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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
마태복음 21장 18-22절 / 18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병행구절, 막 11:12-14, 20-26; 참조, 눅 13:6-9)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예수께서 저주하신 사건에 대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 차이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마태복음인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요일부터 시작되는 마지막 한 주간인 고난주간 중 월요일에 있은 성전 정화 이후의 사건인 한 단락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병행구절인 마가복음에서는 11:12-14과 11:20-26 두 단락으로 시간차의 간격을 갖고 나누어져 기록되어 있으면서, 그 사이에 성전 정화의 사건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고난주간 중 월요일 아침에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 있었고, 그 다음날 화요일 아침에 예수께서 저주하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뿌리 채 말라버린 것을 제자들이 보고 그 사실을 예수께 말함으로, 그 일이 무엇 때문에 있게 된 것인지를 예수께서 알려주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
예수께서 무화과나무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얻고자 하셨으나 얻지 못하시다 : 예수님은 예고하신 것에 나타내신 작정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마침내 입성하셨다가 날이 저물자 성 밖으로 나오셔서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베다니에서 나와 다시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 날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므로 시작된 고난의 한 주간에서 월요일에 해당됩니다. 이때 아침 길을 걷는 예수님은 시장기를 몹시 느끼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은 멀리 바라보이는 길가의 무화과나무를 보시고는 그 나무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있는가 하여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에서는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잎사귀만 무성히 있을 뿐이지 열매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열리는 철이 이미 지났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잎은 보통 열매가 열린 다음에 납니다. 때때로 잎사귀와 함께 열매를 맺기 시작하기도 하는 것이 있기도 하는데, 이 열매들은 현대 팔레스타인에 사는 아랍인들에게서‘타크쉬'(taqsh) 라고 알려진 어린 열매, 곧 미숙한 상태에 있는 열매입니다. 이 열매들은 대부분 미숙한 상태의 열매로 땅에 그냥 떨어져 버립니다. 이렇게 땅에 떨어진 이 열매들은 빨리 썩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들을 주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얻는 것은 잎사귀가 나기 전에 맺는 열매들이며, 비록 미숙한 상태의 열매이지만 먹을 수 있는 어린 열매도 나무에 달려 있는 경우라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잎사귀가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는 혹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하고서 다가가신 것은 마가복음에서‘이는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님이라’고 기록하여 알려주고 있듯이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무성히 열리는 철이 이미 지나가는 때 늦은 시점에서 그나마 어린 열매라도 먹을 수 있을 것을 바라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어린 열매조차도 얻지를 못하였습니다. 무성한 잎사귀 외에는 열매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임을 저주하시다 : 그러자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저주하셨습니다.“너는 이제부터 영원히 열매 맺지 못할 것이니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다.”예수께서 이렇게 열매 없는 나무를 저주하시는 말씀을 예수님의 곁에 있던 제자들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까닭 : 우리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보게 되면 본능적으로 기대를 갖고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혹 열매를 얻지 않겠는가 해서입니다. 모학교에 들어가는 문 바로 옆집에는 홍시가 되는 감나무가 있습니다. 가을이 점점 깊어가니 감나무에 감 열매가 주렁주렁 많이 맺혔는데 따서 먹어도 될 만큼의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뻗어 하나 따 먹을 수 있는 높이인가 눈으로 재어보면서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함께 가던 분들과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저 나무가 비록 뿌리와 둥치는 마당 안에 있지만, 그래도 가지는 집 마당 밖으로 나와 있으니까 한 두개 따 먹어도 집 안에 있는 주인이 뭐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결국은 따 먹지 못했습니다. 감이 열린 높이가 손과 맞지 않아 닿지 않아 긴 막대기나 다른 도구를 이용해야 되는데 그렇게 까지 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모역전 주위에는 은행나무가 있으며 어떤 해에는 열매가 많이 맺힙니다. 그런데 은행나무가 길가에 있다고 해서 행인들이 저마다 따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유권이 국가(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따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열매를 보면 따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이 시장하여 배고픈데, 열매가 열리는 나무를 보면 그 나무에서 혹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있는지 기대를 갖는 것은 누구나 갖는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열매 맺는 철이 아직 안 되었거나 또는 철이 이미 지나서 열매를 얻지 못하면 어떻게 하는지요.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망할 놈의 나무야, 아무 쓸데없구나, 저주를 받아 말라 죽어버려라!”하고 저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이번에는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얻지 못해서 아쉽지만, 내년에는 기대할 수 있겠지!”하는 마음을 갖고서 많은 열매가 맺힐 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대하심에서 참으로 의아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아침에 몹시 시장하신 예수께서 멀찍이서 길가의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거기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얻을까 해서 가까이 다가가셨는데, 잎사귀만 무성할 뿐이지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하자 그 나무를 향하여 저주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저주하신 그대로 무화과나무가 말라 갔고, 그 다음날 아침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나무의 곁을 지나갈 때는 뿌리 채 말라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막 11:20).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얻고자 했으나 얻지 못했다고 해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니요! 잎사귀가 무성하다면 이미 앞서 열매가 맺혀 온 것이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가 아니며, 잎사귀와 함께 맺히는 어린 열매가 있기는 해도 시기가 지나면 그마저도 땅에 다 떨어지고 없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어린 열매조차 얻지 못한 것은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해서가 아니라 무화과 열매를 얻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열매마저 볼 수 없는,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얻을 철이 지났으니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얻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러니 무화과나무가 저주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얻지 못하자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이 단지 열매를 얻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에 분노하시며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이겠는지요. 