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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연쇄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지점 (S.N. 고엔카님)
알아차림과 평정심을 계발하면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고통은 자신의 실제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이 무지의 어둠 속에서 마음은 모든 감각에서 좋아함과 싫어함, 갈망과 혐오로 반응합니다.
그런 모든 행동이 지금 고통을 낳으며 미래에 고통만을 가져오는 연쇄적 작용을 시작합니다.
■어떻게 해야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끊을 수 있습니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과거의 무지한 행동 때문에 삶이 시작되었고, 몸과 마음의 흐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자살을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죽일 때 그 순간의 마음은 고통으로, 혐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음에 어떤 생을 맞이하든, 그 또한 고통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 행동으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생이 시작되었고, 어느 누구도 거기로부터 탈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경험을 하게 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다 파괴해야 합니까? 눈을 뽑고, 혀를 자르고, 코와 귀를 망가뜨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없앨 수 있습니까? 이것 또한 자살과 같이 아무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렇다면 여섯 가지 감각의 대상물들, 모든 보이는 것, 소리 등등을 다 없애야 합니까?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우주는 무수히 많은 대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누구도 그것들을 모두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존재하는 한, 그것들이 각자 그 대상과 접촉하는 것을 막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접촉이 일어나자마자 감각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사슬이 끊어질 수 있는 지점입니다. 결정적인 연결점은 감각이 일어나는 순간에 생겨납니다. 모든 감각은 집착이나 혐오를 일으킵니다.
☸️💔이 집착과 혐오의 《순간적이고 무의식적인 반응들》은 현재와 미래에 고통을 일으키면서 즉각 증가하기 시작해 더 큰 갈망과 혐오로, 애착으로 악화됩니다.
● 이것은 자동적으로 반복되는 무의식적 습관이 됩니다.
☸️💚💎그러나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서 우리는 모든 감각에 대한 알아차림을 계발합니다.
그리고 평정심을 계발합니다. 반응하지 않습니다. 감각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갈망·혐오·집착 없이 객관적으로 검토합니다.
☸️💚💎 이제 모든 감각은 새로운 반응을 일으키는 대신, 오직 지혜, 빤냐, 통찰력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은 무상하다. 이것은 변화하게 되어있다. 이것은 사라지기 위하여 일어난다.”
☸️💎사슬은 끊어지고 고통은 멈추었습니다.
☸️💎갈망과 혐오의 새 반응들이 없으므로 고통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도 없습니다.
☸️💎👍고통의 원인은 깜마(kamma), 정신적 행위입니다. 🌿이는 갈망과 혐오를 일으키는 맹목적 반응, 상카라(saṅkhāra)입니다.
☸️마음이 감각을 알아차리며 평정을 유지할 때, 고통을 일으키는 반응이나 원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을 멈춘 것입니다. 붓다는 말했습니다.
"모든 상카라는 무상하다.
진정한 통찰을 통해 이것을 깨달을 때,
그대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초연해진다.
이것이 정화의 길이다."
[각주: <담마빠다>, XX. 5 (277).]
이 상카라라는 단어는 의미가 다양합니다.
☸️ 마음의 맹목적인 반응을 상카라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행동의 결과, 그 열매도 역시 상카라라고 합니다. ☸️심은 대로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일은 모두 따져보면 우리 자신의 정신 행위에서 온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넓은 의미의 상카라는 이렇게 주어진 세상의 모든 것, 창조되고 형성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우주의 ‘모든 창조된 것은 무상한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 경험적 지혜로 이 진리를 관찰하면 고통은 사라집니다. 이는 고통의 원인으로부터 뒤돌아섰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갈망과 혐오의 습관을 내려놓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해탈의 길입니다.
■모든 노력은 탐진치로 반응하지 않는 법, 상카라를 만들지 않는 법을 익히기 위함입니다. ■어떤 감각이 일어나고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 찰나의 순간은 반복되고 심화되어 갈망과 혐오가 되고, 격렬한 감정으로 자라나 결국에는 의식적 마음을 압도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면 감정에 사로잡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그 결과 남을 해치는 불순한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고통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지금도 미래에도 고통을 겪습니다. 한순간의 맹목적인 반응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반응의 과정이 일어나는 지점이 어딘지 안다면, 즉 감각을 알아차린다면,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도록 또는 심화되지 않도록 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반응하지 않고 감각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갈망이나 혐오로, 격렬한 감정으로 자라나 우리를 압도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감각은 그저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 마음은 평정하고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이제 우리는 행복합니다. 미래의 행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반응하지 않는 능력은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몸의 감각을 알아차리고 동시에 평정을 유지한다면, 그 순간 마음은 자유롭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명상 중에 몇 순간만 이런 경험을 할 것입니다. 그 몇 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감각에 반응하는 오랜 습관으로, 마음은 갈망·혐오·고통의 오래된 바퀴 속에 허덕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명상하면서 그 짧은 순간들이 몇 초가 되고 몇 분이 되어 마침내 반응하는 오래된 습관이 사라지면, 이윽고 마음은 항상 평화롭게 됩니다. 이것이 고통을 멈추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을 멈추는 방법입니다.
- <고엔카의 위빳사나 명상> 中, 윌리엄 하트 지음, 담마코리아 옮김.
첫댓글 ☸️💎👍고통의 원인은 깜마(kamma), 정신적 행위입니다. 🌿이는 갈망과 혐오를 일으키는 맹목적 반응, 상카라(saṅkhāra)입니다.
☸️마음이 감각을 알아차리며 평정을 유지할 때, 고통을 일으키는 반응이나 원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을 멈춘 것입니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반응하지 않고 감각(느낌)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갈망이나 혐오로, 격렬한 감정으로 자라나 우리를 압도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감각은 그저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 마음은 평정하고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이제 우리는 행복합니다. 미래의 행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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