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 차 있으나 동시에 완벽하게 비어 있는 침묵. 굽어지고 다시 곧게 뻗어 오르는, 이 기묘한 곡선 앞에 섭니다. 사람이 공손하게 구부린 모습처럼도 보이고 생각하는 머리의 기울어진 각도가 보이기도 합니다. 돌이 뿜어내는 그 깊고 푸른 침묵 앞에서, 나는 다시금 내가 뱉어낸 말들의 무게를 가늠해봅니다.
악을 악이라 부르고 선을 선이라 칭하는 순간, 그 본질은 이미 이름의 울타리를 넘어 멀어져 버리는 듯합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행위는 대상을 붙잡으려는 오만인지, 아니면 끝내 이해하고 싶어 내미는 서투른 손짓인지, 나는 아직도 그 경계에 서 있습니다. 이번에 수석에 관한 글들을 갈무리해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보내고 나니, 내 안에서도 그 오래된 물음이 다시 바람처럼 일어납니다.
강가에서 수천 년을 침묵으로 닦아온 돌 앞에 앉아, 나는 감히 몇 줄의 문장으로 그 생애를 헤아리려 했습니다. 활자로 옮겨진 문장들은 내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이미 내 것이 아니었고, 책장을 덮고 난 뒤 서재에 놓인 돌들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내가 써 내려간 문장들이 혹시 돌의 몸이 아니라 그림자만 더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대상에서 이탈한 말들이 허공을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 한켠이 자꾸만 비어갑니다.
책을 부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감정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축하의 말을 건네주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들이 내 안에 닿지 않습니다. 기쁘기보다 어딘가 어색하고, 뿌듯하기보다 낯이 간지럽습니다. 너무 오래 쥐고 주물렀던 생각들이 마침내 형태를 얻는 순간, 그것이 단단한 결실이 아니라 오래 주물러 터져버린 홍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허탈하고, 미진하고, 부끄럽고, 때로는 공연히 나를 드러내 보인 것만 같은 민망함이 뒤섞입니다. 나를 표현했다기보다 나를 늘어놓은 것은 아니었는지, 조용히 건네고 싶었던 사유가 괜한 자랑처럼 비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를 향한 의심이 자주 고개를 듭니다.
더 낯선 것은, 막상 책 속의 글들을 다시 읽어 내려갈 때 찾아옵니다. 분명 내가 쓴 문장들인데도 그 뜻이 또렷이 잡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고, 그때의 마음과 결이 희미하게 끊어진 자리도 적지 않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써놓은 글을 더듬는 것처럼 어색하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잘된 문장보다 어설픈 문장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지나치게 공들인 흔적이나 억지로 세운 문장들이 부끄럽게 떠오릅니다.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니었는지, 조금 더 침묵 속에 두었어야 할 생각들을 섣불리 밖으로 끌어낸 것은 아니었는지, 뒤늦은 자책이 잔물결처럼 번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심스럽게 돌아봅니다. 돌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던 그 시간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존재 앞에서 스스로를 가다듬던 순간들이 거짓이었는지요. 내 언어가 그 침묵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을지라도, 그 문장들은 분명 돌에게 닿고 싶어 했던 내 나름의 연가였을 것입니다.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손을 뻗어보는 일, 그것이 어쩌면 글을 쓴다는 일의 본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책을 내고 난 뒤 찾아온 이 낯선 공허함이 특별히 나만의 결함인지, 아니면 어떤 과정을 지나며 누구나 한 번쯤 건너는 자리인지는 아직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생각해보면, 오래 품고 있던 것을 세상에 내어놓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조금 비워내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비워진 자리로 바람이 드나드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돌 앞에 앉습니다. 이름을 붙이기 이전의 상태로, 설명하기 이전의 자리로 조용히 돌아가 보려 합니다. 돌은 여전히 내가 붙인 어떤 말에도 기대지 않은 채, 묵묵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 변함없는 침묵이 오히려 나를 안심시킵니다.
무엇이라 부르든, 돌은 돌로 남아 있고, 나는 다만 그 곁에서 잠시 말을 만들었다가 다시 거두는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헛소리이면 어떻고, 이탈이면 또 어떻겠습니까. 내 손을 떠난 문장들은 이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의미를 얻을 것이고, 나는 다시 이름 없는 돌 하나를 앞에 두고, 그 깊고 푸른 침묵을 천천히 건져 올리려 합니다.
첫댓글 수필 동인지 나오면 한권 살게요 ~
선생님 주소를 제게 보내주시면 한권 보내겠습니다. 010 9493 2668로 문자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