그러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없었던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해서가 아니라, 열매를 맺었었는데 그 열매를 딸 철이 이미 지나서 더 이상 없기 때문인데, 단지 열매를 얻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면 이것은 무화과나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나무를 저주하는 무엇인가의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열매를 얻지 못한데 따른 실망과 불만으로 분풀이를 하는 것에서가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런 이유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면 그 당시에서만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서 예수님은 공경을 받으실 주이신 그리스도가 아니시며,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더군다나 아니십니다. 과연 그러셨다면 예수님은 일반인도 그렇게 하지 않을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분이심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무화과나무 사건을 표면적으로 보이는 대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시는 일은 사소하게 보이는 일까지도 구약성경을 통해서 드러낸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며, 마가복음 1:1에서 시사를 해 주시고 있는 바대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무화과나무 사건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시장을 느끼신 예수께서 무화과나무에서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한 것을 계기로 삼아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유대인)의 신앙 상태와 그 결과를 알리시는 상징적인 행동을 하신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세례자 요한이 이스라엘을 향하여“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 3:10)고 경고함으로써 그 백성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에 비유한 것과 마찬가지이며, 또한‘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 비유’에 의해서 열매를 맺을 시기가 되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베어 버릴 것을 말씀하시는 것에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처지가 어찌 될 것인지를 알게 해 주시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눅 13:6-9). 구약시대 선지자 미가는“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미 7:1) 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온통 부패하여 하나님께서 조그만 열매라도 보시길 원하는 데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열매가 전혀 없어서 쓸모없는 상태에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의 상태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17-24에서 이스라엘로 비유하는 것에서 올리브나무를 들어 이 나무에서 잘린 가지에 있기 때문에 그 잘려나간 가지에 접붙임을 받은 가지(이방인)도 나무의 뿌리(그리스도)에서 공급되는 생명의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에게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임할 저주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선언을 받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다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게 그 즉시 말라져 갔습니다. 이스라엘은 망할 수밖에 없는 저주를 받을 것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시기 위해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하는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곧 임할 이스라엘이 받을 저주를 밝히 보여주시는 예언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저주에 있은 이스라엘의 상태 : 예수님이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임할 저주가 되심으로 이스라엘이 망하는 저주를 받을 것은, 예수님이 복과 저주의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할 주로 오신 분으로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것에서 그 나무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에 있는 이스라엘이 회개치 않는 것에 대한 표상으로 쓰셨습니다.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에서 비록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에 대한 임박한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셨을지라도, 이는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지 못한 것에 실망을 한 조치로서가 아니라, 이제 곧 예수께서는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에게 임할 저주의 메시야가 되실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회개치 않고 고집한 사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주간을 보내실 때 아주 두드러지다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못 박을 것을 요구하면서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는 피를 흘리게 되는 것에 따른 저주는 자신과 자신들의 자손들이 대대로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7:25).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예수님이 흘리신 피 값으로 영원히 임할 화인 죽음의 형벌을 밝히 보여주는 예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 아래 있는 온 세상에 미칠 저주의 화(재앙)이심 :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영원히 마르도록 하신 것은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화가 끝없이 미칠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서 동일하게 온 세상이 처할 저주의 화를 보게 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의 인류의 역사는 예수님의 피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말한 바와 같이 주께서 제사를 원하지 않는 줄 알면서도 번제를 드려 와야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시51:16-17).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리신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에 임하는 대속의 죽음에 있는 죄를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저주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잘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하신 아들이실지라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위해 대신 짊어지신 죄값을 반드시 물으심에 계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대속의 죽음에 참여하는 연합에 있는 믿음에 있지 않고서는 외아들을 외면하신 저주에 의한 피 흘림에 있는 죄값을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철저하고 처절하게 요구하실 것을 똑똑히 보게 하신 것을 뜻합니다. 저 옛날에 악한 대역죄인을 처형하는 방법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다니는 길거리에서 효수하여 그 머리를 장대에 높이 달아 모든 사람에게 보여 본이 되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복음 3:15-18에서 사도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 있을 때 있었던 한 사건의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하시고, 그 믿음으로 바라봄에 있는 모든 사람은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을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할 때 행하신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악으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불뱀에 불려 죽는 것에서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을 들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겪은 생생한 역사를 들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자를 영원히 저주하시니,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그 저주에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머리 정수리에서부터 발끝에까지 뒤집어쓰게 되어 가루가 되어 땅의 흙먼지처럼 사라짐의 멸망에 있게 됩니다(참조. 마 27:24).
