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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주 오스닝에 위치한 싱싱 교도소는 18세기 말에 세워진 미국의 대표적인 감옥이다. 20세기 중반에 이곳에서는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형 집행이 이루어졌는데, 사형수는 놀랍게도 어느 미국인 부부였다. 당시 미국이 개발한 원자폭탄 관련 기밀을 소련에 넘긴 스파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혐의 내용을 완강히 부인했고, 사실대로 자백하면 사면해 주겠다는 정부의 제안조차도 거부하고 끝내 사형 집행을 당하고 말았다. 전기의자에 먼저 앉은 사람은 남편 쪽이었다. 고압 전류가 더 잘 통하도록 머리카락 일부를 삭발한 상태였다. 전기 충격은 모두 세 번 가해졌다. 2분 30초 만에 그는 사망하고 말았다. 교도소 관계자들은 의자에 묻은 배설물을 닦아낸 다음, 그의 부인을 똑같은 자리에 앉혔다. 이번에는 시간이 약간 오래 걸렸다. 5분 동안 다섯 번의 전기 충격을 가한 뒤에야 사망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재판 과정 내내 남편보다도 더 강인한 태도를 보였던 부인 쪽에 어울리는 최후라고 수군거렸다.
로젠버그 부부의 사형 집행 소식이 전해지자 백악관 앞에 모인 시위대는 “공산주의자 쥐새끼들에게 죽음을”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어 올리며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같은 시각에 뉴욕 시에서는 7천여 명의 시위대가 이들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들은 과연 불운한 희생자인가, 아니면 자발적 순교자인가? 결코 풀리지 않을 이런 의문과 안타까움을 뒤로 남긴 채, 아직 30대의 줄리어스와 에셀 로젠버그 부부는 나란히 세상을 떠났다. 1953년 6월 19일 저녁의 일이었다.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1918년 5월 12일, 뉴욕에서 가난한 유대계 이민자 부부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15년 9월 28일에 태어난 에셀 그린글래스도 유대계였고 형편도 비슷했다. 줄리어스는 뉴욕 시립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공부보다는 좌익 학생운동에 열중했고, 에셀도 뉴욕의 어느 회사에 근무하는 동안 파업 주동자로 해고당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1936년에 국제 선원 노동조합의 파업사태를 계기로 처음 만났고, 1939년에 결혼했다. 1940년에 줄리어스는 미국 육군 통신대에 민간인 직원으로 취직하지만, 자칫 결격사유가 될 수도 있는 한 가지 이력을 숨기고 있었다. 1939년 12월 12일자로 미국 공산당에 가입했던 것이다. 하지만 육군 통신대의 내부 충성도 검사에서 그는 줄곧 공산주의와의 관련을 부인했다. 에셀은 정식 당원은 아니었지만 남편의 정치 활동을 종종 지원했다. 에셀의 남동생 데이비드 그린글래스도 매형 줄리어스를 따라 열혈 공산당 지지자가 되었다.
부부의 마지막 키스(왼쪽), 쇠창살에 나뉘어 갇혀 있는 로젠버그 부부
1945년, 줄리어스는 공산당원이란 이유로 육군 통신대에서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결백을 주장했다. “나는 (…) 단 한 번도 공산주의자였던 적이 없다.” 줄리어스는 개인 사업을 벌이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그 와중에 경제 문제와 자녀 문제 등으로 결혼 생활도 삐걱거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 생활은 어차피 오래 가지 못할 운명이었다. 결혼 10여 년 만인 1950년에 로젠버그 부부는 소련의 스파이 혐의로 연이어 체포되었던 것이다.
미국은 1942년부터 맨해튼 계획을 통해 원자폭탄 개발에 나섰다. 뉴멕시코 주 로스앨러모스에 연구 시설을 세우고, 최고의 과학자들을 불러 모아 공동 연구를 시켰다. 나치를 피해 영국에 망명한 독일 출신 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도 그 중 한 명이었는데, 훗날 그는 소련의 스파이임이 밝혀져 체포되었다. 그의 연락책이었던 화학자 해리 골드는 푹스 말고도 정보원이 또 한 명 있었다고 FBI에 자백했는데, 문제의 인물은 바로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처남 데이비드 그린글래스였다.
