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문화일반
"땅을 치며 슬퍼하는 자, 왜 행복한가"…故차동엽 신부가 찾은 답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중앙일보 입력 2023.02.17 00:31
#궁궁통1
고(故) 차동엽(2019년 선종·노르베르토) 신부는 서울 관악산의 달동네인 난곡에서 자랐습니다. 좁은 골목에 가난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산동네였습니다. 차 신부는 난곡에서 연탄과 쌀 배달을 하며 유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차 신부는 힘겨운 삶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차 신부는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가톨릭 신학대에 들어갔습니다. 자신이 찾고자 했던 삶에 대한 물음을 다른 곳에서는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겠지요. 차 신부는 신학교를 졸업한 뒤 오스트리아 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성서신학으로 석사, 사목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가톨릭 안에서도 성경 말씀에 대한 남다른 안목을 내놓곤 했던 차 신부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안목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차 신부는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대학생 때 사색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상당수 그때 가졌던 생각입니다.”
#궁궁통2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 언덕에서 설했다고 전해지는 ‘산상수훈’의 팔복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팔복 중 두 번째 복입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지 않나요? 왜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며, 왜 슬퍼하는 사람이 위로를 받는 걸까요. 도대체 그 위로는 누가 주는 것이며,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우리에게도 삶의 고비마다 슬픔이 닥치지만 그때마다 위로가 밀려오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고통의 파도가 밀려올 때가 더 많지 않나요? 이 대목에는 도대체 어떤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걸까요. 그걸 차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궁궁통3
신약성경은 처음에 그리스어로 기록됐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했던 아람어로 기록된 신약성경도 있었을 거라 보지만, 아직 발견된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리스어 신약성경이 예수님 원래의 어록에 가장 가까운 셈입니다. 차 신부는 그리스어로 ‘슬픔’을 먼저 설명했습니다. “마태오(마태) 복음에서는 ‘슬픔’을 그리스어로 ‘펜툰테스’라고 썼다. 이건 상실의 슬픔을 뜻한다. 사별 등 소중한 걸 잃은 극심한 슬픔을 뜻한다.”
‘산상수훈’은 루카(누가) 복음에도 등장합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슬픔에 ‘클라이온테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클라이온테스’는 땅을 치면서 우는 걸 뜻한다.” 땅을 치면서 우는 일, 우리말로 하면 ‘통곡’쯤 되지 않을까요. 그럼 히브리어로는 뭐라고 불렀을까요. 그 정도로 복장이 터지는 슬픔은 “히브리어로 ‘사파드(Sapad)’다. 애통해 우는 걸 뜻한다. 예수님은 이 단어를 썼을 것이다. 슬픔은 감정이고, 우는 건 표출이다. ‘사파드’에는 이 두 가지 의미가 통합돼 있다.”
#궁궁통4
저는 슬픔에 대한 물음을 이어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나. 슬퍼하는 사람이 왜 행복한가?” 차 신부는 찻잔에 차를 따르며 빙긋이 웃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위로’에 있다. 이 ‘위로’가 어디에서 오는 위로인지 알아야 한다.” 차 신부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유대인은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으려 했다. ‘하느님’이란 주어를 사용하지 않으려면 수동태 문장을 써야만 했다. 주어를 생략하기 위해서다. 그럼 이 구절의 주어는 무엇이겠나. 그렇다. 이 위로는 하느님이 주시는 위로가 된다.”
차 신부는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슬픔과 절망을 겪지 않은 사람의 삶은 싱겁다. 그래서 누리는 행복도 싱겁다. 우리가 명심할 건 슬픔의 끝에 위로가 있다는 거다. 슬픔의 크기와 비례하는 위로 말이다. 그걸 가슴 깊이 받아들이면 희망이 생겨난다. 고통이 와도, 슬픔이 와도 두렵지만은 않게 된다. 그 고통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니까.”
* 실패는 나를 성장하게 한다 (따뜻한 편지 2323)
해발 8,848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 뉴질랜드의 등산가이자 탐험가인 에드먼드 힐러리는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한 최초의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도 첫 등반으로 에베레스트 등정이라는 쾌거를 이룬 것은 아닙니다.
여러 번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했습니다.
역시나 세계 최고봉이라는 에베레스트의 정상은 그를 포함해서 누구에게도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선험자들 덕분에 등반 코스 등이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산행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지라 에드먼드 힐러리의 열정적인 도전은 긴 준비와 극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패할 때마다 설산을 향해 말했습니다. "산아, 너는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계속 자라날 것이다. 내 기술도, 내 힘도, 내 경험도, 장비도 자라날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기어이 네 정상에 나는 설 것이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났습니다.
다시 도전할 때는 텐징 노르가이라는 동료도 함께였습니다. 밤사이 텐트 밖에 놓아둔 신발이 꽁꽁 얼어붙어 신발을 녹이는 데만 2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에드먼드 힐러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전진했습니다.
1953년 5월 29일 아침, 12m나 되는 빙벽이 그를 가로막았지만, 끝내 올라 꿈에 그리던 정상에 다다랐습니다. 인간 승리의 순간이었습니다.
泰山(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노라.
세상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반드시 그 끝은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꿈과 의지에는 끝이 없습니다.
단번에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오늘도 끊임없이 자신에게 외치며 도전해보세요.
# 오늘의 명언
당신의 꿈을 이루는 것을 막는 사람은 당신 자신밖에 없다.
– 토머스 브래들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