저주 받아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에 의한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것을 본 제자들의 물음 : 마태복음의 기록은 예수께서 무화과나무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얻고자 하셨으나 어린 열매조차 없는 것을 보시고 저주하신 것에 이어서 즉시 무화과나무가 뿌리 채 말라 죽은 것을 제자들이 보고 이를 이상히 여기며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이렇게 바로 말라버릴 수 있는지를 묻는 것으로 같은 시간대에 있는 하나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만,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과 예수님이 저주하신 대로 무화과나무가 뿌리 채 마른 것을 제자들이 보고 그 중에 한 사람인 베드로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무화과나무를 보실 것을 가리키며 예수께서 저주하신대로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다고 말함에 따라 예수님이 그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는 사건은 각각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전자인 전날(고난주간의 월요일)의 사건과 후자인 그 다음날(고난주간의 화요일)의 사건이란 하루의 시간차가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마침내 입성하신 예수님은 잠시 둘러본 후에 저녁때가 되자 성 밖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보내시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길을 가시는 중에 시장을 면하고자 길가의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고자 하셨으나 아무 열매도 얻지 못하심으로 다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임을 저주하신 후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는 성전 정화의 사역에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므로 또 다시 하룻밤을 묵기 위해 성 밖으로 나와 베다니로 가셨다가 그 다음날 아침에 제자들과 함께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걷는 중에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 곁을 지나가게 되었고, 이때 베드로가 무화과나무가 뿌리 채 마른 것을 보고는 예수께서 전날에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저주하시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기에 그때의 일이 생각이 나서 참으로 놀라워하며 신기히 여겨“보십시오, 선생님. 선생님께서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다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도록 영원히 말라버리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주셔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있게 하셨으나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한 임박한 하나님의 저주를 밝히 보여주기 위한 예언으로 쓰시는 것에서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제자들이 있어야 할 것을 가르침 주시는 예수님의 답변 : 그런데 제자들이 묻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이에 대해 마가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3-25). 이 둘의 종합에 의하면, 제자들 중 한 사람인 베드로가 하는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것에서 행하신 이적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권능을 제자들이 보게 해 주시는 것으로‘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언급하여 이 믿음이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를 알게 해 주시는 가르침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를 현대어성경의 번역으로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을 믿으라. 만일 너희가 이 산더러‘저 바다로 빠져라’고 하더라도 너희 마음에 의심을 품지 않고 그대로 되리라고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라. 너희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생각나거든 그를 먼저 용서하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 만일 너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하나님을 믿으라’는 믿음을 언급하신 것은 지금 제자들이 보고 있는 대로 어제 본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린 것이 예수님이 저주하신 대로 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인데, 이 사실을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어제까지도 멀쩡했었는데 예수께서 그 나무를 향하여 저주를 하시는 말씀대로 즉시 말라 버린 것이 믿기지 않고 참으로 신기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능력을 믿는 믿음에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이상히 여기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린 것을 이상하게만 여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저주하신 말씀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일을 해 나가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어야 할 것을 가르치시는 것으로 믿음을 언급하셨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저주가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하셔서 된 것임을 제자들이 보고 있는 것이기에, 무화과나무에서 있은 하나님의 능력이 앞으로 제자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알게 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다음의 말씀으로 해 주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만일 너희가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이와 같은 일뿐만 아니라 더 큰일도 할 수 있다. 너희가 이 산더러 ‘땅에서 들려 바다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이 부분을 마가는 “만일 너희가 이 산더러 ‘저 바다로 빠져라’고 하더라도 너희 마음에 의심을 품지 않고 그대로 되리라고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막 11:23)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저주하신 말씀에서 보는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 제자들에게 해 주시는 말씀에서 그대로 행해질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그 즉시로 말라 버린 놀라운 이적을 보는 것보다도 더 큰일도 그들이 하게 될 것이니 산더러 명하여 땅에서 들려 바다로 옮겨 가라고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7:20에서는 “너희가 만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향하여 ‘옮겨지라’고 하여도 옮겨질 것이다. 