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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는 참 아름다운 편지입니다. 빌립보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사랑과 신뢰가 오롯이 담겨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와는 대조가 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정말 문제가 많았습니다. 교회는 부흥했지만 여러 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은사는 풍부했지만 사랑이 없어 각자 받은 은사를 서로 자랑하며 교만했습니다. 교인들끼리 세상 법정에 나가서 송사를 하고, 성적으로도 문란하였습니다. 바울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문제가 많은 이 교회를 꾸짖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그대로 담아서 고린도교회에 보냈습니다. 여기에 비해서 빌립보서를 읽으면 따뜻한 위로와 권면이 은혜가 되고 마음도 편안해집니다.
바울은 4장 1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요, 기쁨이며 면류관"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일생을 바쳐 사도로 살아가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바울입니다. 그런데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자랑이요 보람이 있다면 빌립보교회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에도 빌립보교회는 평생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고, 하나님의 상급을 받게될 근거가 될 것이라고 바울은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는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섬기는, 혹은 섬겼던 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목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최근에 발표된 어떤 보고서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요즘 목회 활동을 하면서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지’, 목사님들께 물었습니다. 제일 많은 응답은 ‘무기력한’ 느낌으로, 응답자의 21.0%였습니다. 그 다음은 ‘답답한’ 느낌, 16.5%였고, 그 다음은 ‘피곤한 느낌’이 15.9%였습니다. 무기력하고 답답하고 피곤한 느낌이라는 부정적인 응답이 나란히 1,2,3위를 차지하였습니다 ‘막막한’ 느낌, 13.1%까지 더하면 부정적인 응답은 전체 응답자의 3분의 2를 차지합니다. 이에 비하여 긍정적인 대답으로는, ‘감사한’ 느낌이 14.8%, ‘행복한’ 느낌이 11.4%, ‘보람’을 느낀따는 응답은 4.4%, 그리고 목회가 ‘즐겁다’고 하는 응답은 2.8%였습니다. 희귀종입니다. 우리 교회 김 목사는 뭐라고 대답했는지 궁금하십니까? 설문에 직접 응답한 것은 아니지만, 한 마디로 복잡합니다. 즐겁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보람도 느낍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설문에 없는 대답인데, ‘죄송한’ 느낌입니다. 목회자로서 부족하고 모자란다고 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떨까요?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이기에 답답할 것 같지 않습니까?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기에 불안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을 사모하며 기뻐합니다.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을 기대하며 보람을 느낍니다.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고 기도할 때마다 가슴에 기쁨과 보람이 넘쳤습니다. 목회자에게 교회와 교우들은 그런 존재입니다. 늘 사모하는 마음, 그리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있지만, 넉넉히 견디고 믿음을 지켜나가는 교우들이야말로, 보람이요 기쁨입니다. 바울은 이 사랑스런 교회와 교우들을 위하여 오늘 본문에서 몇 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1절에 ‘주 안에 서라’는 것입니다. ‘서라’는 말은 ‘견고하게 서라’, 요동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원어에서 이 ‘서라’는 말은 전쟁터의 초소에 서있는 병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모습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이 처해있는 어려운 상황들을 알고 있습니다. 핍박도 받고 소외도 당하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견고하게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렵기도 하고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그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주 안에 서라’. 흔들리지 말고 견고하게 주님 앞에 서서 믿음을 지키며 주어진 사명을 다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 안에 서는 것이 힘이 듭니다. 교회나 교인들이 실망스러울 때도 있고, 기도가 응답 되지 않아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인간적으로 여러 가지를 포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안에 서지 못하고 때때로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 안에’ 서야 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떤 경험을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없도록, 믿음을 지키며 주님의 뜻과 그 은혜 안에 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교우들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바울에게는 기쁨이요 면류관과 같은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불완전합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인간성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교우들 사이에 생각과 의견에 차이도 생겼을 때, 사탄은 그 틈을 파고들어 교회를 어지럽히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빌립보 교회 역시 예외일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낯선 이름,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모두가 빌립보 교회의 신실한 일군들이었고, 그만큼 교회 안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걱정할 정도로 심각한 갈등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어떤 문제로 갈등을 보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누가 어떤 주장을 했는지 바울은 적지도 않았고,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이들 두 여성 교우들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만 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어떤 영어 성경은 ‘live in harmony in the Lord.’, 주안에서 하모니를 이루며 살아가라고 번역했습니다. 어떤 영어성경은 ‘agree with each other in the Lord.’ 주 안에서 서로 뜻을 맞춰 살아가라고 번역했습니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에서 누가 옳은지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 다 특별히 문제 있는 나쁜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왜 분쟁하고 갈등했을까요? 신학적으로나 교리적인 문제였다면, 바울은 이렇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단호하게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오류를 바로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저, 소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아마도 사소한 견해차로 인한 갈등이었고, 결국은 자존심 싸움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자기 주장이 너무나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소신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만큼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입니다. 