1950년 7월 17일,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체포되었고 얼마 뒤에는 그의 아내인 에셀 로젠버그도 체포되었다. 데이비드는 미국 육군 소속 기계공으로 로스앨러모스에서 일하던 1944년, 누나와 매형이 원자폭탄에 관한 이야기를 자꾸 캐물어서 자신의 임무에 관해 설명해 주었고, 이후 매형의 소개로 해리 골드를 만나 관련 정보를 전달했다고 증언했다. 데이비드의 아내인 루스조차도 시누이 부부를 고발하는 데에 앞장섰다. 일각에서는 그린글래스 부부의 이런 행위가 미국 정부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의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원자폭탄을 만든 과학자들은 로젠버그 부부의 혐의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반박했다. 이론적으로 원자폭탄 제조 기술은 널리 알려진 바이고, 이들 부부가 빼돌렸다는 기밀도 그리 핵심적인 내용까지는 아니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역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청원서에서 이러한 주장을 반복하며 “사형 판결만은 철회되어야 한다”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깡그리 무시되고 말았다. FBI 국장 에드거 후버는 로젠버그 부부의 범행이 “세기의 범죄”라고 잘라 말했다.
본인이나 배우자의 목숨보다 무고함을 주장하는데 뜻을 모았던 로젠버그 부부
원자폭탄이라는 놀라운 신무기는 잠시나마 미국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1949년에 들어 소련도 똑같은 무기를 개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고,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불안 속에서 반공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때마침 벌어진 로젠버그 부부 사건을 미국 정부는 자국 내의 소련 스파이망을 파헤칠 기회로 여겼다. FBI 국장 에드거 후버를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은 이들 부부의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해 “사형을 선고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전략을 택했다.
재판을 담당한 어빙 카우프먼 판사는 다음과 같은 비논리적이고 비약적인 판결문을 통해 피고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나는 피고들의 죄가 살인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 러시아에 원자폭탄을 넘겨준 피고들의 행위는 (…)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을 야기시켰고, 그로 인해서 이미 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 피고들은 반역 행위로 역사의 흐름을 우리 미국에 불리하도록 바꾸어 놓은 것이 분명하다. (…) 따라서 본 법정은 (…) 피고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바이다.”
하지만 다른 혐의자들과의 형평성만 따져 보아도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사형 언도는 너무 가혹했다. 클라우스 푹스와 데이비드 그린글래스는 15년 형을 선고 받았고, 루스 그린글래스는 스파이 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처벌을 면제받았다. 일각에서는 데이비드가 정부 측과 일종의 뒷거래를 했으리라는 추측도 나왔다. 이에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로젠버그 부부의 사형에 반대하는 청원이 잇달았다. 공산주의 동조자였던 사르트르와 피카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교황 피우스 12세까지도 이들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다.
미국 정부의 일차적 목표는 어디까지나 미국 내 스파이망을 알아내는 것이지, 로젠버그 부부를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처형은 일부 대중의 복수심을 만족시킬지는 몰라도, 정부에는 적잖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형 집행 바로 전날까지도 FBI 요원들이 교도소를 찾아가 이들을 설득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나중에 공개된 정부 기록에 따르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나 후버 FBI 국장은 로젠버그 부부가 전기의자에 앉는 그 순간까지도, 형 집행 정지 라는 최후의 카드를 들고 도박을 벌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부 측에서 미처 몰랐던 점은 로젠버그 부부가 만만치 않은 고집쟁이였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줄곧 혐의를 부인하며, 국가가 무고한 개인을 탄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에셀은 어린 두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동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편보다도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 물론 이런 태도가 그녀에게 결코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태도에 일반 대중은 오히려 그녀를 뻔뻔하고 냉혹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까닭에 이들은 불리하고도 억울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동정보다도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로젠버그 부부의 태도에도 뭔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다. 우선 양쪽 모두 마치 본인이나 배우자의 목숨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유명한 옥중 서한집에서도 이들은 줄곧 담담한 태도로 자신들의 양심과 원칙에 관한 이야기만을 반복한다. 일각의 지적처럼 자연스러운 분노와 슬픔과 체념의 감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을 가리켜 “순교자나 영웅은커녕 심지어 인간이 되는 데에도 실패했다”(레슬리 피들러)는 비판이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재판을 받았던 사람들 같지가 않다”(모튼 소벨)는 한탄이 나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재판 당시 변론조차도 신통치 않았다. 역시 공산주의자였던 변호사가 피고의 무죄를 밝히는 것보다는 당시의 사태를 공산당에 유리하게 몰고 가려고 의도적으로 그랬다는 해석도 나왔다. 공산당은 줄곧 로젠버그 부부를 외면하다가 사형 집행 3개월 뒤에야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무고한 순교자”라고 예찬했다. 일각에서는 로젠버그 부부의 죽음이 미국 정부의 진보 세력 억압에 맞선 의도적인 순교가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정부에서는 사형이라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눈엣가시를 제거할 기회를 노렸지만, 로젠버그 부부와 공산당은 도리어 그 기회를 역이용했던 셈이라는 것이다.