그 믿음이 있으면 너희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에 있어야 할 것을 언급하신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을 비유적으로 사용하여서, 그리고 감람산과 사해바다를 비유적으로 사용하여서 귀신들려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소년에게서 사악한 마귀가 예수님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터를 둔 믿음의 능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이 저주하신 대로 말라 버린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일어난 이적을 보는 것에서 제자들은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있게 하신 그 기도의 성취로 있게 될 놀라운 참으로 큰 일을 이제 곧 보게 될 것이니, 이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당하시는 고난의 죽음과 생명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권능 있게 해 나가실 일을 믿는 믿음에 두실 것에서 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기도의 상관성 :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시는 설명의 말씀을 제자들이 행하는 기도를 들어서 하셨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을 것이다.”이 부분을 마가복음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 11:24). 제자들이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이미 받은 것임을 믿으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여 구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터로 두고 있기에 기도할 때에 믿음으로 구하는 것은 그것의 터인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부터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주하여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말라버리게 하신 것은 그 당시의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저주를 보여주시는 표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저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하십니다. 예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로 영원히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처럼 영원히 생명을 기대할 수 없게 죽음의 형벌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있는 자는 이런 존재인 것이 그가 숨 쉬며 움직이는 모든 행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저주스런 존재를 밝히 드러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 속에 있는 그를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십자가에 함께 달려 죽은 자가 되고 함께 장사됨으로써 다시는 죄를 물을 수 없게 하여서 저주가 없게 하시고, 영원히 생명을 열매 맺을 수 없는 그를 생명을 열매 맺게 하시는 큰일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자신에게 준비되어진 하나님의 일인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은 죽음과 생명의 주로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 안에서 하나님이 하실 큰일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예수께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죄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가 되게 하고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산 자가 되게 하는 큰일을 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믿고 그 구함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제자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참으로 놀라운 일을 봄에 있게 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겪은 역사의 거울에서 보여 오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에 있게 되면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행하신 10가지 이적에서 본 것은 애굽에 내린 재앙의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이며, 마침내 출애굽하였으나 홍해에 가로 막혀 있고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아 앞뒤로 죽음의 위협에 처해 있으면서 이스라엘이 본 것은 자신들 눈 앞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행하신 애굽에게는 재앙의 죽음이 된 홍해를 생명의 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구원의 큰 일을 봄에 있게 하셨습니다(출 14:13).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을 것이다”(마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될 것이다”(마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에서‘믿고 기도하면’은‘믿음으로 기도를 하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알고 그 믿음에 있어야 하니, 알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서 제자들은“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하는 구함에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하는 믿음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받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본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취할 태도요 자세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어야 할 것을, 그리고 그 믿음의 기도에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의 내용 : 그에 따라서 제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할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마가복음에서는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잘못)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5)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성경에는 없으나, 다른 고대 사본에서는 “만일 너희가 다른 사람의 허물(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잘못)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구절(막 11:26)도 있습니다. 이는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의 사이에서 마음이 상하고 피해를 입는 잘못한 일이 있음으로 서로 등진 일이 생각나거든 그를 먼저 용서하여 그와 화목함으로 함께 평화에 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용서한 그 용서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에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기도문에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말씀해 주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것에 근거한 것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주는 것에서 용서의 자비를 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죄 용서하심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입음에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으로 구함에 있는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 사하시는 일인 구원 사역이 행하여져 나갈 것임을 염두에 두시고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에서 나타내신 능력은 또한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하는 복음 사역에 의해서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주께서 하시는 일을 제자들 또한 그대로 해 나감에 있게 됩니다. 이렇게 “내가 하는 일을 너희 또한 하리라”는 것에 있게 됩니다.
