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공식적인 답사기 작성자의 1보 입니다. 몇일간 나열하는 글은
뭔가 얘기를 하려는 것인데...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군요.
어쨌는 맥안이 잘 나갔으면...
글쓴이 김학중/ 시력이 거의 제로인 상태/ 박사과정 등록 준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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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사 후기 잡글 ###
(참고로 잡글이라고 사족 같은 제목을 붙인 이유는 읽어보면 바로 알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답사기라고 생각을 하고 글을 써도 답사기가 안 나오더군요. 밀린 숙제 하는 기분으로 썼다고
하지만 쓴 것을 꼼꼼하게 읽어보니 아무래도 저 혼자 답사 갔다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기야 여러 관점에서 볼 때 제가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 좀 있었죠. 철량산 정상까지
올라가지도 않았지. 석송령에서는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지 산에 오르면 항상 내 몸 생각하기에
바쁘지……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그래도 저 나름대로는 뒤통수 꽤나 긁으면서 썼다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타이틀: 마량 가을 문화답사
몇 주전,
광활한 우주.우리 은하의 지구라는 자그마한 행성에서
EpisodeⅠ
2002년 6월말 경 창비 문화기행을 통해 생성된 마량 앞바다 동호회는
10월에 가을을 맞아 영주 부근으로 문화기행을 가기 위해 동호회 회원
들에게 참가의사를 물었다. 11월 2일 함께 출발하게 된 최종 인원은 12.
동호회 회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의 참가였지만 오랜만에 보게
될 사람들인데다가 전국 규모의 방대한 조직을 가진 특성상의 문제 등을
감안할 때 결코 적은 참가 인원이라 할 수 없었다. 청량산과 도산서원 부
석사와 소수서원 등을 둘러볼 그들의 이번 가을답사는 과연 어떤 사건과
추억을 가지고 올 것인가? 11월2일 압구정 등의 각지에서 답사지로 행하
는 차들은 가슴 두근거리는 사람들을 태우고 출발하는데….
CD1
1번 트랙 <출발>
바람이 싸늘하게 불어왔다. 아침 일찍이라지만 아직 가을이라고 생각한 나에게는 겨울이 무척
가까이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 고철 총무님의 추위에 단단히 준비해서 오라는
전화가 없었더라면 산에서 떨다가 추위 때문에 항상 힘든 산행이 더 힘들어졌을 것이다.
압구정에는 서울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이 모두 와 있었다 지각이었다. 출발해야 하는 것
때문에 총무님하고만 악수를 나누고 다른 분들과는 그저 고개 숙임을 통해 인사를 나누었을
뿐 반가움을 나누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들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술렁거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이미 9월 말에 부석사에 친구와 함께 갔다 왔었지만 이런
술렁임과 기대 속에 내 자신을 적셔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행이란 것의 재미와 핵심이
여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2번 트랙 <부석사 가는 길? >
신경숙은 왜 부석사로 가는 길을 잃었을까? 길이 이렇게 잘 닦여있는데 말이야. 고철님의
말이다. 차 안에 왁자한 웃음이 퍼졌다. 부석사 가는 사람으로서의 체면을 세우려고 그걸
읽으셨다는 데 나도 그 소설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줄거리나 뭐 그런 건 기억이 안 나고
부석사 가는 길에 길을 잃고 밤에 어딘가에서 눈을 맞이하는 부분만 생각난다. 그게 상상력이라는
건가? 하기야 답사 가는 차 안에서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가는 것도 사실 부석사 가는 생각의
길을 잠시 잃은 게 아닐까 하는 별로 타당성 없는 상념에 젖은 것도 상상력이겠지. 아. 생각이
꼬이는군. 휴게소로 들어가는 우리가 탄 흰, 근데 차 모델이 뭐지? 내리는 데로 음료수나 커피를
마셔야겠군. 나는 소설을 써도 길을 잃는 소설은 못 쓸꺼야. 내가 자가용을 몰 일이 있어야지
말이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 때문에 잘못하면 이상문학상을 꿈도 못 꾸겠군. 아이구.
