보너스도 지급하도록 하였다. 즐겁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팀은 날이 갈수록 성적이 향상되었고 1977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는 기량이 뛰어난 몇몇 선수들이 우리 팀에 합류하기도 했다.
파드레스를 소유한 일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었다. 가장 큰 보람 중의 하나는 샌디에고의 발전 가능성을 알게 된 것이었다. 샌디에고는 모든 조건이 훌륭했으며, 기후가 모든 종류의 제조업에 적합하고 노동력도 풍부했기 때문에 급속도로 성장할 가능성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 나는 맥주 레스토랑, 고급 햄버거 레스토랑 체인점 사업에 뛰어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우리는 더 손해를 보기 전에 손을 떼야만 했다. 그리고 실패한 메뉴들도 몇 개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사업에 뛰어들다 보면 이처럼 가끔 실패를 겪기도 하지만 비록 실패를 하더라도 그 속에서 뭔가 배울 점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존의 맥도날드 운영 방식에서는 다루기가 매우 어려운 요리여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로스트 비프의 경우에서처럼 잃어버린 것을 충분히 보충하고도 남을 만큼 맥도날드의 운영방식에 대한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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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특별한 경영기법이나 학력, 재력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 대부분은 의지 하나로 모든 것을 이뤄낸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한다. “밀어붙여라.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끈기를 대신할 수는 없다. 오직 끈기와 의지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바로 이것이 4,000개 맥도날드 레스토랑을 일궈낸 원동력이다. 4,000호의 개점은 초창기에 겨우 4개의 지점을 개설하고 난 뒤 5개째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예선에서 피땀을 흘려가며 노를 젓는 노예처럼 일을 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이정표 같은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5,000호를 향해 계속 전진할 것이다. 나는 파드레스가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는 것을 꿈꾸고, 맥도날드 인터내셔날의 경영에 새로운 요소들을 도입할 꿈도 꾸고 있다. 그리고 해외진출 책임자는 계속하여 멋진 계획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 전 세계의 대중들이 맥도날드의 ‘황금빛 아치’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맥도날드 매장을 대중들에게 보다 가깝게 접근시키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생활하고 일하고 즐기는 어느 곳에서든 맥도날드는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