내가 반드시 옳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데 자기를 믿고, 자기의 생각이나 소신을 믿기 때문에 도무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고, 양보나 타협을 할 줄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과 교제를 나누다보면 상처를 받기가 쉽습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2장에서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고 비우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고, 마침내 희생의 제물로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이러한 자기를 비우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자기 희생과 용서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문제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이 세상과 다릅니다. 언변이나 논리로 상대방을 제압하여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 안에서 자기를 낮추고 서로를 존중하여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마음을 품고,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권면하는 것은 기쁨입니다. 4장에 불과한 짧은 편지 속에 ‘기쁨’, 혹은 ‘기뻐하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편지를 ‘기쁨의 편지’라고도 부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 속에 수감 되어 있고 재판을 앞두고 있지만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현실 속에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얻었거나 내가 바라던 목표가 이루어졌을 때 기뻐합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또 다른 것이나 더 큰 것을 기대하게 되고, 그것을 얻지 못하는 한, 삶의 기쁨도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그런 조건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가운데 두 번째로 ‘기쁨’을 들었습니다. 이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어떤 조건이나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확신으로부터 오고, 오늘도 나의 삶 가운데 동행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기쁨은 주님이 가까우시다고 하는 믿음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그날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심판은 곧 죽음이요, 이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심판 날을 바라보며 그날이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날은 구원의 날이고, 그 날에 우리는 무거운 죄의 짐과 인생의 굴레를 벗는 해방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는 기쁨의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관용이란 말은 우리 말 사전을 찾아보면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손해를 입거나 어려움을 당해도 쉽게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며,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손해를 끼친 사람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이해하고 포용해 주는 마음이 관용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관용을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한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럽습니다. 자기를 스스로 변호하고 합리화하며 아주 쉽게 스스로를 용서하곤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나 엄격합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쳤거나, 자기의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건드렸다면 참지를 못하고 비난하거나 미워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용을 베풀 수있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성도들이 관용의 태도로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 믿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관용을 베풀수 있는 힘의 근원입니다. 주께서 가까우신데, 주께서 오시면 모든 인간과 역사의 선악을 판단하시고 불의를 심판하실 터인데,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만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이해관계 때문에 그렇게 다투고 다른 사람을 미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심판은 그날의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대로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주께서 가까우시다’라는 말은 박해 가운데서 살아가는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있어서 위로와 희망이 담긴 말씀이었습니다. 초대교인들은 만나면 서로가 “마라나타”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주여 어서 오소서’,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의미입니다. 조금 더 견디자는 것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온갖 박해를 이기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관용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주께서 가까우시다”라고 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다’라고 하는 이 말은 주님이 가까이에 와 계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고난받는 우리들의 현실 가까이에, 힘들고, 답답하고, 불안한 내 삶의 가까운 곳에 주님이 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권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나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경건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염려 대신 기도합니다.
기도할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비록 현실이 어렵고 힘이 들고, 실망스럽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오히려 감사함으로 주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어렵지만, 힘들지만, 그래도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눈으로 오늘을 본다면 우리는, 비록 아프고 답답한 현실이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고, 당신의 선을 이루기 위해 역사하신다는 그 믿음을 가지고 현재를 긍정하고 미래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할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평강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평안할까?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평강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성공하고 형통하고 편안할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고 역경에 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견뎌야 하는 이 현실은 축복의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은 우리들 가까이에 와 계십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간구하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힘들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마음과 생각만 똑바로 지킬 수 있다면,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의미없는 고통 속에 우리를 던져버리지는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그 시련의 시간 속에서 주님의 뜻을 구하며 주님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포기하거나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소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가까이에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심판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시며,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그 믿음을 가지고, 기쁨과 관용과 평강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며 살아가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