잡념이 너무 많다. 이래 가지고서야 어디 사바세계 건너편에 있는 극락세계인 부석으로
들어가겠는가? 상상과 현실, 깨달음과 무지, 번뇌와 해탈 그것들이 아슬아슬하게 만나서 이루고
있는 자석 같은 힘에 의해 서로의 무게를 띄우고 있는 부석이 있는 곳으로 말이야. 하긴.
이런 생각을 해봤자. 부석에 대한 해석은 되기 힘들겠지. 거기엔 전설이 있잖아. 이봐 친구.
곁가지가 너무 많아 내려서 화장실이나 다녀오라구.
3번 트랙 <청량산을 오르며>
숯불에 구운 고기를 반찬으로 먹지 않았다면 사실 별로 오르고 싶지 않은 산이었다. 이런 한
쪽으로 벼랑을 끼고 가는 산길이라니. 그래도 오르자! 그렇게 피하지 말라고 살만 찔 뿐이야.
포기하는 것만큼 비대해지는 몸과 정신의 무게를 잘 알잖아. 너무 투덜대고 있는 자아를
토닥이며 나는 산행을 하기 위해 일행을 따랐다. 영주 톨게이트에서 여산 선생님을 비롯해
김일현 선생님 성창모 선생님 등을 만나 식사를 하면서 화기 애애한 대화를 나눈 것과 차
안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말동무를 해준 김관호 님 상우형 등 때문에 산행을 하는
두려움도 덜 했다. 몇 년전 혼자 여행을 하다 발목을 다쳐서 고생고생하며 산을 내려온 기억
속에는 함께 하고 싶다는 갈망이 들어 있지 않았던가. 하기야 그 의존적인 내 모습이 싫어서
혼자 그렇게 다녔지만 말이다.
제대로 물이 들기 전에 서리를 맞은 낙엽들은 스산하고 웬지 모르게 애처롭게 보였다. 여산
선생님은 청량사로 갈 것이라고 산행의 경로를 밝히셨다. 나는 묵묵히 일행의 뒤를 따랐다.
어느 정도 올라오니 산의 경관과 주위의 환경이 매우 멋지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풍이 제대로
들었다면 가을 낙원이 따로 없었을 터 였다.
올라갈수록 난 그놈의 절간이 왜 이렇게 깊은 산중에 있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자꾸 시달렸다.
역사 시간에 산으로 절이 올라간 이유를 배운 기억이 설핏 스쳤지만 산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길을 오르다 보면 가끔 그 절 안에서 수도를 한다는 것이 별로 치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일에 시달리면서 사는 것이 깨달음에서 멀다고 느껴지는 山寺. 하지만. 이런 생각은 내
힘든 산행 속에서 피는 분노의 한 갈피일 뿐이다. 나는 이런 산행 중에도 왜 이렇게 진지해
져야만 하는가? 돌부리가 자꾸 내 발을 붙잡는다. 올라갈수록 고개가 숙여진다.
어느 덧 청량사에 가까워졌다. 절 간이 입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자연히 감탄이 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청량사가 보이는 산비탈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한다. 산행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온 정의득 선생님과 상우 형의 카메라가 절경을 놓치지 않는다.
우리도 그 안에 담긴다. 나는 머리 속으로 아 저기에 절을 지으려면 일하는 사람들은 꽤
힘들었겠다는 생각을 한다. 왜 나는 저런 것들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가? 모르겠다.
우리는 그곳에서 조금 내려와 청량산 정상으로 가는 길과 청량사로 가는 길이 가리는 곳에서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나와 무주바다님 정의득 선생님과 성창모 선생님은 청량사로 길을
잡았고 나머지는 산 정상으로 향했다.
청량사에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소리가 노래를 타고 흘러 넘치고 있었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결국 나의 번뇌는 나무아미타불 저 독경 읊는 것과 같이 내가 나의 깨달음을
만나기 위해 맞닥뜨려야 할 어떤 화두란 것을. 잔소리말고 나무아미타불 하고 돌아서 내려
가란다. 청량사에서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다.
