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매(臥龍梅) 생각
임병식rbs1144@daum.net
멀리 흘러가는 장강(長江)은 중간에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가고 낭떠러지를 만나면 곤두박질을 친다. 그러면서 결국은 한곳에 모인다. 나는 와룡매(臥龍梅)를 떠올리면 이 나무들이 제각각 아픔과 사연을 안고 있을지라도 몸 안에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과 정서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매화나무 자체가 본디 간직한 기품에다 우리와 함께해온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이력을 지니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3년 전, 나는 보성 복내에 200년이 넘은 고매(古梅) 나무가 있다는 말을 듣고 환자를 돌보는 처지에 운신이 자유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불원천리 달려갔다. 고을에서 삼베 지킴이로 살아가는 이찬식 선생이 자기 집 대밭에 200년이 넘은 회화나무와 또 다른 인근의 죽곡정사(竹谷精舍)에 자라는 매화나무 사진을 보내주었다.
가서 보니 헌헌장부(軒軒丈夫)의 회화나무는 아직 철이 일러서인지 나목(裸木)의 상태인 꼭대기에 까치집을 매달고 있고, 매화나무는 오랜 세월을 버텨온 탓에 검버섯 핀 노인의 얼굴처럼 몸피가 수백 번 벗겨져 흉터가 생기고 몸통과 가지는 이리저리 뒤틀린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역시 잎이 없이 맨몸 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걸 보면서 바로 “이건 와룡매군요”라고 말했다. 내 말에 죽곡정사 주인과 인내를 맡은 분은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의아해했다.
내가 대번에 그리 말한 이유가 있다. 오래전에 지인으로부터 눈물겨운 와룡매에 대하여 들은 바가 있었다.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1990년 초에 일본 센다이한국교육원에서 교육연구사로 활동한 임창순 선생이다.
와룡매는 매화나무가 거의 곧게 자라는데 이것은 땅바닥을 기듯이 몸통과 줄기가 마치 용처럼 나직하게 꿈틀거리며 자라는 것을 이른다. 이 말을 전해준 선생도, 1988년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리기 이전에는 그 말 자체를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올림픽 이후 한국과 일본 교류가 활발해지자 우리나라에 일본 단기 유학생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그중 한 학생이 “와룡매를 아느냐.”라고 묻더란다. 당시는 아는 바가 없어서 대답을 못 해주었는데, 이태 후에 일본을 갔더니 과연 그런 나무가 있더라는 것이다.
기력이 쇠하여 몸통은 비록 부목에 의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더란다. 선생은 그 나무가 한국에서 건너간 내력을 알아내고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와룡매가 일본으로 건너간 내력이다. 현재 일본에는 이즈간지(瑞巖寺)와 센다이공원, 그리고 야마기 형무소 안 등 세 곳에 심겨 있는데, 그것은 임진왜란 때 창덕궁에 있던 것을 반출한 것이라고 한다.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심복인 다테마사무에(伊達政宗)에게 명하여 1593년에 파갔다고 한다.
그것이 나중 다테가와 보리사인 마치시마(松島)의 서암사가 중건되면서 불당 앞 양옆에 홍 백이 함께 심어져 4백 년 동안 꽃을 피우는 명목이 되었다는 것이다.
임 선생은 그것을 현지에 가서 보고는 큰 감동 하였단다. 대번에 아픔이 느껴져서 그것을 글로 써 지인인 일본 교장에게 알리고, 다시 일본 수필집에 게재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그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장에 그 교장은 자기 학교와 자매결연을 한 경기도 수원농림고등학교에 그 후계목(後繼木)을 기증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는 철저히 반출을 막고 있었는데, 마침 학교에서 와룡매 분양을 허락받아 실습장에서 육종하고 있었다. 그게 마침내 자매학교에 기증이 이루어지게 되었단다. 한데 이후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미 한국에 그 와룡매가 돌아왔는데, 또다시 다른 이벤트 행사가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1999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89주기 기념식에 맞추어 행해진 소위 ‘와룡매 환국식’이었다.
이것은 다소 뜬금없는 것이었다. 와룡매가 있는 사찰의 129대 주지 하라나소료(平野宗淨) 스님이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인한 수많은 살상과 약탈의 피해를 참회하는 의미로 후계목 반환을 제안한 게 한국과 일본 양국의 외교통상부가 적극적으로 협조한 것이다.