소련의 몰락 이후 로젠버그 부부 사건에 대한 새로운 증거가 나왔다. 1990년에는 흐루시초프가 “로젠버그 부부의 도움”을 언급한 녹음 내역이 공개되었고, 1995년에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도중에 해독한 소련 측의 교신 내용이 공개되었는데, 거기에는 줄리어스가 실제로 소련의 스파이였음이 명확히 드러나 있었다. 다만 그가 빼돌린 기밀은 원자폭탄이 아니라 전파탐지기 관련 정보였다. 결국 미국 정부는 애초부터 줄리어스가 스파이라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사형 언도라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자백을 끌어내려 했던 것이다.
불운한 희생자인가,자발전 순교자인가?
결코 풀리지 않을 의문과 안타까움을 남긴 채,아직 30대의 줄리어스와 에셀 로젠버그 부부가 나란히 세상을 떠났다
로젠버그 부부 사건은 국가의 이익과 개인의 양심이라는 두 가지 원칙이 대립한 문제였다. 한때 이들은 양심을 지키려다 국가의 폭력에 희생당한 인물로 여겨졌지만, 지금 와서 보면 석연찮은 부분도 없지 않다. 스파이 행위의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이들의 죽음조차도 일부 세력에게는 일종의 선전 수단으로 이용되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직시하는 순간, 두 사람의 죽음은 고귀한 희생이 아니라 철저한 계산이 되고, 동정심보다는 오히려 거부감을 자아낸다. 어느 쪽의 시각에서 바라 보느냐에 따라서 이들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달라질 수 있다.
로젠버그 부부는 정말 스파이였다. 하지만 스파이에게도 변론의 기회는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들은 국가와 대중이라는 다수의 공포와 편견 속에서 공정한 재판과 변론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이들의 자발적인 순교 행위에 모종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는 점은 그 희생의 격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국가의 억압에 맞서 죽음까지도 불사하며 항거하는 개인의 양심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던저주었다. 이들의 죽음이 20세기의 역사에 사실상 원자폭탄 못지않은 파장을 남긴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리라.
우리나라에는 로젠버그 부부에 관한 단행본 전기가 아직 없다. 레이시 볼드윈 스미스의 <바보들, 순교자들, 반역자들> 는 소크라테스, 예수, 간디, 등 자신의 신조를 지키기 위해 죽음조차도 불사했던 역사적 인물들을 소개한 책인데, 이 책의 제11장에는 디트리히 본회퍼와 로젠버그 부부를 함께 다루고 있다.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사건의 개요와 아울러 로젠버그 부부를 둘러싼 엇갈린 시각들을 잘 정리, 소개하고 있어서 도움이 된다. 본문의 내용도 이 책을 주로 참고했다.
로젠버그 부부의 유명한 옥중서간은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사랑은 죽음을 넘었어라>(편집부 옮김, 들불, 1989)에는 1950년 체포 직후부터 1953년 사형 직전까지 쓴 이들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고, 그 전후의 사정을 설명하는 편집자의 해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의 전기에도 짧게나마 참고할 만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커트 젠트리의 <존 에드거 후버>(전2권, 정형근 옮김, 고려원, 1992)의 제8장에는 로젠버그 사건의 배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의 활동을 중심으로, 어째서 미국 정부가 사형이라는 과도한 조치까지 불사하면서 이 사건에 매달리게 되었는지가 자세히 나와 있다. 프레드 제롬의 <아인슈타인 파일> 의 제9장에는 로젠버그 부부 구명 운동에 앞장섰던 아인슈타인의 행적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