찻집 밖으로 번져오는 붉은 기운 겨울 해가 짧다. 김일현 선생님이 들어오신다. 여산 선생님과
갈래길에서 해어질 때 찻집에서 만나기로 했었는데 우리가 있던 곳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청량사로 내려오는 길에 지나쳤던 그 찻집이었다고 하신다. 거기선 차가 공짜였다나.
이런 하여간 나에게는 고행길이 남았다. 내 주위에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면 난 아마 내려가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크게 다칠 것을 알면서도 천천히 내려와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두세배의 시간을 투자해서 말이다. 다행히 상우형과 정의득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서 내려갔다. 머리 속으로는 수많은 사념들이 떠다녔다.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야 한다.
여기는 산이다.
4번 트랙 <도산서원>
“왜 이 사람은 매번 2등만 했을까?” 퇴계 이황의 연보를 보고 김남희 님이 한 말이다.
불행히도 나의 기억력은 거기에 멈추어져 있다. 도산 서원의 자료를 찾아 읽어 보았지만 별로
글로 옮기고 싶지 않다. 아 이 괴팍함이란. 아아. 맞아. 고철 선생님이 우리 한옥의 칸 수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지. 맞아. 그리고 그리고. 에 또.
CD 1과 CD2 사이. 하프타임
<죽계산장>
죽계산장에 다다르니 최재권 님과 유지현 님 최경실 님이 먼저 와 계셨다. 나는 뒤돌아 보았다.
시커먼 건 산이고 그 밑에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보이질 않는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각 방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는 저녁 식사를 위해 큰 온돌방에 상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았다.
밥상 앞에 마주하니 웬지 사람들 얼굴이 모두 환하다. 밥이 역시. 음. 힘이 있어. 우리는
그러나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용감하게 열의를 다해 여산 양승모 선생님의 강의와 최경실
선생님이 준비하신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단한 정신력! 먹을 것을 앞에 두고. 근데
사실 어느 정도 먹고 토론을 했는지 토론을 하고 먹었는지 그 경계가 구분이 안가는데.
하지만 분명한 건 토론하는 동안 우리는 몇 잔의 술만 입에 대었을 뿐이었다. 여산 선생님이
퇴계 이황의 사상과 우리 나라 사상의 뿌리와 줄기를 짚어 주신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상 깊었다.
나도 물론이었지만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고구리’가 생각이 난다. 고구려가 아니라니.
그리곤 우리의 진정한 하프타임 휴식은 시작되었다. 과연 휴식인지 알 수 없는 술잔 부딪치기 리그가.
성창모 선생님이 가지고 오신 포도 증류주는 기막힌 술이었다. 높은 도수에도 불구하고 술은
금새 동났다. 그리고 참소주가 나왔고 몇 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죽계 산장에 있는
모든 소주를 소화해 냈다. 그래서 소주를 나가서 사 와야 했다.
성창모 선생님의 ‘허리케인 박’을 필두로 노래가 불러졌다. 거의 모두가 노래방 기계의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김관호 님은 거의 마이크맨이었다. 최재권 님과 짱언니 님
무주바다 님의 노래도 기가 막혔다. 그리고 생음악으로 부른 김남희 님의 사랑가는 대박이었다.
흥이 무르익었고 유선생님은 초반의 증류주에 이미 여력을 잃어 방에 들어가 주무셨고
우리의 호프 고철 김경식 선생님도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취해버렸다. 이제 서바이벌
게임(?) 혹은 서바이벌 파티로 바뀐 우리의 광란의 밤은 절정에 다다른다. 도대체 몇 병의 술을
마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마량의 막강한 술파워에 필자는 심히 반했다.
이런 와중에 이번 답사의 감초격 이벤트가 일어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김일현 선생님과
짱언니 님의 부르스가 도대체 어느 틈에 이루어졌는지 몰라도, 다음 날 정의득 선생님의 얼굴에
침통한 기운을 돌게 하였으며 대다수의 여성 회원님들로부터 김일현 선생님이 은근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별로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필자인 나도 최경실 님의 무릎을 베고 전사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다음에 계속... (마지막 부분의 제 얘기가 있죠. 사실이 아닐수도 있는데... 어쨌든, 제목과 관련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