저주의 쇠사슬에서 풀려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사
새하늘과 새땅, 새예루살렘의 계시 : 사도 요한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는데,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서 하나님의 도성의 넓은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수정처럼 맑은 그 강의 양쪽 언덕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달마다 새 열매를 맺고 있었고, 그 나뭇잎은 온 세계의 민족들을 치료하는 약으로 사용됨으로 성 안에는 더 이상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뵈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계 22:1-5).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에서 보는 뿌리 채 말라 죽은 나무는 하나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가에 심겨져 생생히 살아 있으며, 생명의 열매를 맺고 생명의 약으로 사용되는 나뭇잎이 무성한 생명나무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야곱의 우물에서 수가성의 사마리아여인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주었으리라…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0, 14)라고 하셨고, 또한 오병이어의 이적을 통해 자신을 계시해 주셨던 바인,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 6:35, 48)라고 하시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라고 하신 말씀의 실현입니다. 이 생명의 물, 생명의 떡을 하나님과 어린양으로부터 공급받아 영생하며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음으로 모든 눈에서 눈물이 있었던 저주가 다시는 없습니다(계 21:4; 22:3).
예수님과 함께 한 믿음의 갚음이 되시는 하나님과 그의 어린 양 :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주 예수님과 함께 하는 믿음에 있은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과 어린양의 나라에서 주어지는 생명의 복이 갚음이 되게 하십니다. 그에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아 생명의 물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에서 보게 되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재앙을 내리실 것이어서 거룩한 도시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하게 하시니, 그들 중 누구도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게 하십니다(계 22:12-19).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 사건에 의한 이스라엘의 상태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있어 생명의 공급을 받고 있지 않은 자에게서는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눅 16:19-21)에서 보는 혀를 시원하게 해 줄 단 한 방울의 생명수를 마심에 있지 못하며 배부름에 있게 해 줄 단 한 조각의 생명의 떡을 먹음에 있지 못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살펴 확증하라 : 그러니 우리의 생명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그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과 함께 함의 연결에 있는 것에서 그 보장이 영원합니다. 그러한 우리가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는 어떠한 것이겠는지요. 사도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라고 말하여 자신을 잘 살펴보아서 그리스도가 임재하여 계시며,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인임을 알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임재가 없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없으면, 옛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취한 외식하는 행동에서 보는 것처럼 한갓 기독교의 모습만 취하고서 흉내만 내며 실상은 자아 만족의 달성을 위한 탐욕에 이끌린 자기 열심에 있어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표상으로 삼아 예언하여 주신 그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져 버림받음에 있을 것이기 말입니다. 그러한데 혹 이런 자의 모습을 따라하여 취하는 것에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살펴보라는 주의를 담고 있습니다.
자신을 시험함에 있는 성도에게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사 : 성도는 이 주의에 무관심하며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불러내어 하나님의 소유된 성도로 삼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을 두고 그분을 바라봄에 있게 해 주셨습니다. 성도란 그리스도의 임재에 따른 합당한 삶을 살게 하시는 은혜를 입고 그 능력으로 살아가는 자인데, 그리스도의 임재가 없는 자에게서 있는 행동인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죄에 사로잡혀 사는 저주스런 행위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는 그 물결에 자신을 맡겨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절규하여 표현한 바인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는 절망에 갇혀 탄식하는 눈물의 밥을 삼킵니다. 그에게서 꺼져가는 심지와 같았던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불꽃이 살아 있어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함께 함으로 그의 생명을 안전히 보전해 가시고 있음을 확인케 하며 그 믿음의 확증에 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롬 7:24)는 절망의 탄식에서 벗어 나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7:25-8:2)라고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한 그는 나무가 베임을 받았었어도 남은 그루터기에서 나오는 새로운 가지에 의해서 생명의 열매가 열리고 잎이 피는 자입니다. 이러한 자를 시편 기자는‘의인’으로 말하였으며, 그는 악인이 망하는 것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자로 의인의 회중에 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시 1:5-6). (*)