이런 연유로 심어진 매화는 굳이 서울 남산공원에 심어진 내력이 있다. 애초부터의 갖고 있던 원죄에다 야마기현 대림사에는 안 의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것이다. 또한 와룡매는 그곳 가까운 곳에 있다.
거기다가 안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마지막을 보낼 때 간수가 그곳 출신의 치바도시치(千葉七十)이었다. 그는 안 의사를 깍듯이 존경하여 마지막 유묵을 받기도 했다.
가족들은 그가 죽자 위패와 함께 유묵을 놓고 제사를 지내오다 나중 대림사에 기증했다고 한다. 와룡매는 지금 안 의사의 동상이 내려다보이는 공원에 홍백 두 그루가 심겨 있다. 그것은 세월이 흘러 어느덧 거목이 되었다.
우리나라 와룡매는 한동안 창덕궁에 있던 것이 사라진 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나 5천 년을 이어온 역사가 있는데 그대로 맥이 끊길 이유가 있는가. 최근에는 김해공업고등학교의 교내에 있는 것이 밝혀지더니 마침내 보성에서도 찾아내게 된 것이다.
보성 죽곡정사의 와룡매는 내가 바른 이름을 찾아주기 전에는 그냥 ‘고매(古梅)’로만 불렸다. 고유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이다. 이 묵은 와룡매도 200년의 수령을 자랑한다. 본래 가지가 쳐지는 특성에다 워낙에 노구라서 담장에 큰 줄기를 기대고 있지만 지금도 이른 봄이면 가장 먼저 붉은 꽃송이를 터트린다고 한다.
이곳은 회봉(晦峯) 안규용(安圭容) 선생이 일제 강점기 인동의 학동을 모아 서당을 연 곳이다. 죽곡정사를 지으면서 매화를 가져다가 심었는데 당시도 어지간히 큰 나무였다고 한다. 그로 미루어 보아 해방이 된 지 80년이 다 되어 가니 이미 노목이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보성에는 세 분의 뛰어난 문사가 있었다. 글씨는 설주 송운회 선생, 시문에는 희봉 안규용 선생이었다. 이분들의 필적과 문장은 인동의 사당과 비문, 목판과 문집에 온전하게 남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뒤늦게 찾아낸 이 와룡매는 물론, 아픔을 안고 돌아온 매화도 명맥을 잘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돌아온 매화는 낯선 땅에 끌려가 그간 얼마나 서러움을 받은 것인가. 그리고 남아 있는 것도 그간 정체를 숨기느라 얼마나 숨죽여온 것인가. 그런 면에서 와룡매는 일본의 농업학교처럼 육종에 힘을 써서 널리 보급을 했으면 한다. 잘 가꾸어 상품화하면 인기 있는 품목이 되지 않을까.
나는 일련의 와룡매 수난사를 보면서 도도히 흐르는 큰 물줄기를 생각한다. 기존에 있었던 것을 뒤늦게 찾은 것을 비롯하여, 반출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매화들은 모두 한 줄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와룡매는 더 이상 흩어지는 시련을 겪지 않고 우리나라 안에서 굳건히 뿌리 내려서 맥을 잘 이어가기를 바라본다. (2023)))
첫댓글 와룡매가 우리 나라 매화였었는데 임진왜란 때 반출해 가고 다시 우리나라에 오는 역사가 있었군요.
와룡매가 안중근의사와 얽어 있어 참으로 역사가 있는 매화입니다.
선암사에 가도 아주 오래된 와룡매가 있는데 임진란때 창덕궁에서 일본으로 반출되었다니 왜놈들은 좋은 것은 다 잘 알고 자기 네 나라로 반출하는 것이 상식화 되었군요.
와룡매에 얽힌 역사적인 얘기 잘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3년전에 보성 복내를 갔더니 그곳에 있는 죽곡정사에 와룡매가 있었습니다.
고매라고 부르고 있어서 와룡매라고 알려주었지요.
선엄사에도 와룡매가 있는줄을 몰랐습니다.
한번 가서 봐야겠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2024년 현대수필 봄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